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3화 (13/122)

안방 데뷔전 (2)

* * *

오늘 씬은 러시아 마피아 소탕.

호텔 몇 층을 통째로 빌려 찍는, 제작비를 잔뜩 때려 넣은 화려한 씬이다.

“외벽 쪽 폭파 씬은 조연출이 따로 나가서 찍을 거예요. 크레인이랑 헬리캠 도착하는 대로 외부촬영도 시작할 거고··· 호텔 측에서 시간을 빡빡하게 잡았으니까, 최대한 스무스하게 가 봅시다.”

메가폰을 쥔 나종모 PD가 디렉션을 준다.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박건 씨는 여기, 이 동선대로. 엘리베이터랑 복도, 스위트룸 씬까지 논스톱. 호흡이 좀 길어져도 괜찮겠어요?”

“예, 상관없습니다.”

정연우가 조종하는 드론들이 호텔 창문으로 폭탄을 쏟아붓고, 그 사이 최승이 침투하는 양동작전이다.

“이래서 박건 씨가 좋아요. 항상 시원시원해서 우리까지 고민이 없어.”

나종모 PD가 촬영 초기보다 핼쑥해진 얼굴로 싱글벙글 웃었다.

“스턴트맨들, 보출 분들은 대부분 그대로고. 오늘 새로 합 맞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아, 저기 오네. 말친 씨!”

저만치서 거구의 백인이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우리 드라마가 액션으로 또 확 떴잖아. 싸움 좀 한다는 배우들도 특별출연 넣어 달라고 러브콜이 많아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전문가부터 초빙했죠. 말친 씨도 운동 오래 하셨으니까, 둘이 잘 맞춰서 해 봐요.”

말친을 쓱 본 박건이 물었다.

[복싱입니까?]

영어가 아닌 능숙한 러시아어다. 말친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답했다.

[예, 다른 무술도 했지만 복싱을 제일 오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감독님은······.]

[지금은 제가 감독입니다. 동선 말고 다른 디렉팅은 없을 겁니다.]

[예?]

[힘 조절을 하면서 치겠습니다. 통증은 거의 없을 테니, 실전처럼 하시면 됩니다.]

······실전처럼?

말친은 순박한 눈을 끔뻑거렸다.

지인이 때리고 맞는 연기만 하면 돈을 준대서 왔을 뿐인데, 실전이라니?

그는 새삼스레 눈앞의 동양인을 훑어보았다. 체격이 꽤 좋긴 하지만 195CM, 130KG에 달하는 말친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 정도 체급 차이면 스파링을 해도 깔아뭉개질 텐데······.

“자, 준비해 주세요!”

“조금 뒤에 컷 들어갑니다! 엑스트라 분들, 이쪽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스탭들이 목청을 높였다. 무덤덤하게 서 있는 남자를 흘끔대며, 말친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병원비 안 나오게 조심해야지.’

*

액션 씬을 촬영하는 날에는 전 스탭진이 각별히 긴장한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위험도다.

날아다니는 와이어 액션이든 합 맞춰서 싸움질만 하는 격투든 마찬가지다.

숙련된 스턴트맨도 대역을 뛰다 부상을 입고, 행여 배우가 허리라도 삐면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그래서 씬마다 세심한 디렉팅이 요구되지만······.

“1조, 2조, 3조는 순서랑 챙길 소품만 기억합시다. 나가다가 엉키지 말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현도균 무술감독의 디렉팅은 저걸로 끝이다.

보조 출연자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이거면 됐지. 어차피 다 해 주는데.”

“지난번엔 ‘다들 아시죠?’ 한 마디 했다면서?”

“진짜 신기하다니까. 몰입이 쫙 되는데, 진짜 배우가 된 기분이었어.”

“아이고, 꿈 깨셔. 박 배우님 없으면 목각인형 되는 양반이 무슨.”

감독에게 전권을 받은 배우, 박건의 디렉팅이 거기 방점을 찍는다.

“지난번처럼 달려들어 주시면 됩니다. 여러분들끼리 겹치지만 않게요.”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스탭도 출연자도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승 출연 씬에서는 아직까지 NG가 한 번도 없다.

대사를 유난히 잘 저는 조연 남배우도 박건하고만 붙으면 연기력이 살아나, 볼 때마다 따라다니는 해프닝도 있었다.

‘박건 씨. 어떻게 하는 거예요? 비결 좀 가르쳐 줘요.’

‘무슨 비결 말입니까?’

‘아니, 카메라 켜지고 앞에 있으면 싹··· 이렇게, 빨려들듯이 몰입되는 거 있잖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귀띔 좀 해 줘요.’

‘잘 모르겠는데요.’

막내 PD가 그 광경들을 8mm 카메라로 전부 담았다. 메이킹필름은 나 PD가 촉박한 일정을 나누고 쪼개 편집하는 중이다.

마지막 화가 방영된 후, 이 영상들이 다시 한 번 팬심에 불을 지필 것이다.

*

“자, 슛 들어갑니다!”

이어 시작된 촬영.

호텔 로비는 폭음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최승에게 시큐리티 요원들이 달려들지만, 어린아이처럼 제압당해 바닥을 나뒹군다.

카메라는 씬을 끊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탄 최승을 좇는다.

30층으로 향하지만, 위쪽에서 전력을 차단했는지 승강기는 도중에 멈춰 선다.

ㅡ······.

최승은 표정변화 없이 엘리베이터 내의 비상단추를 누른다. 수트 속 근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힌다.

탕, 타앙!

고개를 내밀자마자 날아드는 고무탄. 최승은 잠시 뒤로 물러나 수트를 벗은 뒤, 망토처럼 쥐고 뛰쳐나간다.

“쏴, 얼른 쏴··· 커헉!”

“옷으로 가린다! 다리를 노려!”

고무탄은 피하고, 테이저건은 막는다. 몇 초 사이 호텔 복도는 깔끔하게 정리됐다.

끙끙대는 시큐리티들을 지나친 최승이 비상계단 문을 열려 했을 때.

피슝!

손 바로 옆에 탄환이 박힌다.

최승이 무표정하게 돌아보자 거구의 백인이 리볼버 총구를 까딱거린다.

명백한 도발에, 최승도 자세를 잡는다.

오늘 촬영의 하이라이트.

예고편 속 씬스틸러가 될 격투 장면이다.

*

‘이거지, 이거야!’

촬영감독 김정남은 요즘 살맛이 났다.

로또 3등이 됐을 때나 아이가 처음 아빠라고 불렀을 때도 짜릿했지만, 그런 것들과는 결이 다른 흥분이다.

조연출 시절부터 촬영만 15년차. 이렇게 장면들이 잘 뽑혔던 적이 있었던가?

‘몇 번 없었지.’

재능 있는 배우들은 흔히 ‘메소드’라 일컫는 초집중 상태에 몰입한다. 그럴 때면 카메라를 든 이들은 가장 잘 나올 각을 찾는다.

그것이 연출의 디렉션이며, 촬영감독의 몫이다.

그런데 이 배우는 다르다.

퍽, 퍽, 퍽!

짧은 연타가 거대한 배에 꽂힌다. 충격이 있는지 거구의 백인 복서가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그러나 50킬로에 가까운 체급 차이는 무시하기 어렵다. 백인이 라이트 훅을 날리고, 최승은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표정 좋고, 박진감 미쳤고.’

남들은 액션 연출이 끝내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합을 맞추는 능력이 좋다고.

그러나 촬영감독이기에 알 수 있다.

정말로 소름끼치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든 최적의 영상미를 ‘배우가’ 만든다는 것이다.

피하고, 흘리고, 고개를 젖히면서도 절대 앵글을 이탈하지 않는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려 있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다.

‘카메라는 분명히 처음이었다고 했는데. 부대에서 시연영상을 자주 찍었나?’

군대에서 몇 가지 실전훈련을 했다는데, 특수부대원이 다 이랬으면 진작 대한민국은 통일됐을 것이다.

현장을 몰입시키는 능력은 어떠한가.

최승, 아니, 박건 옆에 붙으면 단역이 아니라 페이 엑스트라도 눈빛부터 달라진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마저 끌어들이는 아우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촬영 각도는 귀신같이 잡아내는 무명 배우.

‘액션 말고, 그냥 연기 스펙트럼이 평균만 돼 준다고 해도······.’

김정남 촬영감독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나친 욕심이다. 지금까지처럼 액션 원툴, 차갑고 무감정한 역할만 맡아도 쓸어 담을 배역은 차고 넘친다.

이 화가 방영됐을 때, 그리고 드라마가 끝났을 즈음, 새로운 라이징스타가 탄생할 것이다.

‘···다음에 작업할 배우가 불쌍해지는구만.’

*

건은 생각한다.

‘착각이 아니로군.’

이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슛이 들어가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잠들었던 ‘용사’의 감각들이 일거에 깨어난다.

피가 시뻘겋게 끓어오르고 익숙한 전능감이 손에 잡힐 듯 엄습한다.

성녀의 인도 아래, 신전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용사의 업을 받아들였을 때처럼.

‘확실해. 합기(合氣)의 편린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궁금한 나머지, 스탭들에게 부탁해 따로 찍어 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진짜 씬이 아닐 때는 심장이 뛰기는커녕 가벼운 고양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바람. 그리운 피와 철의 대기.

용사로 돌아온 기분은 오직 슛을 외친 실전에서만 느껴진다.

붕, 부웅!

이제 완전히 시합 모드로 돌입한 백인 복서가 훅을 휘두른다.

‘이 앵글은 반대 각도가 더 잘 나오겠지.’

액션이 아닌 진짜 싸움을 하고 있지만, 별 위기감은 없다.

애초에 용사가 지닌 권능, 합기의 위기감지능력은 미래예지에 가깝다.

거기에 두 세상에서 단련한 신체 역시 일반인의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한다. 어디로 오든 알 수 있으니, 어떻게 찍힐지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전 생각이 나기도 한다.

-죽어라, 용사!

-당신부터요, 카빌!

동료와 가짜 결투를 벌이며, 왕국의 배신자들을 하나하나씩 살폈었지.

타락한 변경백, 혼을 판 대주교, 야심가 3군단장. 용사와 왕자의 결투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배신자들은 그날 밤 모두 죽었다.

“······.”

그에 비하면 저기서 숨까지 죽인 채 찍고 있는 촬영감독과 스탭들은 좋은 구경꾼이다.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 보조 출연자들도 썩 협조적인 엑스트라에 속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아도 돈을 주다니, 이만한 일자리가 또 없지 않은가.

‘잠깐, 그렇다면 혹시······.’

합기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권능. 당연히 철왕국에서 현대로 돌아올 때 모두 잃었다.

실제 촬영 한정이라고 하나,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이라도 옛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나중에 고민할 문제다. 지금은 일이 먼저야.’

그의 리드로 상대 또한 실전처럼 몰입한 상태. 다치지 않도록 정신부터 들게 해야 한다.

건이 주먹을 쥔 순간, 백인 복서가 멈칫했다. 오귀준 실장을 실금시켰던 그 때의 기세다.

“······.”

찰나 눈빛이 오갔다.

자칫 스치기라도 한다면 체급이고 뭐고 기절할 수가 있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대신 진짜 맞는 것 같은 각도로······.

펑ㅡ!

말친의 관자놀이에서 파공성이 터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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