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6화 (16/122)

안방 데뷔전 (5)

* * *

촬영이 중반을 넘어선 지금, 출연진들도 지친 티가 났지만 표정은 좋다.

사전촬영에서 분량을 넉넉히 뽑은 데다 은희욱 작가가 절대로 쪽대본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리 종방하면 건이 형한테 개인 교습 받아야겠다. 그럼 평생 액션 걱정은 없을 거 아니에요.”

용준상이 근엄하게 끼어들었다.

“희도 씨, 난 이미 하기로 약속도 받았어. 정식으로 강사료 내고 수업 받을 거야.”

“어어, 아무리 선배님이라도 저점매입은 반칙이죠! 요즘 연락 엄청 올 텐데, 그죠, 매니저님?”

서희도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자 박선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아, 예. 어떻게 알았는지, 형 폰으로도 매니지먼트 사람들 문자가 오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어. 밥 먹자고 하면 절대 나가지 말고 종방까지 기다려요. 그 인간들, 더 몸값 올라가기 전에 침 바르려는 거야.”

실제로, 첫 화가 방송된 이후로 오만 사람들한테 연락이 다 오고 있었다.

매니지먼트엔 관심이 없던데다 기억나지 않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라 무시했는데, 이제 쌓인 메시지가 백 개를 넘어갈 지경이었다.

촬영 배우 중 가장 개런티가 높은 용준상이 조언을 자처했다.

“나중에 계약이나 관례 같은 거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혹시 내가 몰라도 매니저 형 불러서 물어볼 테니까.”

“예, 많이 여쭤 보겠습니다.”

한바탕 떠들고 나니 촬영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실내 촬영. ‘정 인터내셔널’ 안에서 서희도와 함께 찍는 씬이라 액션은 없다.

몇 바퀴 카메라가 돌고 난 뒤, 컷을 외친 나종모 PD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히든카드는 언제 오는 거야?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한강 촬영 시작해야 하는데.”

“히든카드요?”

“어, 건이 씨는 모르겠구나. 은 작가가 배우 한 명 섭외해 온다고 했거든요. 미리 찍어 놓고, 특별출연으로 마지막 회 직전에 나올 겁니다.”

그때 촬영장 저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종모 PD가 실쭉 웃었다.

“역시 배우들도 양반은 못 된다니까. 이름값답게 십 분만 지각하셨네.”

곧 남녀 한 쌍이 나타났다.

익숙한 개량한복 차림의 은희욱 작가 옆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단발머리 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세상에, 진지유 아냐?”

“대박··· 근처에서 촬영하다 놀러온 건가?”

“어? 근데 진지유, 요즘 휴식기라 따로 들어간 작품도 없을 건데······.”

스탭들이 놀라는 것을 보니 배우, 그것도 꽤 유명한 사람인 것 같았다.

누구야? 건이 눈으로 묻자 박선이 잽싸게 입모양만 움직였다. 진지유, 예전 우리 회사 배우!

“선배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몇 년 됐지. 오늘 잘 부탁해요.”

용준상 등 다른 주연들과 인사를 나눈 여배우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늘씬한 키에 비현실적으로 작은 얼굴. 아이라인 하나 없이도 눈꼬리가 올라간 고양이상에, 운동을 오래 했는지 몸의 밸런스가 좋다.

진지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지유라고 해요.”

“박건입니다.”

“대표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저희 회사가 실례가 많았다고. 이쪽이 매니저님이죠?”

“아뇨,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박선은 성은이 망극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탑 배우의 인사치레를 받았다.

건과 가볍게 악수한 진지유는 촬영장을 둘러보면서 생긋 웃었다.

“은 작가님 부탁도 있고··· 저도 여기 꼭 나오고 싶어서 따라왔어요. 요즘 서울의 개, 보는 드라마 중 최고로 팬이거든요.”

진지유가 누군가. 백하니와 함께 로만 여배우의 양대산맥. 존재 자체만으로 1인 기획사라는 탑급 여배우다.

그런 사람이 휴식기에 선뜻 출연한다는 것은 관심이 됐든, 친분이 됐든 꽤 깊음을 의미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진지유 씨 팬입니다.”

“그래요? 그럼 제 작품 중에 재밌게 보신 것도 있어요?”

눈치가 빠르다. 이쪽이 본인 작품은커녕 자기가 누군지 몰랐다는 것도 아는 기색이다.

건이 사실대로 말하려 했을 때, 고양이 같은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드시겠다. 혹시 하니 언니 작품은요? 저랑 같은 소속사, 백하니 배우.”

“죄송합니다. 그분은 잘 몰라서요.”

광화문을 모르는데 을지로라고 알 리가 없다. 진지유는 웃음을 꾹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자, 1승! 여러분, 이거 언니 귀에 안 들어가게 비밀 지켜 주시는 거 알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눈웃음을 치며 애교를 뿌린다. 구경하러 몰려들어 있던 스탭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네, 소리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은 별 감흥 없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무슨 역할로 오셨습니까? 제가 아직 들은 게 없어서요.”

이번에는 진지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납치당하는데요, 그쪽한테?”

*

‘서울의 개’는 극의 후반부로 치닫는다.

정연우는 기어이 서울 내 조폭 조직들 대부분을 소탕했다.

단, 원초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고 제 여동생까지 크게 다쳤으나, 정연우의 광폭한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경찰 상부에서는 의견이 나뉜다. 암흑가를 접수한 새로운 세력을 포섭하자는 의견과, 목줄을 못 채울 것 같으니 묻자는 의견.

부패한 유력자들은 ‘정 인터내셔널’에 친화적 메신저를 보내지만, 그들이 개로 부리려 한 자는 뒤틀린 테러리스트다.

ㅡ늙다리 새끼들이 벌써부터 배가 불렀나, 어째 80년대 그 시절보다 범죄와의 전쟁을 안 하려고 해. 고양이 몇 마리 죽여 주니까 누굴 개인 줄 알고. 안 그래, 최 실장?

ㅡ······.

최승은 여전히 말이 없다. 마대휘와의 첫 만남 이후, 대사는커녕 수화조차 여태 하지 않았다.

무생물의 동공. 세월에 침잠돼 썩어 버린 눈빛으로 제 보스를 응시할 뿐이다.

ㅡ청장네 한번 다녀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새끼들. 발등에 끓는 물 좀 부어 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번 보게.

이번 목표는 타락한 경찰, 그 수장이다.

*

S#.21 뒷골목(밤)

현 경찰청장 이철준의 딸, 이서희는 학과 행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귀가하는 길에 웬 남자와 맞닥뜨렸다.

ㅡ누구세요?

ㅡ지금 뭐 하는··· 으아악!

설명도, 예고도 없는 무자비한 폭력이 일행들을 휩쓴다. 코뼈가 부러지고 팔이 비틀린다.

일행들 세 명을 순식간에 담가 버린 최승은 이서희의 팔을 잡고 잡아끈다.

ㅡ놔요, 119만 부르고 내 발로 갈 테니까.

의외로 담담한 반응에, 최승은 잡았던 손을 놓고 무표정하게 기다린다.

납치당한 인질이 납치범의 차에 올라타고, 문 닫힌 아반떼 옆을 경찰차가 스쳐지나간다.

동시에 도시 곳곳에서 들리는 폭음. 최종장으로 치닫는 테러리스트들의 공습이 시작됐다.

*

한강 둔치에 주차된 차.

앞좌석에서는 긴장감이 팽팽하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 촬영감독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배어난다.

두 배우가 연기를 주고받는다.

이서희 :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불쑥) 우리 아빠 때문이죠?

이서희 : 어릴 때부터 그랬어. 유독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가게 주인들, 깡패 새끼, 소시민부터 판검사 어르신까지.

이서희 : 어째 더러운 건 엄마 쫓아내고 청장 돼도 달라지는 게 없냐.

이서희 : (계속 답이 없는 최승을 흘끗 보며 자조 섞인 웃음) 저기. 뭐 하나 말해 줄까요? 원하는 거 있으면 그냥 그 새끼가 만난 아가씨들 목록을 캐요. 딸년 납치한다고 벌벌 떨 사람도 아니니까.

확실히 좋은 배우는 몰입력부터 다르다. 특별출연이라 여태 쌓은 서사도 없건만, 툭툭 뱉는 대사 몇 마디로 상황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옆에서 떠드는데도 최승은 귀머거리처럼 한강 위 불빛들만 보고 있다. 순간 이서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이서희 : 알겠냐고!

외침과 함께, 휴대용 전기충격기를 꺼낸 이서희가 손을 뻗지만 어림도 없다.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피한 최승이 거침없이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짝ㅡ!

보고 있던 사람들이 무심코 입을 틀어막았을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다. 가냘픈 몸이 차량 문에 부딪치고, 볼을 감싼 이서희에게 최승이 수화로 무언가를 말한다.

이서희 : 뭐라는 거야, 깡패 새끼가.

이를 악문 이서희. 최승이 보는 앞에서 스마트폰을 켜 수화의 뜻을 검색한다.

이내 나온 의미는 ‘떠들면 죽인다’.

흑룡파의 욕탕에서, 마대휘에게 했던 ‘따라오면 죽인다’에 이어 두 번째 대사다.

이서희 : (입술을 한번 핥고서) 성격 존나 더럽네.

*

“컷!

나종모 PD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매니저와 스탭들이 우르르 와 배우를 챙긴다.

“지유야, 괜찮아?

“응. 별로 안 아파, 입도 안 찢어졌고.”

신기하게도, 진짜로 볼만 살짝 붉어졌을 뿐 부어오르거나 피가 맺히진 않았다.

한쪽에 물러나 있던 박건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몰입해서.”

“아니에요, 제가 더 세게 때려 달라고 했는데요. 요즘 시청자들, 이런 거 흉내만 내면 몸 아낀다고 엄청 싫어해요.”

촬영 장면을 확인하고 온 나종모 PD가 상기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역시 지유 씨, 실감나게 잘 잡혔어요. 명배우 둘이 만나니까 NG고 뭐고 날 틈이 없구만.”

“괜찮아요. 그럼 다음 씬은······.”

“여기서 찍고 갈 게 몇 컷 더 남아서, 마저 하고 움직일 겁니다. 잠깐만 쉬고 있어요.”

못내 걱정스러운 매니저가 차로 가자고 했지만, 진지유는 휴식도 마다하고 촬영용 의자를 직접 하나 가져왔다.

그러더니 아예 대본집을 들고 명당에 앉아서 다음 촬영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염탐하던 연출팀 스탭 남녀 두 명이 쑥덕거렸다.

“진짜 팬인가 봐. 다음 스케줄 안 가고 구경하는 거 보면.”

“어휴, 서울의 개 특출은 나올 만 하지. 어디 이게 보통 드라만가.”

현재 시청률은 평균 20% 정도. 경쟁작들이 연타로 죽을 쑤는 지금, 케이블치곤 준 대박 수준이나 탑 배우가 쩔쩔맬 정도는 아니다.

남자 스탭이 물었다.

“왜? 은희욱 작가랑 친해서?”

“아니. 박건 배우님이랑 같이 할 기회잖아.”

“그건 너무 억지다. 아무리 좀 핫해졌어도, 진지유랑 박건은 급이······.”

말하던 남자 스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르긴 한데, 저거 보니까 또 모르겠네.”

여자 스탭도 시선을 돌렸다. 연출진 카메라 쪽, 주연급 배우들이 전부 박건 옆으로 모여 연기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역시 박 배우님. 믿고 보는 라이징스타.”

“···너 박건 배우 나이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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