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8화 (18/122)

안방 데뷔전 (7)

* * *

라오스짐 1대 관장.

박두이는 요즘 심기가 불편했다.

그가 운영하는 성스러운 MMA 체육관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인가, 최군인가, 이름도 허약해 보이는 모 배우가 싸움을 끝내주게 한다는 게 골자다.

특히 주짓수 쪽 여성 관원들은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타격 선 깔끔한 거 봐, 이 배우는 진짜 맞다니까, 운동 많이 한 사람이야.”

“원래 특수부대 출신이라던데?”

“어쩐지··· 전문가 아니면 이 포스 안 나오지.”

여태까진 귀를 꾹 닫고 모른 척 했지만, 저 소리만 들으면 복장이 뒤집혔다.

박두이도 소싯적 무술 자문, 비중 있는 엑스트라로 촬영장을 다녔던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액션은 무슨, 비싼 옥체 다치실까 카메라로 장난질이나 하는 서커스지.’

딱 봐도 사이즈가 보인다. 훈련도 안 된 일반인 수준을 데려다, 액션감독과 촬영감독이 쿵짝 맞춰 그럴듯하게 연출했을 것이다.

연예인이 잘생겼다는 소리는 넘어가도 싸움 잘 한다는 소리는 참을 수 없는 법.

결국 박두이는 염치불고하고 끼어들었다.

“아니, 뭔데, 뭐! 그래 봤자 배우 아냐! 얼마나 잘 하는지 한번 봅시다!”

처음 말했던 회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어어, 이거 최승 액션씬 모음집인데······.”

“그러니까 줘 봐요. 주먹 뻗는 폼만 봐도 진짠지 사짠지 다 나와.”

그리고 몇 초 뒤, 박두이는 트집 잡으려던 것도 잊고 침을 삼켰다.

‘뭐지, 이거?’

욕탕 씬, 복서 씬, 페창고 씬. 나오는 영상마다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화면 속 액션은 액션일 뿐이다. 격투기와 실전 개싸움이 다르듯, 합을 맞춘 액션과 실전 격투는 모형 칼과 사시미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작자는······.

‘미친, 진짜 싸움을 하고 있네.’

박두이는 확신했다. 저 촬영장엔 대본이나 동선 같은 게 없을 거라고.

저 박진감, 화면을 뚫고 나오는 생동감, 날것 그대로인 조연들의 반응이 말하는 건 하나다.

무술감독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저놈은 합도 안 맞추고 엑스트라들을 쥐어 패고 있었다.

“와, 졸라 잘 치네.”

기어이 박두이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관장님의 반응에 신이 난 관원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그쵸? 잘 하죠?”

“관장님 표정 봐, 찐으로 놀라셨다.”

“서울의 개는 진짜 최승이 다 살린다니까요. 아직 본방 중일 때 꼭 한번 보세요.”

그는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벌떡 일어났다.

“연습들 하고 있어요.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그렇게 말은 했지만, 박두이의 발길은 화장실이 아닌 사무실로 향했다.

즉시 컴퓨터를 켜 자주 가는 이종격투기 사이트에 들어갔다. ‘최승’으로 검색하자 아직은 별 떡밥이 없었다.

전, 현직 관장들, 격투계의 선후배들이 소식을 주고받는 조용한 커뮤니티다. 박두이는 이 흥미진진한 뉴스를 공유할 책임감을 느꼈다.

“동네 사람들, 이것 좀 보라고 소문내야지.”

*

진지유가 특별출연한 12화가 방송된 뒤, 몇 가지 짤들이 올라왔다.

제목 : 진지유 후려 패는 최승

[차 안에서 때리는 움짤]

제목 : 마대휘 가지고 노는 최승

[마대휘를 드럼통에 넣고 비탈길에서 굴려 버리는 움짤]

제목 : 지금까지 최승이 팬 목록

[최승의 액션씬 움짤 모음]

엑스트라 수십 명, 보조출연자 다수, 탑급 남배우 및 여배우, 펀치머신

그저... 대단하다 줘팸좌!!!

ㅁㅊ 펀치머신 ㅋㅋㅋㅋㅋㅋㅋ

ㄴ오락실 사장님은 왜 빼냐 ㅠㅠ 갑자기 연예인이 자기 영업장 때려부순 건데

ㄴ응 진작 금융치료 끝냈어~

ㄴ그것도 자기 사비로 물어줬다더라; 얼른 괜찮은 소속사 좀 들어가자

그나저나 다다음주가 막화 아님?

ㄴㅇㅇ 16부작이니까 4화남음

ㄴ왠지 다 죽을것같은데... 제발 배드엔딩 유행 편승만은 ㅠㅠㅠㅠ

ㄴ은희욱은 그런 거 신경안씀 지 꼴리는대로 죽이고 살림

ㄴ응 최실장 죽으면 불매운동이야

*

오늘 촬영은 교외의 야외 로케였다. 막히는 도로를 뚫고 가던 중, 박선이 물었다.

“형, 혹시 격투기 선수들이랑도 알아?

“아니, 왜?”

“인스타 팔로우가 우르르 쏟아져서. 다 선수들이라, 형 지인 분들인가 했지.”

“난 몰라. 뭘 배워 본 적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오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올림픽대로를 막 지나올 즈음이었다.

“어, 최승! 최승 맞죠!”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있었는데, 옆 차에서 문신투성이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예, 맞습니다.”

“와, 미쳤다.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응원해 주세요.”

“당연하죠! 차기작도 나오면 꼭 볼게요!”

보통 남자 배우들은 여자 팬덤이 형성된다고 하지 않던가?

어째 그를 알아보는 사람 중엔 남자들, 그것도 덩치 큰 운동맨들이 많았다.

그 이야기를 하자 박선은 뿌듯하게 설명했다.

“브랜딩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야. 남배우가 남자 팬 만들기 진짜 어렵거든.”

“남자들은 같은 남자 안 좋아하지 않나? 보통 아이돌이나 여배우 좋아하잖아.”

“어, 그치. 그쪽 팬덤에 비해선 진짜 한 줌이긴 한데··· 남자들도 그냥 잘생기기만 하면 관심 안 줘. 운동을 잘 한다거나, 연기력이 끝내준다거나, 끌릴 소재가 있어야 기억하지.”

왜 좋아하는지는 짐작이 잘 안 갔다. 건은 자기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사람 때리는 것밖에 안 했는데.”

“형은 멋있잖아. 뭐랄까, 같은 남자가 봐도 피가 끓는 그런 게 있다니까.”

신이 나서 떠들던 박선의 표정이 갑자기 수심에 잠겼다.

“그리고 팬덤은 미리미리 형성해 둬야 돼. 형 곧 백만 안티 양성될 거라.”

“안티는 왜?”

“진지유 씨 때린 거 방송 탔잖아.”

“아, 그거.”

어제 진지유가 특별출연한 화가 전파를 탔다. 하필 함께 보던 아버지는 헛기침을 했고 어머니는 분개했다.

남들은 키스신 찍는데 우리 아들은 이게 뭐냐, 여자친구 패는 남자로 찍힌 거 아니냐며 장탄식을 늘어놔 박선이 진땀을 뺄 지경이었다.

“그래도 형, 연기할 만 하지?”

갑작스러운 동생의 질문에, 건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괜찮네. 재미도 있고.”

“그래, 형 요즘 얼굴이 많이 폈다니까. 전역하고 며칠은 진짜··· 어디서 휴대폰 잃어버리고 온 사람 보는 줄 알았어.”

“내가?”

“응, 몰랐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엄마랑 아빠도 얼마나 걱정 많았는데. 나한테 계속 군대에서 무슨 일 있던 거 아니냐고 물어보셨어. 말년휴가 때랑 사람이 달라졌다면서.”

건은 얼굴을 쓸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이상했나?

하긴, 귀환 초창기에는 정신이 없었다.

수십 번을 죽고 살아나길 반복하다가, 대악마 머리통도 못 깨고 돌아온 전직 용사에겐 적응기간이 필요한 법이다.

양자역학이니 초끈 이론이니, 한동안 차원이동 관련 서적들을 읽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혹시나 이 기현상을 설명할 단서를 찾을까 싶어서.

‘성과는 없었지.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고.’

20년간 죽고 죽이며 악마와 싸웠으니, 현대의 기억은 흐려질 만도 하다.

그러나 철왕국의 누락된 기억들은? 아직도 성녀와 동료들, 마지막 싸움을 포함한 대악마들과의 전투는 떠오르지 않는다.

꼭··· 누군가 일부러 가려 놓은 것처럼.

죄악의 베리알은 망각과 혼돈을 관장한다. 놈을 베었을 때 뭔가 수작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합기. 이건 왜 돌아온 거지?’

카메라가 돌아갈 때마다 되살아나는 용사의 권능도 설명이 되진 않았다.

애당초 합기(合気)란 오러의 일종. 신체를 강화시키고 초인적인 근력을 뽑아내는, 악마와 맞서기 위해 창조된 인간의 무기다.

평화로운 현대에서야 쓸모없겠지만, 익숙한 힘이 돌아오자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잠시나마 철왕국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기에.

더 정확히는,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멀어질 수 있어서.

‘여기, 이거,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에요.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인간 백정, 그 내면에 감도는 공허와 고독! 박건 씨는 마스크랑 아우라만으로 이게 된다니, 진짜 복 받은 겁니다.’

모니터링 도중, 김정남 촬영감독이 침을 튀기며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처음엔 작가와 PD를 포함한 스탭들의 칭찬 세례가 거북했지만 이젠 적응됐다.

고마운 일 아닌가. 실패한 칼잡이가 스크린 속에서나마 쓸모가 있다는 것이.

건은 새파란 지구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성녀도, 동료도, 찢어 죽일 날개쟁이들도 없지만, 용사였던 사내는 아직 이곳에 있다.

“별일 없었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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