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9화 (19/122)

드라마가 남긴 것 (1)

* * *

오늘은 최승의 마지막 씬 촬영 날이다. 이미 주요 장면은 편집까지 다 끝났고, 로케 일정의 특성상 후반부 장면들은 순서대로 찍게 되었다.

용준상이나 서희도 등 주연배우들은 언제 찍으나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애초에 영화나 드라마나 스토리 진행에 촬영일정을 맞춰 주지 않는다. 3화, 7화, 12화에 들어갈 씬을 하루 만에 찍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감정선을 못 잡으면 프로가 아니다.

“아이고, 백 선생님 오셨습니까! 연락 받았으면 제가 모시러 갔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 자네가 시간 낭비하는 꼴을 내 못 봤어.”

오늘도 새로운 게스트가 오셨다. 진지유 출연 전후로, ‘서울의 개’엔 다양한 카메오들이 나와 극의 재미를 더했다.

작가가 워낙 마당발이라지만, 애초에 잘 되는 드라마라서 섭외가 쉬운 것도 있다.

“박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얘기 많이 들었네. 자네가 요즘 소문 자자한 최승이구먼.”

도인 같은 풍모의 백발 배우가 박건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작중 부패한 경찰청장, 진지유의 아버지 역으로 특별출연을 맡은 연극판 출신 60대 명배우다.

백장협은 과장된 동작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둘러보는 척을 했다.

“그나저나 나 PD, 내 딸은 없나?”

“이거 어쩌나··· 진지유 씨 나오는 회차는 진작 촬영분량이 끝났습니다. 은 작가 스타일 아시잖습니까, 다 찍으면 바로 보내는 거요.”

“농담일세, 농담! 난 어차피 이 친구 때문에 온 거야. 요즘 단역들 사이에서 호평들이 자자하대서.”

백장협은 사람 좋게 허허 웃더니, 탐나는 눈빛으로 박건을 쳐다봤다.

“실제로 보니 느낌이 와. 브라운관에서도 이 정도면 영화판은 씹어먹고도 남아.”

“과찬이십니다.”

“그··· 어떻게, 연극이나 독립영화 쪽은 관심 없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도 좋지만, 메이저급 작품들 찍기 전에 커리어를 다져 놔야······.”

“선생님, 저희도 있습니다!”

저만치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 감독들을 슬쩍 소개시켜 주려던 백장협이 뜨끔한 척 돌아보았다.

“크흠, 용 배우 왔나?”

작품 초반에 서희도가 아이돌답지 않은 안정감으로 주목받았다면, 용준상은 작품 내내 물 오른 연기력을 보여주며 극을 견인했다.

배역 역시 오랜만의 형사 역할. 덕분에 전작들의 악역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광고주들의 러브콜도 쏟아지고 있었다.

“섭섭합니다. 아무리 박건 배우가 대세라지만 주연은 쏙 빼놓고 스카웃이라뇨.”

“무슨 소리야. 자넨 항상 1순위지. 어제 보낸 문자 못 받았나?”

“매니저한테도 선생님 연락은 안 왔다던데요.”

대본을 말아 쥐고 배우들의 만담을 구경하던 나종모 PD가 부추겼다.

“아예 다 스카웃해 버리시죠. 박건 씨에다 준상 씨랑 희도 씨까지, 주연들 싹 모아서 올리면 올해 첫 천만 뚫는 거 아닙니까?”

“그럴까? 복에 겹긴 한데 제작사 등골이 휘겠구먼, 흐흐흐.”

웃고 떠드는 사이, 용준상이 건에게 물었다.

“오늘 마지막이죠?”

나종모 PD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작품 순서에 맞게 씬들을 찍는 편이다.

회상 씬 등 나머지 장면은 몇 개 남았지만, 둘이 붙는 하이라이트 씬은 이번이 끝이다.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 작품, 찍는 내내 재밌었어요. 나랑 희도가 주연이라지만 박건 씨 덕분에 자극 많이 받았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해서 좋게 본 거니 감사할 필요는 없고. 끝까지 같이 잘 해 봅시다.”

인기 배우치고 담백한 눈빛이 꾸밈없는 호승심을 담고 이쪽을 본다.

박선이 말해주기를, 용준상과 서희도 정도면 배우병이 없는 편이라던가.

굴러들어온 조연에게 질투가 아닌 라이벌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썩 괜찮은 인간이란 방증이다.

건은 손을 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S#.1 서울 도심

서울 하늘을 검은 연기가 뒤덮었다.

JS코퍼레이션의 몸통은 와해됐지만, 정연우가 뿌려 놓은 행동대원들이 시내 도처에서 사제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최승을 시켜 경찰청장 딸을 납치한 정연우. 인질이 붙잡힌 영상을 생중계하며, 이 모두가 경찰들의 죄라고 조롱한다.

이철준 : 씹어 죽일 놈의 자식들, 지금부턴 전면전이다. 싹 쓸어버려!

격노한 경찰청장은 경찰특공대를 동원하고, 정연우는 총기를 소지한 조직원들로 맞선다.

이내 서울에서는 남미의 할렘가를 방불케 하는 총격전이 벌어진다.

트럭을 탈취한 정연우가 대로를 질주하며 경찰차에 불법개조 소총을 쏟아 붓는 장면은 후반부의 백미다.

정연우 : (미친 사람처럼 광소하며) 와 봐, 새끼들아. 이게 네놈들이 먹어치운 세금이다, 맛이 어때!

그러나 게릴라는 게릴라일 뿐. 결국 정연우와 ‘정 인터내셔널’ 잔당은 경찰특공대에 진압된다.

총격전 끝에 아지트로 쓰던 폐공장을 탈환하지만 납치된 경찰청장의 딸은 그곳에 없다.

마대휘의 총탄에 팔이 관통된 정연우. 일그러진 조소를 띤 채 공권력을 비웃는다.

정연우 : 이미 갔다, 병신들아. (피 섞인 기침을 토한 뒤) 폭탄 오십 킬로그램이랑··· 너희 청장님 딸, 최 실장이 데리고 출장 나갔어.

마대휘 : 이 새끼, 인질은 어디로 빼돌렸어!

정연우 : 갈 곳에 갔겠지. 우리 마 형사님 고향, 원주 쪽일지도 모르고··· 흐흐.

마대휘 : (뭔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고 정연우의 멱살을 잡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정연우 : 최승이 그놈, 네 동생이야.

마대휘 : 뭐라고······?

정연우 : (마대휘를 향해) 귀 먹었어? 엄마랑 형은 저희끼리 살겠다고 도망치고, 술주정뱅이에 범죄자 아빠랑 같이 살다가 보육원 들어간 네 동생, 마대승이라고.

마대휘의 눈이 흔들린다. 정연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악마처럼 히죽대며,

정연우 : 우리 최 실장, 아니··· 대승이가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 댁네 아버지 기억나지? 마영광 씨 죽고 나서 깡패들 소굴에서 소매치기로 길러지는 거, 내가 빼 와서 사람 만든 거야. 자길 버린 가족들이랑 이 세상에 복수할 수 있도록.

마대휘 : ···거짓말, 개소리 마라.

정연우 : (낄낄 웃으면서) 그럼 가서 확인해 보든지. 아, 더 늦으면 청장님 딸내미랑 폭사할지 모르니 서두르셔.

*

촬영장에 긴장감이 흐른다.

배경은 허름한 아파트 승강기 앞. 총 한 자루도 없이, 단신으로 경찰특공대를 몇 팀이나 쓰러뜨린 최승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늘 입고 다니던 통이 큰 수트는 이미 그 자신의 피로 푹 젖어 있다. 치명적인 총상만 다섯 발을 넘게 맞았다.

오늘 죽인 경찰의 수가 열 명이 넘지만, 최승 역시 이곳에서 숨이 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달려온 마대휘가 나타난다.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 다른 스탭들도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압도적인 액션으로 모든 것이 커버됐다지만, 이번 씬에서는 감정선을 표현해야 한다.

나종모 PD는 숫제 따로 박건을 데리고 나가서 멘탈 케어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NG 안 냈잖아요. 적금 미리 깨서 썼다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갑시다. 박건 씨가 줄여 준 촬영 시간만 일주일은 될 거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예, 알고 있습니다.”

나종모 PD는 잠시 고민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눈앞의 신인에겐 저런 호불호가 없다.

무슨 디렉을 줘도 오케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물만 뽑아낼 뿐이다.

‘참, 피디 입장에선 좋은 배운데······.’

예스맨들은 넘어질 때 더 크게 자빠진다. 나종모는 까탈스럽지만 자기 사람은 잘 챙겼고, 그래서 박건의 연기가 괜찮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자, 들어갑니다. 둘, 셋, 큐!”

*

S#.22 허름한 아파트 비상계단 앞

땀투성이가 되어 달려온 마대휘.

그러나 청장의 딸과 폭탄은 온데간데없고, 쓰러진 경찰특공대 대원들과 최승만 있다.

마대휘 : (침착한 목소리로) 인질은 어디 있지?

마대휘 역의 용준상은 수십 년 전 헤어진 동생을 앞에 두고도 프로페셔널한 형사 연기를 완벽히 소화했다.

최승이 대꾸 없이 숨만 몰아쉬는 사이, 마대휘의 이어링으로 보고가 들어온다.

상황실 : 마 팀장님, 최승이 있던 빌라에서 이서희와 폭탄 확보했습니다. 인질은 무사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최승은 함께 폭사하라는 정연우의 명령에 불복한 모양이었다.

한숨 돌린 마대휘, 그제야 자신이 쫓던 도살자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본다.

시청자의 눈물을 짜낼 신파는 없다. 추후 편집을 입힐 때도 나레이션이나 배경음악 없이 담백하게 흘러갈 것이다.

비극은 그 자체로 전달됐을 때 가장 무참한 법이기에.

마대휘 : (틀리길 바라는, 비극을 예감한 표정 짓는다) 너, 혹시 대승이냐?

빛을 잃어가던 최승의 눈에 언뜻, 희미한 섬광이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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