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0화 (20/122)

드라마가 남긴 것 (2)

* * *

ㅡ너, 혹시 대승이냐?

가짜 피로 범벅된 채, 건은 수십 년 전 헤어진 형을 쳐다보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이곳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경험해 본 인간이 자신일 것이다.

대악마들의 군단에는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악마들이 즐비했다. 때론 머리가 깨져 죽고 때로는 가슴이 뚫려 죽었다.

한순간 시야가 새카매진 적도 있었고 천천히 세상이 빛을 잃던 적도 있었다.

용사가 죽어갈 때, 동료들은 용준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용사님, 일어나세요!

잠드시면 안 됩니다, 제발 눈 좀 떠 보십시오!

치유를··· 성녀님, 어서 기도를······!

처음에는 빌어먹을 신을, 그를 가운데땅으로 불러온 성녀와 천상을 원망했다.

그 다음은 철왕국의 모든 인간들을 증오했다.

시간이 흐르자 분노는 마모되고, 원망은 풍화돼 목적만이 남게 되었다.

ㅡ(수화) 오랜만이네.

피투성이 손이 가슴께에서 움직인다. 처음 최승과 만난 뒤, 어설프게나마 수화를 공부해 온 마대휘의 눈이 커진다.

ㅡ야, 대승이··· 이, 씨발··· 형이다!

의심은 진실로 변한다. 달려든 마대휘가 지혈하려 하지만, 피를 틀어막을 부위가 너무 많다.

“······.”

바짝 달려든 카메라가 최승의 표정을 집요하게 렌즈에 담아낸다.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살인자의 눈빛에 분노와 허망함, 뒤늦은 아쉬움이 몇 초 사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ㅡ구급차 보내! 의료장비 싹 실어서, 빨리!

ㅡ그만해. 됐으니까.

낮고 무감정한 음성.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무전기로 소리치던 마대휘가 흠칫 놀라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어머니가 데려간 형, 아버지에게 남겨진 동생, 그 둘의 엇갈린 운명이 짧은 눈맞춤에서 교차된다.

ㅡ···대승이, 인마.

새까만 동공이 빛을 잃고 흐려진다. 마대휘는 망연히 주변을 둘러본다. 동생의 시체와, 동생이 죽인 이들의 시체 한복판에 선 채로.

돌고 돌던 죄의 종말이다.

“컷!”

나종모 PD의 컷이 나오자마자 용준상은 박건을 붙잡고 흔들었다.

“박건 씨, 괜찮아요?”

“예.”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돌아온 박건이 툭툭 털며 일어섰다.

“무슨 죽는 연기를 이렇게 살벌하게 해요. 진짜 심정지라도 온 줄 알았네.”

“선배님 덕분에 몰입이 잘 된 것 같습니다.”

“몰입 문제가 아니라··· 아무튼, PD님. 방금 씬 잘 찍혔죠?”

김정남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방금 저 장면을 못 살렸으면 인기 PD 사단에서 촬영감독을 맡을 자격이 없다.

찍힌 씬을 확인하고 온 나종모 PD가 흥분한 표정으로 손을 비볐다.

“여러분, 방금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예?”

“기뻐들 하시라고요. 우리 드라마, 이거면 시청률 25%까지 누워서도 뚫습니다.”

“아휴, 피디님!”

“또, 또,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

아무리 잘 풀려도, 설레발을 치면 일이 망한다는 징크스는 방송가의 고전 미신이다.

나종모 PD는 비명을 지른 스탭들에게 오히려 면박을 줬다.

“뭐, 왜! 다들 내 말 맞았다고 복비 싸들고 찾아오지나 마요. 세영 씨는 쫑파티 으리으리한 데로 알아보고. 우리 화성 갈 거니까!”

*

로만 엔터테인먼트 17층 대표실.

마라톤 미팅이 끝났다.

대기업 기획부를 상대하기란 늘 피곤하다. 이쪽 배우들의 홍보효과와 저쪽의 개런티, 숫자와 조건들이 치열하게 맞부딪친 결과다.

이상철 본부장이 기지개를 길게 켰다.

“진땀 뺐네요. 요즘은 부장급들도 무슨 임원 행세를 하려 들어서, 원. 대표님은 언제쯤 퇴근하십니까?”

노중만 대표는 큼직한 손 안에서 장난감처럼 보이는 폴더형 폰을 흔들었다.

“서울의 개 하는 날이잖아. 보고 가야지.”

“아, 그거요. 슬슬 막방일 텐데······.”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더군.”

회차를 검색해 보던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첩보원이 많아.”

“어휴, 전 그 드라마만 보면 아직도 뭐에 홀린 기분입니다. 와우키즈 애들이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차라리 내부에서 먼저 터진 게 호재라고 해야 할지, 참.”

노중만 대표는 책상 한쪽의 신문꽂이로 시선을 보냈다.

매일 새것으로 바뀌는 맨 앞자리에, 며칠 전부터 자리 잡은 연예지 조간이 꽂혀 있었다.

「와우키즈 재계약 불발··· 멤버 내 불화설 스캔들까지, 갑질 논란 재점화되나?」

“그 친구는 어때.”

즉각 알아들은 본부장이 대답했다.

“잘 나가요. 갑자기 투입된 일반인치고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진짜, 이래서 처음 줄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니까요.”

‘서울의 개’ 시청률은 진즉 20%를 뚫었다.

처음엔 이슈몰이 정도로 여겨지던 박건의 평가도 극이 방영될수록 뛰고 또 뛰었다.

일반인 출신, 유니크한 마스크와 피지컬, 액션 부문에서만큼은 검증된 연기력.

관계자들 사이에선 지금이 최저점이니 채 가는 곳이 임자란 소리까지 돌고 있다.

“우리 쪽 컨택은?”

“넣었죠. 매니저가 답이 없다던데요.”

“그럴 만도 해. 자길 쫓아낸 회사가 형 때문에 바짓가랑이 붙잡는 거니까.”

“근데 뭐, 아직 검증받을 게 많아요. 아시잖습니까, 이 바닥 반짝 뜨긴 쉬워도 계속 떠 있기는 어려운 거.”

“그래? 난 계속 갈 것 같은데.”

엔터 대표 중 안목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 노중만의 보는 눈은 무섭게도 정확하다.

뜰 거라 찍은 이들은 최소 A급, 최대 S급까지 갔고, ‘쟤는 안 되겠다’는 말이 나온 연예인들은 전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본부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잡아야겠는데요. 지유가 갑자기 서울의 개 특출 나간댔을 때는 좀 놀랐습니다. 다 귀찮다고 대기업 광고도 까던 애가, 은 작가랑 친분 때문인지······.”

노중만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올 하반기 일정들이 어떻게 되지? 굵직한 것들 위주로.”

“어··· 아이돌 쪽은 퀸텀이 컴백하고요. 최필립이는 가을까지 쉬겠다고 했고··· 신승이랑 지유도 작품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시나리오들 고르면서 광고촬영 두어 개 병행 중입니다. 들어갈 작품들이 갈수록 없어지니, 원.”

“백하니는?”

“걔는 중국 보내달라던데요. 위안이랑 달러 잔뜩 싸와서 우리 회사 코스닥에 상장시키겠다고. 이제 재계약이 목전이잖습니까.”

“건드리지 말란 소리군.”

“그럴 겁니다. 또 뭐, 꽂히는 거 있으면 하지 말래도 물어올 애니까요.”

본부장이 슬쩍 커버를 쳐 줬지만, 노중만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수혈을 하긴 해야 돼. 창진그룹이 칼을 뽑았잖아. DG랑 조이너스도 점점 급해질 거야.”

방송가는 늘 작품 기근, 배우 기근에 시달린다. 괜찮은 작품은 몇 없고, 작품 속 TO는 정해져 있으며, 그 자리를 꿰찰 얼굴들도 정해져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 자본까지 컨텐츠 미디어 경쟁에 뛰어들며 재능들을 집어삼키는 중이다.

아차 하는 순간 소속 연예인은 물론, 작품과 편성 자리까지 다 빼앗길지 모른다. 공룡들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달려야 한다.

“지방 연극판 쪽, 쓸 만한 얼굴들이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돌고 오는 김에 박건 그 친구랑도 제가······.”

“아니, 그냥 내가 가지.”

“대표님이 직접요?”

잠시 놀라던 본부장은 곧 노중만 대표의 인맥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은희욱 작가에게 스카웃된 사이가 아닌가?

삐딱하게 보면 동생을 쫓아낸 회사지만, 좋게 보면 팔자를 바꿔 준 해프닝이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대표님이 찍으신 배우면 투자 가치야 충분하고 남죠. 거기다 은 작가랑 같이 작업한 거 생각하면··· 우리 쪽에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건 만나 보면 알겠고.”

일축한 노중만은 몸을 일으켰다. 낮은 천장이 아닌데도 대표실 샹들리에에 정수리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종방연 때 화환 하나 보내 줘. 특별출연도 우리 배우니까.”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막방 25%, 아니, 30% 뚫어 봅시다!”

‘서울의 개’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야외 씬을 마치고, 전 스탭과 배우들이 사전 섭외해 둔 돼지갈비 집으로 이동했다.

종방연이 배우와 방송국, 팬들의 축제라면 촬영 쫑파티는 스탭들의 만찬장에 가깝다.

드라마가 망하면 어떻고, 샴페인이 아니라 소주에 삼겹살이면 어떤가?

일하는 동안 엿 같고 지지고 볶았어도 며칠 뒤면 또다시 얼굴 맞댈 운명들이다.

일단 지금껏 수고했고, 앞으로도 죽어보자는 의미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자, 이번 쫑파티는 무려 드라마국 국장님께서 쏘셨습니다! 2차, 3차, 다 상관없으니까 마음껏 놀다 전사하시랍니다!”

조연출이 선창하자 환호가 터져나왔다. 까다롭기로 유별난 JNBC 김백동 국장의 치하다.

쫑파티 때 돼지갈비나마 생색을 내면, 종방연 때는 시청률에 따라 단체 휴가라도 떨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박건과 박선 형제는 가운데서 몰려드는 술잔을 받느라 바빴다.

“덕분에 편하게 찍었습니다, 박건 배우님 아니었으면 새치가 한 바닥은 더 생겼을 겁니다.”

“현 감독, 왜 새치기야? 이런 건 원래 연출 쪽이 먼저 꺼내는 게 순서라고.”

무술감독에 촬영감독, 조연출에 스탭까지 몰려와 박건이 앉은 테이블은 사람이 꽉꽉 찼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나종모 PD가 큰소리를 쳤다.

“어허, 침들 그만 바르시고! 우리 건이 씨, 다음에도 우리랑 쭉쭉 가는 겁니다? 올해는 모르겠고, 내년 안엔 무조건 백상예술대상 보내 줄 테니까.”

“예. 불러만 주시면 가겠습니다.”

용준상이 끼어들었다.

“박건 씨,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PD란 양반들은 진짜로 세상 끝까지 따라오거든.”

“용 배우님. 그런 건 배우들만 있을 때 가르쳐 줘요. 여기 듣는 제작진이 몇인데!”

현도균 무술감독이 집에서 담근 산삼주를 가져와, 때 아닌 전통주 파티까지 벌어졌다.

달아오른 분위기는 진지유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을 때 절정에 달했다.

“아니, 지유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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