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남긴 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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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같은 소리 하네. 배역이 액션 위주인 걸 어쩌라고!”
서울의 개에 우연히 입덕한 지 어언 12주.
유튜브에 올라온 드라마 쇼츠를 접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레전드로 회자될 욕탕 씬, 펀치머신 영상까지 본 뒤 박건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진짜, 다음 작품에선 이런 인간들 입을 다 막아 버려야 하는데······.”
사실 한지영의 별명은 ‘똥차판독기’였다.
배우고 아이돌이고, 그녀가 덕질한 사람은 전부 논란에 휩싸여 방송가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저 불명예스러운 호칭까지 하사받은 이래, 자신의 안목을 의심한 것이 어언 몇 년이던가.
“아냐. 이번엔 다를 거야.”
본방 전의 광고가 시작됐다. 퇴근길에 사 온 피자를 앞에 놓고, 한지영은 손을 모아 기도했다.
얼굴은 냉막한데 하는 짓은 허당인 이 배우.
박건만큼은 꽃길만 걷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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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개’는 최종회다운 속도감으로 안방극장을 폭격했다.
정연우가 최승의 비밀을 밝힐 때는 수많은 팬들이 탄식했고, 이를 예상했던 몇몇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맞지, 맞지! 내가 둘이 뭐 있다고 했잖아!”
“야, 진정해. 이미 작가가 떡밥 흘린 거 분석글까지 2화부터 돌았었어.”
이어지는 아파트 총격전 씬.
여태까지의 액션이 날것 그대로였다면, 이번에 편집팀은 기가 막히게 연출을 살렸다.
각종 화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가 지형지물을 활용한 최승의 게릴라에 사냥당하기 시작한다.
결국 특공대는 전멸하지만 최승 역시 심각한 총상을 몇 군데나 입는다.
이윽고 도착한 마대휘와 최승의 마지막 대화가 시청자들에게 송출됐다.
ㅡ너, 혹시 대승이냐?
ㅡ오랜만이네.
예고 없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최승의 진짜 이름은 마대승. 둘은 같은 부모를 둔 친형제였다.
마대휘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도망치며 첫째아들만을 데려갔고, 최승은 아버지 밑에서 양육되다가 암흑가로 흘러들어갔던 것.
다른 드라마였다면 슬픈 음악부터 깔았겠지만, 작가는 아픈 사연을 지닌 범죄자에게 일말의 동정조차 할애치 않는다.
수십 년을 건너뛴 형제의 상봉은 잔인하리만치 건조하게 끝난다. 마대휘가 침통하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최승은 눈을 뜬 채 죽음을 맞는다.
관원들과 함께 본방사수 중이던 박두이 관장이 몸이 달아 소리쳤다.
“뭐야, 설마 저대로 끝나?”
“관장님, 좀 조용히! 안 들리잖아요!”
암전됐던 화면이 바뀐다. 25년형을 선고받은 정연우는 복역 중 자살했다.
‘정 인터내셔널’ 일당들은 모두 검거되고, 마대휘는 광수대를 떠나 경찰 제복을 벗는다.
새로 임관한 순경들이 경례하는 가운데, 마대휘 역의 용준상이 덤덤히 독백한다.
ㅡ유기되는 아동, 매년 300명.
ㅡ범죄 전력이 있는 비행청소년, 27.8%.
ㅡ무관심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유예될 뿐이다. 서울을 물어뜯던 개들이 다시 돌아와 이 땅을 활보할 때까지.
내레이션이 끝나고, 세 소년의 오래된 사진을 배경으로 엔딩음악이 깔린다.
관원들은 ‘지금까지 서울의 개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구가 뜰 때까지 입을 벌린 채 화면만 쳐다봤다.
“와, 미쳤네.”
“K-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저렇게 보낸다고?”
“슬퍼하지도 말라는 거 아냐. 은희욱, 진짜 인정머리도 없는 인간······.”
저마다 한 마디씩 하던 도중, 박두이를 본 관원이 물었다.
“관장님. 혹시 우세요?”
“뭔 소리예요, 내가 언제 울었다고!”
“어어, 또 뭐가 반짝였는데?”
프로 파이터조차 울린 마지막 장면은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쳤다.
JNBC 홍보팀이 발 빠르게 ‘한국 드라마 3대 레전드 죽음 씬’을 업로드했고, 몰려든 팬들로 댓글은 활활 불타올랐다.
박건, 용준상, 서울의 개는 이튿날까지 화제성지수 상위에 랭크되며 대미를 장식했다.
최고시청률 26.2%.
평균시청률 19.4%.
금년도 케이블채널 자체제작 드라마 중 최고의 쾌거였다.
*
방송가는 숫자가 지배한다.
쪽박을 찼다면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렸겠지만, 인기를 끌었다면 온갖 러브콜이 쏟아진다.
마치 지금처럼.
-어제가 종방연이었다면서요? 첫 작품 잘 마치신 거 축하드립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말이 30%지, 요즘 세상에 케이블 가서 20% 넘기기가 어디 쉬운가요? 영화로 치면 천만 관객이나 마찬가집니다.
“운이 따랐나 봅니다. 다음 작품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파일럿으로 들어가는 좋은 예능이 하나 있거든요. 내가 맡아서 그런 게 아니라 포맷이 진짜 잘 빠졌어. 박건 씨가 나와 주면 딱 그림 좋을 것 같은데······.
“아, 저희 배우한테 전달하겠습니다. 아뇨, 절대로 예능이 싫은 건 아니고요. 제가 피디님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꼭 나와 달라는 예능국 막내작가의 부탁부터, 너희가 콧대 세울 레벨이냐는 은근한 협박까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방송국 인간들의 육탄 공세엔 아직도 대처가 어려웠다.
“어휴, 이래서 소속사가 필요하구나.”
그래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 좋다고, 연락이 오니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긴 했다. 전역한 형이 전 직장으로 쳐들어가더니 갑자기 배우로 스카우트, 거기에 데뷔작 빅히트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해서 그 자체로만 영화 대본 같을 정도다.
“이것도 나중에 예능에서 풀기 좋겠네. 우리 형, 좀만 더 괜찮아졌다 싶으면.”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동안 형은 약을 잘못 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자면서 아리아라느니 케일이라느니 외국인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사에, 뜬금없이 하늘을 쏘아볼 때도 있었다.
거긴 왜 보냐고 물어보자 알쏭달쏭한 대답만 돌아왔다.
‘놈들은 하늘에서 온다, 라고 했지.’
다행히 기행은 점점 나아졌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알아본 바, 군인들의 PTSD엔 완벽한 치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물어봐도 말을 할 리 없고, 굳이 물어볼 까닭도 없기에 박선은 그냥 기다렸다.
본인이 내킬 때 털어놓겠지. 그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온 힘을 쏟을 생각이었다.
그때 또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박선은 또 어떤 피디겠거니 하고 받았다.
“예, 박선입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누구지?
“저, 죄송한데 연락처 저장이 안 돼 있어서··· 혹시 누구신지요?”
-난데, 로만 대표 노중만.
“아, 예? 예! 대표님!”
-박선 씨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아직 제대로 못 했어. 따지고 보면 더 커질 우환을 두 명 덕분에 잘라냈는데.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애써 침착하게 말하면서, 박선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대형기획사 대표가 직접 전화를 한 이유라면······.
-미팅 잡기가 어렵더군. 박건 배우랑 만나보고 싶어서 연락했는데, 전해 줄 수 있나?
“예, 형한테 이야기 전하고, 근시일 내로 답신 드리겠습니다. 연락은 혹시 이 번호로······?”
-편할 대로 해. 내 쪽이 아쉬워서 보자고 한 거니까.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박선은 한동안 찍힌 번호를 들여다보았다.
대형 기획사 관계자, 그것도 대표가 직접 매니저에게 연락해 왔다. 연이 있었다지만 높아진 박건의 몸값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근데 진짜, 포스부터가 다르네.”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DG와 조이너스에서는 아직 연락이 안 왔지만, 중소형 기획사 몇 팀과는 미팅을 마쳤다.
다만 최대한 싸게 후려치려는 것이 너무 빤히 보여서 선택지에서 배제했었다.
과연 노중만은 어떤 조건을 제시할 것인가?
“좋아, 해 보자!”
차만 모는 로드라면 몰라도, 소속사가 없는 지금은 매니저가 스케줄 관리부터 배우의 일정들까지 모두 서포트해야 한다.
박선은 의욕을 불태우며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 박열호가 TV를 보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 선이도 나왔냐?”
“예,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요. 형 소속사 건으로 미팅들이 엄청 잡혀서요!”
“밥들은 꼭 먹고 다녀라, 네 형은 너 잘 때 진작 나갔다.”
이번엔 박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요? 어디로요?”
“방송국 사람들이랑 점심 먹는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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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NBC 사옥 지하 라운지.
피디, 작가, 배우 등 ‘서울의 개’ 주역들이 커피를 하나씩 들고 둘러앉았다.
어젯밤 종방연을 마친 뒤, 오늘 점심은 나종모 PD가 한턱 낸 참이었다.
용준상은 스케줄이 있어 먼저 일어났고 나머지 주연들은 티타임을 즐기러 남았다.
“미팅? 지금 다들 같이 있어서, 번호 남겨두면 내가 연락할게.”
박건이 전화를 끊자 나종모 PD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오, 소속사? 어디서 붙었대요?”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얘긴 못 들어서요.”
“뭐, 이제 온갖 연락 쏟아질 때 됐죠. 드라마가 잘 돼도 많이 잘 됐으니까. 꿀꺽 하고 보려던 기획사들, 지금 골치 좀 아플걸요.”
“희도 씨가 많이 가르쳐 준 덕분입니다.”
두 손을 든 서희도가 우는 소리를 했다.
“형, 제발 그냥 말 놓으라니까요. 언제까지 정 없게 그럴 거예요?”
“제가 누구한테 반말을 어려워해서요.”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그럼 후임처럼 대하면 되죠, 미리 적응 좀 하게.”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서희도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종모 PD가 턱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근데 희도 씨, 스케줄 안 바빠? 광고에 예능에, 다음 작품 찍자는 작가들도 줄 섰을 거 아냐.”
드라마가 성공하면 배우들은 잠시나마 황금기를 맞는다.
주연들에겐 광고 오퍼가 쏟아졌고, 조연이나 단역들도 한두 자리씩 연락이 들어왔다.
서희도는 금발로 바꾼 머리를 쓸어넘겼다.
“말도 마세요. 사장님이 앨범 집어치우고 다음 작품부터 고르자면서 대본 폭탄을 주시는데, 바로 샵 가서 탈색부터 했잖아요. 이번엔 진짜 일 년은 푹 쉴 거예요.”
“우리 박건 씨는? 뭐 소식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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