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시나리오 (2)
* * *
“그래, 마음 좀 진정시켜. 대기업 돈이라고 나쁜 거 아냐. 요즘은 걔네가 더 합리적이라니까?”
김률 감독이 나가자 태종범 대표는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조연출이 질색하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사무실에선 안 피우신다면서요!”
“한 대만 태우자. 속이 쓰려서 그래.”
코를 막고 짜장면을 흡입하던 조연출이 물었다.
“김률 감독, 이번엔 할까요?”
“해야지. 무조건 해야지. 여기서 더 늦으면 우리도 손 떼야 돼.”
“감독님 고집이 참··· 적당히 쓰셔도 될 텐데, 이러다 또 해 넘어가겠네요.”
“어휴! 나도 몰라. 김 감독 저놈, 올해엔 막힌 운수 뚫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더니······.”
태 대표는 가슴을 두들겼다. 김률 감독을 안 지가 벌써 십 년째다.
실력적으론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영화 주인공 못잖게 박복한 운세다.
잘 찍은 독립영화는 주최측 내정자로 수상이 빠그라지고, 투자를 받았던 장르영화는 전국적 역병으로 개봉도 제대로 못 했다.
어디 그뿐이랴. 동업자가 돈을 싸갖고 도망치고, 가까스로 구한 투자사가 갑자기 파산하는 등 종류별 역경들이 잦았다.
그렇게 몇 차례, 이제 김률의 영화에는 투자자도 배우도 잘 붙지 않는다.
이쪽 바닥 소문이 오죽 빨리 돌던가? 한 번 실패하면 그럴 수 있지만 세 번을 내리 구르면 전국적 불행덩어리다.
“팔자 사나운 놈이랑 굳이 놀겠냐 이거지.”
그런 면에서 이번 제안은 마지막 기회였다. 엔터테인먼트계로 공격적 확장을 나선 창진그룹의 C&J 노블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제작비는 얼마든지 대 줄 테니, 대신 본인들이 픽한 배우를 쓰라는 조건으로.
“대표님, 근데 강균모랑 서예주면 나쁘지 않은 카드 아니에요?”
“말해 뭐 해? 얼씨구나 하고 업어다 써야지.”
“그럼 절충안으로··· 연극판 출신 중에 없을까요? 김률 감독님 그쪽 인맥 좀 되잖아요.”
“없어, 없어. 젊고 마스크 되는 연기파가 필요한데 김 감독 지인은 죄다 나이 지긋한 노친네야.”
기어이 담배 두 대를 다 피운 태종범 대표는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한 PD, 설득하고 싶으면 죽여주는 배우 두 명만 데려와 봐. 돈 안 밝히고, 김률이 마음에도 쏙 들 만한 라인업들로.”
“···저는 설득할 생각도 없었는데요.”
그때, 뒤쪽에서 대표실 전화가 울렸다. 허리를 뒤로 젖힌 태 대표가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예, 큰범 스튜디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건이라고 합니다.
조연출의 귀가 쫑긋 섰다. 허스키한 저음 속에 미성이 섞인, 절로 듣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목소리다.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흑의사제’ 시나리오를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배우 오디션이 이미 끝났습니까?
오디션은 개뿔, 제작부터 빠그라지는 단계였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없다.
태 대표가 후다닥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사소한 문제가 좀 있어서··· 아직 진행 중이에요. 혹시 투자사 쪽 관계자십니까? 아니면 매니지먼트?”
-배우입니다. 서울의 개에 출연했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던 조연출이 돌연 팔을 미친 듯 휘젓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고’라는 제스처에, 태 대표도 노련하게 진도를 뺐다.
“배우님이셨군요. 그럼 저희 시나리오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거죠?”
-예. 가능하다면 오디션을 보고 싶습니다. 시간은 언제든 괜찮습니다.
“언제든? 마침 여기, 그 시나리오 쓰신 감독님이랑 같이 있던 참인데. 혹시 오늘이라도······?
-예.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배우는 쿨하게 오디션을 잡더니 전화를 끊었다. 조연출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완전 대박이에요. 일이 잘 되려나, 어떻게 박건한테 연락이 딱 오지?”
“박건이 누군데? 난 이름도 처음 들어.”
“모르세요? 요즘 핫한 배운데, ‘서울의 개’ 최승 역할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조연출이 내민 유튜브 드라마 쇼츠를 쓱 본 태종범 대표는 턱을 쓸었다.
“잘생겼네. 몸도 잘 쓰고.”
“그리고 로만이잖아요. 같은 소속사라 진지유가 특별출연도 해 줬다는 얘기가 있어요.”
최승의 명장면들을 보면서도 큰 반응 없던 태 대표의 표정이 변했다.
“로만? 노중만 대표가 하는 그?”
“네. 듣기론 둘이 뭐가 있다던데, 노 대표가 푸쉬하는 신인이라는 소문도 돌았어요. 은희욱 작가 인맥이 엔터 관계자들 쪽으로 넓잖아요.”
“은희욱 작가요?”
마침 들어온 김률 감독이 물었다. 태 대표가 잘 됐다는 듯 손짓했다.
“김 감독, 얼른 앉아 봐. 배우한테 연락이 왔어!”
“갑자기 무슨······.”
“로만 소속 박건이래. 서울의 개 알지? 거기 최승으로 나왔던, 요즘 떠오르는 라이징스타 아냐.”
방금 전까지 생판 몰랐던 이름이 ‘로만’ 한 단어에 라이징스타로 탈바꿈했다.
조연출이 타이밍 좋게 아이패드를 들이밀자 방금까지 보던 유튜브 편집본이 재생되었다.
아이패드 화면 안에서 헐거운 양복을 입은 사내가 뛰고, 날고, 인간을 부서뜨린다.
ㅡ너, 혹시 대승이냐?
ㅡ그만해. 됐으니까.
극중 죽음을 맞는 마지막 씬이 나오자, 태 대표와 조연출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반응을 살폈다.
영상이 나오는 내내 턱을 괴고 있던 김률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어때?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 한 PD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필모 없는 쌩 신인이라는데, 절제된 감정묘사가 수준급이에요. 피지컬이랑 마스크도 최상위고요.”
마침내 김률 감독의 입이 열렸다.
“좋네요. 서요한 역에 잘 어울립니다.”
“그치, 좋다니까!”
“좋긴 한데······.”
“또 왜?”
김률 감독은 송곳 같은 시선을 태 대표에게로 향했다.
“혹시 이 사람, C&J가 바꾼 카듭니까? 강균모로는 회유가 안 되니까 절 설득하려고요.”
좋은 배우를 데려와도 의심부터 한다. 지난 1년, 작품을 찍게 하려고 수도 없이 잔머리를 굴렸던 부작용이다.
“뭔 소리야! 어차피 크랭크인 들어가면 다 나오는데, 나 그렇게 허술한 사람 아냐. 진짜로 방금 전화가 왔다니까?”
태 대표가 펄쩍 뛰는데도 김률 감독은 딱 잘라 말했다.
“저까지 속이시면 작업 같이 못 합니다.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인 거 아시죠?”
“그래, 일단 얼굴은 확인하자고. 초장인지 춘장인지 색깔은 봐얄 거 아냐.”
“오디션은 언제로 잡아 달랍니까?”
“두 시간 뒤에. 지금 온다는데?”
기어이 김률 감독의 입이 벌어졌다.
*
“오디션이요?”
메레디스 엔터테인먼트 사옥.
형을 데리러 온 박선은 눈을 끔뻑거렸다.
방송국 사람들이랑 밥을 먹는다더니 서희도의 회사로 온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번엔 갑자기 오디션을 보러 간단다.
‘서울의 개’ 촬영장에서 친해진 서희도의 매니저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불도저는 처음 봤어요. 옛날에 희도한테 들어온 시나리오를 찾아달래서 찾아줬더니, 그쪽 제작사로 전화해서 미팅까지 잡았대요.”
형은 작품 찍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관심 있을 만한 시나리오를 모으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어떤 내용이었는지 혹시 아세요?”
“무슨 오컬트였을 텐데··· 아, 저기 오시니까 직접 물어보십쇼.”
저만치서 연습생들에게 사인을 해 주던 박건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트레이닝복 차림 연습생 무리에 메레디스 직원들까지 몰려 있었다.
“일찍 왔네.”
“어, 방금. 근데 갑자기 오디션을······.”
박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간 끌 필요 없잖아. 붙으면 좋고, 떨어지면 포기하지 뭐.”
오늘 점심은 국밥이래, 정도의 말투에 박선은 혀를 내둘렀다. 이만하면 강심장을 넘어 신경다발이 철근인 수준이다.
“그쪽 감독님이 바로 봐도 괜찮대?”
“전화했더니 오라던데. 제작사에서 연출진들끼리 미팅 중이었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서희도가 설명을 보탰다.
“나도 옆에서 들었거든요? 건이 형이 관심이 있다니까 일단은 가 보는데, 아직 배우도 못 구했다는 걸 봐선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요. 매니저님이 한번 저쪽 분위기 봐 줘요.”
안 그래도 그래야 할 참이다.
박선은 형의 손에 들린 대본과 뒤에서 쭈뼛거리는 연습생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저기, 뒤쪽 분들만 마저 사인해 드리고 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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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뒤, ‘큰범 스튜디오’ 사무실로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키가 작은 쪽은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딱 ‘나 매니저요’라고 써붙인 복장이었고, 키가 큰 쪽은 새까만 정장 상하의를 빼입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나 어울릴 차림이었지만,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사무실 안이 고요해졌다.
배우나 아이돌 팬미팅에서, 주인공이 입장할 때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지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본 최애에게 감격해서, 또는 연예인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놀라서.
지금은 후자에 가까웠다.
‘화면이 실물을 다 못 담는군.’
태종범 대표는 박건을 훑으며 생각했다. 긴 팔다리에 작은 얼굴, 거기 대비돼 어깨는 더욱 넓어 보이지만 피지컬은 빙산의 일각이다.
외꺼풀진 눈매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각진 턱은 남성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인 인상을 준다.
분위기는 또 어떤가. 남자를 감싼 묘한 아우라에,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갈라지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요즘 핫하다는 게 언플은 아닌 모양이야. 노 대표가 노다지를 잡았군.’
무표정한 얼굴만으로도 이 정돈데, 마음먹고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춘 태 대표가 활기차게 손님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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