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7화 (27/122)

표류하는 시나리오 (5)

* * *

큼지막하게 깎은 사과로 박열호의 입을 막아 버린 한영주는 환히 웃었다.

“괜찮아. 네 아빠가 주책이지 뭐니, 엄마는 너희만 별 탈 없으면 돼. 괜히 마음 쓰지 말고······.”

“그럼 우리 사진 찍어요.”

“응?”

한영주가 눈을 끔뻑였다. 건은 포크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같이 찍은 게 선이 대학 졸업 사진밖에 없잖아요. 오늘은 폰으로 찍고, 나중에 다 같이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찍으면 되죠.”

눈치 빠른 박선도 합세해 분위기를 잡았다.

“맞아요, 엄마. 얼른 아빠도 일루 오세요. 이거 찍어서 형 공식계정에도 올리게.”

“아니, 무슨 사진을 찍는다고······.”

형제의 재촉에, 한영주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소파로 왔다.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키가 제일 큰 박건이 셀카 모드로 휴대폰을 들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아, 잠깐만! 나 눈 감았어!”

“찍는 김에 몇 장 더 찍어 줘라. 저기, 네 엄마 눈 감았잖아.”

“다시 찍습니다. 하나, 둘.”

해프닝 끝에 수십 장이 갤러리에 담겼다. 폰을 받은 박선이 새 가족사진을 발 빠르게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프로필 사진을 가장 먼저 바꾼 사람은 아버지 박열호였다.

“와, 벌써 바꾸셨어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몸은 성치 않아도 감각은 요즘 애들 못잖다.”

“···마음 아프게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박선이 울상 짓는 가운데, 한영주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왜요? 잘 안 나왔어요?”

“아냐. 마음에 쏙 들어. 엄마는 이거 평생 프사로 해 놓을 거야.”

“또 바꿔야죠! 혹시 알아요? 형이 이번 영화도 대박 나서, 연말에 영화제랑 방송국 시상식 불려 가서 상 들고 사진 엄청 찍을지.”

“어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자고로 큰일에는 초심이 중요해. 꾸준하고 신실하게, 한 걸음씩 쌓아올려야······.”

“시끄럽고, 당신은 이따 나 좀 봐요.”

웃고 떠드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건은 잠시 감회에 젖었다.

이십 년간 되새기다 잊어버렸던, 잊고 싶지 않았던 이쪽 세상의 추억이 눈앞에 있다.

‘이런 모습이었지.’

회귀가 두 자릿수를 넘어가면서, 현대인으로서의 이성은 점차 혼탁해졌다.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어떤 루트를 타도 동료들은 죽어나가며, 죄책감의 찌꺼기는 혈관에 쌓여 신경을 갉아먹는다.

기약 없는 고행의 연속. 끝없이 베고 죽이고 부수는 삶 속에서, 그는 점차 용사가 아닌 살육기계가 되어 갔다.

-가족들한테 가야죠, 돌아가겠다면서요!

-이번 용사행도 실패했어요. 난 영원히 여기 갇히고 말 겁니다.

-주접떨지 말고 정신 차려요. 용사님··· 야, 이 인간아!

가족의 얼굴마저 잊어 갈 즈음, 성녀의 외침은 풍화되던 정신을 일부나마 되돌려 주었다.

항상 올곧은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어머니와, 늘 제 형 바라기를 자처하며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해 주던 동생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 얘기는 거의 안 했는데. 그 회차에서 가족이 있었다고 말했던가?’

잠시 고민하던 건은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해소할 수 없는 의문이다.

차원을 넘어 지구로 돌아온 지금, 모두와 건강히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아버지, 어머니, 선아.”

소파에서 사진을 찍던 가족들이 돌아보았다.

다시는 잊지 않을 얼굴들을 보며, 건은 오랫동안 못 했던 말을 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

그날 밤, 박건의 인스타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평범한 가정집에서 찍은, 네 가족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진이었다.

아래에는 간결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좋아요 6,152 댓글 225

사랑하는 가족.

*

“여어, 김 실장.”

“박 실장? 여긴 어쩐 일이야?”

“배우 미팅. 온 김에 내려왔지, 오랜만에 사람들 얼굴들도 볼 겸.”

DG엔터 사옥 1층.

관계자들에게 개방된 카페, 헤드헌터들이 구석진 테이블로 모여 앉았다.

“어우, 뭔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

“말도 마. 오늘까지 먹으면 꼬박 열흘째야. 아주 그냥, 내가 헤드헌터인지 호빠 선수인지 모르겠다니까.”

우는 소리를 한 헤드헌터가 건너편의 동료에게 물었다.

“최 팀장은 어때. 요즘 뭐 좀 건졌어?”

“건지기는! 발에 땀나게 돌아도 괜찮은 애들이 없어. 어디로 다 빨려나가는지, 원.”

“저출산 시대잖아, 흐흐.”

“어이고, 저출산 시대에도 어린이집은 잘만 되더라.”

넉살과 우는 소리가 한차례 오갔다. 말만 저렇지, 비장의 카드 한둘쯤은 꼭꼭 숨겨 뒀다는 사실은 서로가 안다.

눈부신 재능의 원석은 묻혀 있다. 그 보석들을 빼앗기기 전에 발굴해, 최대한 싼값으로 공룡들에게 진상하는 것이 저들의 일이다.

“유튜버고 크리에이터고, 요즘은 인성부터 글러먹은 것들이 태반이야. 뜰채 들고 훑어도 씨가 말랐다니까?”

“그냥 나처럼 배우랑 아이돌만 파. 크리에이터랍시고 연예인 병 걸린 일반인들 입맛 맞추는 게 더 기분 더러워.”

“누군 하고 싶어서 하나, 까라니까 찾는 거지.”

업계 현황을 거친 이야기가 신인들로 넘어갔다.

얼마 전 DG에서 데뷔한 레드스완, 아역배우 출신으로 C&J에 합류한 여배우 강아진, 조이너스의 야심작 4Kings, ‘서울의 개’ 히트를 이끈 박건까지.

“박건? 그 친구는 아직도 프리인가?”

“들어보니 사실상 로만이라던데. 노 대표가 찜해 놓고 침 발라 키우는 중이잖아.”

헤드헌터 하나가 아는 척을 했다.

“아냐. 최근에 실장 하나랑 얘기했는데, 아직 아무도 배우랑 미팅을 못 했대. 매니저만 나와서 조건 좀 듣고 끝이었다던데. 진짜 로만이었으면 그런 기획사들이랑 눈이라도 맞췄겠어?”

헤드헌터들의 표정이 변했다. 현재 시장에서, 박건은 군침 도는 블루칩이다.

깜짝 신인이 데뷔해, 케이블에서 무려 20% 시청률을 달성했다.

주연들이 따로 있었다고는 해도 화제성 중 한 축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팬덤도 생겼고, 유니크한 외모에, 무엇보다 일반인 출신이라는 점이 구미를 당기는 요소다.

동생이 로만 매니저 출신이니 그쪽으로 가지 싶었는데, 아직까지 소속사가 없다고 하면······.

머릿속 생각과 다르게, 헤드헌터들은 짐짓 한 마디씩 보탰다.

“벌써부터 스타병 세게 들렸네. 히트를 쳤으면 얼마나 쳤다고.”

“초대형 소속사랑 하고 싶은 거지. 다음 작품 찍기 전에, 최대한 몸값 올려서 기대작에 꽂아 달라 조르려고.”

“욕심 날 만도 해. 일반인 출신이잖아.”

그때, 선명한 구둣발 소리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재밌는 얘기들 하고 계시네, 남의 회사 안방에서.”

금장테 안경을 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상의 곤색 수트 사내였다.

코를 찌르는 스킨 향이 확 끼친다. 훌쩍하니 큰 키도, 팽팽하게 당겨진 수트 속 베스트도, 기획사 직원이라기보다는 프로 사업가의 외양이다.

싸늘한 시선이 압축유리 너머로 사람들의 면면을 쭉 훑었다.

“일들 안 해요? 요즘 어느 회사고 스카우팅 리포트들이 영 시원찮던데. 쓸 만한 놈이 없는 건지, 찾는 놈들이 쓸모없는 건지.”

도를 넘은 폭언이지만, 저 말을 하는 작자는 그럴 만한 위치에 있다.

잘 봐주십쇼, 하며 상품을 진상해야 하는 보부상들은 현감의 폭정에 벌벌 떨 뿐이다.

“···어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럼 또 보자구요. 먼저 일어납니다, 팀장님.”

처음 말을 꺼냈던 헤드헌터가 머쓱하게 짐을 챙겨 일어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부산스레 흩어졌다.

DG 내 최연소 엔터테인먼트 기획본부장.

매니지먼트 신흥 강자.

손대는 엔터테이너마다 띄우기로 유명한 젊은 마이더스, 차인혁은 고개를 반쯤 돌렸다.

“보고.”

두 발짝 뒤에 서 있던 여비서가 무표정하게 브리핑했다.

“확인된 바, 로만 소속은 아닙니다. 메레디스 사옥에 갈 만큼 서희도와 친분이 있고, 오귀준 실장 사건 이후 로만에서 목격된 적은 없습니다.”

“만나도 밖에서 만났겠지. 조이너스랑 C&J는?”

“없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려는 것 같습니다.”

“먼저 라이트하게 컨택해 봐. 주변 뒤져서 사고 칠 종자인지도 체크하고.”

여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아, 그리고.”

서늘하게 잘생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노중만 그 너구리가 진짜 침 발랐는지도 알아봐. 몸값 올리려고 둘이서 짜고 바람 잡는 거면 이 기회에 쑤셔 버리게.”

*

도산대로 한복판, 예약조차 어렵다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정월’.

두어 달 전부터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5층의 VIP룸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

서빙을 마친 직원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친다.

한쪽은 모르는 얼굴에, 다른 한쪽은 잘 아는··· 아니, 몰라도 알고 싶은 얼굴이다.

기어이 박건을 다시 한번 흘끔거린 직원이 느릿느릿 나간 뒤, 노중만 대표가 서두를 뗐다.

“놀랐어요. 박건 배우가 먼저 보자고 해서.”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여유가 생겼을 때 뵙는 게 예의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 편이 나아.”

서로 바쁜 일정이니까. 중얼거린 노 대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동생이 안 와도 괜찮겠어요? 두 사람한테는 미안한 일도 있고, 같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일은 혼자가 편해서요. 오늘 대표님과 미팅이 있다고만 말해 뒀습니다.”

배우가 소속사 대표와의 미팅 자리에 매니저를 배제한다.

매니저의 일이 아닌, 동생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소리다.

노중만 대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들죠. 내가 아는 곳으로 고르긴 했는데. 한식은 좋아하나?”

“예. 날개 달린 것들 빼곤 다 먹습니다.”

“······?”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 대표도 식사를 시작했다.

‘정월’의 주력 코스는 한우 등심과 석쇠불고기. 거기에 오늘은 농어와 도미도 추가됐다.

대식가라는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는지, 메인과 사이드 메뉴들이 종류별로 쉴 새 없이 나온다.

석쇠불고기를 한 점 집은 노중만이 말했다.

“잘 먹는군요.”

“그런 편입니다.”

“건강의 비결인가?”

박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먹으면 위염이나 위궤양이 올 겁니다.”

“그래 보여요, 회사 소속 크리에이터한테 물어봤더니 대식도 건강에 안 좋다더군.”

마음은 정했냐, 조건을 듣겠냐, 본론이 무엇인지는 둘 모두 알 텐데 화제는 빙빙 돈다.

선수를 친 쪽은 박건이었다.

“그래서, 번호는 왜 주신 겁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