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9화 (29/122)

드라마판과 영화판 (2)

* * *

박건이 나간 뒤, 노중만 대표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물을 타 옅게 만든 이화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재미있는 놈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랬다고 전부 하는 패기나, 조건을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나.

‘내 쪽에서 어려우면 계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

애송이의 블러핑쯤은 눈 감고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기획사 대표란 작자들이다.

어설픈 허세가 아니었다. 저 신인은, 심지어 자기가 택한 작품의 흥망에도 미련이 없었다.

‘끌어올릴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만사에 초탈한 놈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은 채, 노중만은 조금 전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말씀드린 조건만 승낙해 주신다면 로만과 계약하겠습니다.”

“물론. 또 필요한 건?”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됐군, 잘 부탁해요.”

둘은 악수를 나눴다. 맞잡았던 손을 놓은 노중만이 물었다.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연기는 계속할 건가요? 몇 년이 지나서도?”

박건은 대답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대표님, 전생을 믿으십니까?”

“전생?”

“예. 인간은 모두가 윤회하고, 이전 삶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는 걸요.”

옛 헐리우드 배우들, 메소드 연기로 유명한 위인들 중에는 미치광이가 많았다.

저만한 연기력의 괴짜가 전생을 믿는대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연기는 당분간 계속할 겁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찾는 게 있어서요.”

“찾고 나서는······.”

“그때가 돼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분명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또래에 비해 원숙할 수는 있지만, 저 눈은 끽해야 서른 안팎 청년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오십 대 동년배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박건은 흰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앞엔 빈 접시가, 노중만의 앞에는 빈 술병들이 흩어져 있었다.

“저는 어떤 갈증이 있습니다. 대표님도 그런 갈증, 또는 욕망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천박하고 추악하며 화려한 세계에.”

노중만은 뒷목을 따라 솟는 소름을 느꼈다.

여태 뒤집어쓰고 있던,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퇴역 군인의 껍데기가 아니다.

‘저게 진짜였나?’

형형한 눈빛이 닿은 자리마다 털끝이 곤두선다. 젊었을 적 다뤘던 공장의 임펠러, 산업용 회전날 앞에 목을 갖다 댄 기분이다.

박건의 모습을 한 어떤 존재가 말을 이었다.

“다만 그 방향이 같다면··· 함께 못 갈 이유도 없겠죠. 동료와 조력자는 늘 필요하니까. 우리가 좋은 파티이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공기조차 멈춘 듯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고개를 몇 번 흔든 노중만이 말했다.

“기사는 언제 내든 괜찮겠지?”

“예. 되도록 떠들썩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때와는 많이 변했군.”

“나름대로 적응이 됐거든요.”

솔직한 대답이다. 초심을 지키는 놈보다는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놈이 오래 살아남는다.

노중만은 남은 술을 쭉 들이키곤 빙긋 웃었다.

“적응이라, 이쪽 세계에?”

박건도 마주 웃었다.

“아마도. 이 세계에.”

지잉─

짧은 진동이 회상을 깨웠다.

노중만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본부장이 보낸 문자였다.

[이상철 본부장]

백하니 재계약.

기간 1년, 비율 및 조건은 전과 상동.

예상한 성과다. 대어 두 마리는 그물로 들어왔으니, 이제 남은 고기들만 손보면 된다.

“아니, 대어가 아니라 상어인가?”

노중만은 일정표를 켜 다른 연예인들의 계약기간을 확인했다.

진지유는 남았다. 백하니도 남을 것이다. 원래도 안 되던 핸들링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단점은 있으나, 그녀 정도면 선녀인 편이다.

촬영장에서 타 소속사 배우와 스탭을 모욕하는 여배우들, 성접대와 마약에 범벅돼 소속사 몰래 범죄까지 손대는 유명 남배우들보다야 훨씬 낫다.

‘애초에 그런 원석들만 모으려 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배우는 DG에, 아이돌은 조이너스에 밀리며, 자금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C&J를 이길 수 없다.

후발 주자가 선발대를 따라잡는 법은 딱 하나, 넘어지지 않고 죽어라 뛰는 것이다. 앞의 놈이 발을 헛디뎌 자빠지길 빌면서.

그렇기에 방금 나간 신인이 중요하다.

국내의 파이 싸움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작품과 배우들은 OTT 시장을 넘어 리메이크며 재개봉작으로 지평을 넓히고, 칸과 그래미는 이미 공고하던 인종의 벽에 구멍이 났다.

그 전쟁터에서 싸우려면 더더욱 유능한 용병들이 필요할 것이다.

박건이 기대치의 반만이라도 해 준다면······.

밟고 올라야 할 몇몇 적들이 떠올랐다. 빤빤한 얼굴들이 구겨지는 것을 상상하며, 노중만 대표는 희미하게 웃었다.

“안목들이 부족해. 빛날 별에는 미리 이름을 붙여 둬야지.”

연예계에는, 운석이 떨어질 것이다.

*

다음날, 박선과 ‘큰범 엔터’로 간 건은 두 가지 소식을 전했다.

로만에 들어갔다.

노중만 대표가 투자사를 소개해 주었다.

시나리오 보완 도중 끌려나온 김률 감독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결국 로만으로 정하신 겁니까?”

“예, 그리고 저희 작품에 들어올 투자사도 소개받았습니다. 투자사랑은 별개로, 크랭크인 전에 대표님 본인도 얼마쯤 넣고 싶으시답니다.”

투자사 소개에 이어 투자까지, 가난한 제작사 입장에서는 동아줄··· 아니, 생명줄이다.

태종범 대표는 절이라도 올릴 기세로 남의 소속사 대표를 찬양했다.

“이런 경사가 또 있나, 로만이라니! 거기다 투자라니! 김 감독, 일이 잘되려나 봐!”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죠! 역시 그때 전화 받았을 때부터 딱 느낌이 왔다는 거 아닙니까. 딱 그날이 ‘서울의 개’ 정주행한 날이었거든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공치사를 늘어놓던 태 대표의 표정이 갑자기 처량해졌다.

“그, 배우님. 혹시 원래 로만이셨는데 절 놀리셨던 거 아닙니까? 이 태종범이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를······.”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소속사가 없었습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겹경사가 터졌는데,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흐흐흐.”

김률 감독이 들뜬 태 대표에게 일침을 놓았다.

“좋아할 때 아닙니다. 이제 소개를 받았으니 미팅부터 준비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매니저님?”

엉겁결에 불똥이 튄 박선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저도 대표님한테 언질만 받았거든요. 가 보면 알 거라시던데, 우선 같이 출발하실까요?”

“예. 그럼 자료만 좀 가져오겠습니다. 어제 만들어 둔 게 있어서.”

과연 빠꾸만 맞은 감독다운 정성이다.

김률 감독이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오겠다며 차로 간 뒤, 태 대표가 투덜거렸다.

“김 감독은 뭘 몰라. 이런 건 기세 싸움인데, 혹시 아나? 거기 투자사 대표가 우리 박건 배우님 열성팬이라 일사천리일지.”

*

“아이고,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이번 ‘흑의사제’ 제작을 맡은 큰범 스튜디오의······.”

“알다마다요. 이쪽은 제작진분들, 이쪽은 박건 배우님이시죠?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들 앉으세요.”

후덕한 인상의 사장은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박건 일행을 환대했다.

성대한 환영에, 방문객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김 감독, 저분이 진짜로 박 배우 팬인가?’

‘저야 모르죠. 그래 보이긴 하는데.’

노중만 대표가 소개해 준 회사는 테헤란로에 있는 거대한 투자회사였다.

‘밀리언 벤처파트너스’, 거대한 위용에 감탄하며 올라가자마자 VIP룸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더니 커피가 나왔고, 오 분도 안 돼 사장이란 사람이 버선발로 달려나온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여기가 노중만 대표 자회사라도 되나?’

프로답게 당황한 빛을 숨긴 태종범 대표가 본격적으로 소개를 돌렸다.

“큰범 대표 태종범입니다. 본격적인 계약에 앞서, 영화 시나리오와 대략적인 홍보전략을 준비해 왔습니다.”

“영화감독 김률입니다. 문서와 PPT 둘 다 있으니, 혹시 빔을 사용할 수 있으면······.”

“아, 괜찮아요, 괜찮아. 그건 넣어 두세요.”

김률 감독이 가방을 열었지만 포트폴리오는 꺼내 보지도 못하고 저지당했다.

제작진들을 막아 버린 왕종길 사장은 호감 그득한 눈빛으로 박건을 응시했다.

“나는 왕종길이라고 합니다. 노 대표님께는 어제 연락을 받았거든요. 어떤 분들이 오실까 궁금했는데, 역시 아우라가 남다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요, 배우님 덕분에 영화판에도 발을 들이게 됐는데. 오히려 이쪽이 감사드려야죠.”

환대도 환대 나름이지, 이건 숫제 투자하는 이와 투자받는 이가 바뀐 수준이다.

물론 큰 판이라면 돈을 싸들고도 한몫 끼려고 안달복달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아직 시나리오도 안 본, 영세한 제작사의 작품에 이렇게까지?

왕종길 사장은 의아한 표정들을 둘러보더니, 씩 웃으며 두 손을 펴 보였다.

“자, 그럼 필요한 걸 말해 보시죠.”

투자계약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진행이랄 것도 없었다. 뭘 말하든 저쪽에서 무조건 승낙을 하니, 태종범과 김률 등 제작진은 미팅이 아니라 팬미팅에 온 기분이었다.

조건, 오케이. 필요한 금액, 오케이.

심지어 눈 딱 감고 더 부른 10억도 흔쾌히 허가가 떨어졌다.

배우가 뭘 더 어필할 필요도 없어서, 박건과 박선은 소파에 앉아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포트폴리오를 안 보셔도 괜찮을지··· 저희가 이래봬도 준비를 꽤 해 왔거든요.”

오디션 내지 제작환경에 일절 참여를 안 한다고는 했지만, 어디 믿을 만한 얘긴가? 앞에서 시원하게 오케이, 질러 놓고선 뒤에 가서 꼬장을 부리면 악몽의 시작이다.

눈치를 보던 태종범 대표가 조심스레 말하자 왕 사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나중에 말이라도 바꿀까 봐서요?”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 말아요. 돈놀이는 해도 돈 가지고 장난은 안 치니까.”

녹차로 목을 축인 왕 사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원래 벤처 쪽, 그중에도 신기술에 주로 투자하는 신기사(신기술사업금융회사)입니다. 연예계 쪽은 잘 모르고 관심도 없죠.”

밀리언 벤처파트너스. 척 봐도 연예 엔터테인먼트와는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름이다.

굳은 표정의 김률 감독이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투자를 결정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익은커녕 원금조차 회수를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김 감독! 좋은 날에 그게 무슨 말이야?”

태종범 대표가 기겁해 외쳤지만 왕종길은 태평하게 대꾸했다.

“노 대표님 소개라면서요?”

“예?”

“그거 하나면 됐죠. 회사 기둥뿌리가 휘청댈 정도도 아니고, 영화제작비 투자 정도야 문제없습니다. 여기 건물이 좀··· 다 쓰러져 가긴 하지만요.”

박건을 제외한 전부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남의 노른자위. 테헤란로 한복판에 있는 25층 건물 절반을 쓰는 회사다. 당연히 자금력 또한 평범한 창투사 수준일 리가 없다.

태종범 대표가 고개를 넙죽 숙였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냥 뭐, 돈 대는 물주인데요. 감독님은 잘 찍으시고, 대표님은 잘 지원하시고, 배우분들은 열심히 연기해 주시면 되죠.”

사람들을 쭉 둘러본 왕종길 사장의 시선이 박건에게 가서 멈췄다.

“노 대표님을 못 믿은 건 아니지만, 내가 봐도 왜 이리 보냈는지 알겠어요. 좋은 성적 미리 기대하지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푹들 쉬다가 일어나요. 내 비서가 나머지 서류는 처리해 줄 겁니다.”

회의가 있어서 이만, 하며 왕 사장이 일어나자 말쑥한 정장맨이 등장해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읽어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김률 감독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정말 빠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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