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30화 (30/122)

드라마판과 영화판 (3)

* * *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태종범 대표와 김률 감독은 눈만 끔뻑거렸다.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환대받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탓이다.

거기에 목표치인 30억에서 10억 원이나 추가로 예산을 증액해 버렸다.

노중만 대표가 투자한다고 했던 3억, 크랭크인이 들어가며 붙을 개인투자자며 투자사까지 생각하면 주머니가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이가 아닌가 보죠.”

태 대표가 코를 벌름거리며 엘리베이터 천장을 올려다봤다.

“노 대표가 사라던 땅이라도 사서 대박이 났나? 노중만 그 인간, 감이 수상하게 좋기로 예전부터 소문나긴 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사장님 말씀대로 우린 영화만 잘 찍으면 됩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그 엔젤 투자자님을 모셔 온 건······.”

꿀이 뚝뚝 떨어지는 태종범의 시선이 버튼 앞에 서 있던 건에게 꽂혔다.

“박건 씨······!”

“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이리 좀 와 봐요! 내가 진짜 너무 고마워서 그래. 목마라도 태워 줄까요? 아니면 김 감독이랑 같이 헹가래?”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들러붙는 태 대표를 피해 걸어나가면서, 건은 생각했다.

‘복지가 나쁘지 않군.’

노중만은 세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는 추후 활동의 전폭적 지지.

둘째는 작품 및 광고 선택의 자유.

셋째는 박선의 전담 매니저 보장과 스텝 비용 전액 부담.

-스텝 비용이란 건 뭡니까? 지금까지는 따로 쓰질 않아서요.

-헤어, 메이크업, 피부관리부터 모발이식까지, 여긴 다 돈이에요. 앞으로 세팅할 일이 많아질 텐데, 그럴 때마다 지갑 열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기 십상이야.

-그럼 동생은······.

-당연히 전담이지. 연차가 쌓이면 회사랑 계약해서 다른 연예인 케어해도 되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본인이 원한다면. 대신 전담 매니저들은 맡던 배우 이미지가 박혀 버려서, 연예인들 쪽에서 거절할지도 몰라요.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애초에 목적은 함께 활동하는 데 차질을 없애는 것이지, 본인 입김으로 동생을 소속사에 꽂는 게 아니다.

영화 투자비의 문제도 시원시원하게 답이 나왔다.

-밀리언 벤처파트너스. 내가 연락해 둘 테니, 여기로 가 봐요. 왕 사장 얼굴 못 본 지가 좀 되긴 했는데··· 제작비 정도는 융통해 줄 거야.

그래서 찾아간 회사는 제작비를 융통이 아니라 쏟아 붓는 수준으로 넣어 주었다.

총액 40억. 이래저래 당긴 돈, 그 밖의 돈들까지 모으면 어림잡아 45억··· 운이 좋으면 50억까지 확보될지도 모른다.

영화판 제작비는 잘 모르지만, 제작진들의 반응을 봐선 총알은 다 채워진 모양이었다.

‘투자금 출처도 멀쩡해 보이고.’

왕 사장이란 인간을 쭉 지켜본 결과, 딱히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노중만에게, 혹은 노중만의 어떤 조언에 수혜를 입은 것 같다는 예상만 할 뿐이다.

불쑥 계약했다는 말을 들은 동생의 반응도 의외로 침착했다.

-형, 난 진짜 괜찮아. 이미 오 팀장님은 거기 없고, 로만 정도면 정말 상식적인 축이거든. 차라리 다른 대형 엔터로 안 간 게 다행일 수도 있어.

계약서에 ‘사회적으로 불미스러운 위해를 저질러 이미지를 실추시켰을 때’ 광고사 측 위약금 전액 지불과 계약 해지 조항이 들어 있긴 했다.

‘그럴 일은 없지. 이래봬도 전직 용산데.’

저쪽이 투자를 망설이지 않듯, 이쪽은 사생활 문제로 겁먹지 않는다. 건은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영화 크랭크인 준비다.

빌딩 밖으로 나온 태종범 대표가 손을 맞비볐다.

“김 감독, 지금부턴 우리 흐름이야. 바로 오디션 공고 뿌리고, 배우들한테 시나리오 넣자고. 40억이면 웬만한 연기파들은 다 땡길 수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걱정이던 투자금을 배가 터지게 당겨 왔지만, 김률 감독의 표정은 영 개운치 않았다.

“왜 또, 왜! 뭐가 문제야?”

“이제부터가 문제라 그렇죠. 나머지 주조연들을 어떻게 섭외할지 고민입니다.”

“오디션 때문에 그래? 돈도 있겠다, 각본도 좋겠다, 실력 있는 감독에 배우까지 왔겠다, 돈 냄새만 나는데 뭘 걱정해?”

김률 감독은 박건을 보고 태 대표를 본 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말은 왠지 자조적인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나머지가 안 올까 봐.”

*

박건의 로만행이 공식화됐다.

[‘초신성’ 박건, 로만행··· 노중만의 품으로]

[새로운 배우 합류는 221일만, 마침내 칼 뽑은 로만 엔터테인먼트]

[박건 합류한 로만, 한층 두터워진 라인업]

[첫 소속사가 메이저 엔터··· 대형신인의 다음 행보는?]

[박건X구신승X최필립 나란히 한솥밥. ‘얼굴 천재’들의 회동 열리나]

기어이 대형기획사 들어가네 ㄷㄷ

ㄴ좀만 더 간 봤으면 DG나 조이너스도 갔을 듯? 백퍼 오퍼는 왔을 텐데

ㄴ딪이랑 조스가 물로 보이냐 ㅋㅋㅋㅋ 거기 아티스트들 최소 5년은 연습한 베테랑들임

ㄴ길거리 스카웃으로 연기력 증명한 거랑 싹 보이는 애들 습생으로 뽑아서 트레이닝 시키는 거랑 같냐?

ㄴ팩트) 아직 증명이 더 필요하긴 함

근데 C&J로는 왜 안 갔지? 요즘 연예인이고 크리에이터고 싹 끌어모으던데

ㄴ대기업 자본이라 좀 보수적일 수 있지 ㅇㅇ 특히 배우 쪽은 신인한테 투자하는 것보다 톱급 데려오는 게 안전하다

ㄴ하긴 이제 드라마 하나 성공했으니...

빠까 거르고 로만 정도면 ㄱㅊ 배우진도 잘 나가고 푸쉬도 확실하니까

ㄴ그래서 다음 작품은 뭐 찍으려나?

드라마판의 블루칩이 로만으로 갔다.

패를 던지지 않고 눈치만 보던 대형 기획사들도, 호시탐탐 저점매수를 시도하던 중소형 기획사들도, 아쉬운 군침을 삼켰다.

저기로 가면 건드릴 수 없다.

로만의 노중만 대표는 소속 연예인들을 향한 모든 수작질에 무관용으로 대응한다.

출범 초기, 작은 기획사였던 로만을 만만히 보고 물어뜯으려던 하이에나들은 맹렬한 역습에 자기 살점이 뜯겨나갔다.

온갖 루머와 견제에 시달리던 후발주자가 2대 엔터 바로 밑까지 올라온 것은 결코 운이 아닌 것이다.

고로 아티스트를 빼내려면 내부 합의 하에 계약을 종료하거나, 사고를 쳐서 로만 측에서 내쫓게 만드는 방법만이 유이하다.

“결국 갔군.”

눈두덩에 붉은 불을 켠 벤츠가 강변북로를 달린다. 뒷좌석에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차인혁이 중얼거렸다.

“한 발 늦었어. 못 먹을 감엔 고춧가루라도 뿌렸어야 했는데.”

운전 중이던 여비서가 즉답했다.

“죄송합니다. 노 대표의 동선을 놓친 시간대가 있었는데, 그때 도산대로에서 미팅을······.”

“됐어. 너한테 그것까지 기대했으면 월급을 더 줬거나 잘랐겠지.”

아무렇지 않게 부하를 모욕한 차인혁은 화면에 뜬 기사들을 쭉 내렸다.

[히트제조기 박건], [새로운 마이더스 탄생], [연타석 홈런 정조준]

칭찬 일색인 제목들이 경멸스러운 손짓 아래 쓸려내려간다.

“그냥 운 좋게 얻어 걸린 거야. 기껏해야 1년에 10억짜리, 두어 작품 하다가 거품 싹 빠져서 홈쇼핑 뺑뺑이로 꽂힐 친구가.”

DG의 젊은 본부장이 사람을 보자마자 견적부터 낸다는 것은 딱히 대외비도 아니다.

얘는 맥시멈 5억, 쟤는 잘 쳐 봐야 3억, 아까 그 친구는 롱런일 때 10억.

현재가와 최고가를 무자비하게 계산해, 최적의 이윤만 뽑아내는 노예상인 것이다.

“근데 거기다 마이더스니, 신의 손이니, 이딴 소리를 해 댄단 말이지. 작감한테 빨대 한 번 잘 꽂아서 떴을 뿐인데.”

여비서는 말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자리가, 젊은 마이더스라는 타이틀이 위협받아 불쾌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안다. DG 소속이 아닌 연예인들이 연타석 히트를 쳤을 때, 저 비슷한 키워드로 스팸성 기사를 내라고 사설 홍보팀에 지시하던 인간이 바로 그녀의 상사다.

말끔하게 면도된 입매가 열렸다.

“어차피 대작은 못 들어가. 노중만도 리스크 배팅을 싫어하니, 케이블보다는 지상파, 최대한 안전한 월화나 수목극으로 꽂으려고 할 거야.”

“MBS에서 김지안 작가 수목극, YTS에서는 공 남매 주말극이 있습니다. 큰 이미지변신 없으면서도 안정적인 주/조연 배역들입니다.”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급으로, 서넛씩 추려서 오디션에 밀어 넣어. 모험은 안 하려 들 테니 기반만 못 다지게 하면 돼.”

집중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단기간에 연기력이 급성장하지는 않는다.

액션 조연으로 시작했으니, 캐릭터 해석이 쉬우면서도 매력어필에 유리한 역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알겠습니다. 영화 쪽도 알아볼까요?”

“영화?”

차인혁은 멍청한 질문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포마드와 워터왁스로 세팅된,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쓸어 넘긴 머리가 비웃듯이 까딱였다.

“거긴 못 가. 근본 없는 놈이 근본도 없이 시작해서.”

*

오디션 당일, 큰범 스튜디오는 아침부터 부산했다.

박건 때 사무실 한쪽에 촬영장비만 대충 설치하고 찍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급작스레 잡힌 오디션이기에 가능했던 일.

판 짜고 정식으로 돗자리 편 배우 구인에서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한 PD, 언제까지 써도 된댔지?”

“23시까지요. 영화 오디션이라고 하니까 거기 사장님이 엄청 좋아하시던데요? 날밤 새도 되니 마음껏 쓰래요.”

태 대표의 말에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조연출이 대답했다.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본진과 가까운 곳에 있는 신설 스튜디오까지 섭외했다. 잠시 후 오디션이 시작되면 지원한 배우들로 꽉 찰 것이다.

“좋아··· 아주 좋아.”

총알이 찼으니, 쓸 만한 배우들에게도 아낌없이 콜을 넣었다.

출연자, 감독, 연출진이 명시된 시나리오를 보낸 것이 일주일 전.

주연과 조연을 포함해서 꽤 많은 배우들이 응답했고, 날짜까지 오디션 드문 화요일로 잡았으니 보석들의 출현을 기대해 볼 만 하다.

“장소 됐고··· 사람 됐고··· 시간 충분하고··· 이렇게 주머니 빵빵하게 오디션 여는 게 얼마만이냐, 응?”

손가락을 하나씩 접던 태 대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김 감독은? 먼저 가 있댔나?”

“예. 현장 체크하신다고 스탭들이랑 같이 출발하셨죠. 한참 전에 도착하셨을 걸요?”

대형 제작사야 팀이 세분화돼 있지만, 영세한 프로덕션은 소수의 정예가 온갖 업무들을 틀어막아야 한다.

조연출 한성훈도 일정 관리, 배우 캐스팅 및 현장 점검 등 제작 PD의 롤을 겸하느라 며칠 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그래,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고. 현식이랑 정석이한테 나머지 짐들 챙겨서 붙으라고 해.”

“옙. 내려가서 시동 걸고 있겠습니다.”

이제 오디션은 두 시간 뒤다.

미리 가서 분위기도 확인하고, 제작진끼리 오늘 오는 배우들의 프로필이라도 보면서 대략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도착한 스튜디오 지하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 대표의 눈이 커졌다.

“뭐야, 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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