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판과 영화판 (4)
사람이 없다.
북적거려야 할 대기실에는 빈 의자들이 이 빠진 잇몸처럼 듬성듬성했다.
물론 배우가 한 명도 없다거나, 그래서 오디션이 불가능한 정도의 드라마틱한 뷰는 아니다.
그러나··· 전부 쭉정이뿐이다.
엊그제 받은 최종 오디션 컨펌 목록, 거기 들어가 있던 ‘유력 후보’들은 전멸 수준에 달했다.
표정을 유지한 채 스튜디오를 지나치며, 태 대표가 조연출에게 속삭였다.
‘한 PD, 제대로 돌린 거 맞지?
‘확인까지 받았어요. 김미훈, 오주한, 이연채, 빅 쓰리 포함해서 조연급들도 다 온다고 연락했고요.’
‘엿 됐구먼, 진짜 엿 됐어.’
안쪽 스튜디오에는 이미 김률 감독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태종범이 등 뒤를 가리켰다.
“김 감독, 밖에 봤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럴 것 같았습니다.”
“뭐가, 배우들 단체로 안 오는 게?
김률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긴 왔잖습니까. 오디션 볼 정도로는.”
“아니, 저 인간들을······!”
자칫 들릴지도 모른다. 태 대표가 필사의 노력으로 목소릴 낮췄다.
“저 인간들을 얻다 써. 주조연급들은 아무도 안 오고, 그냥 잔잔바리들만 왔잖아. 단역으로만 배역 짜서 박 배우 옆에 올릴 거야?”
“그럼 어떡합니까. 우리랑 일하기엔 자존심 상한다는데.”
태 대표의 입이 딱 멈췄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오른 탓이다.
탑 리그부터 하부리그까지, 영화를 찍는 배우 대부분은 드라마 판에 선입견이 있다.
이유는 제작 환경이다.
장르의 특성상, 드라마는 전 회차 사전제작이 어렵다. 기껏해야 6화에서 8화. 그것도 편성이 느긋하게 빠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고, 보통은 4화를 찍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손이 느린 작가와 일하면서, 촬영 현장까지 딜레이된다면?
그야말로 쪽대본의 지옥에 떨어진다.
드라마 중반부터는 작가가 아침에 대본을 보내고, 낮에 찍은 영상을 부랴부랴 편집해 저녁에 내보낼 때도 잦다.
반면 영화는 잘 짜인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진행된다.
짧으면 몇 달, 길어도 일 년 안에 쾌적하게 작품을 찍는 영화배우들 입장에선 드라마를 하위문화라며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페이도 주고 시나리오도 잘 빠졌잖아, 영화 찍는 배우들이 드라마 안 찍는 것도 아니고······.”
“판을 옮기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왜!”
“배우는 트레이닝도 안 받은 일반인 출신에 드라마로 뜬 반짝 스타. 감독이란 놈은 영화만 몇 개를 말아 처먹은 등신. 근본 없는 조합으로 커리어에 흠 나기 싫겠죠.”
“아냐, 오디션이 겹쳤을 수도 있어. 하필 초대형 기획작이랑 우리랑 맞물린 거지.”
태 대표가 애써 행복 회로를 돌렸지만 본인조차 설득이 안 되는 눈치였다.
다른 오디션 커뮤니티를 쭉 돌며 크로스 체크까지 마친 조연출이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없어요, 대표님. 이제 오디션 본다고 우르르 몰려가고 안 그러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더 말이 안 되지! 단체 보이콧도 아니고, 오디션장을 왜 안 와?”
“예의상 온다고는 했겠죠. 안 바쁜 거 아는데 까면 눈치 보이니까. 그러고는 다들 똑같은 생각으로 불참한 겁니다.”
김률 감독이 사태를 예견한 자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오디션은 진행해. 저 중에서 원석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니다. 저기 있는 양반들의 실력은 뻔할 뻔 자다. 예리한 못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준비된 뉴페이스··· 그것도 큰 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뻔히 알지만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던 태 대표가 애써 마무리했다.
“한 PD. 우리 시나리오, 오늘 안 온 배우들한테 다시 한번 돌려 봐. 혹시 늦게나마 오겠다는 인간 있는지도 확인하고.”
“예, 알겠습니다.”
의욕 없이 대답한 조연출이 나간 뒤, 태종범 대표는 이마를 감싸고 신음을 흘렸다.
“제발, 제발 영화만 찍자······.”
*
연예계의 생리는 약육강식이다.
센 놈은 목에 힘을 주고, 약한 놈은 토끼처럼 쪼그라들어 눈치를 본다.
업계 평판용 예절이야 있지만 지키지 않아도 되는 배려를 굳이 하지는 않는다.
상대가 내 밑, 그것도 한참 아래에서 빌빌대는 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누님, 얘네 시나리오 또 왔는데요?”
매니저로부터 소식을 들은 영화배우, 배지나가 코웃음을 쳤다.
“범인지 호랑인지 거기?”
“옙. 혹시 시간이 안 되셨냐면서, 개인적으로 보셔도 되니 편하게 답 주시래요.”
“병신들, 급도 모르고 질척이네.”
‘큰범 스튜디오’가 보낸 시나리오는 배지나도 읽어봤다.
장르는 제법 독특한 오컬트. 모셔 가겠다는 배역도 주연이지만 작품은 중요한 게 아니다.
A급 여배우에게 들어오는 작품이며 광고가 한 달에 몇 개인가?
그녀 정도 되면 같이 나오는 배우부터 감독의 네임밸류까지 깐깐하게 따져야 한다.
“나 배지나야. 드라마판 탑들이 나와 주십사 해도 모자랄 판에, 케이블 출신··· 그것도 조연으로 데뷔한 신인? 걔랑 주연으로 연기할 바에 브이로그 하날 더 찍고 말지.”
매니저도 음흉하게 히죽대며 거들었다.
“그죠? 거기다 감독이 김률이에요.”
“김률?”
“왜, 있잖아요. 충무로 마이너스의 손. 찍는 것마다 말아먹어서 아무도 같이 안 하려는 인간.”
배지나의 고운 이마가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 구겨졌다.
“하여튼 끼리끼리 놀아요. 안 갔으면 알아서 눈치 까야지, 또 발을 들이밀어?”
“그래도 개런티 최저는 맞췄던데요. 연기력 되고 마스크 유니크한 여배우 귀하잖아요.”
“응, 지랄 말라고 해.”
가면을 벗은 연예인들은 내숭을 부리지 않는다.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니, 적당히 조미료를 쳐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도 매니저의 일이다.
매니저는 시나리오 뭉치를 대기실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종이가 아깝다, 진짜.”
다른 곳으로 들어간 2차 섭외들도 비슷한 꼴을 맞았다.
최근 히트작으로 주가를 올린 영화판 출신 남배우가 실장에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긴 뭐, 불사조야? 또 보냈다고?”
“그니까. 어떡할래?”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갖다 버려. 거기 오디션에도 찌꺼기들밖에 안 왔다면서 뭘.”
“큭큭큭, 그랬다더라. 찌꺼기는 좀 그렇고, 잔챙이 정도로 하자.”
엔터테인먼트 소식들은 발이 빠르다. 하룻밤 사이 천 리, 만 리도 달린다.
‘흑의사제’ 시나리오가 원래 C&J 투자 하에 작업될 예정이었다는 것.
박건이 합류하면서 내부 상황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래서 본 오디션에 급 되는 조연들도 안 와서 대표가 뒷목을 잡았다는 것까지.
소속사 실장이 입맛을 쩝 다셨다.
“좀 아쉽긴 하네. 시나리오는 죽여줬는데.”
남배우는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그것도 주연일 때 얘기지. 한번 봐, 형. 박건이 메인이면 아무도 안 가려고 할걸?”
*
“왜 안 오는 거야!”
오전 10시, 큰범 엔터테인먼트.
‘흑의사제’ 관계자들의 긴급 대책 회의가 벌어졌다.
눈 밑이 거뭇거뭇해진 태종범 대표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돌려 물었다.
“한 PD, 그쪽으론 뭐 온 거 있나?”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의 조연출이 대꾸했다.
“하나도 없는데요.”
“그럴 줄 알았어. 이 상도덕 없는 새끼들!”
태 대표가 기어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김률 감독이 딱딱하게 말했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노쇼는 대놓고 엿 먹이는 거니, 평판 나빠지지 않게 미리 끊어내겠죠.”
태 대표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김 감독은 화도 안 나? 어차피 같은 배운데, 이건 거의 보이콧이잖아!”
“배우들 자기 자존심 뜯어먹고 삽니다. 화낼 시간에 대책을 세워야죠.”
“인간들이 안 오는데 대책은 어떻게 세워? 뭐, 한 PD한테 정장 입혀서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내보낼 거야?”
“···대표님, 저는 갑자기 왜······.”
조연출이 질겁하는 사이, 가방을 뒤진 김률 감독이 두툼한 파일철을 꺼냈다.
“배우 후보들입니다.”
“후보들? 우리가 연락했던 사람 말고?”
“어차피 그네들은 우리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안 옵니다. 새로운 사람이 나아요.”
며칠 사이 명단을 이만큼 뽑다니, 역시 김률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덥석 받아들어 안쪽 프로필들을 훌훌 넘기던 태 대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뭐야, 이거?’
현직에 있는 양반들이면 알 법 한데, 이 판에서 꽤 구른 자신도 죄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어디서 쌩 신인만 뽑아 온 건가?
“그··· 이게 다 우리 후보라는 건가?”
“예.”
“오해 말고 들어. 김 감독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뉴페이스로만 채워도 좀 그렇지 않나? 그래도 배우 파워란 게 있잖아.”
“신인 아닙니다.”
“응?”
“전국에서 활동 중인 극단 소속 배우들입니다. 서울 쪽도 있지만 대부분 주력은 지방이고요.”
“아이고야······.”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률 감독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차피 우린 외인구단입니다. 어설프게 메인스트림에 탑승할 생각 말고, 새 사람들로 승부 보는 게 맞아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박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팀은 신중하게 구성해야죠. 저도 동료를 고를 때 고민 많이 했습니다.”
영화의 유일한 주연 배우는 십여 분쯤 전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자긴 신경 쓰지 말라’면서 한쪽 자리를 잡고 앉더니, 지금까지 쭉 저 상태다.
제작사의 대책 회의에 주연이 참석하다니,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상식적이지 않은 조합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지런히 오갔다.
‘···박 배우는 왜 온 거야?’
‘저는 모르죠.’
‘김 감독도 몰라?’
‘제작 일정 묻길래 회의 날짜랑 시간만 얘기했어요. 매니저만 오는 줄 알았더니 같이 왔던데요.’
머리를 긁던 태 대표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혹시 오늘 촬영이 없으신가? 당연히 우린 좋은데요, 괜히 박건 배우님한테까지 걱정 끼친 건가 해서······.”
“제작 환경은 어떨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영화는 처음이기도 하고, 혹시 공부가 될까 싶어서요.”
공부하러 왔다는 사람이, 정작 회의엔 끼지도 않고 게임만 깨고 있다.
다음 작품이 송두리째 엎어질 위기지만 배우도 소속사도 별 위기감은 없어 보인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내심 로만이 뭐라도 나서 줄까 했던 태 대표 입장에선 오만 상상이 들었다. 노중만, 신입, 따돌리기, 버린 자식······.
“여러분, 커피 드시고 하세요!”
잠깐 나갔던 박건의 매니저가 양손 가득 든 커피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사셨대.”
“앞에 카페가 있더라고요. 저희도 먹고 싶어서 형 올려보내고 같이 사 왔어요.”
“감사합니다. 제작사가 돼서, 이런 일로 크랭크인 전에 심려나 끼치고······.”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한 배를 탔는데. 다 같이 힘을 모아야 될 일도 더 잘 되죠.”
태 대표와 조연출은 감동적인 눈빛으로 얼음 동동 뜬 커피에 빨대를 꽂았다.
뜰 만큼 뜬 배우네 매니저가 영세한 제작사에 이렇게 친절하다니, 한 작품만 떠도 목에 힘 빡 주는 이 바닥에선 천연기념물 수준이다.
“그나저나 김 감독, 오디션 얘기 때문에 아침부터 모이라고 한 거야?”
박선에게 커피를 받아든 김률 감독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오디션은 안 봅니다.”
“응? 그럼 저 사람들은······.”
갸웃거리던 태 대표의 표정에 급격히 먹구름이 꼈다. 김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보셨죠? 가만히 앉아서 시나리오만 돌려 봤자 사람들 안 옵니다. 직접 가서 섭외해 와야죠.”
“잠깐만, 지방 극단이 대부분이라며!”
“그러니까 일찍 왔잖아요.”
감독이 가는데 대표가 안 갈 수 없다. 오늘은 꼼짝없이 지방 투어다.
“···야단났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