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32화 (32/122)

드라마판과 영화판 (5)

* * *

지방에는 소극단이 많다.

의외로 예술가들의 전시나 공연도 많고, 여기저기서 활동하는 극단도 제법 된다.

다만 그중 대중들이 이름을 들어 본 단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방대표극단’이라고 해 봐야 전국연극제니, 서울연극제니 하는 행사가 개최될 때만 반짝 활동을 하고 또다시 소식이 끊긴다.

활동을 멈춘 것이 아니다. 안 뜨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잡는다고? 굳이?”

차를 놓고 컨벤션 센터로 걸어 올라가며, 태 대표가 구시렁거렸다.

지방이다 보니 전반적인 건물들 높이가 서울보다 몇 층씩은 낮다.

“대학로 배우들은 풀이 좁아요. 신선함을 수급하려면 서울 밖으로 돌아야죠.”

“어, 뉴 페이스 좋지. 근데 아무리 지방이라도 이렇게 일찍 출발할 필요가······.”

앞서가던 김률이 휙 돌아섰다. 새까맣게 탄 얼굴 속 눈빛이 오늘따라 날카롭다.

“저희 영화에 배역들이 오죽 많습니까. 몇 명씩 데려와도 다 채우려면 등골 휩니다.”

찔끔한 태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있다는 거지. 암, 당연히 움직여야지.”

“그리고 저도 직접 봐야 합니다. 연기 폼이라는 게, 제 기억이나 최근 영상이랑은 또 다를 수가 있으니까요.”

일리 있는 소리다.

‘흑의사제’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서요한이지만, 조연들의 역할도 크다.

주연 캐릭터를 보조하고 위협하면서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인간 군상들이다.

첫째는 바티칸의 한국 구마지부 사제.

오십 대 정도 되는 남자 배우로, 중반부쯤 등장하여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둘째는 서울지방경찰청 강력반 형사.

이 역시 삼십 대의 남자 배우로, 사건현장 주변을 맴도는 서요한을 의심하다가 ‘구원회’의 진실에 다가간다.

셋째는 악마에게 사로잡혀, 신자와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구원’하는 회의 여성 교주다.

“형, 볼래?”

옆에서 걷고 있던 박선이 정리된 프로필 뭉치를 내밀었다.

“어, 고마워.”

“경력이랑 나이는 다 있대. 오디션 영상 같은 건 감독님도 못 구하셔서 없고··· 그래도 정리가 잘 돼 있더라구.”

제법 개성 있는 마스크들이다.

배우 사진이 흑백으로 인쇄돼 있고, 나머지 프로필엔 극단 경력과 나이가 적혀 있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삐걱대는 현황을 눈치챘는지, 어젯밤 노중만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사가 뜬 소감은 어떠냐, 언제 회사에 한번 와라, 뜬구름 잡는 얘기도 없이 본론이 나왔다.

-어쩔 생각인가?

“영화 말씀이십니까?”

-음. 캐스팅부터 난항인 모양이던데.

소속사의 파워는 홍보에 큰 도움이 된다. 거기다 지금은 긴급상황이 아닌가.

회사 홍보팀을 움직여 달라고 징징거릴 만도 한데, 아무 말도 없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선이한테 들어 보니, 드라마 쪽 신인이 주연이라고 배우들이 많이 안 온 것 같습니다. 캐스팅은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몇 사람 알아봐줍니까? 괜찮은 배우들이 우리 쪽에도 많아.

“괜찮습니다. 정 안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몇 번 더 권유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노중만은 의외로 별 얘기 없이 끊었다.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자유 보장 하나는 괜찮군.’

소속 배우들의 라인업은 이미 확인했다.

진지유, 백하니, 구신승, 최필립··· 이외에도 그가 모르는 꽤 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꼭 그중 한 명이 아니더라도 노 대표라면 몇 명을 소개해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로 작품이 빠그라져서 소속사까지 망신당할 상황이 아니라면, 첫 작품부터 손을 빌릴 필요는 없다.

‘내 파티는 직접 짜는 맛이지.’

건은 앞서가는 대표와 감독의 등판을 보며 생각했다.

김률 감독은 주연 배우가 지방 캐스팅까지 동참한다는 말에 놀란 눈치였지만, 태종범 대표는 아예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아이고, 박 배우님이 와 주신다면야 천군만마죠! 오늘은 밥부터 간식까지 저희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물론, 굳이 따라온 이유는 옛 추억 때문이다.

―용사님, 또 누굴 낄 거예요?

―일단 헌트랑 에카르트부터 찾읍시다. 라구엘은 지금 거미숲에 있을 테니 빼고, 이번에는 화력 위주로 가 보자고요.

―···그게 누군데요?

―있어요. 낮도깨비 같은 놈.

모닥불 앞에서 나누던, 풋풋하던 시절의 대화가 흐릿하게 떠오르다 사라진다.

용사행 초창기 때는 동료들을 구하러 철왕국 전역을 헤집고 다니곤 했었다.

성녀는 고정이었고, 주요 멤버들은 순서와 조합이 바뀔 때도 많았다.

망나니 헌트, 제국의 4황자, 배신자 케일, 가운데땅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 무르고로스.

그 중 몇이 죽고 몇이 살아남았던가?

하늘을 덮던 용의 거체를 떠올리는 사이, 그들은 한 극장에 도착했다.

밖에서는 그렇게 안 보이지만, 들어와 보니 공간이 제법 널찍하다.

헤드헌터 일행은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공연을 낮부터 하네요?”

“여긴 문화센터라, 남는 시간 쪼개 들어오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저녁엔 또 다른 팀이 써야 하거든.”

박선의 질문에 태 대표가 설명했다.

“누군데요?”

“<오늘은 트로트>라고, 요즘에 뜬 김수향이 있죠? 걔네 팀이 싹 다 와서 공연한대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 박선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TV 광고도, 채널 편성도, 대형 콘서트홀 내지 종합운동장도 똑같다. 어딜 가나 메인 시간대는 제일 잘 나가는 놈이 차지하고 돈을 쓸어담는다.

“근데 김 감독, 서울에선 아예 활동 안 한 배우도 있던데. 여주 토박이는 어떻게 아는 거야?”

“제가 있던 극단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본 사람도 있고··· 시작하네요.”

이내 막이 오르고 무대가 시작됐다.

‘저 사람들이군.’

건은 턱을 괸 채 극을 지켜보았다.

오른 극은 특별할 것 없는 휴먼스토리였다. 뻔한 시놉시스에 적당한 구성, 그저 그런 연기로 돌려가면서 쓸 수 있는.

김률 감독의 프로필에 있던 사람은 남배우 두 명이었는데, 연기가 나쁘지 않았다.

마스크는 방송국의 배우들보다 떨어지지만 표현력은 괜찮다. 김률 감독도 펜을 꺼내 뭔가를 열심히 체크하고 있다.

“···나랑 얘기 좀 해.”

“할 말 없어. 그때 다 끝났잖아.”

확실히, 프로필에 있던 이들 말고는 대사를 칠 때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의 개’ 시절엔 용준상과 서희도 등 비주얼 되는 연기파들이 중심을 잡아 줬다면, 이젠 그에게 맞는 조력자들이 필요하다.

서요한은 최승과 결이 다르다.

액션이 주가 되지 않는 캐릭터고, 그렇기에 단역들에게 했던 일전의 ‘무술 지도’도 할 수 없다.

“우리··· 이제 헤어지는 거야?”

“웃기는 소리 마! 김한영 그 새끼가 뭐라고 말했든 난 너 안 떠나. 아니, 못 떠나!”

극의 주연들이 대사를 주고받는다.

건의 머릿속 시뮬레이션도 민활하게 돌아간다.

원로 배우나 업계 관계자 정도의 분석이야 어렵겠지만, 함께 연기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는 대강이나마 예상이 간다.

“저 정도면 싼값에··· 김미훈이보다야 별로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태 대표와 한상윤 조연출은 아예 입가로 손을 가리고 실시간 리포트를 나눈다.

그때, 무대를 굽어보던 건의 눈에 다른 한 명이 잡혔다.

‘저건 누구지?’

메인으로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대사를 주고받는 주연들의 뒤쪽, 오브제(Objet)처럼 서 있는 여주인공 친구 역할의 배우였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파마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검정 백팩을 멘 이십 대 여자.

“뭐야, 너희 다시 만나?”

“그렇게 됐어. 고운 정은 떼어도 미운 정은 못 뗀다고, 그 말이 딱 맞더라.”

“야, 야, 그만해. 저기 정숙이 있잖아.”

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조명이 센데다 전부 무대 중앙만 비춰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초인적인 시력은 뒤쪽 배우들의 표정근육까지 정확히 잡아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저 조연은 계속 표정을 바꾸고 있다.

주목받기 위한,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한 연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흡사··· 맡은 배역에 동화됐다는 쪽에 가깝다.

마침내 극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을 때, 여자는 주인공들을 응시하며 비스듬히 웃었다.

등에 멘 가방에서 염산통을 꺼낼 듯한 미소였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극단 ‘틈’, 또 공연할 테니 찾아 주세요!”

극이 끝났다. 몇 명 없던 관객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떴고, 제작진도 일어섰다.

박선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어, 커튼콜은요? 이대로 끝이에요?”

이쪽 바닥을 잘 아는 조연출 한상윤이 씁쓸하게 말했다.

“여긴 그런 거 없어요. 배우들 나오길 기다리는 관객도 없고. 그냥 대기실로 가면 돼요.”

“그래요, 빨리 가자고. 저 사람들 바빠서 우리도 서둘러야 돼.”

“방금은 커튼콜이 없다고······.”

시나리오를 챙기고, 머리까지 쓱쓱 매만진 태 대표가 대수롭잖게 답했다.

“이거, 무료 봉사나 마찬가지야. 초청돼서 한 타임 메꿔 봐야 두당 일이 만 원씩 떨어져요. 자아실현 하려면 돈 벌러 가야지.”

*

무대 뒤편과 연결된 대기실.

모처럼 극을 마친 극단 ‘틈’의 단원들은 다음 스케줄 준비에 부산했다.

“지금 몇 시야?”

“두 시 반. 급해?”

“급한 게 아니라 위급해. 나 이번에도 늦으면 진짜 잘려.”

“하긴, 요즘 야간 편의점 알바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지.”

귀중한 낮 시간을 소모했으니 누구는 편의점으로, 또 누구는 독서실로 출근해야 한다.

화려한 박수갈채, 꽉 찬 관객석, 성원 속의 커튼콜, 이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나마 문화센터처럼 불러주는 곳에서는 무대 제작비나 임대료가 들지 않으니, 극단을 유지할 수익이라도 나기를 기도할 뿐이다.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친 배우가 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대기실 앞에 몇 명이나 서 있었다.

‘틈’의 부단장이 서둘러 나섰다.

“혹시 다음 차례로 오시는 분들이세요? 저희 거의 다 됐거든요, 당장 대기실 나가야 되면······.”

호인처럼 생긴 양복쟁이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큰범 스튜디오’ 대표 태종범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화감독 김률입니다. 장성화 배우님이랑 조용조 배우님 캐스팅 건으로 서울에서 왔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대 뒤에서, 배우가 가장 짜릿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몇 초가 흐르고서야 격한 환호성이 터졌다.

“야, 장성화! 너 이 새끼!”

“용조야, 가자! 빛 볼 날 있다고 했지!”

오디션 제안도 아닌, 자그마치 서울에서 제작진이 직접 와서 건네는 캐스팅 제의다.

소극단에서 동고동락한 단원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두 배우를 에워싸고 방방 뛰었다.

태종범 대표도 웃는 낯으로 시나리오를 건넸다.

“여기, 캐스팅 사항이랑 시나리오가 있으니, 나중에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두 분 다 마음이 내키셨으면 좋겠군요.”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대단한 회사가 아님은 안다. 큰 제작사였으면 전화만 틱 걸어 오디션을 고지하고, 보러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잘 됐다, 미쳤다!”

“서울이래, 서울! 너 맨날 서울 가서 연기하고 싶댔잖아, 거기다 올라가는 거야!”

그러나 연기 하나에 꿈을 싣고, 투잡 쓰리잡을 뛰어 온 사람들에겐 이보다 기쁠 수 없다.

두 배우는 얼떨떨함과 기쁨, 단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태 대표가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들의 뒤쪽에서, 야구 모자를 쓰고 있던 키 큰 남자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박건을 모르는 이도 있었지만, 저 분위기를 못 알아챌 사람은 없었다.

“······.”

‘진짜’ 연예인이다. 연극배우들 중에도 외모가 출중한 이들은 많으나, 저런 레벨의 외모를 눈앞에서 보면 말문이 막히는 게 정상이다.

남자고 여자고 박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던 중, 단장이 용기를 내 질문했다.

“저기··· 박건 배우세요?”

“예. 극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박건은 누군가를 찾는 듯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혹시 여기 이장미 씨 계십니까?”

야, 이장미! 얘 그새 어디 갔어?

아까 전보다 더 흥분한 웅성거림이 퍼진다.

이내 앞쪽의 단원들이 좌악 갈라서며, 라커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

스물셋, 어쩌면 스물? 분장을 지우자 아까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다.

집념과 광기를 숨기던 배우는 사라지고, 피곤해 보이는 대학생 한 명만이 리무버 묻힌 화장솜으로 눈가를 닦아내고 있다.

따로 언질을 받지 못했던 태 대표와 김률 감독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장미야, 너 찾으시잖아.”

“얘예요, 얘. 이장미.”

누가 봐도 스카웃, 또는 캐스팅 제안이 나올 분위기다. 동료들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데도 무표정한 얼굴엔 미동도 없다.

백팩을 짊어진 ‘틈’의 단원, 이장미는 쥐고 있던 화장솜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연기 안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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