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33화 (33/122)

누가 그들을 외인이라 칭하나 (1)

* * *

“그럼 좋게 고려해 보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대표님이 이렇게 정성을 들이시는데 어떻게 고사(姑捨)할 수 있겠습니까. 내 세우던 아시바 팽개치고라도 가겠습니다!”

종로의 허름한 가락국수집 앞.

불콰하게 술이 오른 단역배우들이 열정적으로 소리친다. 김률 감독의 레이더망에 섭외된 마지막 인물들이다.

“자, 자, 이럴 게 아니라 같이 한잔 하시죠. 오늘 여기 술 동내 버릴라니까.”

“아이고, 감사하지만 저희가 또 갈 데가 있어서··· 그치, 김 감독?”

“예. 따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가까스로 붙잡는 손들에서 벗어난 태종범 대표가 땀을 닦았다.

“이쪽 판 사람들 술 센 거 알지? 저기 들어가면 간에 구멍 하나 뚫리는 거야.”

“올해 초에는 매일같이 드셨잖아요. 궁 프로덕션 사람들이랑, 어디 엔터에서 배우들 불렀다고 그렇게 가실 때는 언제고······.”

“어허, 한 PD. 듣는 귀도 많은데 그런 날조는 자제하자고.”

지방에서 시작해 서울로 올라온 캐스팅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다.

거절하는 배우도, 반기는 배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긍정적인 반응으로 시나리오를 챙겼다.

다른 것보다도 주연 배우가 제작진과 지방까지 내려왔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힘든 일정에도 표정들이 밝았다. 태 대표가 호들갑스럽게 감사를 표했다.

“우리의 빛과 소금! 오늘 무지하게 고생하셨습니다. 배우님 아니었음 섭외 반은 튕겼을 거예요.”

“아닙니다. 확답을 못 받아서 아쉽네요.”

“확답이요? 아, 그 문화센터··· 거긴 그냥 잊어버려요. 김 감독 포트폴리오에도 없었잖아?”

한상윤 조연출도 한 마디 보탰다.

“맞아요. 혹시 해서 경력들 따 봤는데 딱히 뭐가 있진 않더라고요.”

건은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싫어하는 것처럼은 안 보였는데···.’

극단 ‘틈’의 이장미. 그녀는 눈앞에서 캐스팅을 제안받고서도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야, 장미야, 왜 그래?”

“너 이분 누군지 몰라? ‘서울의 개’ 최승, 그 잘 하시는 분이라니까!"

주변 사람들이 몸이 달아 더 난리인데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멀리서 오셨는데 죄송해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연기는 이제 안 해서요. 오늘도 땜빵해 주러 온 거예요.”

“무대에서는 계속 하시던데요. 다른 분들만큼 열정적으로.”

놀란 기색이 이장미의 얼굴에 스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예의 죽은 눈으로 돌아갔다.

“잘못 보신 거예요. 저보다 더 잘 하는 사람들 많으니까, 여기서 골라 가세요.”

그렇게 이장미가 나가 버린 뒤, 극단 리더가 부랴부랴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우리 극단 에이스였다, 연로하신 할머니를 혼자 모신다, 몇 년 전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반 폐인이 돼서 돌아왔다······.

김률 감독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고, 태 대표는 알 만하다는 듯 나오면서 떠들었다.

“박건 씨가 봤으면 뭐가 있긴 했겠지. 그런데 정승도 내켜야 벼슬이라고, 본인이 싫다는데 어떻게 해요. 저런 사람들은 억지로 끌고 와도 당일에 도망간다니까?”

무대에 오른 그녀에게선 구원회의 교주 박신영이 엿보였다.

악마에게 빙의된 연기, 맹신자 특유의 광기, 앳되면서도 어딘지 노숙한 마스크 등, 시나리오를 읽으며 상상했던 여교주와 완벽하게 어울렸으나,

‘하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지.’

극단 동료들에게 명함을 남겨 뒀으니, 마음이 바뀌면 공개오디션에 나타날 것이다.

어떨 때는 관심이 아닌 무관심이 유효하다. 끌고 가려고만 하면 역효과가 난다.

―내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소. 가까운 횡액을 두고 먼 재앙을 치라는 것이오? 그것이 용사란 자들이 할 소리요!

또 하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며 돌아서는데 김률 감독이 불렀다.

“박건 씨, 괜찮으십니까?”

“예. 멀쩡합니다.”

그을린 얼굴에 진심 어린 고마움이 떠올랐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고를 훨씬 덜었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을 모으는 일이잖습니까. 많이 해 봐서 익숙합니다.”

“아··· 전에도 해 보셨군요.”

“예, 그때 생각도 나고 재미있었습니다.”

김률은 납득한 듯 끄덕거렸다. 사실 감사는 되려 이쪽이 받아야 마땅하다.

21세기 엔터 시장,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캐기란 개인의 힘으론 불가능에 가깝다.

대형 엔터처럼 헤드헌터들이 취합해 올린 자료들을 확인하고, 그중 쓸 만한 재목을 리스트업 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노동과 시간이 소모된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김률 감독이다.

“아니, 근데 김 감독. 이 사람들은 언제 다 뽑은 거야? 며칠 사이에 그게 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독립영화 출신, 연극판 출신 선후배들한테 부탁도 했고요. 간신히 리스트업한 목록입니다.”

오늘 그들이 전국을 돌며 만난 사람들 중엔 드라마 출신도 있고 연극판 출신도 있었다.

이십오 년간 무명으로 활동했던 배우는 일행을 사기꾼으로 오인해 화를 내기까지 했다.

‘김씨, 서울 유명한 제작사에서 사람들이 오셨다는데?’

‘사기꾼 아녀? 나 먹고 죽을 돈도 없어!’

‘저 뒤에 있는 사람 좀 봐요. 저게 어디 사기 칠 얼굴로 보여? 연예인이잖아, 이 양반아!’

긍정적인 반응도,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그들의 공통점은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군.

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썩 괜찮다. 이 김률이란 사내는, 전장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

힘이 부족하다면 머릿수가 방법이다. 그 역시 한창 동료를 모을 무렵에는 최소 열, 최대 서른 명이 넘게 파티를 짠 적도 있었다.

그 다음은 두 가지로 좌우된다.

리더의 능력이 출중한가.

동료들에게 내 등을 맡길 수 있는가.

“저어기, 박 배우님?”

“예, 대표님.”

“배도 고픈데 한잔 쏘러 가시죠. 왜, 전에 말씀드렸던 대창집 기억나십니까? 거기 안주들이 그냥 작살이거든요. 이 태종범이가 책임지고 목구멍까지 기름칠해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에 술 안 드신댔으면서······.”

조연출이 옆에서 혀를 찼지만, 공짜로 기름칠해 준다는데 뺄 이유도 없다.

막 끄덕이려는 차에 박선이 끼어들었다.

“앗, 죄송하지만 오늘은 좀··· 저희가 아직 인사를 못 돌려서, 잠깐 회사에 들러야 해서요.”

“아이고, 그럼 가셔야죠!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뵙겠습니다. 가자, 한 PD!”

로만 말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기세다. 거수경례까지 하며 배웅한 태 대표가 멀어지자 김률 감독이 다가왔다.

어려운 말이라도 있는지, 꾹 다문 입술을 한참이나 달싹거리더니 겨우 말문을 뗐다.

“그··· 염치없습니다만,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나중에 소속사 쪽으로 홍보를······.”

건은 흔쾌히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홍보팀에 잘 말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우가 잘 되면 소속사도 좋지만, 회사의 홍보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막 들어간 신입에게 이걸 해 달라, 저것도 해 달라며 빨대 꽂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것이다.

“김률 감독님, 진짜 멋있더라.”

차에 타, 로만 사옥으로 달리며 박선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뭐가?”

“상황이 어려워도 절대 포기 안 하시잖아. 추진력이나 카리스마도 장난 아니고. 우리도 우리지만··· 이번 영화, 꼭 잘 됐음 좋겠어.”

동생의 말이 맞다.

오늘 하루, 그는 저 무뚝뚝한 사내에게서 오래전의 자신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

모욕감. 열패감. 좌절감. 목표 대부분을 실패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독기와 투기.

듣기로는··· 캐스팅한 배우들 대부분이 오지 않아서 이번 오디션을 망쳤다던가?

건은 오른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초월적인 권능은 사라졌으나,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그렇게 만들 거야.”

“응?”

“지는 건 나도 싫어하거든.”

*

로만 엔터테인먼트.

완만한 유선형 디자인의 사옥에는 아직 불들이 환히 켜져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나?”

“아냐, 시티뱅 애들 해외 스케줄 때문에 다들 바쁘거든. 홍보팀 직원들이랑, 요즘은 본부장님까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신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형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올라갔다.

계약 직후, 박선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몇 번 왔으나 함께 온 것은 처음이다.

금빛 로비를 가로지르다 보니 출입구 뒤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귀준 실장을 잡으러 왔을 때 그가 배우인 척 속였던 보안요원이었다.

건은 동생이 나서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동생 일 때문에 너무 급해서,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옆의 박선도 사 온 커피를 내밀며 외쳤다.

보안요원은 잠깐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두 형제를 번갈아 보였다.

“···그럼 사진 하나만 찍어 주십쇼.”

“예.”

“사인도요. 계약 축하드립니다.”

“물론입니다.”

해프닝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박선이 휴대폰에 저장된 연예인 스케줄표를 체크했다.

“시간도 시간이고··· 본부장님부터 홍보실 직원분들까지만 보고 가면 되겠다. 어차피 배우들은 회사에 잘 없으니까.”

“아, 연락 안 했는데.”

“응? 무슨 연락?”

“아냐. 그냥 친구.”

의심 없이 끄덕이는 동생 옆에서, 건은 슬쩍 메신저를 켰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진지유와의 대화는 저걸로 끝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신일은 2주 전이었고.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더 연락 안 했는데, 한솥밥을 먹는다고 인사는 남길 걸 그랬나?

‘뭐, 회사가 같으니 언젠간 마주치겠지.’

노 대표는 미팅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그들은 본부장실부터 들렀다.

“어, 박건 씨!”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이상철 본부장은 형제를 반갑게 맞았다.

“박선 씨도 같이 왔네요. 여긴 두 번짼가?”

“예,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배우가 회사 자주 들락날락거려도 안 좋아요. 나 같은 사람이랑은 계약서 쓸 때나 보면 되지.”

과연 대형 엔터의 본부장급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상에, 무테안경 하나만 꼈는데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이 느껴진다.

물티슈로 손을 닦은 본부장이 악수를 청했다.

“다시 보게 돼서 반가워요. 처음엔 서로 난처했는데, 앞으론 그 몫까지 잘해 봅시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충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책상 옆에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택배 박스가 보였다.

이상철 본부장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아, 저거. 엄청 크죠?”

“예. 무슨 선물 박스라도······.”

“선물은 아니고, 누가 주성전자에서 제일 비싼 놈으로 스타일러를 보냈어요. 자기가 깨뜨린 물품 변상하겠다고. 너무 커서 받기만 하곤 풀지도 못했네.”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옮겨 드리겠습니다.”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본부장은 농담인 줄 알았는지 껄껄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내려가 볼 거죠?”

“예, 왔으니 인사라도 돌릴까 합니다.”

“박선 씨가 잘 좀 안내해 줘요. 그래도 몇 주 있었으니 형보다는 익숙할 텐데.”

“물론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박선이 본부장실을 나오자마자 앞장섰다.

‘발걸음이 가벼운데.’

예전에야 막 들어온 로드였지만, 이번에는 엄연히 소속 배우의 전담 매니저다.

배우의 활약이 달갑지 않을 매니저 없고, 형의 일약이 안 뿌듯할 동생 없는 법이다.

“대표실은 꼭대기층, 본부장실은 그 아래, 홍보팀이랑 A&R팀은 또 한 층 아래에··· 연기, 춤, 노래 같은 트레이닝 존은 지하야. 어디부터 갈래?”

건은 고민할 것 없이 골랐다.

“가까운 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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