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외인이라 칭하나 (2)
* * *
무명이 스타가 됐다면, 달라진 인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밖에 나가 보면 되죠. 그럼 알잖아요?’
어떤 영화배우가 그런 말을 했으나,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본래 인기란 팬들보다 업계 관계자들을 통해 가장 먼저 체감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계약하게 된 박건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진짜 오셨네!”
“대박··· 배우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가까운 홍보팀으로 가는 동안,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환영과 덕담이 쏟아졌다.
형보다 더 신이 난 박선이 양손 가득 챙겨 온 떡과 커피를 돌렸다.
“여기,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늦게까지 고생하신다고 형이 사 가쟀어요. 백설기랑 시루떡이랑, 커피는 다 디카페인으로!”
잘생긴 놈 하나, 귀여운 놈 하나, 조합도 좋은데 선물까지 가져왔다.
직원들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계약 떡이잖아요. 이건 진짜 귀한데······!”
“배우님이 이렇게 찾아와서 커피 돌린 적, 구 배우님 이후로 처음이에요.”
“에이, 지유 씨도 자주 쏘잖아?”
“그쪽으론 비교하면 안 되죠. 우리 엔젤진은 배우가 아니라 천사라고요.”
“천사라고 하셨습니까?”
특히 홍보실의 반응이 가장 격했다.
“아이고, 자기들!”
이미 면식이 꽤 있는 듯,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일어난 남자가 박선을 덥석 끌어안았다.
“헤헤, 공 팀장님. 저 돌아왔어요.”
“잘 왔어. 그새 얼굴이 확 폈네, 아주!”
로만의 홍보팀장, 공기형 팀장은 쫙 빠진 녹색 수트 차림이었다.
둘이 회포를 푸는 사이, 다른 남직원이 웃으며 설명했다.
“오귀준 사건 터졌을 때 공 팀장이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와우키즈 애들이 워낙 잔사고를 많이 쳐서, 박선 씨가 자주 올라오셨거든요.”
“그 애새끼들, 눈 돌아가는 게 쎄하다 했다니까. 뒤에서 그러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집도 절도 없을 적, 동생한테 잘 대해 준 사람은 은인이다. 건은 고개를 숙였다.
“박건입니다. 선이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챙겨 주긴요, 나도 얘기 많이··· 아니지, 활약상은 계속 봤어요. 여기 있는 동안은 나랑 우리 팀원들이 전력으로 서포트할게요.”
“아니, 팀장님은 그런 말을 왜 하세요!”
“뭐 어때? 잘 풀려서 몸값 왕창 받고 어디든 가면 좋은 거지!”
공 팀장은 첫인상만큼 유쾌했다. 팀 분위기도 좋아서, 다들 야근 때문에 눈 밑이 시커먼 상태임에도 새 식구를 반가이 환영해 주었다.
“자, 다들 커피 하나씩 들고 와 봐요. 부려먹히는 만큼 뽑아먹는 법, 육 년간 모은 꿀팁들 싸악 공유해 줄게.”
어차피 자기도 쉴 생각이었다며, 두 형제를 데리고 회사 안내까지 자처한다.
과연 대형 엔터답게, 내부의 시설들은 어지간한 호텔보다도 호화롭다.
연습실에 녹음실, 층 하나를 통째로 쓰는 헬스장, 유기농 식당 존, 거대한 사우나를 포함한 각종 편의시설들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연습실이랑 화장실 말고는 가 본 적이 없다던 박선이 입을 떡 벌렸다.
“와, 진짜 좋다······.”
“그치? 이제 자기들도 여기 터줏대감처럼 쓰면 돼. 특히 선이 씨는 다른 팀장이나 로드가 시비 걸면 나한테 얘기하고.”
“아마 못 걸 겁니다.”
건의 말에, 공 팀장은 알 만하다는 표정이 됐다.
“하긴··· 그 박건 동생을 누가 감히 건드려. 근데 한 명은 좀 조심해야 돼요.”
“···혹시 백하니 배우님인가요?”
“맞아. 선이 씨는 다른 팀장들한테 들어서 알죠? 백 배우 발작할 때는 본부장님은 고사하고 대표님도 한 수 접어 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직원 몇몇이 커피를 마시는 라운지에 도착했다.
낮에는 바리스타가 상주한다는데, 퇴근하고 나서도 직원들은 24시간 자유롭게 사용 가능하다는 모양이었다.
공 팀장이 거대한 진열대에서 비타민 음료를 세 병 꺼냈다.
“백하니 씨라면 같은 회사 배우 아닙니까? 홈페이지에서 프로필을 읽었습니다.”
“맞아요. 구신승, 최필립, 진지유에 백하니, 이렇게 네 명이 로만 얼굴들이지. 그중 제일 지랄맞은 게 백하니고. 오죽하면 전임 홍보팀장님이 위궤양이 여섯 번이나 도지셨겠어요.”
듣던 박선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로요?”
“큭큭, 사실 담배 때문이긴 했어요. 하루에 세 갑씩 피워 댔거든. 업무 스트레스도 한 몫 했겠지만.”
같은 회사 배우 성질머리가 더럽든 말든, 이쪽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한 작품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진지유 씨는 어떻습니까?”
“아, 맞아. 건이 씨는 진 배우랑 구면이죠?”
“예. 드라마 후반부에 특별출연으로 오셨습니다.”
공 팀장은 의미심장하게 코를 찡그렸다.
“업계 종사자들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진지유는 연예인 안 같아서 연예인 같고, 백하니는 영락없는 연예인이라 연예인 같다는.”
무슨 소린지 짐작도 안 갔으나, 동생은 알아들은 눈치였다.
“딱 느낌 오죠?”
“예, 이해했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중에 백 배우 재해에 안 휩쓸리는 법을······.”
씩 웃은 공 팀장이 말할 때였다.
저 멀리, 라운지 입구 쪽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야, 야, 하니야! 왜 또!”
“냅둬요, 팀장님. 백폭탄 터지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처음 듣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이어, 별들이 등장했다.
일단 청바지 차림의 맨 뒤 남자. 이쪽은 딱 봐도 로만에서 일하는 팀장급 매니저다.
반면 앞의 두 남녀는 그야말로 살벌한 미모들을 자랑한다.
여자 쪽은 사람인가 싶게 청순한 미모에 도회적인 세련됨이 듬뿍 묻었고, 남자 쪽은 쌍꺼풀 없이 서글서글하게 잘생겼다.
공통점은 무지막지하게 머리가 작고, 비율 좋고, 특유의 아우라가 풀풀 풍긴다는 것이다.
백하니와 최필립, 박건을 번갈아 보던 공 팀장이 수트 소매로 눈을 가렸다.
“아, 눈 매워.”
긴장감이 흘렀다. 현직 대표 선수와 유망주 신입이 서로를 쳐다보던 것도 잠시.
무쌍계의 원픽, 최필립이 실실 웃으며 백하니에게 선공을 날렸다.
“보니까 어때, 백하니 재계약 밟고 단독기사 터질 만하지?”
“우리 회사 방음이 별론가. 어디서 개가 짖네.”
“응, 그건 너희 집 뽀삐고.”
이내 회사의 대표선수 둘은 치열한 공방을 펼치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창피해서 재계약하기 싫다느니, 목주름이 도마뱀처럼 늘었다느니··· 청순하고 서글서글한 외모들이, 하는 말은 욕보다 독하다.
“···저게 말로만 듣던 최백전······.”
박선은 기가 빨린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쳤지만, 건은 기억을 되짚었다.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백하니라는 여자의 목소리, 기억에 있다. ‘서울의 개’ 종방연 때 가게 맞은편의 밴에서 들었던 음성이다.
공 팀장이 별로 말리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며 둘을 중재했다.
“저기, 두 분. 다들 쳐다보는데요. 괜찮으시면 저쪽 빈 녹음실에 가셔서······.”
백하니는 코웃음부터 쳤다.
“보면 어쩔 건데요. 여기 직원들 중에 백하니 성격 지랄맞다고 욕 안 한 사람 있어요?”
최필립도 고개를 끄덕인다.
“난 했지. 하루에 스무 번씩.”
안 한 것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건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저는 아직 안 했습니다.”
“하? 그야 댁은 날 처음 봤으니까······!”
한 대 맞은 얼굴로 발끈하던 백하니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차갑고 도도한 대외용 얼음가면이 흰 피부 위로 달라붙는다.
“저기요, 본 김에 뭐 좀 묻죠.”
“그러십시오.”
“진짜로 대표님 턱 돌렸어요?”
“푸흡!”
공 팀장이 기어이 커피를 뿜었다.
“안 돌렸습니다. 사람을 때리지도 않고요.”
백하니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계속했다.
“알겠으니까, 이상한 짓 할 때는 미리 예고하고 해요. 오락실 기곈지, 유리창인지 깰 때도 마찬가지예요. 여배우도 아니고 남자 배우가 나랑 컨셉 겹치는 건 세상 끔찍하니까.”
“야, 박건 씨가 너 같은 줄 알아? 저분은 다 물어주신다고.”
최필립이 다시 끼어들었으나, 백하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알겠습니다. 혹시 뭘 또 부술 일이 있으면 백하니 씨한테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대신 허락은 못 받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사람들 안전이 달린 일이면.”
여배우의 표정이 당혹으로, 이어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얼룩으로 물들어 간다.
과연 탑 배우답게, 표정근의 떨림 하나하나가 지금껏 봤던 누구보다도 선명하다.
“···진짜, 어이없어.”
중얼거린 백하니가 홱 돌아섰다.
“또 봅시다, 다들 실례 많았어요. 하니야, 본부장님 뵙고 간다며!”
한 뼘이 훨씬 넘는 힐을 신고도 어쩜 그렇게 빠른지, 순식간에 멀어지는 백하니를 매니저가 허겁지겁 쫓아갔다.
“자, 그럼.”
머쓱해진 분위기를 최필립이 환기시켰다.
“이상한 애는 갔으니까, 상식적인 사람끼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최필립이에요.”
“박건입니다.”
“그쪽도 특수부대 전역이랬죠? 나도 특전사 출신이거든요, 1공수여단.”
“예. 부사관으로 다녀왔습니다.”
“와, 군필이라니까 더 반갑네. 이 바닥 남자애들은 다 연예병사로 빠지는데.”
“잠깐만요, 두 분 그대로 정지!”
찰칵대는 플래시 소리가 연발로 터졌다. 두 배우의 투 샷을 무슨 화보필름 찍듯 찍어 대던 공 팀장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 그림도 끝장나네. 야성미 넘치는 퇴폐맨과 강아지상 존잘남 조합이라··· 신승 씨랑 있을 때랑은 또 달라.”
“에이, 강아지는 무슨. 저 지랄견이잖아요. 맨날 커버 치느라 팀장님이 제일 잘 아시면서.”
대수롭잖게 대꾸한 최필립이 박선과도 악수를 나눴다. 바른생활 청년 같은 외모와는 달리,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태도다.
“푸흡, 필립 씨랑 백 배우가 우리 소속사 원투펀치긴 하지. 근데 김 팀장님은 어디다 두고 혼자 왔어요?”
“아, 영태 형.”
최필립은 천진난만하게 킬킬거렸다.
“호텔 예약해서 쫓아보냈어요. 내일이 여친이랑 이백 일이라는데, 연예인 놈 뒤치다꺼리 시켰다가 논란 터질라.”
그러고는 또 둘이 한참을 웃더니 공 팀장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사라진다.
“팀장님 좀 빌려갈게요. 또 봅시다.”
라운지에 고요가 찾아왔다. 이 난리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직원들도 늘 보던 이벤트라는 듯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박선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 와도 여긴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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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전역할 즈음엔 초봄이었던 날씨가 가로수들이 울긋불긋 물드는 가을이 되었다.
박선이 부지런히 날라다 준 소식에 의하면, 김률 감독은 캐스팅된 배우들에 맞춰 시나리오 막판 수정에 열중이라는 것 같았다.
태종범 대표는 스튜디오 인력을 총동원해 제작 지휘를 맡느라,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란다며 울상을 짓고 있다고 했다.
‘영화 촬영은 드라마랑 또 다르려나?’
이 또한 가 보면 알 일이다. 건은 새 게임을 다운받고 공포영화 몇 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대본 리딩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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