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35화 (35/122)

누가 그들을 외인이라 칭하나 (3)

* * *

“안녕하십니까.”

“어, 박건 씨! 오늘 리딩이시라면서요?”

“예. 4연습실입니다.”

“안 그래도 전달받았어요. 거기 의자랑 책상 같은 거, 대충 구색 맞춰서 깔려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그 사제복 엄청 잘 어울리시네.”

“감사합니다. 끝나고 잘 정리해 두겠습니다.”

로만의 보컬 트레이너, 노현석은 씩 웃었다.

“뭘요, 다 돕고 사는 건데. 어차피 우리 쪽은 요즘 한가해서 괜찮아요.”

리딩날 아침.

보통 영화 대본 리딩은 제작사 사무실에서 하지만, 큰범 스튜디오는 인원을 수용하기가 마땅찮아 로만의 연습실을 빌렸다.

“우와, 여길 다 와 보네.”

“야, 야, 눈 돌리지 마. 촌놈 티 다 난다.”

큰범의 스탭들이 로만의 내부 시설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종합 연예 엔터테인먼트답게 사람은 많지만, 워낙 평수가 넓으니 빈 연습실과 녹음실도 항상 넘쳐난다.

그중 하나를 경영지원팀 박 팀장이 흔쾌히 내주었다.

‘박건 씨네 영화? 무조건 여기서 찍어야지. 대본 리딩 장면으로 메이킹 영상 만드는 거, 드라마만 하는 거 아니에요. 기깔나게 찍어서 홍보팀 올려보내면 공기형이가 잘 만져 줄 거야.’

오늘을 기점으로 온갖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뿌려질 것이다.

아직 리딩 시간까진 조금 남았지만, 벌써 큰범 쪽 스탭들과 관계자 몇몇은 도착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어젯밤, 태 대표는 흥분한 목소리로 그동안의 진척상황을 전했다.

-대박이에요. 김 감독이 러브콜 보낸 사람들이 거의 다 왔다니까.

“혹시 그럼, 그때 그 배우도······.”

-아, 이장미 씨! 마지막에 와서 오디션 같이 봤죠. 그걸 박 배우님도 봤어야 하는데, 따로 영상 안 찍은 게 천추의 한이에요.

예상했던 대로다. ‘연기 안 해요’, 하는 얼굴에는 미련과 회한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잡아 봐야 시간만 낭비할 거, 지금처럼 스스로 돌아오게 두는 편이 낫다.

“어땠습니까?”

전화기 저편으로도 씩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잠시 사이를 둔 뒤, 태 대표는 힘주어 평했다.

-어떻긴요, 완전 찢어 놨지.

건은 스탭이 주고 간 시나리오를 내려다보았다.

수정에 재수정을 거쳐 김률 감독의 심력이 쏟아부어진 이야기는 날이 바짝 선 칼 같다.

서요한과 조연들의 디테일이 수정됐고, 대사 몇 군데가 바뀌면서 전체적 서사가 한층 강력해졌다. 이만하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리메이크라 해도 믿을 정도다.

‘빨리 하고 싶은데. 리딩이든 촬영이든.’

문득, 건은 갈증을 느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이 상태가 이어져 왔다.

물이고 커피고, 잡히는 대로 마셨지만 식도만 적실 뿐 뱃속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다.

연기가 하고 싶다.

촬영장의 조명들 앞에서, 철왕국에서의 옛 기억들을 어서 다시 느끼고 싶다.

“형, 가자. 곧 배우 분들 도착하신대.”

“응.”

동생을 따라가며, 건은 걸음을 빨리했다.

이쪽 세상이지만 저쪽 세상이기도 한, 그곳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오후 1시 45분. 연습실 문을 열고 배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로비 초입부터 주눅이 들어 쭈뼛쭈뼛 들어온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이내 연습실은 시장통마냥 시끌벅적해졌다.

“야, 최서형! 네가 왜 여깄어?”

“얼레? 선배는 왜 거기서 나와요?”

“나야 률이 형이 불러서 왔지. 우리 아빠 힘들다는데, 고사리손이라도 보태야지 않겠냐.”

학연, 지연, 공연으로 묶였던 관계는 쉽게 옅어지지 않는다.

선후배가 반가워하는 동안, 한쪽에선 몇 년이나 지나서 만난 옛 동료들이 어색하게 인사한다.

“화영아, 대박이다. 너도 여기 나와?”

“으응··· 그렇게 됐어. 제작진 분들이 찾아와 주셔서······.”

인사는 오가지만, 내심 이곳이 대형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현장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도 감돈다.

‘애매하네, 진짜.’

조연으로 캐스팅된 여배우가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어딜 봐도 급 있는 얼굴은 없다. 전부 자기와 비슷한, 혹은 그 아래의 인간들뿐이다.

‘여긴 순 애기고··· 얼씨구, 저 선배는 몇 년 전에 연기 접었댔는데?’

저쪽을 보니 아예 얼굴도 모르는 중년 남자들까지 와서 앉아 있다. 작업화에 작업복, 공사판에서 일하다 막 나온 복장이다.

···이거, 영화사에 길이 남는 망작 나오는 거 아냐?

걱정이 깊어지는 그녀의 팔을, 함께 온 극단 동료가 쿡 찔렀다.

“야, 쟤 이장미 맞지?”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자기 몸만 한 백팩을 메고 앉아 있다. 여배우의 눈이 커졌다.

“쟤가 왜 여길 와? 찍는 작품마다 말아먹고 고향 내려갔다며?”

“아냐, 소속사 때문이랬어. 거기 사장이 쟤한테 홀딱 빠져서, 몇 억이나 투자를······.”

“김화영 씨, 서원기 씨.”

냉담한 목소리에 둘은 흠칫 놀랐다. 저 멀리 앉아 있던 이장미가 어느새 눈앞에 와 있었다.

이장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뇌까렸다.

“다 들리니까, 남 얘긴 좀 뒤에 가서 해요. 저렇게 발성이 좋은데 연기는 왜 그 모양인지 몰라.”

“야, 너 지금 뭐라고······!”

한판 하려고 일어났던 남배우는 주변의 눈치에 슬그머니 찌그러졌다.

여기 모인 이상, 좋든 싫든 한 배에 탄 동료다. 기회 하나하나가 아쉬운 사람들끼리 불화를 빚는 건 멍청한 짓이다.

작은 해프닝이 지나간 뒤, 배우석이 다 차고 관계자며 제작진들도 들어왔다.

뒤쪽에는 메이킹 필름용으로 보이는 카메라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큰범이 아닌 로만 직원들이 삼각대를 잡고 있었다.

‘뭐야, 진짜 리딩도 찍는 거야? 방송국에서 하는 것처럼?’

‘쉿, 감독님 말씀하신다.’

연습실 중앙의 큼지막한 원탁. 가운데로 나온 김률 감독이 테이블을 짚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작품 메가폰을 잡은 김률입니다.”

의례적인 박수소리가 퍼졌다.

“먼저, 우린 고사 같은 거 없습니다. 행운을 빈답시고 돼지머리에 현금 꽂고, 그래 봐야 안 될 놈은 안 되는 거 제가 잘 압니다. 대신 그 돈, 제 밥값이랑 같이 털어서 여러분 먹이고 재우고 일 시키는 데 쓰겠습니다.”

흉흉한 예고지만 그만큼 진심이 느껴진다.

원탁의 맨 끝에 앉은 이장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 아니, 전부 다 우리가 성공하리라곤 생각 안 할 겁니다. 지금도 저 새끼 따라가다 인생 꼬이는 거 아닌지 불안할 분들도 계실 거고요.”

실제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배우 몇 명이 시선을 피했다. 그때,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아닙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시커먼 수단(사제복)에 칼라까지 낀 박건이 손을 들자 중년 남배우 두 명도 합세했다.

“우리도 아녀요! 김 감독만 보고 일 확 줄였어. 영화가 망하면 굶어죽는다니까!”

주연 배우의 지원사격에 웃음이 퍼진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률 감독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많이 고생시킬 겁니다. 저도 함께 고생할 거고요. 이번 기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죽어라 찍을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아까보다 한결 열정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이 영화가 마지막인 사람들, 어쩌면 마지막일 사람들은 이곳에 많다.

만년 무명, 쓰리잡을 뛰는 단역, 데뷔조차 못한 엑스트라 출신, 서울에서 밀려나 지방 극단만 유랑하듯 전전하던 연극배우들······.

한 명 한 명을 쭉 훑던 김률 감독의 시선이 박건에게서 멎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박건 씨.’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사제복의 칼라가 살짝 까딱인다. 이쪽은 걱정 말라는 듯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 차고 넘친다.

어금니를 부러지도록 악문 김률 감독이 대본 뭉치를 들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배우들도 대본을 펴고, 스탭들은 카메라에 눈을 붙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리딩이 시작됐다.

*

두 시간 후, 연습실 문에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관계자 몇몇은 멍한 얼굴로 커피를 찾아 내려갔고, 나머지 몇 명도 방금 전 리딩을 회상하며 소름 돋은 팔목을 주물러댔다.

“···박건은 진짜 미친놈이야.”

백이십 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중심에는 단연 박건이 있었다.

‘서울의 개’ 때 미친 액션을 선보였던 최승은 약과였다. 진짜 구마사제··· 아니, 서요한 그 자체가 리딩장 한복판에 강림했다.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저희의 피난처가 되소서. 천상 군대의 영도자여, 사탄과 악신들을 지옥에 떨어뜨리소서!

이건 메소드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연기의 호흡은 또 어떤가.

리딩 내내 빙의와 구마, 또다시 빙의를 반복한 탓에, 대사를 주고받는 배우들과 지켜보던 관계자들까지 지쳐 떨어질 지경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게 되지? 뭐, AI 로봇인가? 이렇게 입력하면 저렇게 척 나오나?”

“진짜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 서울의 개 촬영현장에서도 저랬다더라.”

“보는 눈도 없는 머저리들. 저런 인간한테 거품 어쩌고 떠벌렸다고?”

박건이 로만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추측성 기사들이 깔렸었나.

로만이 섣부른 계약을 했다고, 다음 작품에서는 고꾸라질 거라는 악의적 보도도 많았다.

소포모어 징크스? 액션 원툴?

그 말을 한 기자들이 리딩장에 왔었다면 울고 불며 싹싹 빌었을 것이다.

내용 정정에 오보 사과까지 다 할 테니, 제발 영상 하나만 단독으로 내게 해 달라고.

“박건도 박건인데··· 장미? 튤립? 걔는 또 뭐야, 어디서 미친 인간을 하나 더 데려왔어.”

‘구원회’의 교주 역으로 나온 이장미에 이르러선 감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오늘 보여준 연기는 박건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대사를 뱉기 전부터 박건에게 잡아먹힌 다른 배우들과 달리, 서요한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리딩장을 치열하게 이끌었다.

물론 배우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면 이런 배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무명 감독이 사실상 첫 데뷔작에서 옥석을 찾아 데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될성부른 떡잎은 씨앗 때부터 호시탐탐 하이에나들의 콜을 받는다.

빛을 받아 한없이 떠오르거나 나락으로 영원히 묻히는 이 세계에서, 밀려난 자가 추락한 별을 찾아내는 경우는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서 온 것일까?

웬만한 매니지먼트며 에이전시를 다 뒤져도 배우 프로필은 등록된 곳이 없다.

이장미뿐 아닌 조용조, 장성화 등 굵직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도 그렇다.

이쯤 되면 김률이 섭외를 위해 다른 세상이라도 다녀왔다는 설이 신빙성 있을 정도였다.

“진짜 박건 매직인가······.”

멍하게 중얼거리는 로만 소속 팀장에게, 다른 관계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근데 뭐,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렇던데?”

“하긴. 주조연급들이 빵 터뜨려 놔서 그런가, 좀 심심하긴 했지.”

“괜찮은 배우들이 워낙 없었다잖아. 몇 명 말곤 머릿수만 채우겠다는 전략 아냐?”

“그건 그래. 백억짜리 영화도 연기파들로만 모을 수는 없잖아. 저게 현명하지.”

“······글쎄.”

평소 영화광을 자처하는, 유일하게 김률의 작품들을 구해 본 팀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무지렁이>, <빛의 영사>, <근처>까지.

김률이 말아먹은 영화들, 거기 나온 주연들은 지독한 삼류 중 삼류였다. 다른 출연작을 보면 배우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의.

그런데 김률의 영화에서는, 아무튼 준수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응? 무슨 소리야?”

영화야말로 감독 역량에 따라 배우의 연기력 커버가 극심한 매체다.

드라마에서야 촉박한 일정과 시간 배분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영화는 감독 한 명이 초보 배우를 명연기자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김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박건과 이장미가 더해진다면······.

“저 사람들, 외인구단이 아닐지도 모르겠는데.”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