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38화 (38/122)

누가 그들을 외인이라 칭하나 (6)

로만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오랜만에 진지유와 노 대표가 마주 앉았다.

아래층에서는 이미 도넛 파티가 벌어졌다. 엔젤진이라는 별명답게, 오늘도 간식을 한 보따리 싸와 돌린 참이었다.

“축하드려요, 대표님.”

차를 한 모금 마신 진지유가 인사를 건넸다.

“무슨 축하.”

“계약하신 거요. 최근에 회사 대표 배우들 다 다시 잡으셨잖아요.”

“왜, 넌 다른 데 가려고 했나?”

박건에게는 존칭을 썼지만, 이쪽은 다르다. 진지유도 제법 친근하게 말을 받았다.

“설마요. 전 로만 말고 안 간다니까요? 다른 소속사에서 뛸 바엔 은퇴하고 말죠.”

“모르는 일이지. 사람 마음은 변해.”

“안 그런 거 제일 잘 아시는 분이.”

백하니는 언급도 않고 넘어간 진지유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두고만 보시게요?”

두고 볼 일이라면 하나뿐이다. 최근 오만 곳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수상할 정도로 대응을 하지 않는 ‘그 오컬트’ 영화다.

“박 배우 영화?”

“네. 대표님 싫어하는 기자들 많잖아요. 그 사람들이 회사 신인한테도 묻은 것 같길래.”

노중만 대표는 태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아직 움직일 때가 아냐. 더 내버려 둬도 돼.”

진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질에는 도가 튼 인간 아닌가. 저렇게 말한다면 시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판을 뒤집을··· 또는 모조리 쓸어 올.

로만의 수장, 노중만이 제 회사 식구들은 끔찍하게 챙기는 것을 그녀는 안다. 직접 모셔 온 히든카드가 흙탕을 밟도록 방치할 리 없다.

노 대표의 표정에 희미한 장난기가 섞였다.

“왜, 가서 도와주지 그래? 드라마 때처럼 특출도 해 주고, 연예란 한번 싹 뒤집어엎게.”

“그럼 꼼짝없이 스캔들 나요. 지원사격 핑계로 소속 연예인 중 진지유만 보낸다고, 둘 사이에 뭐 있는 거 아니냐면서.”

“나고 싶은 건 아니고?”

진지유는 기지개를 폈다. 흰 반팔 밑으로 쭉 뻗은 팔은 건강미가 넘친다.

“그건 좀···. 아직 은퇴하긴 싫은데, 스캔들 나도 계속 저 밀어주실 거예요?”

“그래야지. 진짜 스캔들이면 더더욱.”

아이돌 출신이라지만 엄연한 탑 여배우다. 남자와 엮이는 순간 들어오는 광고, 찍을 수 있는 작품, 현실적인 주가까지 영향을 받는다.

상품인 연예인의 스캔들을 응원한다라, 소속사 대표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다.

진지유는 장난스레 웃음을 흘렸다.

“감동이긴 한데, 이번엔 안 갈래요. 거기 감독님도 싫어할 것 같고.”

“잘 생각했어. 유망주면 홀로서기도 해 봐야지.”

짧은 미팅은 금방 끝났다.

모자를 눌러 쓴 진지유가 일어날 때, 노 대표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 이후로, 연락은 없어?”

“네. 다음 달이면 1년째예요.”

“또 오면 얘기해. 처리해 줄 테니까.”

“괜찮아요. 지난번에 그렇게 끝났으니까 이젠 무서워서라도 못 찔러볼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대표실을 나오며, 진지유는 새까만 스마트폰을 꺼냈다. 원래 쓰던 스페이스그레이 색상의 아이폰보다 훨씬 구형 모델이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몇 명 없는 메신저 연락처를 내리다가 멈춘다.

‘가족, 믿음, 사랑’이라 저장된 프로필엔 중년의 부부 사진이, 상태메시지에는 짧은 글귀가 올라와 있었다.

[보고 싶다··· 우리가 잘못했어···]

“지유야!”

진지유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매니저 김영태가 복도 끝에서 커다란 손을 흔들고 있다.

“밑에서 기다리다가, 슬슬 나올 시간 됐길래 올라왔지. 대표님이랑 얘긴 잘 끝났어?”

아이돌··· 아니, 연예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진지유는 마주 손을 흔들면서 활짝 웃었다.

“응, 나 배고파. 얼른 밥 먹으러 가자.”

*

“배우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이요?”

“아, 리딩 때보다 표정이 밝아지신 것 같아서요.”

“오늘 촬영 분량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씬들도 다 재미있고요.”

본래 촬영이 많으면 피곤한 것이 정상이지만, 이 배우는 반대로 말한다.

촬영 스탭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말씀만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저희도 힘내서 잘해 보겠습니다.”

스탭이 사라진 뒤, 동생이 있는 차로 돌아온 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인데, 믿질 않으시네.”

“응? 뭐가?”

“무슨 좋은 일 있냐길래, 촬영이 많아서 재밌다고 했거든. 배역이 좋기도 하고.”

제 형이 다 외운 대본집을 열심히 보고 있던 박선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전에 봤을 때랑 대본이 좀 달라졌는데, 감독님이 형한테 더 어울리게 수정하신 모양이더라구. 내가 읽어도 찰떡이야, 진짜.”

사실이 그렇다. 서요한이라는 배역은 그와 비슷한 구석이 퍽 많다.

우선 캐릭터의 종교적 특성. 자신이 믿는 신을 증오하고, 또 불신하면서도 신성력을 받아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꼭 철왕국에 소환되어 천사의 무기, 성검을 뽑아 악마와 맞서던 용사처럼.

‘난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천사들에게는 울화통이 터졌던 기억이 많긴 했다.

―돌아가라, 인간이여. 우리는 너희의 세상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현신은 하잖습니까, 왜 못 싸운다는 건데!

―드높은 천상의 율법이다. 돌아가라.

돕지 않는다. 손을 뻗지도 않는다.

저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절대자는, 진창을 버르적대는 피조물들 입장에서 원망스러운 악당일 뿐이다.

그렇기에 서요한의 캐릭터도 흡수가 빨랐다. 캐릭터의 배경과 과거, 가지게 된 힘을 듣고 나선 자신이 모티브인가 싶을 정도다.

‘김률이 귀환자는 아닐 테고······.’

최승 때도 편하긴 했지만, 이번엔 한층 몸에 맞는 옷을 걸친 느낌이다.

새로 호흡을 맞춘 김률 감독의 디렉팅도 한몫을 한다. 캐릭터마다 특정 지점에서는 발산을, 또는 자제를 요구하며 씬을 이끌어 간다.

박건 자신을 향한 조언은 거의 없지만, 상대 배우들을 커버해 주니 NG가 훨씬 적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점은······.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드라마 촬영 때와 같다. 잃어버렸던 용사의 힘, 거기에 조각난 철왕국의 기억까지 조금씩 되살아나는 중이다.

물론 용사의 권능은 별 필요 없다. 현대 지구에 악마가 나타날 일도 없고, 촬영 중에만 발휘되는 초인적 근력을 어디에 쓰겠나.

중요한 것은 기억의 파편이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그러다 보면 공간 전이의 실마리에 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십 년간, 그 지옥불 속에서 악마를 찢어 죽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성녀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주머니가 진동했다.

스마트폰을 꺼내자 소속사 동료로부터 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진지유] 촬영은 잘 돼 가요?

요즘 뜨는 기사를 보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건은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박건] 신경 써 주신 덕에 순조롭습니다.

[진지유] 언제 한번 밥이나 먹어요. 이제 한 식구인데.

[박건] 예, 조만간 회사로 가겠습니다. 지난번에 갔을 때엔 안 계셔서요.

몇 분간 답이 없더니, 메신저에서 기본으로 지원하는 웃음 이모티콘 하나만 날아왔다.

‘알겠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니, 소속사 연예인들이 우정 출연을 해 주었을 때는 크게 한 턱 낸다고 들었다.

건은 고민하다가 메신저 선물함으로 들어가 6인분짜리 한우구이 세트를 보냈다.

[박건 님이 진지유 님에게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한우 1++등급 등심(구이용) 3KG]

[박건]술은 나중에 사겠습니다.

“연예인이니까, 잘 챙겨 먹는 게 중요하지.”

*

촬영은 계속된다.

김률은 메인 서사에 공을 들임과 동시에, 서요한에게 눈을 뗄 수 없는 개성들을 부여했다.

신실하지 못한 알콜중독 사제의 하루.

빈 술병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자취방.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고, 수단을 입을 때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도문을 읊는다.

서요한 : (귀찮아 죽겠다는 어조로)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 당신께서 저의 제비를······.

당연히 가계 상황도 좋을 리 없다. 우편함은 각종 요금 고지서와 청구서로 넘쳐나고, 현관문에는 최후통첩 쪽지가 끼워져 있다.

[이번 달에도 방세 밀리면 경찰 부르겠음, 집주인 백.]

하지만 이미 지배인과 싸운 라운지에서는 잘린 상황.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찾은 일자리로 찾아가 면접을 보지만, 사제복을 입고 한다는 이야기에 사장들은 손사래를 친다.

“아니, 뭔 편의점에서 사제복이야! 손님 쫓아낼 일 있어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저도 입기 싫은데, 벗으면 안 될 개인적인 사정이······.”

“뭐라는 거야, 절대 안 돼!”

그렇게 몇 곳을 퇴짜맞은 뒤, 주방 보조를 구한다던 식당에서는 역으로 스카웃이 들어온다.

“잘생기긴 하셨는데 그건 좀······.”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차라리 주방 보조 말고 홀서빙은 어때요? 아니면 저기, 이 앞에 강 사장한테 가 보든가. 딱 거기서 좋아할 상이네.”

“그쪽 가게도 식당입니까?”

“아니, 여자분들 오는 술집. 젊은이가 선수 같아서 하는 소리야, 흐흐흐.”

“···됐습니다.”

서요한의 캐릭터성을 조명하던 이야기는 본격적인 메인 에피소드로 흐른다.

[어제 새벽 4시경, 은평구의 폐창고에서 사체 두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속보입니다. 도림천 다리 밑,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변사체가······.]

[참혹한 광경에 말을 잊지 못할 정도입니다. 시청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하룻밤 사이, 서울의 세 구역에서 무려 다섯 명이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방송국 앵커는 심각한 얼굴로 보도를 잇는다.

[사체의 자상과 훼손 흔적이 전부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경찰은 연쇄살인으로 추정하고 수사망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어슴푸레한 새벽.

이번에는 도심의 야산에서 사건이 터졌다. 파헤쳐진 살점처럼 붉은 흙 위로, 예산을 짜내 동원한 살수차가 장대비를 쏟아붓는다.

“박 반장님, 박 반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또 연쇄살인입니까!”

폴리스라인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이 아우성치지만 우비를 입은 순경들에게 가로막힌다.

그때 저 멀리서 오는 광수대 형사 김황철, 자연스레 라인을 넘으며 명령한다.

김황철 : (담뱃재를 빗속에 털며) 기자들 봉쇄해. 좀 있으면 대장님 오실 거니까, 그 전에 웬만한 건 치워 놓고.

후배 형사 : 예, 지금 보시려고요?

김황철 : 왔으면 봐야지. 안 봐?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 젊어 보이는 순경 한 명이 뛰어나오며 구역질을 한다.

김황철 : (한심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염병을 하는구만, 형사란 놈이.

김률이 스카웃한 극단 ‘틈’의 에이스, 장성화는 지치고 노련한 형사 연기를 제대로 해냈다.

오면서 피우던 담배를 대충 밟아 꺼뜨리고, 비닐로 감싸인 현장에 다가가 몸을 굽힌다.

후배 형사 : (옆으로 다가와 브리핑한다) 이번에도 같은 수법입니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내장은 다 빼내고, 시체들을 나무에 매달아 놨어요.

김황철 : 모방범은 아니겠고··· 다른 건?

후배 형사 : (말하기도 끔찍하다는 듯) 그, 표정요. 이전 피해자들하고 똑같아요.

김황철, 시체의 얼굴을 덮은 비닐을 걷어내고 미간을 좁힌다.

분명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건만, 눈을 감은 얼굴은 환희에 찬 미소가 감돈다.

마치··· 신께 구원받은 인간처럼.

김황철 : (면도 안 한 턱을 벅벅 긁으며) 하아··· 좆같아지겠구만,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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