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기시감 (1)
* * *
큰범 엔터테인먼트.
“아, 예. 배급은··· 그렇죠, 그렇게만 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일정은 저희 쪽에서 무조건 맞출 테니까요, 예, 예.”
전화를 끊은 태 대표는 미간을 좁혔다. 사무실 저편, 빨간 펜으로 표시한 달력의 날짜가 하루하루 지워지는 것이 쏜살같다.
“···이거, 빡빡한데.”
시간이 부족하다.
배급까지 함께 하는 대형 제작사라면 몰라도, 큰범 같은 영세한 제작사는 배급사와의 조율이며 상영 배정 따위를 전부 챙겨야 한다.
여기다 전화를 걸어서 사정하고, 또 저기를 찾아가서 술을 사느라 하루하루 간과 목이 갈려나갈 지경이었다.
물론 제작사 대표로의 업무는 어떻게든 소화해낼 수 있다. 문제는 영화 촬영 및 편집 일정이다.
안 그래도 크랭크 인이 늦은 영화를, 연말 전까지 스크린에 띄워야 한다.
영화의 총 제작기간은 6개월에서 1년. 드라마에 비해 느긋한 촬영 환경이 장점이지만, 이번 ‘흑의사제’ 팀은 그럴 여유가 없다.
“이미 늦었어. 더 늦출 수도 없고.”
이제 연말까지 불과 몇 달. 12월에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해외 대작 애니메이션과 국내외 쟁쟁한 블록버스터들이 포진해 있다.
안 그래도 인기 없는 오컬트가, 그 틈에 잘못 꼈다간 뼈도 못 추리고 부서질 것이다.
태 대표의 붉은 펜이 탁자를 탁, 탁 친다.
그렇다고 연초까지 기다리자니, 이쪽도 도박이긴 매한가지다.
영화는 화제성이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될 때 밀어붙여야지, 개봉일 늦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영화가 충무로에만 수백 편이 넘는다.
잘하고 있으려나······?
조연출 한상윤이를 통해 진행 상황을 전해 듣고는 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총 투자비 45억.
밀리언 벤처파트너스 40억, 큰범이 끌어모은 돈 2억, 노중만 대표의 3억까지, 마케팅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무려 백오십만 명을 넘겨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저도 한 번만 다시 하겠습니다!’
눈을 감은 태 대표의 머릿속에 대본리딩장이 떠오른다.
“미친 인간이 둘, 좀 치는 사람이 둘, 나머지는 그다지······.”
주연들의 임팩트에 가린 덕에 말은 안 나왔지만, 다른 이들은 객관적으로도 평범하거나 시원찮았다.
촬영은 감독과 주연, 둘이서만 찍는 것이 아니다. 박건이 아무리 미쳐 날뛰어도 조연들이 죽을 쑤면 영화는 족쇄를 찬다.
띠링, 띠리링!
다음 미팅을 알리는 알람이 울었다. 양복 외투를 챙겨 일어서며, 태종범 대표는 깊어지는 고민을 애써 떨쳤다.
“···잘들 하고 있으려나?”
*
제작사 품 밖에서도 촬영은 계속된다.
태 대표의 염려와 달리, 다행히 김률은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짜는 감독에 속했다.
장소 섭외, 로케이션 확보, 씬의 순서 선정과 촬영 일정 배분.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삼사십 명이 움직이는 일정을 무슨 패키지여행처럼 착착 맞춰 놓는다.
거기에는 수년간 준비한 ‘흑의사제’ 촬영용 수첩이 큰 힘이 되었다.
이 로케는 단가가 얼마고, 저 씬은 며칠을 기다려야 하고, 강박증 환자도 놀랄 만큼 무자비한 디테일들로 현장을 리드한 탓이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감독의 원맨쇼로만 영화가 성공할 수는 없다.
“아··· 죄송합니다, 이게 왜, 미치겠네.”
막 대사를 잊어 NG를 낸 배우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사과를 거듭한다.
모두가 저 박건 같은 퍼포먼스를 보인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는 대사를 틀리고 누구는 연기력이 떨어진다.
콧대 높은 배우들이 전부 출연을 고사(固辭)한 탓에, 출연진 대부분은 무명과 단역.
그 배우들을 살리는 일은 온전히 감독의 역량에 좌우된다.
“여기서 이쪽으로 몇 걸음, 그다음 자연스럽게 멈추세요. 그리고 카메라를 오른쪽에서 안 받으려고 하시던데.”
메가폰을 놓고 온 김률이 직접 시범까지 보이자, 배우는 구세주를 만난 듯 맞장구를 친다.
“예, 예··· 제가 사실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거든요. 그러고 나선 이쪽 얼굴근육이 마음처럼 안 움직여서, 그래서 연기도 그만뒀던 거였는데······.”
“거기 신경을 쓰니 전체적인 표정도 어색해집니다. 억지로 돌리려고 하면 티가 나니, 그냥 마음껏 움직이세요. 대신 대사를 까먹어서 발성이 약해지면 안 됩니다.”
이 정도면 디렉팅이 아니라 연기 과외, 연기 강습 수준이다.
“예, 알겠습니다!”
“오 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잠깐의 휴식 후, 심기일전한 배우는 훨씬 나아진 연기력으로 OK를 받아냈다.
지켜보고 있던 스탭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김률··· 아니, 갓률······.”
“저 정도면 그냥 사람을 다시 만들어내는 수준인데? 디렉이 진짜로 족집게네.”
“모교 연영과로 몇 년을 찾아가서 학생들 수업 보고 배웠대. 자기랑 하려는 배우가 없어서, 디렉이라도 파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좋은 배우에 잘 빠진 시나리오를 주면 갓 입봉하는 감독도 수작을 찍어낸다.
김률은 정반대다. 애매하거나 모자란 조, 단역들의 연기력을 기막힌 디렉팅과 촬영 기법으로 살려내는 것이다.
덕분에, 서요한은 펄펄 난다.
“뭐요. 나 사제인데,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으니까 비키라고. 내 옷 안 보여?”
불량스러운 목소리는 고막에 꽂히고, 감정표현부터 상대 배역과의 연기 합까지 완벽하다.
롱 테이크를 이어가던 이동재 촬영감독이 소리 없는 감탄을 토했다.
‘일부러 조연들을 살리는군. 그러면서도 중심은 절대 놓치지 않고.’
생각보다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이러한 우를 범한다. 자신의 연기만 세게 가져가, 밸런스를 망가뜨리고 상대를 위축시켜 버린다.
하지만 박건은 다르다. 긁을 때는 긁고, 빠질 때는 빠지면서 영화가 처음인 단역 배우들을 끌어올리고 있다.
‘서울의 개’ 연출진들··· 특히 나종모 PD가 저 광경을 봤으면 장탄식을 토했을 것이다.
왜 하필 액션밖에 없는 조연으로 이 사람을 캐스팅했을까 하고.
디렉팅을 받는다곤 하지만, 훨씬 떨어지는 배우들을 데리고도 이 정도다. 저희끼리 물고 뜯으면서 화면을 장악하는 톱 급들을 붙여 놨다면······.
아니, 아니다.
적어도 한 명, 박건에게 밀리지 않는 배우가 아직 촬영장에 있다.
“이장미 씨는? 스탠바이 아직이야?”
“어··· 곧 나오신댔는데, 찾아볼까요?”
“데려와. 이쪽 로케 시간 안 널널해.”
딱딱하게 지시하던 김률 감독의 시선이 촬영용 트레일러 앞으로 향한다.
“······.”
서요한의 첫 등장 때와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촬영장에 퍼진다.
핏줄이 비치도록 투명한 피부 위, 새하얀 원피스가 하늘대며 나부낀다.
유령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온 이장미는 촬영장을 한 바퀴 둘러봤다.
박건이 캐릭터에서 즉각 빠져나오는 스타일이라면, 이쪽은 아예 씌어 있다. 자신의 배역인 구원회 교주, 악마를 받아들인 이유원에게.
투명한 선의로 가득한, 그래서 더욱 소름끼치는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간다. 오늘 호흡을 맞추는 상대 배역들은 벌써 질려 있다.
초점을 찾은 동공이 김률의 옆, 촬영장을 구경 중인 박건에게 꽂힌다.
“그럼, 할까요?”
*
이장미의 캐릭터는 구원회의 교주, 이유원이다.
원래도 서요한과 투 탑으로 극을 이끄는 주연급 캐릭터였으나, 이장미를 캐스팅한 뒤 배역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늘어난 분량이다.
안대 쓴 남자 : (힘없이 애원한다) 제발··· 누구든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냉동 컨테이너 안.
입김이 나올 만큼 낮은 온도에, 컨테이너 바닥은 불그스름한 성에가 잔뜩 껴 있다.
남자 옆에는 똑같이 안대를 찬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안대 쓴 남자 : (한층 절박하게) 거기 누구, 누구 없어요? 이봐요, 여기 사람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커지자, 숫양 가면들이 등장해 음산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홀린 듯 가만히 있지만 남자는 발버둥친다. 클로즈업 샷을 찍는 카메라에 언뜻 손목의 묵주가 보인다.
그때, 컨테이너의 문이 열린다.
구원회 교주 : 안이 소란스럽군요.
희고 얇은 천 옷은 흡사 성녀를 연상케 한다. 어두컴컴한 컨테이너에 한순간 광휘가 내리비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숫양 가면 하나가 패딩을 걸쳐주려 하자 교주는 손을 들어 거절한다.
“어머··· 괜찮으세요?”
귓속으로 스며드는 청아한 목소리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다.
“아아, 저는 납치···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냥 잠깐 집회에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집에는 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저런. 가족이 있는 몸이신데······.”
“예, 예. 제발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다시는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래요.”
남자는 입을 연 채 굳어버린다. 방금 말의 중간, 여자의 목소리가 굵직한 남자 목소리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교주, 이유원의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그걸 아는 사람이 여기를 오시면 안 되었지요. 더러운 동정녀의 사생아 주제에, 이딴 삿된 물건을 차고서.”
“으, 으아아······.”
“두려워? 어째서? 당신은 남을 구원하기보다는 구원받기를, 그래서 자유로워지길 원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네 신을 부르나요?”
“예,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묵주를 꽉 쥔 남자가 읊조리지만, 기도문은 덧없이 입김으로 화해 흩어질 뿐이다.
이유원, 제사장에서 주로 쓰는 도살용 식칼을 수하들에게 건네받는다. 날의 톱니에 들러붙은 살점들이 검붉은 거머리처럼 번들거린다.
몇 분 뒤, 컨테이너 안은 다시 고요해진다. 바닥의 얼음만 더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얼굴에 튄 살점을 닦아낸 이유원, 하얀 손등을 무심히 혀로 핥아 맛본다.
“그럼, 잘 비워 주세요. 지난번에는 처리가 조금 미흡했었어요.”
명령이 떨어지자 석상처럼 서 있던 숫양들이 뒤쪽의 사체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처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앵글 밖에서는 연신 철퍽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숫양 가면 중, 가장 덩치가 큰 자가 그르렁거리며 말한다.
“그냥 놓아두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표식을 내걸 때가 됐습니다.”
“아직은 안 돼요. 오랫동안 이 땅을 떠나 계셨던 분이라, 너무 빨리 존재를 드러내면 빛의 종들이 몰려들 거예요.”
“이미 십자회가 한국에 들어왔답니다.”
“누군가요?”
“오구환 마테오, 이종걸 베드로 신부입니다.”
“그들이라면 상관없어요. 경찰은?”
“허탕만 치고 있습니다. 놓은 덫에 계속 걸려들 겁니다.”
이유원은 투명하게 미소지었다.
“영생의 날이 멀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한 명이라도 더 구휼해야 한답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해질 거예요.”
“제조원과 포교원의 형제들 수를 늘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고개를 숙여 보인 이유원, 돌아선다. 그 사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서리 낀 뺨 밑에서 한층 사이한 분위기를 발한다.
마치··· 고대의 뱀신을 섬기는 사제처럼.
“컷!”
김률 감독이 외쳤다. 서요한의 안티-테제이자 정교회의 대적자, ‘하얀 교주’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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