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40화 (40/122)

묘한, 기시감 (2)

* * *

“컷!”

김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창고 문이 열렸다.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냉동 컨테이너와 트레일러를 빌렸다. 밖으로 나온 배우들에게 스탭들이 달려와 핫팩과 뜨거운 물을 건넨다.

“많이 추우셨죠,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엎드려 있느라 여기가 조금······.”

“아, 쓸리셨구나. 동상 연고 좀 발라 드릴게요.”

여느 촬영장이라면 코디며 매니저들로 북적이겠지만, 여기 온 대부분의 배우는 단역 출신이다.

당연히 매니저가 있을 리 없고, 그렇기에 스탭들이 아니면 서로가 챙겨야 한다.

“이장미 씨.”

맨 뒤에서 흐느적대며 나오는 이장미를 김률 감독이 불렀다.

“여기, 셔츠라도 걸쳐요.”

아직 이장미는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춥지도 않은지, 파랗게 된 맨팔을 멍하니 들여다보다 옷을 받아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배우가 혀를 찼다.

“고생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네.”

“응? 뭐가?”

“이장미, 반쯤 메소드잖아. 배역에 확 들어가서 자기 혼자선 못 빠져나오는. 저런 연기는 누가 케어 안 해 주면 배우 수명 쭉쭉 줄어.”

메소드 연기법.

타국의 연출가가 가이드라인을 보급해 유명해진, 배역 자체에 동화되어 그 캐릭터의 행동을 평소에도 따라하는 연기법을 말한다.

촬영장에 구원회 교주가 나타난다면 아수라장이 벌어지겠지만, 이장미는 동료들을 배역 이름으로 부르거나 소품용 칼을 휘두르진 않는다.

그저 카메라가 돌아가면 구원회 교주 그 자체가 되어 몰입하고, 촬영이 아닐 때는 저 멀리 홀로 동떨어져 있을 뿐이다.

다른 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저게 메소드가 맞나··· 그냥 친구가 없어서 혼자 집중하는 거 아냐?”

*

막간을 틈탄 점심식사 시간.

따뜻한 밥차가 들어오면 좋겠지만, 예산은 있는데 시간이 없다.

총 3개월 걸릴 촬영을 2개월, 10시간 찍을 걸 6시간에 찍으려다 보니 현장은 늘 급하다. 밥차는커녕 대용량으로 주문한 도시락을 스타렉스에 싣고 와 나눠 줄 때가 더 많다.

“아, 또 도시락?”

“주는 게 어디야. 작년인가, YTS 사극 알지? 거기 촬영장에서는 편의점 샌드위치만 먹어도 감지덕지였어.”

“거긴 작감이 쌍으로 지랄 나서 스탭들만 갈려나간 거고··· 아무튼 먹읍시다, 먹고 하자고!”

불평도 잠시, 젓가락을 뜯은 스탭들이 도시락에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

김이 나는 잡곡밥에 스팸김치볶음, 고사리와 소고기가 듬뿍 든 육개장까지.

스탭과 배우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지만, 이때도 아웃사이더는 있다.

“······.”

이장미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배역에 흠뻑 씌어 연기하는 배우들, 특히나 악역을 맡는 이들은 매 순간 예민한 상태다.

처음엔 그녀를 챙기던 스탭들도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는 분위기다. 붙임성 없는 성격에, 배우를 케어해 줄 매니저도 없으니 자연스레 혼자가 된 것이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기요. 자리 있어요?”

이장미의 시선이 올라간다. ···멍멍이? 박건의 매니저가 티셔츠의 강아지처럼 환하게 웃으며 도시락을 들고 서 있다.

“있는데, 그냥 다른 데 가서 드세요.”

“에에,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박선에게, 이장미는 평소처럼 툭 던졌다.

“그쪽 배우분 챙기셔야죠.”

“저는 여기 있는데요.”

이번에는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이장미가 흠칫하는 와중, 박건은 아무렇지 않게 옆자리에 착석한다.

“같이 먹읍시다. 저희랑 먹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거든요.”

“맞아요, 오늘은 감독님도 다른 감독님들하고 드신대서··· 역시 밥은 셋부터가 맛있죠!”

말도 안 된다. 박건과 박선 형제는 그야말로 촬영장의 분위기메이커다.

동생 쪽은 워낙 싹싹하고 상냥해서, 형 쪽은 의외로 친절한데 유머 코드도 엉뚱해서.

누가 봐도 자길 챙기러 온 거지만, 그렇다고 밥까지 들고 온 사람들을 쫓기도 뭐하다.

이장미는 젓가락을 들다가 박건의 도시락을 보고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걸 다 드세요?”

“예. 오늘은 개수가 모자랄 것 같아서 조금만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들고 있는 건지 이해도 안 되는 양이다. 통에 적힌 것만 봐도 육개장 세 개에 밥은 다섯 개, PD 말론 배우 사비로 식비를 보탠다더니···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나?

“다음 일정이 어디였지?”

“어··· 아마 과천? 거기에 김 감독님이 로케 따 두셨댔어.”

“갈 때 내가 운전할게. 넌 뒷자리 가서 좀 자.”

“형, 나 실직시키려고 그래? 나 형 매니저야!”

대수롭잖은 잡담을 듣고 있자니, 내내 까끌거리던 속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다.

이장미는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형제를 흘끔거렸다.

부러움 위에, 약간의 궁금증이 덮인다. 동생이 매니저면 불편한 건 없으려나? 소속사엔 같이 들어갔다는데, 그럼 페이 분배는 어떻게······.

“연기가 더 좋아지셨던데요. 리딩 때보다.”

갑자기 박건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산더미 같던 도시락은 어느새 바닥이 드러난 뒤다.

“···감사합니다. 박건 씨도요.”

“시나리오가 좋아서 그렇죠, 뭐.”

그러고 보니 리딩 때도 별다른 얘길 나누지 않았다. 혹시 캐스팅 이야길 꺼내려나, 긴장했지만 박건은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춥게 계시지 말고요.”

말과 함께, 체크무늬 남방이 어깨를 덮는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김률 감독의 옷이다.

“형, 커피 마실래? 장미 배우님도 드실래요?”

박선이 활발하게 묻는다.

저 멀리, 한상윤 PD가 싣고 온 전기온수기에 스탭들이 달라붙어 커피를 타고 있다.

“아, 제가 가서······.”

“아뇨. 이럴 때는 제일 키 큰 사람이 가는 겁니다.”

“뭐야, 잠깐! 그럴 거면 가위바위보를 하던가!”

일어난 배우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그 뒤를 매니저가 따라간다.

이장미의 시선이 도시락통으로 내려갔다. 내내 굳어 있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돌았다.

“···아직 마신다고도 안 했는데.”

*

촬영 현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로케이션 일정 펑크? 급작스러운 우천이나 기상이변 등 외부적 요인?

아니다. 그것들은 어쨌든 내부 결속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작은 날갯짓으로 현장 분위기에 영향을, 나아가 지장을 주는 것은 끝없는 NG다.

“컷. 다시 가겠습니다.”

박건은 ‘서울의 개’에서도, 이번 ‘흑의사제’에서도 사실상 NG가 없다. 씬을 다시 따야 해서 찍은 재촬영이 전부다.

나머지 사람들도 한 번에 가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닐 때가 더 많다.

“컷, 다시 갑니다.”

세 번째.

“컷, 다시.”

네 번째.

“컷, 십 분만 쉬었다 갑시다.”

기어이 쉬었다 가자는 말이 떨어졌다.

지금 찍는 씬은 박건과 부마자들의 다대일 전투 장면이다.

박건과 붙어야 할 단역 배우가, 자신의 빙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한다.

“자, 십 분 쉬신답니다!”

“물 좀 드세요, 배우님.”

서요한으로 분한 박건이 아무렇지 않게 땀을 닦아내고, NG를 낸 배우는 생수병을 받아들곤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그놈의 빙의, 빙의가 문제다.

부마자가 어색하면 씬 전체가 우스꽝스러워진다. 감독이 아무리 카메라 마사지를 죽여주게 넣어도 살릴 수가 없다.

“······.”

김률의 이마에 파인 주름이 깊어졌다.

저쪽에서 스탭들이 위로하고 있지만, 이미 배우는 멘탈이 나갔다.

이런 상황에는 아무리 날고 뛰는 감독도 답이 없다. 우선 씬을 넘겨야 하나? 차선을 택하려 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빠듯한 형편이다. 오늘 안 됐던 연기가 다음날 된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로케이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다.

옆으로 다가온 조연출이 속삭인다.

“감독님, 아예 뒷부분을 잘라내고 갈까요?”

“안 돼. 씬이 없으면 시퀀스에 공백이 떠.”

김률이 고개를 가로젓는데, 시커먼 사제복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직 쉬는 시간 맞습니까?”

십 분이 안 지났으니 맞긴 맞다. 김률이 얼떨결에 끄덕이자 박건은 배우 쪽으로 다가갔다.

“호러 영화.”

“예, 예?”

드디어 주연 배우의 짜증이 터진 것일까. 화들짝 놀라는 배우에게 새로운 디렉이 내려온다.

“제가 최근 호러물을 많이 봤습니다. 저주의 밤, 시체인형, 코즈믹 나이트메어. 혹시 아십니까?”

이름만 들으면 아는 호러, 또는 좀비 영화들이다. 명색이 배우란 자가 세계 탑 10에 뽑히는 명작들을 안 봤을 리 없다.

“예, 저도 보긴 했는데······.”

“저는 악마 빙의도 좀비의 일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허기 대신 맹목적인 증오, 시체의 특성 대신 짐승의 행동양식만 뽑아 넣는다면요.”

배우의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생소한 디렉션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탓이다.

좀비는 차라리 쉽다. 세기의 호러 킹 존 홉스는 좋은 좀비 엑스트라를 만드는 법을 자서전에서 공개하기까지 했다.

웨이트와 기계체조로 코어를 단련하고,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동작 십여 종을 몸에 익히면 훌륭한 좀비가 된다.

하지만 빙의는?

박건의 말이 이어졌다.

“구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해방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옭아매던 현실에서 벗어나, 죽이거나 죽임당함으로써 자유를 찾는.”

추후 영화 내용에서 밝혀지지만, 구원회는 열성 신자들에게 환각 성분이 든 약을 먹인다.

그리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구원하겠습니까.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 영화에서의 부마자란··· 가상의 악마에게 씌인 것이 아니라, 이성이 해제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관객들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요.”

배우의 눈빛에 깨달음이 스친다. 감독용 의자에 앉은 김률은 몸까지 기울인 채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배역은······.”

“구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날 비웃고 무시했던 사람, 내가 미워했던 이들을 심판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해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구원받는 쪽을 선택하면 극도의 황홀경 상태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 죽어가게 한다.

구원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떠돌던 악마가 빙의한다. 타락한 부마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의 사제, 제가 그 적입니다. 원수를 찢어 죽인다는 각오로 덤비십시오.”

“하지만 그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괜찮습니다.”

말과 함께, 박건이 사제복 소매를 걷었다. 몸무게를 감량했음에도 불끈거리는 전완근은 일반인의 두 배에 가깝다.

“전부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악마··· 가 아니라, 간질 때문에 착란 증세를 일으킨 사람을 구해낸 경험도 있고요.”

“그··· 특수부대에서 그런 것도 배우나요?”

“아버지가 소방관이셔서요.”

회복? 저 팔뚝을 봐선 구하는 게 아니라 영영 잠재워 버릴 것 같다.

침을 꿀꺽 삼키는 배우에게, 무표정으로 돌아간 사제가 지시한다.

“감정 잡으시죠.”

재촬영한 씬은 두 번 만에 OK가 나왔다.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부마자 역할의 배우들은 여기가 어색했네, 저긴 괜찮았네 하며 합동 피드백까지 들어갔다.

김률 감독이 눈인사를 보내자 흙 묻은 사제복을 털던 박건도 고개를 조금 숙여 답한다.

스탭 중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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