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44화 (44/122)

폭풍우를 헤치고 (3)

* * *

“아버지, 꿈은 왜 꾸는 걸까요?”

“꿈?”

“예. 원래는 거의 안 꿨었거든요.”

어머니는 가족들 중 가장 일찍 출근한다. 두 아들과 아침을 먹던 중, 아버지 박열호는 추억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글쎄. 아빠 같은 경우에는··· 돌아가고 싶거나, 반대로 돌아가기 싫거나, 아무튼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이 나오더라.”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요?”

“그렇지. 예를 들면 여기, 이거.”

박열호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가 헐렁한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일을 많이 꾸지. 내 한평생, 이때 출동했던 꿈을 가장 많이 꿨던 것 같구나. 가지 마, 가면 안 돼, 소릴 지르며 깨어난 적도 있었으니까. 땀에 젖어 일어나면 참 허무했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박선이 진저리를 쳤다.

“세상에, 생각만 해도 정말···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소방관에게 화염이 악몽이라면, 손이 잘린 사고는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박열호, 은퇴한 소방관은 아들들을 향해 허허로이 웃었다.

“글쎄, 아빠도 어디서 읽은 거긴 하다만··· 꿈이라는 건 무의식 속에 강렬히 각인된 기억이라고 하니까. 언젠가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 그땐 그랬지, 하면서 말이야.”

*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

핸들을 잡은 박선은 운전 내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형,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응. 멀쩡해.”

“근데 원래는 안 꿨었다며, 혹시나 요즘 무리해서 몸이 허해진 거면 어떡해. 양씨 아저씨한테 보약이라도 몇 첩 지어다 줄까?”

형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알아서인지, 더 염려하는 기색이다.

“괜찮아. 악몽도 아니었고, 좀 반가운 얼굴이 나와서.”

“그럼 다행이지만······.”

촬영이 거의 마무리된 지금, 확신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다.

커리어와 기억, 양쪽 모두에 있어서.

‘자, 그럼 큐 들어가겠습니다!’

슛이 들어가면 찾아오는 옛 감각은 이제 익숙한 수준에 이르렀다.

작중 배역으로 몰입해, 빙의한 악마들을 깨부수는 것도 썩 재미있었다. 비록 용사 고드였다면 기도문 대신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그래서일까. 며칠 전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옛 동료가 떠오르기도 했다.

‘녀석이 알았다면 섭섭해했겠군.’

‘죽음을 쫓는’ 에르한.

에른의 후예이자 에르헤든의 아들.

철왕국 끄트머리에서 합류한 쌍검의 달인.

몰락한 변경백의 후예답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숙원에 목마른 사내였다.

ㅡ내 숙원은, 악마를 찢어 죽이거나 악마에게 찢겨 죽는 것이다.

회차 중, 수없이 죽었던 초반부에도 녀석은 일행 맨 앞에 나가 싸웠다. 그리고··· 항상 용사인 고드를 구하고 죽거나 함께 죽었다.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기이하여, 어느 밤에 물은 적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필사적이냐고.

ㅡ고드. 너는 내 삶의 이유다. 내가 살아남아 악마 몇 놈쯤 더 죽인대도, 용사가 실패한다면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나게 돼.

ㅡ왜지? 네 고향은?

ㅡ이 땅에 더 이상 변경백은 없다. 할아버지는 악마에게, 아버지는 인간에게 죽었지. 봉토를 잃은 군주, 변경에서 쫓겨난 변경백이 택할 길은 둘뿐이다.

모닥불의 불티가 튄다. 그늘진 얼굴 속, 꿰뚫릴 듯한 안광만이 새파랗게 빛난다.

ㅡ악몽을 부수고 깨어나거나··· 그 속에서 영원히 잠들거나.

그 고집스러운 신념 때문일까. 김률에게서 에르한이 겹쳐보인 까닭은.

‘형, 우리 감독님은 진짜 미친 거야. 조수에 기사도 없이 혼자 가편집 다 따는 감독이 어딨어? 저러다 쓰러지시면 어떡하려고······.’

아니, 쓰러지지 않는다.

건은 턱을 쓸었다. 혹시나 싶어 유심히 지켜봤지만, 선천적인 강골에 체력도 좋다. 몇 주쯤 더 지나더라도 별 사고는 없을 것이다.

그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끝이 가까워질수록, 육체는 한계를 넘어선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그거네.”

코를 훌쩍인 박선이 말했다.

“그거?”

“응, S25였나? 그 형사들 나오는 씬. 원랜 엊그제였는데, 장소 섭외한 곳에서 말을 바꿔서 순서가 밀렸댔거든.”

글로브박스에 동생이 가져다 놓은 대본 뭉치가 꽂혀 있었다.

그나저나, 어젯밤만 생각하면 우습다 못해 민망할 정도다.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지. 이별한 연인마냥 ‘잘 지냈어요?’는 좀······.

‘자기가 꿈에 나왔다고만 해도 배를 잡고 웃었을 텐데, 그 사람 성격이라면.’

생각하며 대본을 읽던 건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 이거.”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흥미롭던 씬이다.

*

오늘 찍는 씬은 후반부 중 하나다.

형사 취조실처럼 꾸며 둔 사무실에서, 광수대 형사들이 서요한을 심문한다.

S25#2. 경찰서 취조실

김황철 : 왜 죽였냐?

서요한 : (고개 숙인 채 묵묵부답)

김황철 : 서요한이, 부둣가 앞 CCTV에 네가 들어가는 거 다 찍혔어.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엔 네 피랑 지문이 덕지덕지 묻었고. 구원회 교주, 이유원이는 왜 죽였냐고!

서요한, 김황철의 목소리에도 아무 반응 없이 자신의 두 손만 내려다본다. 사제복 칼라에 갈색 자국이 묻어 있다.

김황철 :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구원회 놈들, 그 미치광이 새끼들이 약 풀면서 사람들 죽이고 있던 거 알아. 근데 네가 이러면 아무것도 못 도와준다. 걔들이랑 묶여서 평생 썩는 거라고!

서요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한숨을 내쉰 김황철이 나가고, 다른 형사 두 명이 들어와 심문을 이어간다.

“이 사이비 새끼가, 귀에다 뭘 처박았나. 왜 사람 말을 씹어?”

몸을 숙인 형사가 으르댄다. 텅 빈 눈을 들며, 서요한··· 아니, 건은 회상한다.

‘이런 때도 있었지.’

점차 인간성이 마모되어 가던 용사행의 중반부였을 것이다.

또 한 차례, 악마 사냥을 마치고 들어온 그는 성기사들에게 체포당했다.

ㅡ용사, 고드를 포박하라!

ㅡ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얌전히 뜻에 따라라!

분개한 철왕국 수뇌부와 교황청은 용사를 심판대에 세웠다.

죄목이 뭐였더라. 민간인 학살과 용사의 책무 불이행, 신성 모독이었던가?

“이 새끼가, 말을 귓등으로 듣나.”

“내버려 둬. 변호사 믿고 저러는 거잖아.”

앞에서 지껄이는 형사들이 긴 창을 든 왕실근위병과 겹쳐진다.

쇠사슬로 묶인 용사 앞에서, 배불뚝이 대주교가 근엄하게 묻는다.

ㅡ타락한 용사여, 왜 그들을 죽였는가?

ㅡ···죽였다고?

ㅡ라베뉴의 산골짜기, 그곳에서 선량한 신민들을 수없이 학살하지 않았는가!

마경의 입구, 철왕국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성채 라베뉴.

그곳의 모두를 죽였다. 성채 안의 마을도, 인접한 다른 마을 주민들도.

전부를 베어 골짜기를 피로 물들였었다.

“선량이라, 웃기는군.”

“무엇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가? 불화의 모데움, 저 두 번째 대악마에게 산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악마에게 혼을 빼앗기지 않은 인간들이, 어린아이와 여자만을 잡아서.”

용사, 고드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으로 홀을 훑는다.

잘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배신자, 협잡꾼, 타락한 귀족과 악마에게 혼을 판 교인들.

···이제는 알 수 있다. 이 빌어먹을 지옥에서, 정말로 사라져야 할 것은 악마가 아니다.

악마를 닮은, 그들 인간이다.

“너희 교황청도 알고 있었겠지.”

“신성모독을 멈춰라, 용사여!”

“다시 시작하긴 싫어서 돌아왔는데, 도저히 못 참겠군. 진짜 악마들을 두고 대악마를 쫓던 내가 경멸스러울 정도야.”

용사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선다.

성기사들이 엮은, 은총의 쇠사슬들이 뜯겨나가며 빛으로 화해 스러진다.

“날 잡으려면 저 위, 무능력한 비둘기들이라도 데려왔어야지. 이깟 장난감이 아니라.”

“막아라, 놈을 막아!”

“죽여도 된다! 용사를 참수하라!”

대주교가 꽥꽥대며 소리치지만 왕실근위병도, 정예 성기사들도 무력하다.

극성에 달한 합기는 신성력마저 찢어발긴다. “크악, 커헉!” 용사가 손을 떨치자 검붉은 파동이 뻗어나가 성기사들을 천장에 처박았다.

“제발, 그만······.”

이미 근위병들은 눈과 코로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다. 성검이 대주교의 목으로 향한 순간, 홀의 문이 열리며 성녀가 뛰어들어온다.

“용사님, 멈춰요!”

.

.

.

“야, 이 새끼야!”

형사의 거친 욕설에, 용사의 의식 속으로 잠겨들던 본체가 깨어난다.

이곳은··· 돌아온 지구다. 앞의 남자는 타락한 대주교가 아니며, 그는 지금 카메라들 앞에서 영화 배역을 연기하는 중이다.

용사 고드가 아닌 배우 박건으로서.

“···악마가 아니었다.”

“뭐라는 거야, 또?”

짜증스레 파일철을 넘기던 형사가 움찔한다. 서요한이 고개를 든 것이다.

“돌개바람, 숫양, 뱀과 늑대의 상징물··· 이제 알겠군. 놈은 처음부터 이유원에게 부마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죄악을 범하도록 만들려고.”

멍한 눈빛 속에, 서서히 광기가 들어찬다. 형사 역을 맡은 배우가 얼어붙지만 NG 사인은 나오지 않는다.

대사?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씬은 서요한이 통째로 잡아먹어야 할 컷이다.

“소, 손이······.”

수갑을 채워 둔 손목에서 피가 흘러 떨어진다. 일어서는 사제와 움찔하는 형사들, 진짜 공포가 불러온 연기가 카메라에 담긴다.

“가야 해, 더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서요한의 대사가 이어질 때, 취조실 문이 열리고 김황철이 들어온다.

*

로만 엔터테인먼트 라운지.

공 팀장과 최필립, 매니저 김영태가 커피 한 잔씩을 들고 둘러앉았다.

“이제 진짜 막바지네. 겨울 냄새도 나고.”

라떼를 홀짝인 최필립이 운을 뗐다.

“뭐가, 올해 남은 날이?”

“아니, 흑의사제 촬영. 연말 피하려고 크랭크업 빡세게 당긴댔잖아.”

공 팀장이 빙긋 웃었다.

“필립 씨가 그쪽 현장에 관심이 많네요?”

“전우잖아요, 전우. 특수부대 브로.”

“그럼 전화라도 해 보시지, 무려 최필립이 응원해 줬다면서 촬영장 난리 날 텐데.”

“아, 또 그 정도 사이까진 아니라서.”

한 발짝 쓱 빼더니, 이번엔 자기 매니저한테 징검다릴 놓으라고 재촉한다.

“형이 나중에 거기, 박건 씨 매니저 만나면 전화번호 좀 물어봐. 내 번호 줘도 좋고.”

“···필립 씨, 나 홍보팀장이잖아.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뭘 모르시네. 소개팅은 직접 하는 거예요.”

검지를 좌우로 흔든 최필립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홍보팀이 손 놓고 있어도 되겠어요? 촬영 끝나자마자 가편집본 받고··· 그거 수정해서 예고편 내고, 영화관 걸릴 때까지 홍보자료 뿌리려면 시간 빡빡할 텐데.”

매니저 김영태도 한 다리 거들고 든다.

“맞아, 원래 그 바닥 실제 촬영보다 전후로 준비기간이 더 길잖아.”

“아, 우리 영화 홍보?”

여유가 넘치다 못해 줄줄 흐르는 투다. 의심 섞인 시선들 앞에서, 공 팀장이 극적으로 두 팔을 들어올렸다.

“이미 시작했는데. 첫 번째 떡밥 투척.”

“아니, 그걸 왜 지금 얘기해요!”

두 사람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차피 홍보자료가 올라올 곳은 뻔하다.

유튜브를 검색해, 이어폰까지 귀에 꽂고 보던 최필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무슨······.”

매니저가 말을 받았다.

“떡밥이 아니라 돌돔이네, 월척이야.”

*

메이킹영상이 풀렸다.

큰범 한상윤 PD가 부지런히 찍어 홍보실로 보낸 영상 중, ‘떡밥’으로 낙점된 부위는 서요한의 첫 구마 장면.

공 팀장은 메이킹필름에 별다른 편집을 가미하지 않았다. 갓 잡은 회엔 온갖 공을 들여 봐야 신선도만 떨어진다.

어떨 때는 심플한 것이 가장 강하다. 마치 한때 유행하던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현장감을 극대화하고 편집은 최소화해서.

나머지는 안의 내용물이 책임질 것이다.

[흑의사제 메이킹필름 - Ver.1]

-???? 이왜진?

-떴다 드가자ㅏㅏㅏㅏㅏ

-이게 메이킹필름이야 공포영화야 ㅋㅋㅋㅋ

-뭔 메필을 이렇게만드냐... 심장떨리네 ㅠ

-귀곡령 이후 한국 오컬트는 죽었어...

-(죽은 줄) 알았었어...

-아니 로만놈들아 빨리 영상풀어라 쌓아둔 거 다 안다

-왜 로만을 욕함 큰범을 쪼아야지

-제작사나 소속사나 그놈이 그놈이니까

-그래서 예고편은 언제나오는데? 개봉일은?

-찾아보니까 크랭크인 얼마 전에 들어갔던데... 촬영도 끝나려면 꽤 걸릴 듯 ㅇㅇ

*

S33#3. 창고

피 묻고 찢긴 사제복 차림의 서요한. 손에 무언가를 쥔 채 주저앉는다.

“······.”

멀찌감치 둘러선 스탭과 배우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이동재 촬영감독이 클로즈 샷에서 클로즈업 샷으로 앵글을 당긴다.

···악마는 어떻게 되었나?

근처의 땅만 어지럽게 파헤쳐 있을 뿐. 악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위이이잉ㅡ

먼 곳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붉은 빛살이 지상으로 비쳐든다.

먼동이 터 오고 있다.

땀에 젖은 김률이 목소리를 높였다.

“······컷!”

영화 ‘흑의사제’.

크랭크인 시작 후 63일 하고도 17시간.

공식 촬영 일정이 모두 종료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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