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를 헤치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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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률은 큰범이 대여해 준 성수동 스튜디오에서 편집 작업을 한다고 했다.
스튜디오 앞 주차장에서, 형제는 낯익은 빨간 투싼을 발견했다.
“아이고, 박 배우님! 선이 씨도!”
“오셨습니까, 대표님!”
흰 꽃다발을 들고 차에서 내리던 태종범 대표가 손을 흔든다.
“딱 여기서 만나네. 아니, 근데 뭘 이렇게들 많이 사 오셨어요?”
“그러는 대표님은 꽃다발까지··· 크, 이거 받고 감독님 감동하시는 거 아니에요?”
태 대표는 멋쩍게 꽃다발을 감췄다.
“김 감독이 어디 그럴 사람인가. 그냥 구색이나 맞추려고 오다 샀어요.”
두 손에 짐이 많긴 이쪽도 마찬가지다. 편집본 첫 공개 때는 선물이 예의라는 얘기에, 와인과 케이크를 좀 사 온 참이었다.
작업실로 올라가니 이미 낯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미 씨, 성화 씨!”
“오랜만에 뵈어요, 두 분 다.”
이장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극단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져, 투명하던 뺨에 불그스름한 핏기도 돈다.
“용조는 못 왔어요. 그새 어디 에이전시에서 일감 물어 왔다던데,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촬영 일정이 꽉 찼대서.”
아쉬워하던 장성화가 이장미를 쿡 찔렀다.
“너도 바쁘다며? 여기저기서 찾는다더라··· 아주 나만 빼고 몸값 올라가는 소리 들려.”
“뭐래, 억울하면 잘하든가.”
“와··· 벌써부터 연예인 병이 그냥······!”
시끌시끌한 와중, 사람들에게 가려 있던 김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골처럼 핼쑥한 뺨은 여전하지만, 눈빛은 사뭇 또렷하다. 긴 터널을 기어이 헤쳐 온 자 특유의 단단한 광채다.
“김 감독, 일단 받아. 생화야, 생화!”
성질 급한 태 대표가 꽃다발부터 안긴다.
“웬 아카시아를 이렇게······.”
“보니까 꽃말이 좋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완성본은 잘 뽑혔어?”
김률은 대답에 앞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제작사 스탭들, 주연과 조연과 그 일행들··· 영화의 주역들을 쭉 둘러본 감독의 입에서 기다렸던 말이 떨어졌다.
“보시면 알 겁니다.”
“그래, 얼른!”
“저도 보고 싶어요. 오늘 편집본 첫 공개래서 올 때부터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하.”
“장성화, 주접 그만 떨고 의자나 옮겨.”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급한 대로 주변을 치우고, 의자를 몇 개 가져와 간이 상영관을 만들었다.
문 앞에 선 장성화가 슬레이트 치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자, 불 끕니다?”
그때, 마지막 손님이 등장했다.
이상철 엔터테인먼트 본부장과 공기형 홍보팀장이 들어온 것이다.
“보··· 본부장님!”
대표가 아닌 본부장이라지만, 어쨌든 대형 기획사의 넘버 투다. 박선이 차렷 자세를 취하는 가운데 본부장이 빙긋 웃었다.
“내가 와도 되는 자리죠? 공 팀장이 간다길래 대표님 대신 따라왔는데, 괜히 여러분 불편하면 내려가고요.”
“아닙니다, 무조건 환영입니다.”
본부장이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눈 뒤, 드디어 모두 착석을 끝내고 불이 꺼졌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32인치짜리 모니터를 주시했다.
기대와 걱정 속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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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시간 55분이 사라졌다.
“와, 이거는.”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장성화가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거는, 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이다. 문 옆의 한상윤 PD는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땀을 닦았고, 이장미도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나왔지? 촬영장에서 본 거랑 전혀 다른데.”
“내 말이. 주연들은 그렇다 쳐도 조연들은 뭐야, 아예 사람이 달라졌잖아.”
편집을 거친 김률의 디렉팅은 촬영 현장에서보다 더한 마법을 부렸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대사 한 마디짜리 단역조차 연기파 배우를 섭외한 듯 분위기가 줄줄 흐른다.
미장센은 또 어떠한가. 영화 전반을 흐르는 장엄하고 괴괴한 분위기에, 장용 미술감독과 김률이 합작한 영상미는 32인치짜리 모니터를 특별관 초대형 스크린처럼 만든다.
개봉 당일, 스크린 앞 관객들은 저 파괴적인 영상미에 숨도 쉬지 못하고 빨려들어갈 것이다.
“살면서 봤던 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박건의 담백한 평에 이어, 박선도 더듬거리며 감상을 전했다.
“저는 원래도 재관람을 좋아하긴 하는데요. 이건 무조건 두 번··· 아니, 세 번, 거기다 감독판까지 볼 것 같아요.”
“재관람이 문제겠어요? 당장 본 날 연짱으로 여섯 시간 앉아 있으래도 하겠는데.”
“김 감독, 나는 길게 안 할게. 여태까지 본 김률 작품 중에서도 최고였어.”
자연스럽게 한 마디씩 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이 자리의 최연장자이자 최고참, 로만의 실세에게로.
본부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공 팀장 쪽을 돌아보았다.
“공 팀장은 재관람할 시간 없겠는데?”
“옛!”
공 팀장이 잽싸게 작업실을 나가고, 한상윤 PD가 허겁지겁 따라 나간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상철 본부장이 물었다.
“이제 얼마나 남은 겁니까?”
“거의 다 됐습니다. 동시녹음본 선별해서 재녹음까지 진행됐고··· 사운드이펙트, 그러니까 효과음 제작이랑 DI(색보정)만 마치면 완성입니다.”
“속도가 엄청나군요. 현장에 편집기사도 없었다고 들었는데.”
“시간도 부족한데, 에디터스 컷 대신 촬영이 끝나자마자 제가 가편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종본도 그만큼 빨라지니까요.”
영화제작, 즉 프로덕션 과정에 대해 이해도가 있는 이라면 저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알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군. 기획, 촬영, 거기다 편집까지 혼자서 다?’
치솟던 본부장의 눈썹이 제 위치를 찾았다. 지금은 인재 스카웃이 아니라 영화 홍보를 고민할 때다.
“대신 색보정 작업은 조금 시일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비도 부족하고, 제가 원래 잘하던 분야가 아니라서요.”
“내가 MBS 제작본부 출신 에이스를 알아요. 지금은 어디 기술지원팀 고문을 맡고 있을 텐데, 손 좀 빌려 보죠. 장비는··· 뭐, 우리 쪽 작업실이면 나쁘진 않을 겁니다.”
김률의 눈도 번득인다. 대형 방송국 출신 기술자에 좋은 장비? 시간 단축 정도가 아니라 색감으로 관객들을 기절시킬 수도 있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이장미가 손을 들었다.
“저, 그럼 우리 홍보는요? 그냥 예고편이랑 시사회 정도만 하나요?”
“그러게요, 요즘은 영화도 어그로 잘 끌어야 관객이 들던데. 우리랑 붙는 게, 그 스릴러 하나랑 무슨 사극풍 로코랑······.”
장성화가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는 걸 태종범 대표가 받았다.
“‘살인열차’랑 ‘우리들의 네 가지 사정’. 이거 두 편이 몸집은 제일 커요.”
“저도 전단지 같은 건 돌릴 수 있습니다.”
일어서려는 박건을 박선과 김률이 뜯어 말렸다.
“형, 누가 요즘 영화홍보로 전단지를 돌려!”
“···배우가 발벗고 나서면 좋긴 한데, 영화 자체의 이미지가 좀 약해질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그럼 후시녹음 때 효과음만 돕겠습니다.”
“예? 효과음을요?”
유심히 듣고 있던 본부장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김 감독님은 모르겠군요. 우리 박건 배우가 아주 다재다능해요. 웬만한 이펙터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김률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상철 본부장은 웃음기를 지웠다.
“이 영화, 대부분이 망한다고 볼 겁니다.”
“······.”
“그리고 또, 망하길 바라는 사람도 많겠지. 드라마판 반짝 스타에 언더독 제작진들··· 그런 놈들이 축배를 들면 배가 아프니까. 이장미 배우 음해공작도 그 일환이었을 겁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진지해진다. 이장미는 말은 안 했지만, 입술이 잠시 살벌하게 달싹거리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우리는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정면이라면······.”
“똑같이 스팸기사 뿌리고 어그로 끌고, 진흙탕에 들어가서 뒹굴어야죠. 홍보팀이 맞고만 있느라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가장 공격적인 마케팅 수단이다. 부정적인 여론에 장작을 더 넣으며 불판을 키운다.
박선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다른 대응을······.”
로만 홍보팀이 잠잠하던 이유다. 잔챙이들이 설친다고 미리 나가 싸우면 화제성만 떨어진다.
물론 단점도 뚜렷하다. 이목을 끈 만큼, 막상 내놓은 결과물이 엉망일 때엔 어마어마한 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잘 빠졌을 때, 또는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줬을 때에는······.
지잉ㅡ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 본부장은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해 봅시다. 우리 쪽, 바쁘신 한 분도 모처럼 참전하신다니까.”
*
‘흑의사제’ 상영 22일 전.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충무로의 창’이 이길 거라는 김률파, ‘시청률의 방패’가 버틸 거라는 박건파가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언더독은 당연히 후자 쪽이다.
제목 : 흑의사제 망하냐 흥하냐?
실시간 투표
[김률 우위 83%] : [박건 우위 17%]
내용 : 국내외 영화만 3500편을 섭렵한 본인이 볼 때, 결국 흥행이란 통계임 ㅇㅇ 그러니 “One hit” 박건보다 “Multi boom” 김률이 우세할 확률이 높음
-개소릴 정성스럽게도 싸놨네
-1히트 VS 4좆망
└충무로의 불운 VS 진브스 라이징스타
└└영화판 테러리스트 vs 드라마국 안전요원 ㄷㄷ
-제작비 대충 50억이라는데... 그럼 200만은 들어야 본전치기 이상임
-200만? 바로 충무로의 불운 판정승 점친다
└그래서 몇명?
└└배우 이름값은 있으니 80만 찍고 IPTV로 전환해서 본전치기
-80만이 쉬워보이냐 ㅋㅋㅋㅋㅋㅋ 신인 하나에 떨거지들 넣고 비볐는데?
-혹시 모르지, 영화는 감독 놀음임. 드라마처럼 시간이 촉박하면 모르겠지만.
└맞음 디렉에 따라 연기는 바뀜
└└응 니들은 그냥 모르는 것 같다 ㅋㅋㅋ
-이래 놓고 까 보니 개쩔어서 500만 찍고 대종상 쓸면 재밌겠네 ㅋㅋ
└개봉하면 결판나겠지~ 난 볼 생각임 ㅇㅇ
크랭크인부터 말이 많던 박건의 신작이다. 심지어 촬영 도중, 요즘 흔치 않은 ‘여배우 성접대’ 논란까지 떴었다.
판결문이 나왔고 로만이 나서서 불길을 진화했지만··· 물어뜯을 구석은 많다.
[흑의사제가 무조건 삼백만 가는 EU] (34)
추천 22 / 비추천 67
[김률이 이번에 터질 수밖에 없는 까닭] (21)
추천 15 / 비추천 45
거기다 웬 어그로꾼들이 영화 커뮤니티마다 교묘하게 장작을 넣어, 논쟁은 커져만 갔다.
망작일까··· 아니면 평작일까.
그냥 망할 영화라기엔 메이킹필름 이후 공개된 예고편이 지나치게 강렬하다.
하지만 소위 ‘예고편만 보면 다 본’ 영화도 많은 게 이 판 아니던가.
그렇게 헛불만 붙던 차,
[‘흑의사제’ 선공개 유료시사회 결정, 개봉일보다 14일 빨라]
[주말 양일, 단 1회차··· 사실상 ‘프리미엄 선공개’에 이목 집중]
예정돼 있던 개봉일은 그대로 둔 채, 유료시사회가 결정됐다.
그리고 이 뜨거운 감자는 1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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