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47화 (47/122)

폭풍우를 헤치고 (6)

* * *

“······.”

B열 4번 석에서 콜라 컵을 터져라 꽉 쥐고 있던 장윤수, 블로거 ‘vigilia’는 눈을 의심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는 자타공인 오컬트 매니아다. 아니, 영화광이라 해도 옳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블록버스터··· 그 다음에는 독립영화, 난해하기로 소문난 예술영화까지 섭렵하다가 오컬트로 빠졌다.

‘그리고 실망했지.’

한국에서 오컬트란 비주류 중 비주류다. ‘만트라’였던가? 작년 초, 제작비만 150억을 썼다던 작품이 엎어진 뒤 기대를 접었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작품이 나왔지?’

이쪽을 좀 파 본 놈이면 알 수 있다. 장르영화의 문법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대사 하나, 소품 하나에 거장의 미장센이 느껴진다.

액션에는 트렌디한 카메라워킹, 연출에선 호러, 컷의 분배엔 독립영화의 감성마저 녹아 있다.

ㅡ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장윤수는 넋 나간 듯 시선을 들었다. 스크린 속에서는 사제가 몸을 빼앗으려 온 악마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ㅡ네 아비와 어미도, 그 신부 놈도 내게 죽었지. 그런데 너의 신은? 네가 믿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위선자는 나타났더냐?

ㅡ삿된 속삭임을 멈춰라!

ㅡ안타까운 그리스도의 종아, 너도 알겠지. 저들은 그저 너를 이용한다는 걸. 믿음을 수탈하고 구원의 희망에 취하게 하여, 비명 지르는 양떼를 구경하며 즐거워할 뿐임을.

ㅡ아니··· 그렇지 않아······.

ㅡ원망하는 신을 섬겨 온 불신자여. 네 두려움이 보이는구나,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셈이냐?

사제의 고통스러운 부정, 마귀의 간교한 비웃음이 연달아 귀를 후벼판다.

처음 큰범에서 오디션을 볼 당시, 태 대표를 경악시킨 그 장면이다.

보통 1인 2역은 연기의 편차가 크다. 허나 서요한은 악마에게 일부는 잠식당하고, 일부는 먹히지 않는 디테일을 소름끼치게 표현했다.

···맑은 물에 먹을 푼 것처럼, 마귀의 유혹은 믿음을 검게 물들여 간다.

ㅡ도망치거라. 네 신은 결코 널 구원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포기한 악마가 떠난 뒤, 서요한은 비틀거리며 십자가를 찾는다.

마귀가 휩쓸고 간 방 안은 아수라장이다. 쓰러진 스탠드 옆, 늘 가지고 다니던 은십자가는 검게 탄 채 녹아내려 있다.

ㅡ속보입니다, 구원회 신자들과 반 구원회 신자들이, 오늘 광화문 광장에서 충돌했습니다. 두 집단의 충돌로 여섯 명이 다치고······.

구원회는 무서운 속도로 세를 불린다. 거리는 구원받지 못해 절망한 자, 그래서 분노한 자들의 싸움으로 얼룩진다.

결국 서요한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장미십자회의 신부들을 찾아간다. 헤어질 때, 두 신부가 구해 줘서 고맙다며 명함을 건넸던 것이다.

적혀 있는 주소를 찾아, 도착한 무인모텔 옥상에는 까마귀들이 모여들어 있다.

ㅡ···빌어먹을.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간 서요한의 앞에 끔찍한 참상이 펼쳐진다. 모텔 벽에 사제들의 피로 휘갈겨 적힌 라틴어가 번들거린다.

Sanctum est

거룩할지어다

모텔을 나오는 서요한의 머리 위로, 까마귀들이 비웃듯 우짖으며 날아오른다.

사제는 고뇌한다.

경찰은··· 안 된다. 몇 명이 먹혔을지 모른다. 시의원 두엇이 벌써 구원회의 존재를 인정하니 마니 싸우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절망감 속에서, 서요한은 본다. 그들의 양복에 새겨진 악마의 상징을.

ㅡ미친 마귀 놈이, 사람한테 씌는 게 아니라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민중을 홀린 악마들이 소시민을 넘어 유력자에게 들러붙으려 한다. 놈들이 무엇을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구원회를 지원하며 새로운 먹잇감을 조달하겠지. 희생시킨 목숨으로 더욱 힘을 키워, 요직의 인물들을 조종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악의 파국에 잠길 것이다.

ㅡ하느님 아버지, 그리스도와 성 미카엘이시여. 제 영과 육이 불탄다 하여도 저 마귀만큼은 잡아 죽이겠습니다.

추적 끝에 서요한은 어느 폐공장에 도달한다. 그곳은 약을 조제하고, 신자들을 부마시키는 의식이 벌어지는 구원회의 아지트였다.

ㅡ야, 이 지옥에서도 쫓겨난 마귀 새끼들아!

ㅡ크르르륵······.

ㅡ와 봐. 니들 다 족치고 회개하려니까.

부마자들 수십이 달려들지만, 필사의 각오를 다진 서요한의 기도에 튕겨져 나간다.

작품 막판 지원을 온 영상편집팀은 각종 CG를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눈부신 광휘, 서요한이 발휘하는 ‘신성한 벽’은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영화에 섞여든다.

결국 구원회 교주, 이유원이 등장한다.

ㅡ다시 오셨군요, 사제님.

ㅡ어제 찾아와 놓고 모른 척은. 그 사람한테 들어가면 뭐가 달라지냐?

부모님이 죽은 날과 같은 돌개바람이 다시 몰아치고, 힘겨루기 속에서 이유원은 한 발짝씩 거리를 좁혀 온다.

ㅡ잠깐, 무슨······!

ㅡ뭘 망설이시나요, 찌르지 않고? 사제님의 원수가 눈앞에 있잖아요.

갑자기 통하지 않는 신성력에 당황하는 사이, 이유원은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의 몸이 문득 멈춘다.

ㅡ아······.

흰옷에 피가 번져나간다. 자신의 심장에 박힌 칼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유원··· 구원회의 교주는 야릇한 미소와 함께 쓰러진다.

순간, 서요한은 깨닫는다.

이유원은 부마된 적이 없었다.

*

특별상영관 맨 윗자리.

노중만은 문득 목을 쓸었다. 셔츠 옷깃 뒤쪽이 온통 축축하다.

‘영화를 보면서··· 땀을 흘렸다고?’

수천 편의 영화를 봤고, 그보다 더 많은 배우들을 보았다. 영화 한 편에 이렇게 빨려든 것이 얼마 만이던가?

수갑을 찬 채, 죽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서요한이 중얼거린다.

ㅡ이제 알겠군. 놈은 처음부터 부마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죄악을 범하도록 만들려고.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할 때가 있다. B급과 무명 배우들에게 도박을 걸 때, 연예계의 소문난 핵폭탄을 스카웃할 때, 위기에 빠진 아이돌을 그 소굴에서 꺼내 왔을 때.

이 세계는 찬란하기에 잔혹하다.

몇몇 별들은 혼자서만 빛난다. 주변의 빛까지 잡아먹으면서 눈부신 광채를 퍼뜨리다가, 제 압력을 못 이기고 폭발해 사라진다.

ㅡ시팔, 경찰 인생도 이제 끝이구만. 사람 죽인 범죄자를 다 빼돌리고.

ㅡ······.

ㅡ말 좀 해 봐, 새끼야. 난 이런 거 쥐뿔도 모르니까, 그 미치광이 집단 정체가 뭐냐고!

장성화라고 했나, 무명 극단의 배우가 박건과 동등한 위치에서 씬을 지배한다.

혼자의 힘이 아니다. 마법에 가까운 감독의 디렉팅··· 그리고 동료의 역량을 멱살 쥐고 끌어올린 주연과의 시너지다.

달리는 차 안, 조수석 손잡이에 수갑 찬 손목이 연결된 서요한이 차분히 말한다.

ㅡ놈들은 아마 오늘 의식을 할 겁니다. 새벽닭이 울 즈음··· 먼동이 트는 제 0시에, 여섯 양과 세 인간을 제물로 바쳐서.

ㅡ그럼 뭐, 총이라도 쏴야 되냐?

ㅡ부마자는 은과 성물이 아니면 못 막아요. 난 성력을 전부 잃었고.

ㅡ야, 그럼 어떻게 하라는······.

쾅ㅡ!

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물트럭이 그들이 탄 차 옆을 들이받는다. 마귀에 홀린 운전자가 사제를 막으러 달려온 것이다.

자욱한 연기 속, 서요한은 손가락을 비틀어 수갑에서 빼낸다. 룸미러에 걸려 있던 나무 십자가가 힘없이 흔들린다.

ㅡ···정체를 밝혀라, 불결한 마귀야.

마지막 의식이 벌어지려던 곳은 어느 야산의 중턱이다. 묶어 둔 제물들 앞에서, 숫양 탈을 쓴 신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돌아본다.

서요한의 몰골은 처참하다. 검은 사제복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손목은 부러진 채 축 늘어져 덜렁거린다.

ㅡ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신성함을 잃은 사제는 악마의 장난감이다. 서요한의 몸이 기괴하게 꺾이면서, 고통에 차 일그러졌던 입술이 열린다.

ㅡ나는 먼 바다를 건너왔다.

탁한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 영화관 한쪽에서 작은 비명이 터졌다. 아무리 후보정을 거쳤다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를 악문 서요한, 흐려지려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ㅡ숫양의 머리, 늑대의 갈기, 뱀의 꼬리··· 그래서 찾을 수 없던 거였어. ···아몬.

악마의 정체는 아몬, 또는 아문 라. 공기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옛 헤르무폴리스에서 타락한 고대의 신이었다.

ㅡ힘을 잃은 채 오랫동안 떠돌았지. 이 땅은 향기로운 냄새가 그득하더군. 증오와 혐오, 폭력과 분열들. 환란의 전조가 나를 깨웠다.

ㅡ이유원은, 그녀는 어째서······.

ㅡ그 계집은 자청하여 나를 따랐다. 그녀의 구원은 죽는 날까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간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으니까.

ㅡ···여호와시여.

ㅡ오, 모든 거짓된 우상들의 신. 복수를 위해 가짜 신앙을 바쳐 온 사제의 부름에 과연 응답을 해 줄까? 이제 죄악을 범해 제 아들에게도 버림받은 배교자인데.

떨리는 손이 사제복 주머니로 들어간다. 피투성이 손가락에 걸려 나온 것은 형사의 차에서 가지고 온 작은 십자가다.

ㅡ내 힘은 거의 돌아왔다. 성력도 사라진 주제에, 그걸로 뭘 하려고······.

비웃듯 말하던 아몬의 목소리가 변한다. 돌연 십자가 끝에 푸르스름한 빛이 서린 것이다.

ㅡ분명 힘을 잃었을 터인데, 어떻게······!

ㅡ내가 체질이 좀 독특하거든. 갖고만 있어도 너 같은 놈들, 혼이 쏙 빠지게 변하더라.

힘겹게 웃은 서요한, 십자가를 손바닥 한가운데 내리찍는다. 피가 튀고 무서운 비명이 울린다. 아몬이 도망치려 하지만, 사제의 정신력은 몸 안의 악마를 빠져나가게 두지 않는다.

ㅡ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ㅡ그만, 멈춰라!

ㅡ···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목을 타고 터진다. 필사적인 사제의 기도와 악마의 저주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데 뒤섞인다.

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ㅡ타락한 사제, 더러운 죄인아! 영겁의 불못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며 괴로워하거라, 네 신과 동포들에게 구원이란 없을 것이다!

ㅡ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서요한의 몸에서 아른거리던 털과 비늘, 양뿔이 하나둘씩 바람에 날려 스러진다. 눈을 감은 사제는 마지막 기도문을 외운다.

ㅡ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

.

싸움은 끝났다.

동이 트는 산중턱에, 서요한은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사제의 몸에 닿아 성물로 변했던, 아몬을 물리친 십자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경찰차가 보인다.

긴 숨을 내쉰 서요한,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십자가를 몇 번이고 내리찍었던 상처는 찢어지고 벌어져··· 희미한 십자 형태를 그리고 있다.

구름을 뚫고 내리비친 빛무리가, 신도 악마도 아닌 한 인간을 비춘다.

“······.”

관객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스크린만 바라볼 뿐이다. 화면이 암전한 뒤, 어둠 속에서 흰 글자가 새겨지듯 나타난다.

구원을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

압도적인 영화를 봤을 때, 상영 직후 통로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아무 말도 없이 고요하거나,

반대로 왁자지껄하거나.

이번 유료시사회는 후자 쪽이었다.

“대박, 진짜 미친 거 아냐?”

“나 보면서 오줌 마려운 줄도 몰랐어.”

“뭐··· 말이 안 나오네, 저건 그냥 감독이 사이코거나 천재야.”

참았던 반응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다. 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난 눈 가리고 봤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눈물을 훔치는 일행들도 있다.

“야, 조용조 우냐? 울어?”

“개소리야, 누가 울었다고.”

손을 뿌리치는 출연 배우 옆에서, 정작 극단 동료가 눈시울을 붉힌다.

“난 진짜로 눈물 나. 그렇게 고생하고 이제야 빛 보는 것 같아서. 여태 너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냐.”

“···쟤는 왜 갑자기 저래, 쪽팔리게.”

“우우우, 장성화 또 쿨한 척··· 아까 뿌듯해 죽겠다는 표정 다 봤거든?”

“와, 영화는 안 보고 옆사람을 훔쳐보네.”

장성화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는 사이, 조금 뒤에서는 장신의 부자(父子)가 걷고 있다.

김률의 아버지는 실감이 안 난다는 표정으로 자꾸만 상영관 쪽을 흘끔댔다.

“그러니까··· 저거, 저 영화를 네가 만들었다고?”

“예.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요.”

“같이는 무슨, 감독이라면서? 그럼 김률이가 만든 거지, 누가 또 수저를 올려!”

짐짓 호통을 치지만 주름진 입가는 꿈틀거리고 있다. 앞, 뒤, 옆에서 아들의 칭찬이 쏟아지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놈, 재밌더라. 연기를 잘해, 내 젊었을 적에 보던 강백산이 같아.”

“아, 박건 배우요.”

“이름은 모르겠고··· 그래도 네 엄마는 안 왔을 게다. 귀신 나오는 걸 워낙 무서워해야지.”

빈 음료 컵을 들고 걷던 김률은 웃었다.

“그러셨을 거예요. 영화관은 소리도 커서.”

“그래, 내 한 번은 같이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글쎄 그때······.”

두 사람이 긴 통로를 빠져나왔을 때였다. 앞쪽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어, 어어, 김황철!”

“저··· 혹시 방금 나왔던 형사님 아니세요?”

“흠흠, 맞습니다. 이쪽은 한 대 맞고 날아갔던 사제고요.”

“야,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

“대박······!”

입을 가린 여성 관객들을 선두로, 금세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이거야말로 리얼리티 100% 커튼콜이다. 극단 동료들은 숫제 매니저를 자청하며 장성화와 조용조의 사진을 찍어줬다.

“자, 자, 한 분씩 서세요.”

“방금 본 영화에 나온 배우랑 사진 찍을 기회, 이거 흔치 않습니다. 왜냐면 쟤들 다 생판 무명이거든요.”

“얌마, 말을 해도 꼭!”

그때, 신이 나서 포즈를 취하던 장성화가 멀찌감치 서 있는 김률을 알아봤다.

“어, 감독님!”

“감독님? 저분이 흑의사제 감독님이에요?”

“그럼 누구겠어요. 우와, 오늘 보신다더니 여기로 오셨네!”

깜짝 게릴라가 갑자기 커졌다. 그냥 조연도 신기한데, 감독까지 왔다면 소규모 GV(Guest Visit)나 다름없다.

배우들에게 끌려온 김률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김률의 아버지와 장성화가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아버님!”

“뭐, 방금 형사 양반이라고?”

“옙.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님을 키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난장판에서, 노난 것은 얼떨결에 계 탄 관객들이다. 기존 ‘흑의사제’ 팬들, 방금 영화에 빠진 사람들은 앞다퉈 사인을 요청했다.

“대박, 뭔 일이야 오늘. 시사회라 영화 스탭들 다 놀러왔나 봐.”

“저도 사진 좀 찍어주세요. 괜찮으시면 팸플릿에 사인도 좀······.”

“예. 해 드려야지요.”

“감독님, 다른 영화는 안 찍으셨어요?”

처음 알아본 여자 관객의 질문에, 장성화가 제 일처럼 뽐내며 가슴을 폈다.

“몇 개 찍었는데요, 곧 다 재개봉할 거예요. 충무로 블루칩 예약이거든요.”

옆에 있던 조용조도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영화판 제작사들 이제 큰일 났어요. 감독님 깐 배우들은 잠도 못 잘걸요.”

“다 죽었지! 어딜 감히 김률을 넘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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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 팬미팅은 잠시 후에야 끝났다.

겨우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김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김 노인은 무인발권기 앞에 서 있었다. 옆으로 가 보니 화면을 넘기면서 뭔가 찾는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망할 놈의 로보트, 여기는 왜 안 나와?”

“그러니까 뭐가······.”

“네 영화 표! 한 번 더 살랬는데 흑인지 뭔지가 안 보이잖아. 이름이 다르냐?”

···재관람이었군. 김률은 씩씩대며 매표소 쪽으로 가려는 아버지를 붙들었다.

“아버지, 이건 매진이에요. 오늘만 특별히 한 거고, 개봉은 2주 뒤에 해요.”

“그 때도 그 사람들이 와?”

“예? 사람들요?”

“아까 봤던 젊은 양반들 있잖아. 너한테 감독님, 감독님 하던 친구들.”

김 노인은 말하고도 멋쩍은지 지팡이를 괜히 바닥에 툭툭 쳤다.

“사내놈이 말이야, 그렇게 자기 홍보도 하고 그래야지. 아무도 못 알아보면 감독 감투가 무슨 소용이냐, 응?”

서서히, 김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무뚝뚝하고 괄괄한 아버지지만 그는 보았다.

관객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 아들을 지켜보며, 김 노인이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아버지, 나중엔 저랑 영화 찍은 배우들 다 와서 시사회할 거예요. 아버지가 연기 잘한다던 박건 배우도요.”

“그럼 너도 거기서······.”

“예, 그러니까 지금은 밥 먹으러 가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평양냉면 먹고, 작업실 모시고 가서 다시 틀어 드릴게요.”

그날, SNS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사내가 ‘흑의사제’ 팸플릿을 들고 활짝 웃는 사진이었다.

폭풍을 견뎌낸 자에겐 보상이 돌아온다.

영화의 흥행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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