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의 주인공들 (4)
* * *
“와······!”
“김률, 김률!”
“해낼 줄 알았어요, 감독님! 진짜로 대종상 다 찢었다구요!”
벌떡 일어선 ‘흑의사제’ 팀이 날뛰고, 카메라가 잽싸게 가까이 다가온다.
다른 카메라는 놓칠세라 ‘누런 강’ 팀 쪽을 클로즈업해 비춘다. 초짜에게 다 된 밥을 뺏긴 감독은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배우들은 잽싸게 미소 지으며 박수를 친다.
김률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만 있다.
“감독님.”
“······.”
소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이 모든 영예를 선사한··· 절망의 밑바닥에서 손을 내밀어 준 배우가 빙긋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올라가시죠.”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리며 무대에 선 김률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진다.
이 무대에서 제작자가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중고 무명 감독이 손에 쥐었다.
“···의 접수를 집계한 바, 가장 높은 득표와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흑의사제’가 수상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고 수상 소감을 말할 시간, 김률은 입을 떼지 못하고 마이크를 몇 번이나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때 저 멀리 방청석에서 고함이 들렸다.
“김률, 최고다! 잘 찍었다!”
벌떡 일어선 태종범 대표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클로즈업된 무대 뒤쪽 전광판에, 퉁퉁한 뺨으로 흘러내리는 반짝임이 잡힌다.
연기가 아니다. 이 돈 좋아하고 부산스러운 제작사 대표는 진심으로 감격하는 중이었다.
“고생하신 두 분께,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재차 박수가 쏟아진 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김률이 입을 열었다.
“저는 충무로의 불행이었습니다.”
떠돌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불운의 상징, 실패보증수표, 독립영화 제작비도 아까운 꼴통. 온갖 모멸과 경시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너라면 네 영화에 나가겠냐, 거기서 연기할 바엔 포르노를 찍겠다, 실제 배우 분들에게 얼굴 앞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홀 안이 쥐 죽은 듯 변했다.
앞 열에 앉은 유명 배우들, 뒤쪽에 앉은 배우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김률의 회고를 들었다.
“저는 제 성공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간 실패했던 이유는 그래서인지도 모릅니다. 배우와 스탭들, 그들을 한 팀이자 가족이 아니라 제 징크스를 떨쳐낼 도구로 여겼기에.”
장성화와 조용조, 단역들을 비롯한 ‘흑의사제’ 팀 스탭들은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눈이 충혈되고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김률은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다.
수없이 들여다봤을 촬영장의 붉은 불빛, 그 한가운데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예술인에게 긍지는 곧 혼과 같습니다. 이 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걸었던 영화인의 인생에 긍지를 되찾아 준··· 박건 배우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표정은 침착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대조를 이뤘다.
그것은 긴 터널을 헤치고 나온, 한 인간의 사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언이었다.
“우리 스탭들은 알겠지만, 박건 배우의 촬영장 별명이 ‘용사님’이었습니다. 오늘 제게는 그가 용사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한 인간을, 제 꿈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김률 감독은 ‘흑의사제’ 팀이 모여 앉은 중간 열 쪽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몇 초 후, 아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박수의 해일이 홀을 휩쓸었다.
*
건은 생각한다.
‘···어떻게 된 일이지?’
조금 전··· 김률의 이름이 호명되고, 갈채가 쏟아질 때 그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수상대에 선 김률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선명한 환청이 귓가를 내리쳤다.
[다섯은 없다.]
“형, 형!”
동생의 목소리에, 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김률이 앞에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부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박 배우가 없었다면, 저는 아마 지금쯤······.”
“아유, 김 감독! 좋은 날에 왜 이리 주책이야? 잠깐 따라와 봐!”
“그래요, 감독님. 저희랑 같이 진정 좀 하고 다시 들어와요.”
결국 태 대표와 장성화가 김률을 데리고 홀을 나간 뒤, 박선이 소리 죽여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어?”
“아냐.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시상식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무대로 올라온 다음 수상자가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째서, 지금은 촬영 중이 아닌데?’
합기··· 용사의 권능은 느껴지지 않았다. 철왕국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확실했다. 방금 목소리는 드높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예언을 전할 때, 천둥처럼 울리던 천사들의 음성이었다.
타이밍은 더더욱 수상하다. 하필 동료가 자신의 이름을 얘기할 때, 그것도 용사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환청이 들렸다.
작품 촬영 중이 아닐뿐더러 이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없었는데도.
···이 접점들이 과연 우연일 것인가.
‘그럴 리 없겠지.’
무심히 생각하며, 건은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찬란한 조명 속에서 환호가 쏟아진다. 신인상을 연달아 수상할 때에도 미동조차 없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만약 그가 저기 있었다면 무엇을 보았을지에 대한, 옛 용사의 미련과 회한으로.
금박을 입힌 종이들이 꽃잎처럼 휘날리며 홀로 떨어졌다.
목소리는 오랫동안 귓가를 맴돈다.
다섯은, 없다.
*
대종상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올해 대종상의 주인공은 상반기의 800만 흥행을 이끈 ‘누런 강’도, 인기 배우와 제작비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너를 찾아서’도 아니었다.
무려 대종상 4개 부문 석권. 압도적인 지표로 시상식장을 휩쓴 외인구단이었다.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우후죽순 쏟아진 기사의 제목들이 그를 증명했다.
[김률, 대종상 시상식서 고백··· “나는 충무로의 불행이었다”]
[‘올해의 주인공’ 박건, JNBC에 이어 대종상까지 신인상 2관왕]
[은희욱X나종모 사단, ‘서울의 개’ 흥행 주역은 단연 박건]
[무명 감독을 대종상영화제 주역으로··· 박건의 ‘용사행’이 구한 꿈과 긍지]
[시상식 휩쓴 ‘충무로의 괴물들’ 포토월 모음]
온갖 악플들도 오늘만큼은 화력에 밀려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쏟아지는 격려와 환호 위로, 여태 말을 아끼던 유명 평론가가 방점을 찍었다.
씨네99| 김정익 저널리스트
★★★★☆ 8.5
[현대판 용사의 대서사시. 누가 그들을 외인구단이라 칭했나?]
*
“아후우······.”
블라인드 걷힌 사무실. 홍보팀 남직원이 기지개와 하품을 동시에 했다.
“와, 벌써 낮이야. 얼마나 못 잤지?”
옆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던 여직원이 대꾸한다.
“이제 겨우 22시간? 아까 수면실도 다녀와 놓고서 엄살은.”
“그게 어디 잠이냐··· 팀장님은?”
공 팀장의 자리에는 버건디 색 수트만 허물처럼 등받이에 걸려 있다.
“아래층 사우나 가신댔어. 안 올라오면 기절한 거니까 119 불러 달라더라.”
“누구 마음대로 응급실을 가, 우리한텐 이 고생을 시켜 놓고!”
분개한 남직원이 포효했다.
어제, 그리고 그제.
두 번의 시상식은 박건과 그의 동료들을 화제성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쏟아지는 기사들을 모니터링하고, 불이 난 전화통을 커버하고, 필요한 곳에 연락을 넣어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다 쉬었다.
그중 최고는 김률의 수상소감이 전파를 탄 직후였다. 장작을 넣을 필요도 없이, 무서운 기세로 솟구친 불길은 정점을 찍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조용히 하고 눈곱이나 좀 떼. 팀장님 오시면 3차전 시작이야.”
아직 잔불이 남아있다. 그것들을 긁어모아 다시 연기를 피워야 한다.
텀블러 속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킨 남직원이 물었다.
“박건 배우님은? 오늘은 매니저님하고 안 놀러오시겠지?”
“설마. 어제 밤새 달려서 주무시고 계실걸.”
여직원의 말에, 남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휴, 그런 거 보면 배우도 할 게 못 된다니까. 영화판 사람들 술이 얼마나 센데.”
*
“우으웨에에엑······.”
“감독님, 괜찮으십니까?
“욱, 우윽······.”
“장미 씨도 생각보다 술이 약하셨군요.”
이쪽 화장실에선 김률이 토하고, 저쪽 변기에서는 이장미가 끙끙거린다.
건은 화장실을 옮겨 다니며 등을 두드려 주다가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 ‘흑의사제’ 팀은 미리 섭외한 양갈비집, 곱창집, 노래방에 이어 한상윤 PD의 집까지 와서 소맥을 들이부었다.
‘마셔, 오늘 다 먹고 죽는 거야! 박선 씨, 혹시 지금 일어나려는 거 아니지?’
‘저··· 저는 집에 가게 해주세요······.’
‘됐고 김 감독, 잔 들어! 오늘 영화판 최고 술꾼이 누군지 가려 보자고!’
신나게 달리던 태 대표가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뒤, 김률과 이장미만 남아 박건을 상대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우웨에엑!”
한상윤 PD가 사는 집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의 오피스텔.
서울로 상경할 때, 지역 유지인 아버지가 직접 와서 골라 준 전세집이란다.
작게 딸린 발코니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전망이 꽤 그럴듯하다.
‘높은 곳이 좋긴 하지. 공습 위험만 없으면.’
환청이고 뭐고, 일단 사는 세계의 의식주는 중요하다. 철왕국의 왕성까지는 안 돼도 복합주상 아파트 정도면 훌륭한 편 아니겠는가?
이번 ‘흑의사제’ 러닝개런티로 들어올 예상 수익은 10억 원 이상.
광고를 몇 개 찍고, 정산이 다 될 때쯤 주머니를 털어 보면······.
“거기서 뭐 해요?”
발코니 문을 빼꼼 연 이장미가 부른다. 뒤쪽엔 다 토했는지 김률도 비틀거리며 서 있다.
“바람 좀 쐬고 있었습니다.”
“날이 찬데··· 아니, 그보다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습니까? 전 아직도 죽을 것 같은데요.”
“예. 술이 센 편이라서요.”
“와, 진짜 술괴물······.”
그나마 이 둘은 술이 센 편이다. 한 PD와 태 대표를 포함한 나머지는 다 진즉 나가떨어졌다.
거실로 돌아와, 숙취해소음료를 쭉 들이킨 이장미가 말했다.
“감독님, 그 얘기 건이 오빠한테도 해주세요. 어제 다른 테이블에서만 했잖아요.”
“아, 재개봉.”
김률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급사 관계자들 쪽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지금까지 찍었던 영화들도 소소하게나마 재개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칸까지 가야죠.”
거기에 이장미의 일목요연한 평이 더해진다.
“흑의사제, 해외 쪽 첫 반응도 심상찮아요. 거기다 요즘 동양권 작품들도 밀어주는 추세라, 나중에 정말로 초대장 날아올지 몰라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비경쟁부문이어도 좋고··· 만에 하나 경쟁작 부문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축포다.
“오빠는요? 앞으로 뭐 하려고요?”
같은 오빠 소리도 이쪽은 진지유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정말 예전에 알던 대학 후배나 동네 동생을 보는 기분이다.
“연기를 계속 해야겠죠.”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박건 씨 연기력이면 어느 무대로 가도······.”
진지하게 말을 잇던 김률이 또 화장실로 달려간 뒤, 둘만 남자 이장미가 물었다.
“혹시 오빠, 시상식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스탭은 속여도 같은 연기자는 속일 수 없다. 건은 간단하게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감독님 소감을 듣는데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 멍청한 질문이네.”
혼자 픽 웃은 이장미가 말한다.
“오빠랑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기나 돈이나··· 이런 건 그냥 따라오는 부산물일 거라고요. 어쩌면 그렇게 잘하는 연기마저도.”
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들었다.
“아무튼,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할 수 있는 건 무조건 도울게요.”
“무조건이란 말은 위험한데요.”
“사람 한 명을 살려 주셨는데, 그만하면 무조건 달려갈 만하죠. 이래봬도 은혜랑 원수는 안 잊는 성격이라.”
아이고, 죽겠다··· 문 닫힌 작은방에서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태 대표와 한상윤도 슬슬 깨어난 모양이다. 건은 돌아서려는 이장미를 불러세웠다.
“저, 그럼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이장미가 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거요?”
“제 얘기는 아니고. 혹시 같이 술 마시고도 스캔들 안 나는 방법이 있습니까?”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