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빠르게 (3)
* * *
다시 로만 엔터테인먼트 라운지.
‘곤란한데.’
오랜만에, 건은 고뇌한다.
책상 위에는 시나리오 뭉치 세 개가 놓여 있다.
JNBC 주말극, MBS 미니시리즈, 나종모 PD가 직접 전해 주고 간 영화 대본까지.
분노의 바다··· 소년은 복수를 결심했다··· 세렝게티 크라운··· 하나같이 흥미로운 내용에, 연기해 보고픈 배역들의 극들이었다.
그리하여 하루에 하나씩, 오디션을 전부 본 결과는 처참했다.
‘어떻게 이게 다?’
오디션에 탈락한 것이 아니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도 이쪽이 거절한 것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개 때에도, 흑의사제 때에도, 오디션 때부터 느껴지던 용사의 권능이 자취를 감췄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가 리터째 들어간다.
처음엔 그냥 안 맞는 시나리오도 있겠거니, 가볍게 생각했었다. 오디션 세 번이 연속으로 빠그라지기 전까지는.
“느낌만 안 왔지, 내용은 딱 맞았는데······.”
분노의 바다는 무난한 스릴러물이다. 해군 출신 주인공이 날뛰는 게 재미있다 싶었는데, 막상 가 보니 시나리오가 문제가 아니었다.
촬영장의 불빛. 큐 사인. 피디와 상대 배역, 다 똑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
나머지 드라마 하나와 영화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둘 다 주연이 비었고, ‘소복결’은 캐스팅이 끝났지만 그가 온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까지 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용사의 힘, 합기는커녕 철왕국의 냄새조차도 나지 않는다.
‘예? 못 하실 것 같다고요?’
합류 불발을 전하자 조연출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 되어 매달렸다.
‘어째섭니까. 얘기라도 해 주십쇼. 페이 문젭니까, 아니면 그··· 아, 소복결 그 친구들이랑 하기로 하신 겁니까?’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영화 크랭크인에 들어가신다면··· 그래도 저희 아직 방영일까지 여유가 좀 있습니다! 일정은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까······!’
나름대로 짬 있는 PD, 이름난 중견 작가지만 최고의 흥행카드를 놓치고 싶을 리 없다.
달라붙는 연출진을 겨우 떨쳐내고 나오면서 건은 전화를 걸었다.
‘응, 선아. 지금 여기 끝났거든. 부탁했던 오디션들 일정 좀 확인해 줄 수 있어?’
질이 아니면 숫자다.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른 곳에 찾아갔지만 좌절만 반복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캐릭터 해석 능력이 부족해서 합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배우님, 잠깐만요. 배우님!’
이만하면 민폐 수준이다. 잘 이야기하긴 했으나, 계속 오디션만 보고 다니다간 부적절한 오해를 살 게 뻔하다.
연예인병 걸린 놈이 작품마다 찔러만 보면서 제작진들을 기만한다는.
“귀환 이래 최대의 난제군.”
시상식이 끝난 직후, 그는 야심찬 기억 복구 플랜을 세웠다.
용사의 힘과 연기.
이 두 개의 매커니즘은 분명하다. 합기는 철왕국과의 연결고리며,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거듭할수록 기억의 파편들이 돌아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작품과의 궁합, 거기서 나오는 타인들과의 관계··· 아마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어떤 동력이 되어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록 ‘다섯은 없다’라는, 그날 밤의 환청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지만.
‘또 하면 되니까. 어차피 작품이 끝나고 오래 휴식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라고 여겼다. 작년에만 두 편을 했으니, 일 년 내내 작품만 찍으면 세 편까지도 찍지 않겠나.
그런데 그 폭주기관차가 초장부터 멈췄다. 아직 반도 못 갔는데, 선로에서 탈선한 채로.
건은 미간을 눌렀다. 불화의 모데움, 그 대악마의 사념 광선에 맞은 기분이다.
촬영상의 문제는 괜찮다. 어려운 배역이면 따내면 그만이고, 고된 일정은 그가 동료들을 커버해 이끌어 가면 된다.
하지만 칼이 있어도 죽일 악마가 없으면······.
“실례합니다.”
누군가가 어깨 뒤에서 그를 불렀다.
“예.”
다가오는 건 알았지만, 다른 직원이겠거니 해서 내버려 뒀던 남자다.
목소리는 이십 대 중반쯤. 두툼한 방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는데, 곰 귀가 달린 발라클라바(털실로 된 방한모)까지 쓰고 있다.
‘······뭐지?’
이 바닥 마당발인 동생이라면 알아봤을 수도 있지만, 박선은 아직 못 본 시나리오를 구해 보겠다고 잠깐 자리를 비웠다.
의문의 남자가 다시 물었다.
“혹시 서요한 씨입니까?”
“아뇨, 박건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방금까지 영화를 보다 와서··· 너무 몰입해 버렸나 봅니다.”
백 퍼센트 배우다. 말투가 느릿느릿한데 딕션은 자막 버금가게 정확하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누구신지······.”
“아, 이런.”
남자는 방한마스크를 벗고 발라클라바까지 뒤로 젖혔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게 잘생긴, 회사 홈페이지에서 본 얼굴이 나타났다.
“소인, 구신승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진정으로 의금지영(衣錦之榮)입니다.”
“예?”
*
‘흑의사제’ 크랭크인 이전.
리딩을 앞두고 백하니와 최필립을 만난 날, 공 팀장은 동료 배우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었다.
‘지유 씨는 사교성 좋고 싹싹하죠. 하니 씨는 전에 봤던 그대로, 한결같이 지랄맞은 편. 최필립 씨도 좀 비슷해요. 그 백하니랑 치고받을 만큼 한 성격 하니까.’
‘그렇습니까.’
‘연예인이다 보니 다들 가면은 있는데, 이 바닥에서야 당연한 일이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구 배우는 못 봤죠? 구신승 씨.’
‘예. 선이도 본 적 없다고 하더군요.’
공 팀장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중얼대면서도 재밌어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나중에 봐도 너무 놀라진 마요. 저 넷 중 제일 독특한 사람이니까.’
‘어떤 점이 독특합니까?’
‘음, 메소드?’
‘메소드라면 연기법 아닙니까.’
‘그렇죠. 보통 연기자가 캐릭터에 몰입하려고 쓰잖는 게 메소드인데, 구 배우는··· 큭큭, 연기랑 일상이 반대로 됐거든.’
한참 큭큭거리던 공 팀장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자기가 감명 깊게 본 영화, 소설, 만화를 다 따라한다는 얘기예요.’
구신승은 마침 한가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앉아도 되냐고 묻더니, 허락을 받자마자 척 자리를 잡고 열변을 쏟아냈다.
“박 소협의 이번 행보는 그야말로 염력철암(念力徹巖)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그, 연기 심사에 불참한 목불식정(目不識丁) 소인배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었으니 말이지요.”
‘···이번엔 무협지로군.’
무협지인지 중국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뜻을 알아듣기도 힘든 한자성어가 줄줄이 나왔다.
그 와중 오디션 노쇼를 한자로 바꾸는 디테일도 빼먹지 않는다. 건은 제어기를 찾을 요량으로 물었다.
“매니저님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아, 양 형은 대장, 소장, 위장 등 삼부(三腑)의 불화로 측간에 갔습니다.”
구신승은 엄숙하게 눈을 굴리더니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운기행공을 위해서요.”
“······.”
한 번에 생각이 안 나서 덧붙인 티가 나지만, 정작 본인은 창피한 기색도 없다.
지잉, 메시지가 와서 보니 조금 전 톡을 보냈던 진지유의 답장이었다.
진지유 : [드디어 세계관 최강자랑 만났네요]
진지유 : [이번엔 뭐 이상한 거 안 찼어요? 딱 봐도 구신승이다 싶을 텐데]
박건 : [발라클라바랑 방한마스크입니다.]
진지유 : [···사람은 착해요. 연기도 잘하고]
진지유 : [제가 도와주러 가고 싶은데, 지금 촬영을 와서]
진지유 : [혹시 너무 귀찮으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요]
진지유 : [그 오빠도 바보는 아니라, 대충 눈치 주면 알아서 비켜줄 거예요]
일단 비상대책은 확보했다. 답을 보내려는데 구신승이 탁자 위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였다.
“각본을 고르고 계셨습니까?”
“예, 고민 중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일는지요.”
말투는 여전히 무협지 주인공 같지만, 눈빛만큼은 진중하다. 어쨌든 로만 배우들 중에서는 헐리우드도 다녀온 탑 오브 탑 아닌가.
‘혹시 꿍쳐 둔 시나리오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자는 마음으로 사정을 설명하자 구신승이 물었다.
“그 오디션··· 아니, 연기 심사를 본 작품들, 형식이 어땠습니까?”
“시나리오들의 장르 말씀이십니까?”
“흐음······?”
영어를 쓰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게, 컨셉도 저만하면 지독한 수준이다.
“전부 비슷했습니다. 기업, 스릴러, 복수극, 영화는 액션이었고요.”
“지금까지 하신 작품들과 결이 같군요.”
“예, 느와르에 오컬트였으니까요.”
“그럼 새것을 찾아보심은 어떻습니까?”
“새것이라면······.”
최필립이 서글서글한 미남이라면 이쪽은 확신의 귀공자상이다. 귀티가 흐르는 눈썹이 살짝 좁아진다.
“개신창래(開新創來)에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 하였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고, 묵은 해를 버리며 미래를 도모한다면 활로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는 소리다. 지금껏 오디션을 본 작품들은 대부분 하드보일드한 액션.
평범한 휴먼드라마나 로맨스 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안 돌렸었다.
“저한테 맞지 않는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물색해 봐야겠습니다.”
“배우는 다양한 심계를 다뤄야 하니까요. 이 공부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제 저 괴상한 말투도 적응이 됐다.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부캐’라고 생각하면, 세계관을 지켜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다.
“감사합니다. 그럼 조만간······.”
“···라고, 구씨세가 2공자는 현기 그득한 눈으로 말했다.”
“······?”
기출변형에 말을 잃은 사이, 털모자를 다시 눌러쓴 구신승이 일어섰다.
“양 형이 올 때가 돼서요. 언젠가 강호에서 다시 만납시다.”
“아, 예.”
“협(俠).”
포권한 구신승이 사라지자마자 엄청나게 까칠해 보이는 30대 여자가 나타났다.
“아, 박건 배우님. 혹시 신승이 못 보셨어요?”
“방금까지 있다가 가셨습니다.”
팀장급쯤 됐을까, 여자는 깊은 분노를 담아 자기 머리칼을 헤집었다.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부터 드릴게요. 잠깐 놓친 사이에 또······.”
“양 형이라고 하시던데요.”
“예?”
“화장실에서 운기··· 뭐를 하신다고도요.”
“고마워요. 매니지먼트 1팀 양수연이에요.”
여자는 살벌하게 자기소개를 하더니, 이내 라운지를 쿵쿵 울리며 사라졌다. 잡히면 방한모가 아니라 머리털을 다 뽑아버릴 기세다.
‘저쪽 매니저도 배우랑 사이가 좋네.’
건도 시나리오를 긁어모아 일어섰다.
구씨세가 이공자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시나리오가 있었다.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치운, 그럼에도 초반부가 흥미롭던 유일한 작품이다.
“회색도시 팀장님, 이라고 했었나?”
*
“아··· 배우 납치하고 싶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미친놈아.”
YTS 4층 제작회의 사무실.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중얼거리는 유호영 AD를 황창재 PD가 나무랐다.
“왜요, 다 까였잖아요. 보쌈이라도 해 와서 무릎 꿇고 부탁하면 들어 주지 않을까요?”
“헛소리 말고, 아까 리스트업한 배우들 있지? 다음 주까지 아무나 데려와. 걔들도 나가리면 생판 신인 아님 아이돌 갖다 써야 돼.”
YTS 1분기, 14부작 드라마 ‘회색도시 팀장님’.
예비 캐스팅은 반 이상 확정됐다. 이제 메인 남주만 정하면 되는데, 그 한 명을 구하는 데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아니면 PD님, 이렇게 바꾸면 안 돼요? 변휘승을 메인에, 새로 오는 사람을 서브에. 어차피 로코면 색다른 조합도 괜찮잖아요.”
황창재 PD는 한심한 듯 혀를 찼다.
“호영아, 이 안쓰러운 놈아, 그렇게 해서 언제 피디 달고 입봉할래?”
자기도 끈 떨어진 연 신세면서··· AD의 입이 비쭉 올라가지만 반항은 금기다.
얄미운 선배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로맨틱코미디 불문율 몰라? 사고 친 놈이 출연은 해도 메인은 안 된다. 그것도 공모전 당선작인데, 변휘승이를 이진하 역에다 꽂으면 게시판 아작나.”
“그럼 급을 오히려 올려서······.”
“급 높은 애들이 로코를 왜 해?”
“음, 배역 스펙트럼의 확장?”
“그러니까 왜 스펙트럼을 여기 와서 넓히냐고. 대작 들어가면 지겹게 엮는 게 러브라인인데. 잘 나가는 작품이 노맨스인 거 봤어?”
탑급 남배우들의 심리가 그렇다. 로코를 찍을 바엔 대형 기획작에 가고, 정 할 게 없을 땐 그냥 비싼 CF나 하나 더 뛴다.
“백이겸, 구신승, 최필립, 문한빈 중 한 명만 들어와도 소원이 없겠는데요.”
“꿈을 꿔라, 로또를 맞든가.”
“아니면 박건은······.”
“거기까지. 더 말하면 형 화낸다.”
“옙, 자중하겠습니다.”
오히려 백이겸, 최필립보다 단기 임팩트는 더 큰 배우가 현재의 박건이다.
투런 홈런을 연타석으로 날린 신인이 뭐가 아쉬워서 끼워팔기 판에 들어오겠나.
“절대 안 오지. 머리에 총 맞지 않고서야.”
“피디님. 이젠 유행어가 변해서, 누가 칼 들고 협박하냐예요. 누칼협?”
황 PD는 지끈대는 머리를 감쌌다. 쓸 만한 놈은 다 빼 가고, 저런 것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자니 협심증이 올 지경이다.
“어, 잠시만요. 섭외 전환가?”
프로필을 펄럭펄럭 넘기던 머저리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예. ‘회도팀’ AD 유호영입니다. 그런데 누구··· 예? 누구시라고요?”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더니 급기야 말까지 더듬는다. 전화를 끊은 AD에게 PD가 물었다.
“왜, 누군데? 박건이라도 온대?”
“예.”
“헛소리하면 혼난다.”
“진짜 박건이라고요! 매니저가 전화해서, 아무 역할이나 괜찮으니까 오디션 볼 수 있냐는데요?”
저놈이 아무리 얼이 빠졌어도 저런 걸 농담이라고 할 리는 없다.
제작진 몰래카메라 촬영인가? 헛웃음을 흘리던 황 PD가 중얼거렸다.
“진짜로 협박이라도 당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