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 전쟁 (1)
* * *
로맨틱 코미디.
할리우드에서 정립되어 파생된 영화 장르로, 현대 한국에서는 코미디보다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진 극을 말한다.
시나리오의 유구한 역사 이래, 로맨스는 꾸준하게 사랑받는 장르로 자리매김해왔다.
제작자들에게도 로코는 알토란이다.
신인들의 등용문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대단한 연기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한때 유행했던 ‘돌아와요 1991’ 류의 시대극처럼 현실 연기만 펼치면 된다.
요즘은 아이돌도 세 달이면 기본 연기는 가능한 시대가 아닌가. 목각인형 사단만 구성하지 않으면 호평을 받기도 쉽다.
연기력만 기대치가 낮으랴, 제작비 대비 뽑히는 수익도 짭짤하다.
즉, 싼 값에 본전 이상이 뽑힌다.
연출비용? 대단한 세트장을 꾸릴 게 아니니 예산이 절감된다.
섭외비용? 마스크 좋은 남녀 신인은 넘쳐나니 섭외비도 적게 든다.
반면 뽑아먹을 구석은 넘쳐난다.
로코의 주 시청층은 여성. 아이돌판이든 배우판이든, 연예계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돈을 더 잘 쓴다는 것은 통계로 증명된 사실이다.
주인공의 옷부터 화장품, 자동차, 전자제품에 먹거리까지 PPL을 신나게 때릴 수 있으니, 오히려 ‘대작’들에 비해 가성비는 더 좋다.
공중파도 평균시청률이 5~7%, 잘 쳐 줘야 10%인 로코가 분기마다 몇 개씩 쏟아지는 이유다.
“예? 서예니 씨요? 그럼 이효정 씨는···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그쪽에서 먼저 된다면서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로코의 최대 문제는 캐스팅이다. 쓸 돈은 적은데 벌 돈은 많으니까.
어느 방송국이 안 그렇겠냐만, 올해의 YTS는 최대한 ‘가성비’를 짜내야 한다.
작년 2분기와 4분기··· 야심차게 돈을 부은 작품들이 본전도 못 찾고 죽을 쑨 탓이다.
“안녕하십니까. 전에 섭외 건으로 연락드렸던 유호영 AD입니다. 혹시 잠시만 시간 좀······.”
방식도 다양하다. 저쪽에선 지랄을 떨어야 하고, 이쪽에서는 회유가 답이다.
“아이고, 예! 변휘승 배우면 작품 홍보야 무조건이죠. 컨펌 주시면 거기 맞춰서 기사 띄우겠습니다. 예, 예!”
휴대폰을 붙잡고 환관처럼 굽신대는 후배를 보며, 황 PD는 턱을 긁었다.
‘저놈 저거, 몇 년 구르더니 실력이 꽤 늘었단 말이지.’
매일 구박하면서도 유호영이를 데리고 있는 이유가 있다. 나사가 좀 빠진 놈이지만 시키는 일 하난 열심히 한다.
‘···근데 박건. 그 사람은 뭐가 아쉬워서 우리 팀에 연락한 거지?’
다른 방송국으로 간, 비슷한 기수 PD들한테 물어보니 요즘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1분기 기대작들도 다 깠다던데··· 정말로 장르를 바꿔 보려는 건가?
“자, PD님. ‘회도팀지도’ 완성됐습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 한번 보시죠.”
유호영이 B4 용지를 펼쳐보였다. 흔히 말하는 인물관계도처럼, 인쇄된 종이에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을 더덕더덕 붙여 놨다.
“아름답긴 무슨, 빵꾸가 우리 할아버지 잇몸만큼 났구만.”
“에이··· 그러니까 고르시라고 밥상 차려 왔잖습니까, 남주도 다 뽑힌 김에.”
메인 남주인 이진하는 박건, 서브 남주인 석태오는 변휘승으로 낙점됐다.
‘변휘승으로는 살짝 아쉽긴 하지만······.’
로코에도 급이 있는데, 이번에 들어가는 작품은 전형적인 제작비 땜빵용이다.
당연히 톱 남배우들은 안 온다. 애매한 A급이나, 사고 치고 주가가 떨어진 놈을 구해야 하는데 시장에 매물이 너무 적다.
“여주는 어떡하죠? 메인이랑 서브 둘 다 이렇게 나왔는데.”
“한여울이 일정 겹친다고 깠다며, 카이지아에서는 이효정 대신 서예니 보낸댔고.”
“예. 그러면서 자기네 배우 하나도 같이 넣어 준다던데요.”
“넣어 주기는 개뿔, 꽂아 달라는 거겠지. 하여간 양아치 새끼들.”
나머지 여주인공 둘은 아직 공석이다. 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소매로 찔러넣는 손들이 워낙 많아서 그렇다.
서브 여주로는 모델 출신 여배우 두 명이 각축전을 벌였다. 그중 1옵션은 타 방송국으로 갔고, 2옵션은 소속사에서 자체변경을 했다.
‘개 같은 놈들··· 아무튼 서예니 받는다 치면, 메인도 이 둘 중 하나군.’
황 PD의 눈이 ‘메인 여주’ 자리에 붙은 두 장의 사진을 번갈아 훑는다.
한 명은 아이돌 출신, 다른 한 명은 웹드라마 출신으로 최근 조금씩 뜨는 신인들이다.
“그놈의 신인, 아무튼 도움이 안 돼.”
“예? 신인이요?”
후배가 되묻는 걸 무시하며, 황 PD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속 터지게 하는 신인은 이 안에도 한 명 있다.
말안통하는새끼 : [피디님 혹시 남주 신인 여주 기성은 안 될까요]
말안통하는새끼 : [저희 드라마 PPL이 더 돋보일 수 있잖아요]
말안통하는새끼 : [피디님]
말안통하는새끼 : [혹시 저도 캐스팅 같이 하면 안 될까요]
말안통하는새끼 : [피디님 바쁘실까요]
‘···신인이란 놈이, 바라는 건 무슨 스타 작가 급이야.’
이번 작품이 YTS와 제작사가 함께 연 공모전 당선작이 아니고, 국장이 직접 내린 특별 지시가 아니었다면 맡지도 않았을 거다.
애초에 그와는 작품 취향부터가 안 맞는다. 이쪽은 상업성보다 감성과 트렌디인데, 철 다 지난 클리셰를 꾸역꾸역 뽑아서는······.
관자놀이를 마구 지압하던 황 PD가 지친 목소리로 불렀다.
“야, 호영아.”
“옙.”
“오디션 띄워라. 메인은 연기 보고 정하자.”
“소속사에서 난리 치진 않을까요?”
“지들 급으로 무슨 난리. 어차피 나머지 배역들도 잡긴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오라고 해.”
푸른꿈 엔터에 강하나, CNC 엔터에 권유진이랬나? 둘 다 소속사 파워는 비슷하니, 어느 쪽을 뽑든 나중에 귀찮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을 맛이구만.”
국장이 지켜보고, CP가 쪼아대고, 제작사는 벌써부터 은근한 압박을 넣는다.
황창재 PD는 질겅질겅 씹어서 넝마가 된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총체적 난국이지만 해내야 한다. 가늘고 길게 살자는, 자신의 좌우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
YTS 사옥에서 오디션이 열렸다.
1분기의 수목극, ‘회색도시 팀장님’의 여주인공 및 조연들을 뽑는 오디션이다.
오디션장과 붙은 대기실에서는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배우들로 바글바글했다.
“어머, 지호야! 너도 왔어?”
“너도라니, 인생 뒤집을 기회인데 당연히 와야지. 근데 눈이 좀 달라졌다?”
젊고 싱그러운 얼굴들이 친근한 척 뼈 있는 인사를 나눈다.
대부분이 신인들이지만, 그렇기에 서로가 해 볼 만 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메인을 놓고 경쟁할 에이스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 최소 중형 소속사 이상이라거나, 최근 뜨기 시작한 신예라거나.
그 중 가장 유력한 1번 주자.
푸른꿈 엔터테인먼트, 강하나가 들어온다.
“······흐음.”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작은 반응들이 배우들 사이에 퍼진다. 아이돌 출신이라더니 과연 마스크가 앳되고 상큼하다. 신데렐라 클리셰의 신입사원 여주에 딱 어울릴 만큼.
약속이라도 한 듯, 바로 몇 초 뒤 문이 열리고 2번 주자가 들어왔다.
깔끔한 비즈니스 수트에 굽 낮은 구두,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청순한 얼굴. 모 포털 웹드라마에서 히트를 친 권유진이다.
“······.”
이번에는 반응이 없다. 강하나보다 한 단계 강한 경쟁자에 다들 말을 잃은 탓이다.
‘쟤는 또 오버했네.’
‘CNC 유난 떠는 거 유명하잖아. 배역에 맞춰서 옷 입히고 화장시키고.’
‘그런다고 연기력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피디한테 잘 보이고 싶나 몰라.’
이내 질투에 찬 비난이 쏟아지지만, 권유진은 저 구석으로 가서 대본을 꺼내든다.
그때 입구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돌아볼 틈도 없이, 소음의 진원지가 대기실로 입장했다.
“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풀 수트 차림의 박건이 나타난 것이다.
포마드 펌에 챠콜색 수트를 맞춰 입은 배우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고,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그 뒤를 따른다.
‘회색도시 팀장님’ 시나리오 속 주인공, 완벽한 이진하 팀장의 현신이다.
‘미친. 이진하 역이 박건이었어?’
‘오피셜도 안 뜨고 기사도 안 돌아서 몰랐는데, 회도팀이 이걸 숨겼네.’
‘···근데 주연이 여긴 왜 온 거지?’
속사포처럼 속삭이던 구석의 세 배우가 동시에 눈을 깜빡거렸다.
원래 인기 스타들은 오디션을 잘 안 본다. 그쯤 되면 부르는 곳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 자체로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문은 오디션이 시작되고, 박건이 매니저와 잠시 자리를 비운 다음에야 풀렸다.
“심사위원으로 온 거지? 여주랑 조연들 직접 뽑으려고.”
“아냐, 바보야.”
냉큼 면박을 준 배우가 비밀스레 속삭인다.
“사실 박건이 오디션 매니아래.”
“···오디션 매니아?”
“나도 JNBC에 있는 친구한테 들었어. 요즘 계속 오디션만 보면서 작품 찾고 있다나 봐. 몇 군데는 합격하고도 안 갔대.”
듣던 사람들은 벙찌고 말았다. 이미 톱스타 반열에 든 배우가 오디션을?
악취미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굳이 제 살 깎아먹는 갑질 말고도 할 짓은 많다.
대종상과 JNBC 시상식 때 보여 준 모습도 그렇고··· 저 정도면 그냥 연기에 미친 작자라고 보는 편이 옳다.
메인 여주의 절친 역에 지원한 조연 배우가 침을 삼켰다.
“궁금하긴 하다, 오디션 연기.”
*
“안녕하세요, 강하나입니다.”
“예. 거기 앉으시면 됩니다.”
의자에 앉으려던 강하나는 문득 갸웃했다.
PD와 촬영감독, 조연출로 보이는 스탭 옆에 웬 삼각대와 스마트폰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은 저쪽 카메라로 할 텐데, 왜 스마트폰으로 찍는 거지?’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스마트폰으로 찍든 6MM 캠코더로 찍든, 그녀는 여기서 연기를 보여주고 배역만 따면 그만이다.
“제가 연기할 씬은······.”
반면, 황창재 PD는 오디션을 보려는 배우보다 더욱 심란했다.
‘내가 진짜··· 이거 찍고 피디 때려치운다.’
책상에 세워 둔 스마트폰은 녹화용이 아니라 영상통화용이다. 심사를 함께 보겠다던 작가가 떨려서 못 가겠다며 드러누운 것이다.
‘···미팅 때는 멀끔해 보이더만, 하여간 작가란 것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덕분에 이 오디션은 오프라인 셋, 온라인 하나라는 괴상한 조합으로 보게 됐다.
“팀장님, 혹시 제가 싫으세요? 그럼 그냥 말해 주세요, 민폐 안 끼치고 제 발로 나갈게요.”
강하나가 열연을 펼치지만, 황 PD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이를테면 저 밖에 있는 연기 괴물.
전화가 왔을 때는 좋아 날뛰었지만, 박건이 하이에나처럼 작품을 찾는 ‘상습적 오디션범’임을 알고 나자 공황장애가 올 것 같았다.
만약 박건마저 불발이 나면? 메인 남주로 정말 얼굴마담들을 세워야 하나? 최소한의 작품성마저 짓밟아 가면서?
“여기까지입니다.”
“아, 잘 봤어요. 나가 보셔도 돼요.”
미련 없는 축객령에 강하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곧 꾸벅 인사하고 오디션장을 나갔다.
어차피 그녀 아니면 바깥의 권유진이 될 것을 아는 탓이다.
문이 닫히자 촬영감독이 입을 열었다.
“무난하네요. 소속사에서 키운, 연기 수업 일이 년 받은 신인 느낌.”
“딱 생각한 대롭니다. 조금만 더 톤이 안정적이면 좋았겠는데······.”
촬영감독과 황 PD가 머리를 맞대는 동안, 유호영 AD가 물었다.
“저, 박건 배우는 계속 세워 둬도 돼요? 빨리 보고 보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왜요, 아직 대사 못 외웠대요?”
“맨 나중에 하겠다더라. 원래는 오디션 일정에도 없던 배역인데 민폐 끼치기 싫다면서.”
유 AD는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이 시대의 고독한 연진남! 이건 연기에 진심인 남자란 뜻이에요.”
“···안 물어봤으니까 다음 사람 들여보내.”
“너무 그러지 마요, PD님. 새로운 용어 배우고 좋은데, 큭큭.”
둘의 만담을 듣던 촬영감독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걸 진짜로 한 대 쥐어박을까?’
PD의 고뇌 속에서, 오디션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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