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56화 (56/122)

캐스팅 전쟁 (2)

* * *

권유진은 립스틱을 클러치에 넣고 화장실 거울을 마주 봤다.

경직된 듯 단정한 수트의 매무새. 자연스러울 정도로 고쳐 둔 화장. 딱 괜찮다.

‘지금이 13번이랬으니까······.’

조연출한테 받은 그녀의 번호는 18번. 순서도 배역을 따러 온 사람들 중 중간쯤이라, 아직 숨을 고르고 집중할 시간은 있다.

그녀가 손의 물기를 닦을 때, 뒤쪽 화장실 칸 문이 열리며 강하나가 나왔다.

“······.”

권유진이 거울 속 경쟁자에게 눈인사를 했지만 대답은 없다. 옆 세면대로 또각또각 다가온 강하나는 물부터 튼다.

쏴아아ㅡ 쏟아지는 물소리 속에 거만한 음성이 섞였다.

“야.”

“네?”

강하나는 핸드백을 열더니 픽, 코웃음을 쳤다.

“내숭 떨지 말지? 여기 카메라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뒤쪽 칸에는 아무도 없다. 매니저들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 처음 보는 분한테 반말 안 해요.”

“예쁜 척, 착한 척, 웹드라마 하다 온 애들은 어쩜 하나같이 저러지? 소속사에서 연기는 안 하고 이미지관리만 가르쳤나 봐.”

“아이돌 하다 온 분들은 다 그쪽처럼 예의가 없나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주먹질이 오간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린 강하나가 비아냥거렸다.

“너, 어차피 배역 못 따. 강준희 선배님이 연락 넣으신다고 했거든. 그쪽 회사엔 말이라도 꺼내 줄 중견이 있으려나?”

“저기요. 강하나 씨.”

“소속사 바이럴로 바득바득 올라온 건 본인도 알 거고. 보니까 연차만 실컷 쌓인 중고 신입이던데, 제발 좆소면 좆소답게··· 야!”

독 품은 악담이 뚝 끊겼다. 얼굴에 튄 물을 닦으며 씩씩대는 강하나에게, 권유진은 한 발짝 다가가 틀었던 물을 껐다.

“되게 시끄럽네, 발성도 나쁘면서.”

“너 지금 뭐라고······!”

“내 연기 망치고 싶으면 머리채부터 잡아. 아니면 뺨을 때리거나. 그럼 싸워 줄 테니까.”

성질 같으면 벌써 저 빤빤한 낯짝을 변기에 처박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나락이다.

기싸움이 진짜 싸움이 돼서 경찰서라도 가면 소속사가 커버할 범주를 넘어선다.

“한 PD님 어디 계신댔지?”

“15시 촬영장 출발이래, 스탭 단톡방에 올라왔더라.”

마침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뺨을 실룩거린 강하나는 셔츠의 물방울을 홱 털어냈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

오디션은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세수라도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강하나가 돌아온 이후, 권유진 및 다른 조연들도 연기를 마치고 나왔다.

물론 자기 차례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다.

저기 앉은 저, 데뷔 이후 헤어스타일을 처음으로 바꾼 남자주인공 후보 때문이다.

“유 실장님, 들어가기 전에 뭐 드실래요? 저는 피자만 아니면 다 좋아요!”

“어우, 형님한테 많이 시달렸나 보네. 선이 씨 먹고 싶은 걸로 해요. 내가 지원사격 빵빵하게 넣어 줄게.”

매니저 둘만 떠들고, 배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스마트폰에만 집중한다. 손놀림이 무진장 빠른 게 심각한 톡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39번 배우님!”

그리고 마침내, 일어선 박건이 오디션장으로 들어갔다.

‘야, 말 좀 걸어 봐.’

‘네가 해! 사인 받고 싶다며?’

‘아니, 집중하고 계시잖아··· 귀찮게 했다가 한 소리 들으면 나 울 것 같단 말야.’

십여 분 뒤, 다시 나온 박건의 근처로 배우들이 슬금슬금 몰렸다.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싶은 팬심이 발휘된 것이다.

치열한 눈치싸움이 오가는 도중, 그때껏 대기실을 지키던 강하나가 불쑥 나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박건과 같이 온 매니저들이 돌아본다.

시상식 때 같이 찍혀 얼굴을 알린 동생 매니저 외에, 팀장급 이상으로 보이는 매니저도 오늘은 동석해 있다.

“강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박건입니다.”

악수까지 나눈 강하나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봤냐, 이년들아? 이 정도 그림은 돼야 메인 커플 케미지.

도취 섞인 승리감은 곧바로 깨져나갔다.

“그런데 저보다 선배시던데요.”

“선배··· 네?”

“연차도 더 오래되셨겠고요. 저는 작년 초에 처음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주변 사람들 중 화장실에 있던 두 명은 안다. 발갛던 얼굴이 쿡 찌르면 터질 듯 새빨갛게 변했다.

“경력이 쌓이면 관록은 자연스레 뒤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꼭 성과가 높지 않더라도요.”

짧게 목례한 박건이 나가자, 나머지 배우들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매니저와 함께 있던 권유진도 스쳐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선배라 좋겠다. 우리 팀장님은 귀가 밝으신가봐.”

“······.”

투둑, 꽉 쥔 주먹 속에서 연장한 손톱이 부러져나갔다. 이게 무슨 사태인지 감을 못 잡고 있던 매니저가 황급히 다가왔다.

“하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켜.”

“응? 뭐라고?”

“짜증나니까 비키라고!”

그러더니 어깨를 팍 밀치고 걸어간다. 애꿎은 매니저만 치를 떨며 뒤따랐다.

‘지가 비키라면서,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나······.’

*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밴에 오르자마자 유준일 실장이 캐묻는다.

오늘 오디션에 따라가도 되냐고 졸라 대서 데려왔더니, 중간에 잠시 스탭과 이야기하러 자리를 비웠었다.

‘사촌동생이 이 팀 조연출로 일한다고 했나?’

운전석의 박선도 질문 공세에 합류했다.

“나도 궁금해, 혹시 이번엔 왔어?”

“오다니? 뭐가 와요?”

“지금 오디션이랑 미팅들, 느낌이 오나 안 오나 확인해야 돼서 도는 거거든요. 그게 와야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박선은 텔레파시를 받듯 양쪽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인상을 썼다.

“···그건 좀 외계인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그 느낌은 어땠어요?”

“치열하던데요.”

“뭐가요, 연기가?”

“아뇨. 화장실 기싸움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바닥은 똑같다. 유 실장은 대번에 알아들은 표정이 됐다.

“아, 걔네 둘. 강하나라고 했나? 째려보는 거 보니까 한판 붙을 것 같더라고요. 겐세이는 놓고 오겠다 싶더라니.”

“예.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흔해요. 특히나 여배우들은 더더욱. 살살 웃으면서 카메라 안 돌아갈 땐 온갖 칼춤을 추거든요. 우리 백하니 여왕님도 그래서 자주 싸웠지.”

사실 그런 기류는 이쪽이 유 실장보다 더 일찍 눈치챘었다.

혹시나 싶어 강하나가 따라나갈 때 감각을 끌어올렸더니, 열린 문틈으로 이야기가 들려온 거고.

‘뒤를 맡기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지.’

짧게 말을 섞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타인을 서슴없이 해하는 자는 동료와도 불화를 빚는다.

“어, 근데 계속 대기실에 계시지 않았나? 화장실에서 싸우는 건 언제 또······.”

건은 불필요한 질문을 못 들은 척 잘랐다.

“느낌은 괜찮았습니다. PD님도 승낙하셔서, 다음 작품으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우와아아아!”

소리친 박선이 조수석을 팡팡 쳤지만 시트는 믿음직스럽게 충격을 흡수했다.

“축하해, 형! 드디어 찾았네!”

“고맙다. 그간 고생시켜서 미안해.”

“아니, 이쪽 팀은 진짜로 발로 뛰면서 작품을 고르시네들. 앉아서 시나리오만 팔랑대는 다른 배우들도 좀 본받아야 돼.”

덩달아 박수를 치던 유준일 실장이 물었다.

“안에서는 어땠어요. 동생은 잘 모르겠다던데, 박 배우님은 누가 될 것 같아요?”

“여주인공 말씀이십니까?”

“그죠. 강하나? 아니면 권유진? 그래도 몇 달 같이 촬영할 여주잖아요.”

좋은 동료는 좋은 작품에 필수적이다. 건은 조금 전의 오디션장을 떠올렸다.

‘그쪽도 고민하는 모양이던데.’

*

박건의 연기가 끝났다.

오디션장을 해외영업팀 사무실로 만들었던 이진하는 사라지고, 평소처럼 돌아온 배우가 묻는다.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씬도 필요하실까요?”

황창재 PD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더니만, 옆에 앉은 유호영이가 눈치를 보더니 냉큼 받는다.

“아뇨, 잘 봤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촬영감독도 그와 비슷한, 내가 뭘 봤나 하는 얼굴로 방금 찍은 영상을 뜯어보는 중이다.

옆에 켜 둔 스마트폰을 보자 잠잠하다. 아무리 얼이 빠진 작가라도 저 연기를 보고 트집을 잡을 리가 없다.

‘뭐? 남자 배우를 신인으로 써? 인간아,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의기양양하던 황 PD의 머릿속에 불현듯 도끼날이 떨어졌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다른 피디들도 연기를 끝낸 뒤 정중한 거절을 들었다고 했다.

‘나가린가? 아니면 대박?’

표정만 봐선 알 수가 없다. 만약 저 입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면······.

“혹시 저희 작품을 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호영아, 제발 조용히 좀······.”

“예. 있습니다.”

후배를 한 대 쥐어박기 위해, 앙상한 주먹이나마 부르쥐던 황 PD는 동작을 멈췄다. 이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온다.

“저는 하고 싶습니다. 혹시 다른 분을 캐스팅하셨다면······.”

“아니, 그 무슨 소립니까! 처음 연락 주셨을 때부터 박건 배우밖에 없었는데요.”

달려나온 황 PD가 박건의 손을 부여잡고 붕붕 흔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냐, 김씨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 용사님이다.

박건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다.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꼭 카메라 앞에서 테스트를 봐야 해서요.”

“어휴, 민폐는요. 덕분에 오디션 분위기도 후끈해지고 좋았는걸요. 저희야 화제성에 목숨 거는 방송쟁이들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아, 잠깐만요. 잠깐만.”

황창재 PD는 박건을 데리고 촬영감독 쪽으로 종종걸음쳐 갔다.

“여기, 이번에 메인 여주 후보들이거든요? 누가 더 나은지 한번 봐줘요.”

힘 있는 주연이 상대 배역을 고르는 것, 또는 꽂는 것, 둘 모두 흔한 일이다.

녹화 영상을 본 박건은 즉답했다.

“발산하는 표현력은 강하나 씨가 낫고, 톤과 발성은 권유진 씨가 좋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박 배우는 누굴······.”

“그런데 이번 극중 배역은 참고 견디면서 꿋꿋이 나아가는 신입사원 역할이라, 권유진 씨가 장기적 디렉팅엔 더 유리해 보입니다.”

황 PD는 바로 알아차렸다. 박건은 배우의 평상시 모습과 배역의 궁합을 말하고 있다.

‘강하나가 더 외향적이니, 반대급부로 안정적인 권유진을 뽑아라······.’

지극히 옳다. 대부분의 경우 절제보다는 분출이 더 쉬운 것이 연기니까.

전작 영화에서 서브 디렉팅까지 맡았다더니, 단 한 번에 장단점을 파악하고 극의 배역과 비교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고마워요. 캐스팅에 잘 반영해 보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박건이 문을 밀려던 때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유호영이 기어이 사고를 쳤다.

“박건 배우님. 혹시 저희 작품에 들어오라고 협박당하셨나요? 그렇다면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에라이, 미친놈아!”

*

이야기를 들은 유 실장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서요? 호영이 그놈 결국 맞았어요?”

“그런 것 같았습니다. 강도를 보니 전치 1주는 안 넘겼을 거고요.”

“어, 아무리 그래도 입원까지는 좀······.”

머쓱하게 눈을 데굴대던 유 실장이 뒤늦게 스마트폰을 켰다.

“하여간에 박스타께선 권유진을 밀었단 거죠. 이거 누가 될지 궁금하네.”

“왜요, 실장님? 두 분이 라이벌인가요?”

“선이 씨는 잘 모를 수도 있겠네. 강하나나 권유진이나, 딱 로코 여주로 써먹기 좋은 얼굴들이거든요.”

“써먹기 좋다는 게······.”

“만만하다고. 업계 신입이라, 출연료 싸고 연기력 대비 마스크 출중. 적당히 감정이입해서 드라마 줄거리 따라가기엔 최적이죠.”

팀장 시절, 대표 아이돌 퀸텀에 진지유와 백하니까지 전담했다던 매니저답게 설명이 명쾌하다. 내비를 찍던 박선이 고심에 찬 끙 소리를 냈다.

“분위기는 권유진 배우님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실장님 말씀 들어보니 또 모르겠네요.”

“그죠. 거기다 이 드라마는 메인 여주가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주연들은 전부 캐스팅되지 않았습니까?”

건의 물음에, 유준일 실장은 고개를 깊숙하게 끄덕거렸다.

“바로 거기, 그 인간들이 관건이에요.”

*

YTS의 수목극에 박건이 합류했다.

제목은 ‘회색도시 팀장님’, 작년 스튜디오 주크빌과 연계해 열었던 공모전의 수상작이다.

거물의 향방은 주목을 끄는 법.

오피셜 기사가 뜬 뒤, 후발로 올라온 기사들도 신나게 불판을 달궜다.

[신인상 수상자의 거침없는 행보, 마침내 로코 판까지 접수하나]

[박건, ‘회도팀’ 합류 확정··· 배역은 까칠한 패션회사 팀장님]

[느와르, 오컬트에 이어 이번에는 로맨틱 코미디? 연기 변신 예고]

[인기작들의 고사는 배우의 까다로운 작품 의욕 때문··· 로만 측, 새로운 모습 기대해 달라]

[변휘승X박건X서예니, 마지막 퍼즐은 ‘푸르른 그 시절’ 권유진으로 낙점··· 기대 부푸는 신구 케미]

‘흑의사제’의 대종상 싹쓸이 이후, 부쩍 박건 소식이 많이 올라오게 된 영화 커뮤니티에서도 어김없이 떡밥이 돌았다.

박건 <--- 이번에도 대축포 쏘냐?

내용 : 나종모는 공로상 받고 김률은 영화제 쓸었는데 이번엔 뭐 가져올라나? 피디한테 또 각본상 떠먹여주면 최단기 G-O-A-T(역대 최고라는 뜻 ㄷㄷ) 등극 아니냐?

-? 회도팀 시나리오가 공모전 수상작인데 왜 피디가 각본상을 받음

└영붕이는 영화밖에 몰라...

-이번엔 출연진이 화려하던데 ㅋㅋㅋㅋ 음주운전자+염문 많던 남배우에 얼굴마담 여주들

└그게 누구임? ㅂㅎㅅ?

└└ㅇㅇ 변사또

└└└정보) 변사또는 변휘승 사고 또 쳤네의 줄임말이다

-변또 음주운전은 억울하긴 하지 ㅇㅇ 차 빼준다고 1미터 후진하고 나락떨어짐

└그러길래 평소 행실을 조심했어야지

-정보 2) 회도팀 PD 황창재는 로코를 한 번도 연출해본 적이 없다

└수상할 정도로 드라마국을 잘 아는 영붕이 놈들... 니들 정체가 뭐냐?

└└어이 김씨 눈치챙겨

└└└아 ㅋㅋ 영화판 파려면 드라마판도 알아야된다고 ㅋㅋㅋ

-오컬트 킹의 로코행... 가슴이 웅장해진다..

└박건갤됐네 ㅅㅂ

*

“뭐야, 이것들? 주머니 사정 뻔한데 어떻게 섭외했지?”

드넓은 한강뷰 고층아파트.

기사를 죽죽 내리며 읽던 실내복 차림 남자가 중얼거린다.

이제 막 동이 트는 아침이다. 소파 뒤쪽, 침대에 파묻힌 여자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으응··· 불렀어?”

“아니, 너한테 한 소리 아냐.”

매몰차게 대꾸한 변휘승은 신상 스마트폰을 한쪽에 던져 버렸다.

“종필아. 넌 어떤 것 같냐?”

연예인부터 일반인까지, 담당 배우가 여자를 끼고 있는 건 몇 년째 봐 와서 익숙하다. 데리러 온 매니저가 머리를 긁었다.

“글쎄요, YTS 국장이 로만 대표한테 로비라도 한 거 아닐까요? 나중에 음방이나 뭐라도 더 꽂아 준다고 하고.”

“일리 있지. 노중만 그 인간도 불법 빼곤 다 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빡인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훔친, 그러다 너무 많이 훔쳐서 물의를 빚었어도 퇴폐적인 눈매는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매니저가 조심스레 묻는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들 건 또 뭔데.”

“갑자기 끼어들었잖아요. 그래도 형님 쪽이 훨씬 선밴데······.”

“이 바닥에 그딴 게 어딨어. 잘나가는 놈이 형이고 선배지.”

코웃음을 친 변휘승은 냉장고로 걸어가 샴페인 한 병을 꺼냈다. 면세점 가격으로도 백만 원이 넘는 고급 술병들이 줄지어 차 있다.

“그리고 걔가 오면 좋으면 좋지, 나쁠 건 없어. 새삼 신인 질투할 짬바도 아니고······.”

그럴 위치도 아니고. 씁쓸한 뒷말은 샴페인에 쓸려 목으로 넘어간다.

어젯밤에도 잔뜩 마신 듯, 유리탁자 주변엔 빈 술병과 안주의 잔해가 널려 있다.

“아이고, 또 드신다! 촬영장에 술 냄새 풍기면서 가면 사람들 욕한다니까요!”

“스탠바이는 오후잖아. 밥 먹고 가글하면 다 날아가.”

저 고집을 꺾는 것보다 홍보팀에 연락해 기사를 막는 쪽이 빠르다.

안 들리게 한숨을 내쉰 매니저가 브리핑했다.

“아, 그리고 내일··· 아니지, 모레 정오에 대본리딩 있습니다. 제작진이 걱정되는지 좀 일찍 잡았더라고요.”

“거긴 안 가.”

“······예?”

“안 간다고. 아파서 불참이라고 해.”

경악한 매니저가 소리쳤다.

“형님! 지금 박건 합류해서 드라마 화제성 팍 올랐어요. 기자들까지 무진장 꼬일 텐데, 거기 형님이 안 가시면 무슨 욕을······.”

“그럼 오히려 좋지.”

변휘승은 병째 마시던 샴페인을 내려놨다. 혈색 나쁜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간다.

“드라마 인기는 후배님이 가져가시고, 난 은퇴 각이나 잡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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