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57화 (57/122)

캐스팅 전쟁 (3)

* * *

‘회색도시 팀장님’의 대본리딩이 취소됐다.

그것도 하루 전에.

첫 공개 대본리딩인 만큼, 잔뜩 기대하던 팬들은 허탈함에 휩싸였다.

보통 드라마 대본리딩 영상은 미리 찍어 두었다가 첫방 전에 푼다. 풀리기 전에는 참여한 기자나 배우들에 의해 대략적인 소문이 퍼지고.

정식 방영 전까지, 부족한 떡밥을 굴려 갈 몇 안 되는 콘텐츠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비공개도 아니고 아예 취소해 버린다? 노이즈마케팅으로는 부적절하고, 어그로라 해도 득보다 실이 많다.

‘이거, 뭐가 있네.’

‘딱 봐도 주연 중에 누가 안 왔구만.’

선수는 못 속인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알만 하다는 얘기가 돌았다.

분명 핵심 배우 중 누군가가 안 왔고, 그냥 진행했다간 불화설이니 뭐니 말이 돌 테니 리딩 취소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어차피 리허설 전에 비공개 대본리딩은 할 테니까, 새는 물부터 틀어막고 가겠단 거지.’

범인은 누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휘승으로 추측했다. 지금껏 보인 불성실한 태도도 그렇고, 녹화장에서 몇 번 지각과 펑크를 낸 전적도 있다.

거기다 숱한 논란으로 데뷔 이래 몇 번이나 대중의 입에 오르지 않았던가.

소문은 무성했지만 제작진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배우들의 SNS도 잠잠하긴 마찬가지다. 박건 다음으로 몸값이 높은 서예니나, 합류가 확정된 권유진도 별다른 글을 올리지는 않았다.

방송국 홈페이지에 주연 프로필과 배역 정보들만 차례로 업데이트됐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

‘회도팀’의 첫 촬영일.

공시된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세트장이 차려진 건물 밑에 연예인 차들이 도착했다.

한겨울 추위는 아니라지만 여전히 입김이 나오는 날씨다. 촬영장비를 부지런히 옮기는 스탭들은 품속에 핫팩을 두어 개씩 꽂고 있다.

이럴 때 분위기를 띄우는 건 신인 몫이다. 미니밴에서 내린 권유진과 매니저가 로비부터 스탭들에게 인사를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롱패딩을 입은 권유진이 싹싹하게 고개를 숙이면, 매니저가 따뜻한 캔커피와 초코바를 한 세트씩 꺼내 돌린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새벽부터 촬영 때문에 수고하시는데요. 추운데 안 다치게 조심하세요.”

금세 세트장에 활기가 돈다. 별 건 아니라도 노력이 가상하지 않나.

“CNC 출신이라 그런가, 꽤 싹싹하네. 강완민은 첫 촬영 때부터 피디랑 촬감 빼곤 투명인간 취급이던데.”

조명팀 스탭이 중얼거리자 커피로 손을 녹이던 동료가 말을 받았다.

“‘힘내라 동이야’ 때? 걔는 DG 2군이잖아. 거기 애들 조금만 떠도 목에 철심 박아.”

“하긴, 이쪽 멤버들은 리딩 때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취소라고 발표됐지만, 사실 리딩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자와 카메라 없이. 대외비를 조건으로 소수의 관계자들만 참석한 자리에서.

로비에서 오늘의 콘티를 의논하던 황창재 PD와 촬영감독도 주연 여배우와 인사를 나눈다.

“아, 유진 씨. 감기 기운은 좀 괜찮아요? 그때 기침해서 걱정했는데.”

“예, 문제없어요. 혹시 몰라서 수액도 맞고 온 참입니다.”

황 PD가 맥없이 웃었다.

“무슨 수액까지 맞으셨대.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되니까, 그렇게 군기 들 필요 없어요.”

“그래요. 황 PD님 모토가 ‘가늘고 길게’거든? 촬영 워라밸 하난 기막힐 거예요.”

“괜찮습니다, 제가 워라밸 해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쪽에도 웃음이 번진다. 대본리딩 때 이미 면식들이 생겨 있던 탓이다.

애초에 리딩의 목적 중엔 이러한 케미도 있다. 배우와 제작진이 얼굴을 트고, 피디는 리딩을 보면서 각자의 캐릭터 해석을 피드백해 더 나은 방향으로 디렉을 준다.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넣은 스탭이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근데 저러면 뭐 하냐, 이따가 변사또 오면 또 분위기 아작날 텐데.”

“아니, 진짜 무슨 깡이래? 하다 하다 주연인 드라마 리딩을 안 와?”

“일하기 싫나 보지. 이 기회에 이미지관리 접고 은퇴라도 준비······.”

입구 쪽을 주시하던 동료가 스탭을 툭 쳤다.

“야, 야, 왔다.”

권유진의 미니밴보다 훨씬 큰, 벤츠 스프린터가 유리문 저편에 멈췄다.

이내 누군가 내린다. 노르스름한 보잉 선글라스와 새까만 롱 무스탕. 변휘승이다.

무심하게 걸친 아우터에, 척 봐도 분장 안 한 민낯인데도 아우라가 확 풍긴다.

데뷔 13년 차인데도 후배들에게 밀리기는커녕 감탄이 나오는 외모. 숱한 논란에도 변휘승이 여전히 ‘먹히는’ 배우인 이유다.

“어우··· 잘생기긴 잘생겼네. 악마의 재능이 연기력에만 있는 게 아냐.”

“어, 한 대 더 오는데?”

변휘승과 매니저가 로비로 들어온 직후, 이번에는 스타크래프트 밴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의 남자 주인공이 내린다.

이진하 팀장··· 아니, 박건이다. 오디션 때 입었던 풀 수트와 협찬용 은테안경까지 써서, 안 그래도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에 얼음장 같은 한기마저 쌩쌩 분다.

‘한쪽은 퇴폐미, 다른 한쪽은 냉미남······.’

촬영이 없는 서예니를 빼면, 오늘은 주연 세 명이 모두 모이는 첫날이다.

*

“웬일로 멀쩡한 데를 빌렸네? 이런 데는 드라마 촬영이라고 쇼부 쳐도 시간당 60은 나갈 텐데.”

로비의 바닥재를 구두코로 툭툭 차 보던 변휘승이 중얼거렸다.

다만 중얼거림치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옆의 매니저가 기겁을 한다.

“형님, 다 들려요!”

“뭐 어때. 누구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 대표님이 사람들 있는 데선 돈 얘기랑 여자 얘기는 안 된다고 그렇게······.”

“진홍이 형은 여기 없으니까 괜찮아.”

말이 통하질 않는다. 로비를 쭉 둘러보던 변휘승은 스탭들을 무시하고 저만치 서 있는 PD와 여주인공에게 걸어갔다.

황창재 PD가 떨떠름하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아, 우리 피디님이지. 그리고 이쪽이······.”

옆에 있던 권유진이 허리를 육십 도로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응, 안녕.”

심드렁한 반말을 듣고서도 권유진의 표정은 웃는 얼굴 그대로다.

전성기보다야 급이 떨어졌다지만 몇 년간 톱을 달리던 배우 아닌가. 목 뻣뻣한 스탭들처럼 무시나 안 한 게 다행이다.

권유진의 뒤쪽을 기웃거린 변휘승이 물었다.

“피디님, 근데 내 상대 역은 안 왔어요?”

“상대 역이요?”

“왜, 그 친구 있잖아요. 난 맨날 삼십 분씩 일찍 온대서 기대했더니, 좀 떴다고 초심을······.”

“안녕하십니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변휘승의 말을 칼날처럼 자르고 들어왔다. 어느새 도착한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건입니다.”

두 배우가 마주 섰다. 눈썹을 올린 변휘승이 무스탕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러게. 우리 초면이죠?”

“예. 리딩 때 못 뵈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땐 사정이 좀 있어서. 난 나만 욕 먹고 끝날 줄 알았는데 취소가 돼 버렸더라고.”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극중에서 둘은 철천지원수 라이벌 관계, 실제로는 히트제조기 톱스타와 한풀 꺾인 A급이다.

옆에 PD가 있다지만 저 정도쯤 되는 인간들을 말리기는 어렵다. 행여 자존심 싸움이라도 붙으면 촬영 내내 새우등이 터져나갈 것이다.

‘···한판 붙으려나? 진짜로, 첫 촬영부터?’

스탭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별안간 변휘승이 하품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지각 안 하고 왔지. 몇 시에 일어났어요?”

“다섯 시에 깼습니다.”

“체력 좋네, 이십 대라 그런가.”

선배도 후배도, 딱히 적대적이랄 것 없는 대화가 평범하게 오간다.

“좌우간에, 이번 드라마도 부탁해요. 난 묻어서 좀 갈 테니까.”

박건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는 말고··· 적당히 합시다, 방송국에서 돈 받은 만큼만.”

변휘승은 황 PD 쪽으로 눈인사를 건네더니, 빙글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어우,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거야?”

“로비엔 난방을 안 했으니까요.”

“대기업이라면서 복지가 별로네. 패션회사 애들도 삥땅을 치나.”

“그건 작품 속 회사잖아요······.”

동네 이장님처럼 툴툴거리는 배우의 뒤를 덩치 큰 매니저가 따라간다.

‘끝난 건가?’

‘그런가 봐. 리딩 때 안 온 걸로 둘이 붙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인기로도 덩치로도 변이 쫀 거지. 특수부대 피지컬이랑 일대일을 어떻게 해?’

촉각을 곤두세웠던 스탭들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던 일로 돌아갔다.

물론 마음을 놓긴 이르다. 첫 만남은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남자 배우들의 질투도 한번 시작되면 여배우 못잖지 않은가?

다만 한 명, 눈썹에 피어싱을 한 연출팀 스탭이 문득 손목시계를 봤다.

“···근데 변휘승 촬영은 저녁 때 아닌가?”

*

[회색도시 팀장님]의 세트장은 강남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 촬영용 빌딩으로 낙점됐다.

이곳이 가상의 패션회사 ‘더 쉬크’ 본사이자, 자주 출연할 해외영업팀 사무실과 안내데스크 등의 그림을 담당할 것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따로 세트장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느낌, 둘째는 크기다.

애초 대기업이라는 설정이다 보니, 애매하게 세트장을 만들어 봐야 느낌이 안 산다.

회사 전면 샷도 못 딸 뿐더러 인포나 엘리베이터 신도 조악해진다. 그러니 차라리 돈이 좀 나가도 그럴듯한 곳을 빌리는 편이 낫다.

“엑스트라들 준비 끝났습니다.”

“여기서 보니까 위치가 안 나와. 카메라 따라서 저 에스컬레이터 기준 오른쪽으로, 큐 들어오면 최대한 넓게 움직이라고 해.”

“예. 이 감독님, 들으셨죠?”

이어링을 낀 유호영 조연출이 달려가고, 황창재 PD가 대본을 말아 쥐고 소리친다.

“자, 5분 뒤에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오늘 찍을 씬은 ‘더 쉬크’ 해외영업팀으로 배정받은 인턴 한태리의 첫 출근 씬. 그리고 초중반부의 주요 장면들이다.

로비 2층, 난간에 기대 아래를 굽어보던 건은 안경을 추켜올렸다.

‘이건 좀 불편하네.’

원래도 시나리오 컨셉상 박선이 갖다 준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오늘 전달받은 PPL 브랜드는 더 크고 무겁다.

살면서 써 본 안경 종류라곤 군 시절 야시경이 전부지만, 이쯤은 감수할 만하다. 드라마를 굴러가게 하는 광고라지 않은가?

“호영아, 현장은 왜 이렇게 귀찮을까?”

“그래도 촬영 들어가면 나름 열심히 찍으시잖아요. ‘궁장검객’ 막촬 기억나시려나, 그때 조기퇴근이라더니 정시에 마쳐서 스탭들이 얼마나 우리 욕을 해 댔는데요.”

“···야, 나도 빨리 끝내고 싶지! 배우들이 눈만 감았다 뜨면 NG를 내는데 어떡하냐?”

“대충 찍고 시마이 치시면 되죠.”

“안 돼. 아직 대출금 다 못 갚아서.”

저만치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건은 흐트러진 와이셔츠를 매만졌다.

태종범 대표와 김률 감독과는 또 다른 유형의 콤비다. 이번 드라마 식구들의 면면을 살피면 ‘흑의사제’ 때와는 차이가 크다.

만사를 귀찮아하는 PD, 말 많고 일 잘하는 AD, 펑크를 낼지언정 촬영장에서 시비는 걸지 않는 투톱 주연 배우까지.

‘···와, 진짜 신기하다. 이런 마스크가 요즘 사람들 중에서도 나오는구나.’

‘예?’

‘아, 잠깐 얼굴 보고 감탄했어요. 오늘 리딩 잘 부탁할게요?’

대본리딩 때, 처음으로 얼굴을 본 서예니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때처럼 효과음 내면 저 놀라서 비명 지르니까, 하기 전엔 말 좀 해 줘요.’

이만하면 과히 나쁜 조건들은 아니다. 메인 여주인공 권유진이 다소 긴장한 듯 보이나, 연기를 몇 번 주고받으면 풀릴 일이다.

이쪽 배역이 조금 독하긴 하지만······.

‘안 울겠지, 연기인데.’

건은 이진하의 대사들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여주가 구르고 깨지는 로코인 만큼, 오늘 권유진의 배역 한태리는 그야말로 혼이 쏙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초반부터 중반부까지, 따로 디렉이 올 때까지 팀원들을 도구처럼 취급해 달랬으니까.’

실제 지시문도 냉정한 걸 넘어 야멸차다. 필명이 ‘무명’이라던 작가는 대사뿐 아니라 행동 제스처들까지 야무지게 넣었다.

무자비한 말투, 경멸하는 표정, 실수투성이 침팬지를 보는 듯한 눈빛 등등.

이건 거의 패션회사 팀장이 아니라 성격파탄 용병대장 수준이다.

평소 건이 동료들을 몰아쳤느냐, 그것도 아니다. 소규모 용사 파티는 물론, 편제된 철왕국의 8군을 총지휘할 때에도 그는 과묵하고 효율적인 리더였다.

‘그럼에도 합기가 느껴졌다. 이 시나리오의 오디션 촬영에서.’

이미 마음을 정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고민할 것은 없다. 전력투구로 세 번째 작품의 완결까지 달리면 될 일이다.

‘더 쉬크’ 출근 장면을 채워 줄 엑스트라들은 벌써 아래층 로비를 바삐 걷는 중이다. 잠시 지켜보고 있자, 저 밑에서 박선이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온다.

“형, 슬슬 올라가자! 이쪽 스탠바이 바로 들어간대. 권유진 배우님이 밖에서부터 찍고 오면서 위쪽으로 합류, 알지?”

“응. 준비 다 됐어.”

남주는 안, 여주는 밖부터 시작이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무빙 쇼트를 딸 거라 촬영 스탭들도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하얗게 빛나는 빌딩 외벽, 유리창 중앙부에 미리 작업된 ‘CHIC’ 로고가 위용을 자랑한다.

“유진아, 긴장하지 말고 해. 알겠지?”

자기가 더 긴장한 권유진의 매니저가 따라 나와 격려한다.

권유진은 손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바이, 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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