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59화 (59/122)

배고프지 않은 사람들 (2)

* * *

YTS 국장실.

올해 상반기, 2분기에 들어가는 작품들의 기획 보고가 끝났다. 요즘 부쩍 새치가 늘어난 주상준 CP가 경례를 붙였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 밥은 먹고 해라.”

“옙.”

“너 말고, 밑에 애들 먹이면서 하라고.”

“선배가 먹어야 후배도 먹이는 법이죠.”

“하여간 저놈의 혓바닥은······.”

주 CP가 가져온 기획서며 서류들을 긁어모으던 중, 최현우 국장이 문득 말했다.

“창재는 잘 하고 있냐?”

“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변휘승에다 박건을 얹었는데.”

“그것도 이상해. 황창재 그놈이 그럴 수완이 있을 놈이 아닌데, 작품이 썩 대단한 것도 아니고.”

주 CP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면 악담 같지만, 정확한 분석임을 아는 까닭이다.

황창재는 YTS의 아픈 손가락··· 사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손가락이다.

밀어준 적도 없는데 잘 컸고, 맡은 일은 또 평균 근처 값으로 무난하게 해 낸다.

그렇다고 두각을 드러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향상심과 호승심이 녀석에게는 부족하다.

최 국장의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하필 잘하는 놈들이 그때 다 새 작품을 들어갔었지. 놀고 있길래 적당히 제작비나 벌어 오라고 맡긴 거였는데······.’

이 웃긴 놈이, 갑자기 주가가 최고조인 스타를 섭외해 버렸다.

“···국장님은 얼마나 보십니까?”

“평균 8%. 보수적으로 가야지.”

예상보다 더 낮은 수치가 나왔다. 주 CP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600만 배우인데요? JNBC 쪽 드라마도 20%를 넘겼었고요.”

“아냐, 서사가 달라.”

“서사라면······.”

“대중들은 언더독을 응원하지, 애매한 애들한텐 관심 안 가진다. 불쌍할 거면 확 불쌍하든가.”

“아. 그쪽 멤버들이요.”

주 CP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억 이백억씩 투자한 대작이 아닐 뿐, 나오는 면면들을 보면 오히려 카드는 좋다.

아무튼 먹고 살 만한 남자 배우, 드라마랑 광고 잘만 찍는 여자 배우, 널리고 널린 ‘연기 평범 마스크 준수’ 신인까지.

‘근데, 그래서 더 보장을 못 하지. 라인업이 애매한데 동정표도 못 받으니까.’

톱 배우들만 나온다고 드라마가 꼭 뜨는 건 아니지만, 셋이 둘보다 낫고 둘이 하나보다 낫다.

그리고 ‘회색도시 팀장님’은 박건 혼자뿐이다.

“10% 넘기면 선방이다. 15% 넘기면 박건이한테 가서 절 한 번씩 해야 되고.”

다만··· 그 작품은 치고 나갈 깜냥이 못 된다. 최 국장은 다시 하얗게 세기 시작한 귀밑머리를 문지르며 고민을 끝냈다.

“제작비나 좀 더 챙겨 줘. 애들 회식 때라도 갈비 뜯으라고.”

“에이, 그래 봐야 돼지갈비 아닙니까.”

“백억짜리 프로젝트 쌍으로 말아먹고 거덜 안 난 게 다행이지. 올해는 긴축재정인 줄 알아.”

“많이 벌어 오겠습니다!”

“됐고, 다른 놈들한테도 밑에 애들 굶기지 말라고 해라. 너무 촬영시간 끌지 말고.”

주상준 CP는 살짝 감동을 받았다.

다른 방송사 국장들은 시청률 뽑아 오라고 미쳐 날뛴다는데, 이 사람은 PD 출신이 아니라 그런지 마음 씀씀이가······.

“여기서 더 그만두면 드라마국 문 닫아야 돼. 그럼 은퇴해서도 두고두고 망신이다!”

“···국장님, 왜 멀쩡한 애들을 자르고 그러세요.”

*

<용갈비>

성수동에 위치한 양갈비 전문점.

사장이 유명 배우의 친형인 탓에, 개업부터 연예인들은 자주 보이곤 했다.

그래서 종업원들도 웬만한 연예인들한테는 감흥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오는 사람들은 거기서 거기라, 결국 몇 번 보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프라이빗 룸으로, 생전 못 보던 연예인들이 들어온 것이다.

“···야, 봤어?”

“어. 나 인사했더니 인사도 받아 주더라. 팬서비스 장난 아냐.”

“부럽다, 나도 들어가고 싶다······.”

연예인이 왔다고 노가리 까다 들키면 말 그대로 쥐잡듯이 잡힌다.

매니저의 눈을 피해 소곤거리던 서버들이 프라이빗 룸 쪽을 흘끔댔다.

“근데 오늘 무슨 일 있나? 박건에 진지유에··· 로만 연예인들은 다 몰려왔네.”

*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고기를 불판에 올린 직원이 나간 뒤, 진지유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첫방 전략회의라더니, 사람들이 많네요?”

유준일 실장이 공기형 홍보팀장을 나무라는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팀장님이 잘만 꼬셨으면 구신승이도 데려오는데, 막판에 하필······.”

“···아니, 양 팀장님이 눈 시뻘겋게 뜨고 방해하는데 어떡해요. 요즘 신승 씨한테 하도 당해서 아주 수갑을 채웠더구만.”

배우 용준상의 친형이 하는 식당에서, 제일 큰 프라이빗 룸을 통째로 빌렸다.

룸 안에는 박건과 박선 형제, 진지유와 공기형 팀장에 유준일 실장까지 둘러앉아 있었다. 로만 내에서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부서별로 모아 온 것이다.

진지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전前 매니저에게 화살을 돌렸다.

“근데 유 실장님, 요즘 자주 뵙네요. 저 걷어차고 백하니 쪽 전담하러 가시더니.”

“야, 진지유! 그거 진짜 모함이다?”

“맞잖아요. 둘이서 같이 들어간 작품만 벌써 세 개 아닌가?”

“···그건 하니, 걔가 유독 사고를 많이 치니까 그렇지. 그리고 나는 걔를 전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실장으로서 대표 연예인들을······.”

“됐으니까 건배! 다들 소맥이죠?”

“소맥! 소맥!”

“저는 소주로 하겠습니다.”

박건의 말을 마지막으로, 술이 한 바퀴 돌고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오늘 자리는 박건 형제의 조촐한 계약 파티 겸 드라마 전략회의다.

첫방이 이제 일주일도 안 남은 상황, 자연히 화제도 ‘회도팀’ 시청률로 흘러갔다.

“선이 씨, 몇 퍼센트 예상해?”

공 팀장의 질문에 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회사 사람들 앞이라 마음대로 지르지 못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저는··· 어, 으음··· 일단은 10%만······.”

“에이, 박스타 이름값이 있는데 그것보단 더 나오지. 안 그래요, 실장님?”

“그래서 전 15% 봅니다. 최고시청률 기준.”

후하게 쳐줬다는 듯, 혼자 끄덕거리던 유 실장이 옆을 봤다.

“진 배우는? 지유 너, 원래 이런 거 내기하면 다 맞춰서 쓸어 갔잖아.”

갈비살 한 점을 낼름 삼킨 진지유가 말한다.

“최소 20%, 시청률 공약 걸면 30%까지.”

지나치게 높은 수치에, 홍보팀장 공기형과 배우팀 실장 유준일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유 씨, 요즘 로코 바닥 흉흉해. 그 JNBC랑 MBS도 9% 못 넘기고 쪼그라들었다니까요?”

“그래, 거기다 작가도 신인이잖아. 제작비 벌려고 제작사 끼고 연 공모전에서 당선된. 근데 공약 건다고 30%는 좀······.”

“저기, 두 분 다 ‘서울의 개’랑 ‘흑의사제’는 터질 줄 아셨나 봐요?”

그도 그렇다. 회사 직원 둘이 헛기침을 하는 사이, 진지유는 벌써 양갈비 세 대를 해치운 박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건 본인한테 물어봐야죠. 현장 분위기만 좋으면 시청률은 모르는 거라.”

새로운 뼈를 무자비하게 뜯던 박건의 손이 잠시 멈췄다.

“현장 분위기요?”

“그래요, 기사로는 좀 봤는데 궁금해 죽겠어. 선이 씨가 느끼는 거랑 배우 본인이 느끼는 거랑 또 다르잖아요.”

“변휘승 배우가 연기를 잘합니다.”

“그리고, 또?”

“PD님은 욕심이 크게 없고요.”

아리송한 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린 공 팀장이 말속의 맥락을 캐치했다.

“그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아니지, 욕심이 많은 게 안 좋지. 빨리 퇴근하고 집 가야 되는데 같은 컷만 열몇 번씩 찍고 있어 봐.”

“실장님, 그건 매니저 입장이잖아요!”

홍보와 로드의 실랑이를 보던 박건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예, 뭐든.”

“시청률이 높으면 수상 확률도 올라갑니까? 연말 연기대상에서요.”

배우가 아닌 사람들은 잠시 벙쪘다. 이 자리에서 가장 상을 많이 쓸어 담아 본 진지유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청률이 성과의 지표죠. 특히나 굵직한 상들은 더. 배우가 극을 견인해 방송국에 돈을 벌어왔다고 주는 거니까요.”

“그죠, 김률 감독님이 작품상 받은 것도 관객 수는 무시 못 하니까.”

“그렇군요.”

박건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끄덕였지만, 진지유는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나타났던 빛을 놓치지 않았다.

‘생전 욕심이라곤 없어 보이던 사람이, 웬 상?’

어젯밤, 박건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는 솔직히 조금 설렐 뻔도 했다.

박건 :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됩니까?]

박건 : [술 한잔 사고 싶은데요.]

노 대표가 회사 근처에 숙소를 잡아 줘서 조만간 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혹시 집들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대체 누가 회사 사람들 모임에 술 한잔 산다면서 부르냐고.’

무슨 연예인 형이 하는 가게라고 할 때부터 불안했는데, 망할 놈의 양갈비 집에 도착해 보니 술을 사는 자리는 맞았다.

단, 소속사 식구들이랑 다 같이.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하던가!’

진지유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동안, 공 팀장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방송사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은 퍼센테이지에 따라 많이 갈리죠. 신인상은 임팩트고··· 주연상이랑 조연상은 보통 그 해 가장 히트 친 드라마 배우들한테 돌아가요.”

“근데 박 배우님, 상은 갑자기 왜요?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았어요?”

“원래는 그랬는데, 올해는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유 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목표는 높게 잡는 게 좋죠.”

“아무튼 두 사람 다 걱정은 마요. 홍보팀이 이번에도 영혼 갈아넣을 테니까.”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올랐는지, 그사이 눈 밑이 어두워진 진지유가 웃는 낯으로 끼어든다.

“팀장님, 근데 제 영화는 왜 망했어요?”

“···그 얘긴 그만해 줘요. 우리 힘으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첫방까지 이제 D-7일.

평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유진아, 대사 쳐 줄까?”

대기 중인 밴 안, 권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대본 한 부를 더 뽑아 왔던 매니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우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배역은 대사를 주고받는 대부분의 상대가 박건이다. 매니저가 어설프게 받아줘 봐야 몰입만 깨질 것이다.

“그리고 오늘 찍을 씬들, 회차도 뒤죽박죽이라··· 차라리 순서 외우면서 혼자 연습하는 게 나아. 오빠는 대사만 안 틀리는지 봐줘.”

“···진짜로 괜찮겠어?”

꾸욱, 대본을 쥔 권유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괜찮아야지.”

.

.

.

‘회도팀’ 촬영 일주일째.

오늘 씬은 정신없이 널을 뛴다.

장소를 많이 옮겨 다닌다는 것이 아니다. 1부부터 14부까지, 회차를 점프한다는 소리다.

‘서울의 개’ 때는 나종모 PD의 스타일상 비교적 순서대로 찍혔지만, ‘회도팀’은 촬영 씬들의 타임라인이 무자비하게 들쭉날쭉하다.

사실 이쪽이 전형적인 드라마 촬영장의 케이스일 터이다. 덕분에 배우들은 캐릭터가 헷갈릴 만큼 극중 시간대를 옮겨 다녀야 한다.

“유진 씨, 이건 7부예요. 그러니까 방금보다 좀 더 편하게, 자연스럽게.”

“네, 알겠습니다!”

그나마 작중 후반부쯤 한태리가 머리색을 바꾸는 덕분에, 로맨스 씬을 초반부터 찍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다.

현장을 죽 둘러본 황 PD가 메가폰에 대고 신호했다.

“자, 들어갑니다. 큐!”

S#. 13 원단공장(야외, 실내)

한태리는 정신이 없다.

그간 수많은 일을 거쳤지만, 이 회사 해외영업팀의 업무는 괴물 그 자체다.

PPT도 만들어야 되고, 새로운 오더도 받아야 하고, 계약된 매장마다 방문해서 매출과 점포 관리까지 해야 한다.

ㅡ그럼 뭐, 쉬울 줄 알았습니까?

ㅡ그게 아니라······.

ㅡ우리 해외영업팀은 회사 특성상 핸들링할 분야가 많습니다. 국내 브랜드 영업에 런칭, 유통까지 가능한데 손을 놓으면 무능한 겁니다.

벌써 팀에 배속된 지 일주일째.

대형사고를 친 홍준영이 못 미더워서인지, 이진하는 계속 한태리의 교육을 담당 중이다.

사무실에서는 PPT를 짜고, 나가서는 뒤만 따라다니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이 인간은 몸이 강철로 됐는지 지치지를 않는다.

ㅡ···진짜 괴물인가 봐.

오늘은 매장 다섯 곳을 돈 뒤, 하청으로 일을 받는 원단 공장까지 왔다. 예리한 눈빛으로 원단을 훑던 이진하가 어딘가 전화를 건다.

ㅡ안데르손, 공수 가능한 일정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ㅡ안 됩니다. 시간이 안 맞아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쯤은 이미 늦을 겁니다.

ㅡ저희 쪽 조건을 다시 정리해 서면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스토어 가오픈 전까지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완벽한 발음의 영어와 스웨덴어, 핀란드어가 번역기마냥 튀어나온다.

한태리··· 권유진은 연예인을 구경하듯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본다.

‘어떻게 사람이 저러지······?’

그러나 감탄은 시청자의 몫이지, 배우의 몫이 아니다. 연기가 아니라 관람을 한 대가는 고스란히 렌즈에 찍힌다.

‘아, 이거 또 빠졌다.’

촬영감독이 인상을 구긴다.

신인이라 그런지, 곧잘 하다가도 집중력이 한 번씩 확 흐트러진다.

이제 다음 상황은? 높은 확률로 다음 대사 타이밍을 잊고 있다가 PD의 컷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촬영장에는 NG를 두고 못 보는 사람이 있다.

휴대폰을 쥔 채 거침없이 협상을 이어가던 박건이 시선을 돌린다.

“······.”

대사는 없다. 눈길이 카메라에 잡힐 만큼, 그리고 상대가 인지할 정도로만 흘끗 본다. 이내 흠칫 놀란 권유진이 다시 극 속으로 돌아온다.

모르는 사람이면 이 모든 것이 대본, 또는 디렉팅이라 생각할 만큼 자연스럽다.

‘저기서 커버를 하네.’

살짝 좁아지던 황 PD의 미간도 언제 그랬냐는 듯 펴진다.

대본에 있는 지시문이라거나, 이진하-한태리의 합을 맞춘 애드립이 아니다. 저건 그냥 한 명이 낸 NG를 다른 한 명이 살린 거다.

“가, 감사합니다!”

오케이가 떨어진 뒤, 어쩔 줄 몰라 하는 권유진을 괴물 후배가 격려한다.

“아닙니다. 아까 했던 얘기 기억하죠?”

“까먹으면 까먹는 대로, 긴장하지 말고 대사를 치라고······.”

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30분 뒤.

통짜 은색으로 코팅된 연예인 밴이 촬영장 한쪽에 등장했다.

“감독님, 서예니 씨 도착하셨습니다.”

“···또 시간 아슬아슬하게 맞췄지?”

유호영 AD가 탐탁찮게 고개를 끄덕인다. 제작진들은 시간에 예민하다. 아무리 ‘대충 적당히’를 표방하는 황창재라도 매 촬영마다 늦을락 말락 하는 배우가 달가울 리 없다.

“거의 공무원이라니까. 시간 맞춰 와서 적당히 연기하고 칼같이 퇴근하고.”

그렇다고 면전에다 잔소리도 못 하는 건, 그럴 만큼 큰 작품이 못 되기 때문이다.

현장의 왕은 PD가 아니다. 제일 몸값 높은 작자가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지닌다.

“벌써 두 번째 붙네요, 우리?”

모델 에이전시의 사장이자 메인 모델, ‘엄친딸’ 유비은 역을 맡은 서예니가 눈웃음을 짓는다.

안 그래도 키가 큰데, 스타일링까지 진짜 모델처럼 해 둔 탓에 포스가 철철 흐른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만 보면 나랑 찍는 씬은 되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촬영장 구석에 앉아, 메이크업을 재정비하던 박건이 한쪽 눈만 떠서 물었다.

“어째섭니까?”

“평소 텐션처럼 하면 되잖아요. 이진하 쪽이 더 재수 없긴 하지만.”

실제로 서예니가 연기하는 유비은은 적극적으로 이진하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한태리와는 외모도 배경도 완벽한 정반대. 한태리의 입지를 위협하는 동시에, 삼각관계를 조성해 긴장감을 주는 서브 여주인공이다.

ㅡ일 끝나고 시간 있어요?

ㅡ아뇨, 회사로 복귀해야 합니다.

ㅡ저 없었으면 이번 런칭도 못 했을 텐데. 런칭 쇼에 세울 모델 구하느라 발에 땀 나게 뛰었을 거 아니에요.

ㅡ······.

ㅡ그러니까 간단하게 한잔 하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일은 그 옆에 직원분 시키고.

“컷!”

연기를 멈춘 두 배우가 동시에 황 PD를 본다. 서예니는 당연히 오케이라는 표정, 박건은 미묘하게 아쉽다는 표정이다.

‘앞에서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이걸 다시 찍어도 연기력은 어차피······.’

망설이던 황창재 PD가 결국 소리친다.

“오케이, 다음 씬 갑시다!”

부산하게 이동을 준비하던 연출팀 스탭이 동료를 불렀다.

“야, 재호야.”

“어?”

“방금 박건 배우님 말야. 표정이 좀 달라져 있지 않았나?”

“뭔 소리야, 그분 농담할 때도 무표정인데.”

말을 꺼냈던 스탭이 억울한 듯 눈을 비볐다.

“아닌데, 나 시력 1.3인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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