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회초리 (1)
* * *
김이 자욱한 욕실 안.
샤워기 헤드에서 쏟아진 뜨거운 물이 근육의 결을 타고 흘러내린다.
“더워 죽겠네, 나이를 먹긴 먹었나.”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로 나온 변휘승은 대충 머리를 닦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잘 관리된, 그러나 몇 년 전보다 확실히 크기가 줄어든 근육질 몸이 비친다.
나이를 먹어 보니 알겠다. 20대 초반과 중반이 다르고, 중반과 후반이 또 다르다.
거기에 지금은 앞자리까지 바뀐 30대. 술과 담배를 하면서도 운동은 쉬지 않았지만, 주 4회씩 PT를 받아도 예전 몸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빌어먹을 자기관리. 은퇴를 하든 해야지.”
소속사 대표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변휘승은 가운을 걸쳤다.
1년 전부터 은퇴 타령을 꾸준히 해 왔다. 이제는 주변 모두가 나름의 대비는 했을 것이다.
‘문홍이 형이 울고불고 매달리겠지만.’
소속사는 제법 성장했고, 이름도 모르는 후배들도 여기저기 뿌리를 박았다.
사고뭉치 하나가 나간다고 기둥이 흔들릴 염려는 없을 거다. 회사 주가야 잠깐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맞을 매면 미리 맞는 게······.
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턱을 닦아냈을 때, 아파트 자체 현관의 알람벨 소리가 났다.
“음?”
요즘 드나들던 여자애들한테는 다 1층 현관 번호를 가르쳐 줬다.
예전··· 아니, 더 전에 데려왔던 애인가?
휘적휘적 걸어가서 인터폰을 확인한 변휘승은 잠시 멍해졌다.
“저기요, 댁이 왜 여기 와 있어?”
-놀러오라고 하셨는데요.
“내가 언제!”
-두 번째 촬영 끝나고 회식 때요. 제가 이사한다고 했더니, 그 오피스텔 앞 아파트에 사신다면서 호수를 가르쳐 주시고 놀러오라고······.
“아, 알았으니까 와요. 들어와!”
잠시 후 박건이 거실로 들어왔다. 후드티에 검은 볼캡, 마스크에 항공점퍼의 모자까지 뒤집어써 얼굴을 삼중으로 가렸다.
“저기, 어디 비밀연애 하러 왔어요?”
“여기 온 걸 들키면 안 돼서요.”
“누구한테?”
“기자, 파파라치, 선배님의 팬 분들 전부한테요.”
말과 함께, 박건은 뒤집어썼던 것들을 한꺼번에 벗어젖혔다.
몇 번 코를 킁킁거린 변휘승이 중얼거렸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뭘 좀 독하게 마셨네.”
*
“······.”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변휘승은 매니저 이종필만··· 아니, 종종 여자들도 앉았던 소파 앞자리의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나 담그러 왔나? 시청률 안 나오니까 선배 치우고 원톱 주연 들어가려고?’
정신 나간 생각이지만, 복장만 보면 비밀연애 중인 연예인보다 강도에 가깝다.
“연락을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그날 제 번호만 드리고 받질 않았네요.”
‘술김에 한 소리였지, 진짜 찾아올 줄 알았냐.’
당연히 이쪽도 저장을 안 했었다. 변휘승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괜찮아요. 근데 내가 오늘은 좀 바빠서, 따로 용건이 없으면······.”
“선배님.”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를 부른 순간, 짧은 소름이 팔뚝에 돋아났다.
“···왜 불러요. 사람 느끼하게.”
“선배님은 욕심이 있으십니까?”
“욕심?”
변휘승은 무심코 되물었다. 박건이 아닌 스스로에게. 출연료는 협의가 끝났고, 이 작품으로 늘어날 잔고들도 이미 계산을 마쳐 놨다.
더 부릴 욕심이 있나?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하던 연예인에겐 배부른 소리다.
“예. 이번 작품으로 말입니다.”
“잘 모르겠는데. 없으면 어쩌고, 또 있으면 어쩌려고요?”
“없다면 실례했습니다. 만약 있으시다면······.”
박건은 상체를 가까이 숙이더니, 술이나 한잔 꺾자는 어조로 말했다.
“저랑 일 하나 같이 하시죠.”
*
“음음, 음흠흠······.”
황창재 PD는 콧노래를 부르며 세트장 로비를 가로질렀다.
마침 장비를 들고 지나가던 제작팀 스탭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어, 그래요. 식사들은 했나요?”
“지금 먹으러 가는 중입니다.”
“밥은 때마다 챙겨 먹어야지. 고 배우 말대로, 우리 판에서는 체력이 돈인 거예요. 많이 먹고 힘내서 잘해 봅시다, 예?”
황 PD는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인 뒤,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
“우리가 저 정도 시청률은 아닐 텐데······.”
쓸데없이 밝은 귀에 미심쩍은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거기 신경쓰기엔 오늘 황창재의 기분이 지나치게 좋았다.
‘시청률? 봤지. 딱 좋은데 왜?’
집계만 봐도 피식피식 웃음이 비어져나온다. 1화가 7.5%, 2화가 9.1%, 어제 방영된 3화가 무려 8.2%에 랭크됐다.
‘이거야말로 평균이다!’
모두가 예상했던 10% 남짓, 얼마나 좋은가?
아직 히든카드인 박건과 변휘승의 연기 합이 방영 전이다. 조금 더 떨어져도 평균은 칠 거고, 더 선전한다면 그럭저럭 우수한 성적표를 받아볼 수 있게 된다.
감이 떨어졌다며 내려꽂히지도, 너무 잘해서 차기작에 부담을 주지도 않을 정도.
“치즈라면이랑 김밥 두 줄이요.”
근처 분식집에서 주문을 마친 황 PD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수많은 알람들로 범벅된 배경화면에 그의 격언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적 당 히 하 자]
그도 누구보다 열정적일 때가 있었다. 2년차 AD 시절, 스케줄에 맞추려 원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가드레일을 들이박기 전까지는 그랬다.
‘진짜 죽을 뻔했는데.’
에어백 덕분에 갈비뼈 골절로 끝났지만, 자칫하면 산길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에게 몇 가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누군가를 이기려 애쓰지도 않는다. 성적은 무조건 중간만 유지한다.
···아무리 뜀박질 빠른 놈이라도 죽을 고비를 넘기면 기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 로코를 들어가게 됐을 때, 내심 걱정이 많았었다.
대작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이즈가 생각보다 커서 문제다.
앞뒤로 망한 작품 때문에 구멍 난 호주머니, PPL을 떡칠한 로코로 때우려는 게 뻔하니까.
이런 경우는 물 반 독 반이다. 성배도 아닌 것이 마시면 높은 확률로 죽는다.
‘야, 황창재! 너 인마, 아직도 불만이 있어? 남들은 이 정도 사이즈 맡고 싶어도 못 해!’
하도 죽상으로 다니다 보니 주상준 CP가 구내식당 앞에서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사이즈가 작아서 불만이었던 게 아니지만······.’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나온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치우고, 가글까지 마친 뒤 세트장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
공기가 싸늘하다.
황창재 역시 촬영 현장에서 10년 넘게 구른 인간이다. 아까 전과 달라진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다.
“뭐야, 무슨 일이야?”
허둥지둥 달려온 유호영 AD가 드물게 쪼그라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박건 배우님이랑 변휘승 배우님이······.”
“그러니까 왜, 뭘 했는데.”
“···싸우셨는데요?”
황 PD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그 30분 사이에?
유호영이 말해준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대략 10분 전쯤, 1층 로비에 딸린 남자화장실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스탭들이 가 보니 박건과 변휘승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싸우냐고!”
“모르죠.”
유호영은 황 PD가 부들부들 떨든 말든 뚱하게 계속했다.
“진짜 몰라요. 연기가 어쩌니, 프로의식이 어땠니, 맥락도 없는 소릴 둘 다 해 대서.”
“대체 이게 무슨······.”
“근데 왜겠어요. 변휘승은 매번 늦게 오고, 박건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을 거고,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없다잖아요.”
황창재 PD는 이마를 짚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필 촬영장의 넘버 원과 넘버 투가 싸웠다. 갈등의 원인? 그딴 건 중요치 않다. 문제는 잔뜩 쌓인 화약 두 무더기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휘승 씨가 오늘 늦었었나?”
“한 5분 정도요?”
“둘 다 지금 어디 있는데. 이번 씬에서 붙는 거 아니야?”
“네, 이제 찍을 씬에서요. 박건은 위층에 있고 변휘승은 나가던데요, 자기 차 쪽으로.”
화약고는 이미 터졌다. 그가 부지런히 라면국물을 들이키고 있을 동안에.
황 PD의 관자놀이에 처량한 핏줄이 솟아났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
권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여요?”
“죄송합니다······.”
‘회도팀’ 세트장 18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서예니가 앓는 소릴 냈다.
푹신한 소파에 모던하게 빠진 인테리어. 탁 트인 전망이 내려다보이는데도 머리가 지끈댄다.
조별과제 에이스 놈들이 싸움질을 해 댔으니 이깟 풍광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저 멀리, 그 주범 하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가에 서 있었다.
트러블에 휘말리고도 딱히 화가 난 분위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평소처럼 씬 하나를 쳐내고 잠시 쉬는 느낌에 가깝다.
“진짜, 변또는 왜 괜히 긁어서······.”
서예니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박건을 쳐다봤지만, 권유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안다.
‘답답한 나머지 터진 거야.’
아마 예전부터 답답했을 것이다. 함께 씬을 찍으며, 박건은 계속 그녀를 끌어 주려는 것처럼 연기를 리드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웹드라마 한 편을 찍은, 실전 경험 부족한 신인에겐 어려운 과제다.
‘거기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니까······.’
흑의사제 같은 기적은 없었다. 연기력이 일취월장하기는커녕 박건의 커버에도 NG를 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앞에서 가히 완벽한 연기가 날아오는데, 그걸 못 받는 것만큼 배우로서 자괴감이 드는 일도 없다.
“아니, 뭐 분위기가 이래. 촬영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는 거······.”
“형님,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다 듣잖아요!”
저쪽에서, 또 다른 배우진이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시청률이 예상보다 낮게 나와도 축제 분위기였던 사람들. 대본을 까먹고 버벅대면서도 돌아서면 씩 웃고 마는 팀의 동료들이다.
권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일뿐이다. 따끔하게 말할 힘도, 그렇다고 극을 이끌 재능도 없는 신인에게는.
오늘 촬영은 글렀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왜 여기 다 몰려 있어?”
“휘··· 휘승 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변휘승이 라운지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저만치서 수심 어린 얼굴로 열심히 의논하던 PD와 AD, 촬영감독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안 돼, 또 싸우면······!’
누군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두 주연은 서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굳어 버린 사람들을 둘러본 변휘승이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오늘 촬영 안 해요? 내 씬 없으면 집에 갑니다?”
“아뇨, 아닙니다! 잠깐 박 감독님이랑 회의를 좀 하느라··· 그죠, 감독님?”
“어, 그렇지. 다들 뭐 해, 준비 안 하고!”
촬영감독 박종수가 다그치자 스탭들이 놀란 병아리 떼처럼 흩어졌다.
“···선배,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그나마 친분이 있던 서예니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집? 지금 거길 왜 가.”
창가 앞에서, 자기 매니저와 뭔가 말하던 박건이 라운지를 가로질렀다.
다음 씬은 하필 남자 주연들의 대결이다. 변휘승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벌 돈은 벌어야지.”
*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큐가 떨어졌다.
오늘 찍을 씬은 극의 중반이 지난 지점. 악역이자 라이벌인 AF몰의 사업본부장, 석태오가 이진하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야, 오랜만이네. 이진하 팀장님.”
“여긴 왜 왔지? 우리 회사에 네거티브 전문가는 필요 없는데.”
“이 팀장, 본부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명목상, 오늘 석태오는 AF와 더 쉬크의 협업을 위해 이 자리에 방문했다.
땀에 젖은 부장이 호통을 치지만 이진하는 미동도 않았고, 석태오의 도발만 이어진다.
“그래, 진하 씨. 귀한 손님한테 예의는 갖춰야지. 요즘 프로젝트도 계속 삐끗한다면서?”
“석태오 본부장이 에스윈더 에이전시 모델들을 빼돌려 쇼를 망쳤습니다. 이번 NKK 브랜드 런칭도 고의적으로 견제했고, 회사의 오더만 가로채며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얼음바늘 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임 부장 역을 맡은 고광표는 움찔 놀라 찌그러들었다.
기분 탓인지, 꼭 여태 요령을 부리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은가?
“어,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회사를 해치러 온 사람과 할 말 없습니다. 먼저 들어가······.”
“아빠 없는 반편이라 그런가, 겁이 많네.”
돌아서려는 이진하에게 잔인한 인신공격이 날아든다. 무표정을 지키던 은테안경 뒤 눈가가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원래는 말싸움만 벌이지만, 휙 돌아선 이진하는 석태오··· 아니, 변휘승의 멱살을 붙잡고 반쯤 들어올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무시무시한 악력에 수트 단추가 뜯어져나가며 목이 졸린다. 석태오 역시 이진하의 손목을 붙든 채 입가를 비튼다.
“이제 시작이야, 이진하. 철저하게 부숴줄 테니까. 오래 안 걸려.”
“···어림도 없는 소릴.”
“뒤늦게 두렵나 보군. 그럼 내 걸 빼앗지 말았어야지. 이 석태오의 자존심을, 네깟 게 뭔데 감히······!”
나직하던 으르렁거림이 피를 토할 것 같은 부르짖음으로 변한다. 대본보다 훨씬 격렬한 애드립인데도 누구 하나 말리질 못한다.
카메라를 잡은 촬영감독은 물론, 황 PD와 서예니도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배우의 연기를 빙자한 싸움을 쳐다보고만 있다.
그때, 스카이라운지로 올라온 한태리가 뛰어들어오면서 이진하를 부른다.
“팀장님!”
이진하, 순간 옆을 돌아보려다 움찔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쩔 줄 모르는 두 남녀를 번갈아 보며, 석태오의 핏발 선 눈이 악마처럼 번득인다.
“하! 저거였냐?”
“······!”
팍! 서로를 밀쳐낸 수트 차림 사내들이 주먹을 쥐지만, 회사의 보안요원들이 막아선다.
구겨진 셔츠를 휙 털어 버린 석태오가 능글맞게 인사를 건넨다.
“이거, 우리 회사도 아닌데 소란을 피워 미안하군요. 그럼 또 봅시다들.”
땀을 뻘뻘 흘리는 고광표와 어쩔 줄 몰라 하는 권유진, 주먹을 말아쥔 박건을 한 컷에 담던 촬영감독은 무의식 중 생각했다.
‘···이거 로맨틱 코미디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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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은 천 리를 뛰어넘는다.
그날 저녁, ‘회색도시 팀장님’의 불화설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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