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62화 (62/122)

사랑의 회초리 (2)

* * *

[‘회색도시팀장님’ 주연들의 불화설··· 흔들리는 촬영장]

[현장에서 싸웠다던 남배우 B와 K, 누구?]

[회도팀 불화·주먹다짐 논란··· ‘사실무근’ vs ‘내부갈등’ 점화]

[4화 시청률 7.2%, ‘회도팀’ 5화의 향방은?]

[YTS 기대작, 신인 작가의 기대작이라던 로맨틱 코미디··· 알고 보니 ‘구멍 숭숭’]

[촬영 현장 불화설, “그런 일 없어” 단호하게 일축한 서예니 측근]

[CVN 수목극 ‘종우네 삼남매’ 다음주 첫 방영··· 위기의 ‘회도팀’, 라이벌 잡고 부활할까]

*

YTS 사옥 안.

고개를 축 늘어뜨린 황 PD가 걸어간다. 수심이 잔뜩 드리워진 낯빛에, 지나가던 직원들이 움찔 놀라며 돌아본다.

“황 PD 아냐? 왜 저래?”

“냅둬. 저 양반 지금 기분 흉흉할 거야.”

“왜, 시청률은 잘만 나오더구만.”

“지금 그게 문제야? 주연 둘이 치고 받고 싸웠다잖아. 박건이랑 변휘승.”

“에이, 치고받은 건 오버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입방아를 찧지만, 정정해 줄 기운조차 없다.

‘···사실 치고 받은 급이긴 했으니까.’

불화설이 처음 뜬 것은 어제 오후.

이름 모를 연예일간지를 시작으로, 채 대응도 하기 전에 기사들이 쏟아졌다.

회도팀의 주연이 싸웠다더라, 연기 도중 몸싸움이 벌어졌다더라, 불화설이 불거진 사람은 남자 배우 두 명이라더라······.

‘남자 배우가 둘밖에 더 있겠냐고!’

이를 갈아 봐야 이미 늦었다. 어떤 놈이 나불댄 건지, 기사에 적힌 내용이 대부분 사실인데다 본 사람도 많다.

더 머리가 아픈 것은 앞으로의 촬영이다.

“로코가 아니라 주먹다짐이 될 것 같은데, 분위기를 보면.”

바로 촬영을 보이콧할 것 같았던 변휘승이 웬일인지 잠잠한 건 다행이지만, 한 번 터진 폭탄이 두 번을 안 터지겠나?

요즘 촬영장에는 지각은커녕 웃는 사람조차 한 명 없다. 시한폭탄들이 활보하니 배우고 스탭이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인 것이다.

‘좋은 시절은 오기도 전에 갔네.’

힘없이 걸어가는 황 PD를 누군가 잡았다. 돌아보니 굳은 표정의 주상준 CP가 서 있었다.

“아, 선배.”

“잠깐 얘기 좀 하자.”

인적 없는 비상구 계단에 서서, 주 CP는 뽑아온 커피를 건넸다.

“···너 괜찮냐?”

“여기는 중간이 아니라 바닥인데요······.”

“뭔 소리야, 또?”

주상준 CP는 습관처럼 담배를 빼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뭘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 이제 시작이야. 배우들 불화설 한번 떴다고 시청률 안 꼬라박혀. 너도 봐서 알 거 아냐?”

“같이 안 찍겠다면서 보이콧이라도 하면 어쩝니까, 선배. 둘이 멱살까지 잡았다니까요.”

“뭐? 그게 진짜라고?”

“···예. 붙는 씬이긴 했는데··· 좀 감정을 과하게 싣던데요, 둘 다.”

골똘히 뭔가 생각하던 주 CP가 박수를 쳤다.

“오히려 좋아.”

“예?”

“잘 됐다고. 잘 됐어.”

···이 인간이 진짜 미친 건가?

황창재가 죽어가는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주 CP는 속 없는 소릴 해 댔다.

“대본은 다 안 봐서 모르겠는데, 아무튼 걔네 둘은 끝날 때까지 싸울 거 아냐? 변휘승이 악역 서브남주라면서.”

“예, 맞죠.”

“아니면 뭐, 작가가 반전에 미쳐 가지고 마지막 가서 세탁이라도 해?”

“아닙니다. 그런 건 없는데······.”

“그럼 쭉 밀고 가. 변휘승이 그놈이 은퇴할 거 아니면 태업은 해도 하차는 안 해. 더 꼬장 부리면 제 살만 깎이는 걸 모르겠어?”

“대충 찍으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너도 대충 찍잖아, 인마. 어차피 거기 애들 박건 빼고 다 고만고만하더구만.”

“······.”

팩트가 따귀를 후려친다. 주상준이 의기소침해진 그를 다독였다.

“얼른 식당 내려가서 배부터 채워. 응? 입맛 없더라도 김밥에 라면이라도······.”

말하던 주상준 CP는 흠칫했다. 홱 돌아본 황창재가 눈을 홉떴던 것이다.

“절대, 절대로! 그 두 개는 안 먹을 겁니다!”

“어··· 그, 그래라.”

“내가 왜··· 그때 밥을 처먹는다고··· 그놈의 라면만 아니었어도······.”

황 PD는 좀비처럼 비척대면서 비상구 계단을 올라갔다. 이내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홀로 남은 주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이번 시청률은 팍 뜰 거라고, 제일 중요한 얘길 못 했네.”

*

촬영장에서 배우가 사고를 치면, PD는 골치가 아프지만 소속사는 속이 타들어간다.

심지어 그게 회사 에이스이자 초창기 개국공신이라면 더더욱.

따라서 지금 ‘스타톰’ 엔터테인먼트의 장문홍 대표는 천불이 일 지경이었다.

“아니, 이놈이 대체 왜!”

“대표님, 일단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휘승이도 다 생각이······.”

“생각은 무슨 생각! 용돈벌이 드라마 나가서, 잘 나가는 놈 들이박으면 그냥 묻히고 싶다는 거잖아! 아예 은퇴 인터뷰를 하라고 해, 그럼!”

장 대표를 뜯어말리던, 변휘승의 옛 로드 출신 실장이 입맛을 다셨다.

“그 얘긴 맨날 하잖습니까, 대표님 허락만 받으면 은퇴 날짜 잡겠다고.”

“김 실장.”

“···제가 아무래도 말을 잘못······.”

“가서 일 봐라.”

실장이 부리나케 나간 뒤, 장 대표는 머리를 감싸고 대표실 책상에 엎어졌다.

변휘승은 잘난 놈이다. 너무 잘난 나머지, 주변의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을 만큼.

그놈이 데뷔할 때 연예계는 지금보다 더한 하이에나 소굴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멀쩡하던 놈이 점점 비뚤어졌는지도 모른다.

악플과 루머가 유독 활개를 치던 데뷔 3년차, 한 번은 불러서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야, 휘승아. 이렇게 빈다, 제발 올해만 조용히 넘어가자. 기자들이랑 파파라치들한테 욕하지 말고, 안티들이랑 싸우지 말고, 어디 가면 자중하는 척이라도······.’

‘자중은 무슨 자중이야. 내가 잘못한 게 뭐 그렇게 많은데?’

‘없지, 별로 없지. 근데 넌 연예인이잖아, 인마!’

‘연예인이 성인군자야? 우리 엄마 집까지 쫓아와서 사진을 찍어. 스무 살 때 만났던 애를 찾아서 들쑤신다고. 그런 새끼들은 참아 주면 만만하게 보고 더 설친다니까!’

그리고 음주운전이 터졌다. 연예인들 술자리를 따라다니다가, 차를 빼 달라고 해서 운전대를 잡게 만드는 파파라치에게 걸린 것이었다.

비난의 원성은 높았고 옹호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그날 이후, 변휘승은 전과는 다소 다른 인간이 되었다.

‘형, 난 그냥 이대로가 좋아. 톱 배우고 헐리우드고 필요 없으니까, 꼴리는 대로 살다가 이 엿 같은 바닥 뜰래.’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운운했던 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겠나?

그냥 논란 없이 몇 작품만, 괜찮은 작품 두어 개만 더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신인왕을 휩쓴 특수부대 출신이랑 싸움질은······.

“이거, 진짜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난 장 대표는 사고뭉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로 심드렁한 목소리가 제꺽 받았다.

-또 왜?

“야, 휘승아. 너 걔랑 싸우면 안 돼, 인지도가 아니라 코뼈 내려앉는다. 그 나이 먹고 수술하면 잘 붙지도 않아!”

-뭐라는 거야, 술 마셨어?

“걱정돼서 그런다, 자식아!”

-···어휴, 나 집에 있으니까 올 거면 잠깐 와. 직원들 데려오지 말고 혼자.

술 마신 목소리가 아니다. 재빨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걸며, 장 대표는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불화설 직후엔 연락도 안 받던 놈이 갑자기 보자고 한다. 성질도 안 내고 술도 안 먹고, 그렇다면 할 말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하겠지. 슬슬 인터뷰 깔 준비 시작하자고.’

그나마 방영 도중에 하차, 또는 하차해야 할 사고를 안 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나. 이만하면 유종의 미라고 할 만 하다.

마지막을 예감해서일까, 멀지도 않은 거리가 유독 멀게 느껴졌다. 장문홍 대표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눈을 의심했다.

“어, 형. 왔어?”

“안녕하십니까.”

은퇴할 놈··· 아니, 싸움질한 놈은 태평하게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 그 옆에선 편한 추리닝 복장의 박건이 일어나서 인사를 건넨다.

장 대표는 더듬더듬 물었다.

“박건 씨가 여긴 왜······?”

“걱정 마. 우리 집 오는 거 안 들켰으니까. 파파라치들이랑 하루 이틀 싸운 것도 아니고, 내가 마음먹고 속였으면 열애설이 열 번은 덜 났어.”

자랑스레 대꾸한 변휘승이 냉장고 옆의 와인 셀러로 걸어간다.

“형도 마실래? 딱 한 잔만 할 건데.”

남자랑 노는 걸 안 걸렸다고 어필하더니, 이번엔 술을 권할 기세다.

엔터 대표란 자가 여기까지 봤으면 눈치를 못 채기도 어렵다. 장문홍 대표는 신음했다.

“그럼 둘이, 설마 처음부터······?”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이 친구랑 싸워,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고 싶어서?”

심지어 제법 친한 분위기가 아닌가. 장 대표는 두통과 복통이 섞이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건이 명료한 설명을 덧붙였다.

“소속사 도움을 받아서, 일부러 뿌렸습니다. 이왕이면 먼저 뿌리는 편이 원하는 여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소속사면, 로만이랑은 다 이야기가 돼 있었단 겁니까?”

“예. 그 전날 휘승이 형하고 얘기했었습니다.”

이 두 명이 형 동생 사이가 된 건 놀랍지도 않다. 심지어 상대는 회사에 알렸다는데, 한솥밥을 십 년 넘게 먹은 이쪽은 뭐란 말인가?

장 대표가 노려보자 변휘승은 와인 오프너를 빙빙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너무 화내지 마, 형. 깜빡할 수도 있지.”

“···그게 깜빡할 사안이냐?”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은 게 좋잖아. 종필이도 내가 진짜 싸운 줄 알아.”

저 모진 놈한테 기대한 사람이 잘못이다. 장 대표는 쩍쩍 말라붙는 입을 간신히 뗐다.

“박 배우님, 이게 보통 사안이 아닙니다. 걸리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아마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것 같은데, 불화설이 나면 보통 시청률이 잠깐 올라가다가 다시······.”

“올라가는 게 어디야, 바닥만 안 치면 됐지.”

“넌 좀 조용히 있어!”

입을 삐죽거리는 변휘승 대신, 박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리 선수를 친 거였습니다.”

“미리?”

“저희는 극이 삐걱거리던 게 아니니까요. 당장의 화제성만 끌어올 수 있으면 충분히 해 볼 만 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촬영장의 내부 결속도 공고해질 수 있겠고요.”

“불화설이 나는데 결속이 어떻게······.”

재차 물으려던 장 대표는 입을 다물었다. 충격이 가신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앞의 배우들은 바보가 아니다. 뻔히 잘 돌아가는 작품, 누가 봐도 좋은 분위기에다 재를 뿌렸을 리 없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풀어졌었겠지. 거기서 제일 이름값 높은 두 명이 싸운 거야.’

잘 되던 작품에 뿌리면 재지만, 안 되는 작품에 뿌리면 조미료다. 비록 ‘회도팀’은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박건이 말했다.

“관심이 집중되겠죠. 외부에서는 이쪽이 언제 무너질지 구경하려 들 거고··· 내부에서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할 겁니다.”

“···그 실패에 본인이 기여했다고 욕을 먹기 싫으니까?”

“그렇지, 역시 문홍이 형. 늙었지만 아직 감은 살아 있어.”

장 대표는 끼어든 변휘승에게 눈을 부라렸다.

“넌 인마, 이젠 사고를 치다 치다 지겨워서 가짜 쌈박질이냐? 무슨 프로레슬링 선수야?”

“이쪽이 찾아와서 꼬드기는데 어떡해. 나 은퇴하려던 것까지 알던데.”

“······어?”

말문이 막힌 그를 보며, 변휘승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고.”

“그래, 다 잘 됐다 치자. 그럼 끝난 다음엔 어쩔 건데? 불화설은 그냥 배우 이미지가 깎여. 뒤늦게 우리 원래 사이좋아요, 해 봐야 안 먹힌다고.”

“그것도 준비해 뒀습니다. 여기, 이쪽에.”

기다렸다는 듯 박건이 스마트폰을 건넸다. 내용을 훑어보던 장 대표의 눈썹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걸로 밀면······.”

“해 볼 만 할 겁니다.”

“그렇겠네요. 리스크만 최소화할 수 있다면.”

박건이 고개를 짧게 숙였다.

“먼저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작품을 견인하려 했다 쳐도, 위험성 큰 도박이었습니다.”

“아니, 계속 빌빌대다가 시청률 처박혀서 조기종영 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니까. 저 인간도 욕심 장난 아니라 그냥 솔직히 말해도 돼.”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중인데요.”

앞에서 투닥대는 꼴을 보니, 불화설이 아니라 열애설이 떠야 할 사이다.

장문홍 대표는 변휘승이 가져온 와인을 화통하게 따기 시작했다.

“그래요, 인생 뭐 있나? 온 김에 한잔씩 하고 생각합시다!”

“와, 소속사 대표가 음주운전을 하려고 하네.”

“···대리 부를 거다, 벼락 맞을 놈아.”

*

촬영장에 긴장감이 흐른다.

예전엔 느슨하다 못해 다소 방만할 정도였다면, 이제는 비장함마저 감돈다.

변화는 스탭들보다 배우 쪽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서예니가 세트장으로 걸어온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예, 배우님도 안녕하세요.”

예전에는 변휘승 못잖게 시간을 맞춰 오던 사람이, 이젠 일찍 도착하는 걸로 모자라 스탭들한테까지 인사를 한다.

“저기, 아직도 기자들 많아요?”

“예, 근처에 계속 돌아다니는 걸로······.”

“하아··· 알겠어요.”

한숨을 내쉰 서예니가 매니저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세트장 주변에 언뜻언뜻 보이는, 카메라를 든 자들만 봐도 드라마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체감할 수 있다.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 위상이 아니라 뭐 하나 더 터지길 바라는 거겠지.’

어쨌든, 그런 형편이니 지각은 고사하고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냥 NG를 내고 한 소리 듣는 것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행여 본인 때문에 촬영장이 뒤집히면 드라마 말아먹은 일등공신이 될 판이다.

“자, 다시 가겠습니다.”

“아니, 한 번만 더 해 봅시다.”

“진짜 마지막으로······.”

어지간하면 OK를 주던 황 PD도, 그날 이후 재촬영을 내는 비율이 높아졌다.

불화설의 원인이 드라마의 퀄리티 및 배우 애티튜드가 아니냐며 의심받는 상황. 현장을 조율해야 할 PD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다만, 이따금씩 원론적 의문이 나오긴 했다.

그래서 둘이 왜 싸운 건데?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조심하는 와중 촬영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5회가 방영되는 3주차, ‘그 사건’ 이후 첫 방송이다.

야간촬영이 늦게까지 이어지는 날이라 본방 사수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차라리 잘 됐다는 분위기였다.

실시간으로 잔인한 추락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컷! 로비 쪽 스탠바이 완료되는 대로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촬영 템포도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매니저가 가져다 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권유진은 숨을 골랐다.

‘잘 하고 있는 건가?’

촬영은 중반부를 넘어섰고, 감정선이 필요한 씬들도 어찌어찌 잘 넘겨 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들의 드라마도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잠깐 앉아도 됩니까?”

눈을 들자 쭉 뻗은 수트 바지가 있었다. 초반부터 혼만 나다가 요즘은 로맨스 기류가 흘러, 훨씬 연기를 받기가 편해진 박건이다.

“네, 근데 곧 촬영 시작이라······.”

“1분은 앉아도 되겠죠. PD님도 뭘 좀 드시는 것 같던데요.”

권유진은 슬쩍 제작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이 마른 게 아니라, 아예 타들어간다는 듯 생수를 쏟아 넣는 황창재 PD가 보인다.

“전보단 촬영이 편하네요. 이제 좀 로코스러운 씬들이 나와서.”

“저도요. 찍었던 웹드라마도 로맨스 쪽이었거든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제 5화 들어가는데, 강윤중 역할 배우 분이 복싱을 하시더군요.”

“아, 저 그때 진짜 연기 못 했는데!”

시시콜콜한 화제로 대화가 오간다. 권유진은 이것이 상대의 배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이번 작품이 잘 안 되면 실망이 크실 텐데······.’

아직 극의 초반일 뿐이지만, 이대로라면 희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박건과 변휘승은 그날 이후로도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주고받는다.

극적으로 저 둘이 화해에 성공한다면 모를까. 갑자기 분위기가 좋아질 일은······.

“자, 슬슬 준비합시다!”

황창재 PD가 외친 순간, 갑자기 우당탕탕 소리가 나더니 조연출이 전선에 걸려 넘어졌다.

유호영이라는 이름이었나? 허겁지겁 일어난 AD가 속삭이는 걸 들은 PD의 얼굴이 변한다.

“···뭐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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