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회초리 (3)
* * *
로만 엔터테인먼트.
홍보실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잔치판 같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터졌어, 터졌다!”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최고 14.1%··· 오늘은 15.3% 넘겼습니다, 변휘승이랑 박건이 같이 나오기 직전부터 급격히 치솟았어요!”
직원들이 난리를 치는데도 공 팀장은 팔짱 낀 채 입술만 잘근거렸다.
오늘은 초록색 정장에 시계줄까지 초록으로 맞춰, 풀 한 포기가 서 있는 것 같다.
“아쉽네, 20% 두드릴 줄 알았더니.”
“20%라뇨, 팀장님! 이 드라마 지난주까지 7% 언저리였어요!”
“그건 손을 안 썼을 때고. 이번 주는 우리가 비밀병기를 가동했잖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타자를 두드리던 남직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귀신이라니까······.”
지난주, ‘회도팀’ 4화가 방송된 직후 박건이 매니저도 없이 홍보팀을 방문했었다.
‘혹시 팀장님 계십니까?’
둘은 빈 회의실 하나를 잡고 틀어박히더니 한동안 뭔가를 쑥덕거렸다. 돌아온 공 팀장이 던져 놓은 말은 이러했다.
‘건이 씨가 사고 하나 치겠대.’
불화설을 낸다는 소리에 다들 식겁했으나,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이해가 됐다.
들어보니 밖뿐 아니라 안도 문제라지 않나. 시청률 펌핑과 집안 단도리까지 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다.
“다음 카드는?”
“다 준비됐죠. 슬슬 배우랑 같이 싸잡아서 드라마 때리는 안티들 늘어나는데, 얘네들 좀 더 불려서 터뜨리려고요.”
“그래. 선이 씨한테도 얘기 다 했다니까, 자료는 그쪽으로 받으면 될 거야.”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던 여직원이 낚싯줄에 꿰인 듯 고개를 들었다.
“근데 진짜 비밀로 했대요? 동생한테도?”
“그랬다던데?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고는, 완전 대외비였나 봐.”
연예계의 홍보전이란 우습다. 아이러니하지만 싸울 상대가 있어야 판이 커진다.
그 과정에서 줄타기는 필수적이다. 압도적으로 여론을 휩쓸면 잠깐 타다가 금방 꺼지고 만다.
공기형 팀장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니 계속 던져야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까지 돈 싸들고 와서 덤빌 때까지.’
갑자기 웬 불화설이냐, 저러다 진짜 싸우는 거 아니냐, 내 배우들이 저럴 리가 없다는 팬덤들의 실랑이까지 껴서 반응은 최고조에 달했다.
홍보실 직원들도 거기 편승해 ‘실제 싸움인가 연기인가’ 따위의 짤을 마구 쪄서 커뮤니티들로 퍼 날랐다.
이 역시 미래를 향한 투자다. 지난 일주일간 이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TV 앞에 이만큼 끌어모으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 거긴 어때?”
공 팀장의 물음에, 주어 없이도 제꺽 알아들은 남직원이 대답한다.
“‘우세남’요? 지금은 6%인데··· 점점 내려가서, 막바지엔 5% 찍을 것 같습니다.”
“지금쯤 피눈물 좍좍 쏟고 있겠지. 미안하지만 상대가 안 좋았어.”
KBC의 새 수목극, ‘우리들의 세 남매’ 쪽에서는 동시간대 지상파 라이벌인 ‘회도팀’을 방영 전부터 견제해 댔었다.
딱히 신경 안 쓴다느니,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느니, 막말을 뿌리던 작감의 표정이 어떨지 생각하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이제 극만 안 무너지면 걔들 끝날 때까지 밟힐 거야. 화제성 계속 끌고 가면서, 우리 주연들 프로의식 위주로 교묘하게 돌려 보자고.”
“박건 씨랑 변휘승 연기 보면 슬슬 불화설 거품도 빠지지 않을까요?”
“그럼 때리는 연기 한번 해 달라지 뭐. 합의 하에 한 대만.”
“에엑, 변휘승을요?”
공 팀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응, 지유 씨가 극찬하더라고. 소리가 그만큼 찰진데 안 아픈 따귀는 처음이라면서.”
*
“와, 대박.”
아이돌 ‘포퀸즈’ 숙소.
30평이 조금 넘는 아파트에, 반가운 손님이 치킨을 들고 놀러왔다.
전 멤버 진지유와 현 멤버 넷은 소파며 흔들의자에 취향껏 모여 앉아 ‘회색도시 팀장님’ 본방을 관람했다.
극이 끝날 즈음, 멤버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의문을 제기했다.
“재밌긴 한데··· 우리가 다 같이 볼 정돈가?”
“그러게. 저 언니는 바쁘다면서 안 놀러오더니, 치킨까지 사 들고.”
“얘들아, 같은 회사 동료잖아. 이럴 때 우리가 힘을 모아 줘야지.”
전(前) 리더, 진지유가 변명했지만 막내 소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뭔 소리야? 소속사 멤버라고 밀어준 걸 한 번을 못 봤구만.”
속일 수도 없는 게, 이것들은 연습생 시절부터 칠팔 년을 동고동락한 늑대들이다.
‘파이브퀸즈’로 데뷔했던 진지유가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나머지 멤버들이 다른 소속사에서 재결합해 ‘포퀸즈’가 되었다.
진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現) 리더 임아희가 혀를 쯧쯧 찼다.
“얘들아, 몇 년을 봤는데 저 언니 취향을 아직도 모르겠니?”
“키 크고 잘생기고.”
“피지컬 좋고. 머리 크기 중요.”
“아이돌 스타일 말고, 무조건 배우나 모델 느낌으로. 미소년은 절대 안 됨.”
갓 나온 팝콘처럼 쏟아지는 이상형 목록에 진지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근데 봐, 저걸 다 갖췄는데 연예인이랑 다르게 야성미가 개쩔어. 배우 씹어먹는 일반인한테 안 혹하고 배기겠냐고.”
폭풍처럼 늘어놓은 임아희가 덧붙였다.
“여자 잘 때리는 건 좀 깨지만.”
“야, 그거 연기였다고 했지!”
결국 옛 리더의 응징이 떨어졌다. 현역 아이돌이라 운동을 꾸준히 한다지만, 본디 싸움은 피지컬이 깡패인 법이다.
손발이 붙잡혀 쿠션으로 난타당하는 와중에도 임아희는 바동거리며 외쳤다.
“언니 취향 인텔리한 짐승남 맞잖아, 철갑부대 보면서 얼굴만 내 취향이면 연락처 받았을 거라고 톡한 거 다 있어!”
“······.”
망연자실한 전 리더를 홱 밀쳐낸 현 리더가 의기양양하게 심문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갔는데, 고백은 받았어? 아님 이쪽이 하셨을까나?”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고백이야!”
“언니 원래 노빠꾸 진직구잖아. 남자 마음 기가 막히게 들었다 놓는.”
“진폭스.”
“진저에일.”
“진시황녀.”
한 마디씩 덧붙인 멤버들이 도망칠 준비를 했지만, 진지유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먹혀. 스캔들에 미친 사람이야······.”
임아희가 경악한 표정으로 손가락질했다.
“뭐? 이걸 앞에 두고?”
“···임아희, 손가락 방향이 불순한데?”
“말도 안 돼. 언니가 아이돌 할 때도 먼저 연락 온 연예인들이 연 평균 60명인데, 이렇게 판까지 깔아 줘도 안 온다고?”
듣고 있던 멤버 하나가 경악했다.
“미친, 임아희 저건 그걸 다 셌네.”
“적어 놨지. 진지유 비밀 노트가 몇 권인데, 나 결혼할 때 이거 팔아서 신혼여행 갈 거야.”
“그래라, 그래, 마음대로 해······.”
“근데 믿기질 않네. 지유 언니한테 안 넘어온 사람 아직 못 봤는··· 어, 설마?”
막내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오빠도 같은 소속사랬잖아. 혹시, 정말 혹시··· 달려라 백하니 취향······?”
옛 만화 주인공과 동명의 모 배우가 진지유랑 으르렁대는 걸 모를 멤버들이 아니다.
임아희가 팔짱을 쓱 꼈다.
“그럴 수 있지. 백씨가 예쁘긴 해, 저 언니랑 다르게 좀 청순한 스타일로다가.”
“근데 붙으면 또 별로지 않나? 작년 청룡영화제 때 드레스로 완전 발렸잖아.”
“그건 목 아래 한정이지.”
“하긴, 판정승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
진지유가 서늘하게 웃으며 쿠션을 움켜쥐었지만, 토론에 심취한 멤버들은 미처 못 봤다.
이내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그녀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뒤늦게 스산함을 감지한 임상미가 눈을 치뜨고 손가락질했다.
“히익, 진꺽정이다!”
“뭐? 목 아래 한정? 판정승? 그럼 힘은 누가 더 센지도 느껴 보자, 아주.”
“저거 뺏어! 저 언니가 들면 쿠션으로 패도 코피 터지니까!”
그날, 인기 아이돌의 숙소는 인형과 쿠션이 솜을 튀기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
‘회도팀’ 8화 방영일.
이사한 큰아들의 집에 온 가족이 모였다.
노중만 대표가 구해 준 오피스텔 거실은 박열호와 한영주, 박선이 다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널찍하니 자리가 좋았다.
거기에 오늘은 특별한 손님까지 한 명 더 꼈다.
“아드님이랑 촬영 중인 변휘승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넙죽 절부터 올리는 변휘승을 한영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일으켰다.
“미안해요. 사실 내가 엄청 미워했거든요. 불화설 기사 뜬 뒤로, 드라마에서 나오실 때마다 몹쓸 놈이라면서 욕을······.”
“아이고, 어머님! 절대로 괜찮습니다. 저희가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한걸요.”
“어험, 흠, 휘승 군. 나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내가 현역 때도 그랬거든. 팀 동료란 때때로 다투기도 하면서······.”
“당신은 지금 농담이 나와요?”
“아빠, 엄마, 손님 앞이잖아!”
쌍심지를 켠 한영주를 박선이 부리나케 말리기 시작했다.
슬쩍 몸을 기울인 변휘승이 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머님이 마음이 약하시네. 내가 어른들한테 먹은 쌍욕이 지금껏 얼만데.”
“악역 연기를 잘해서요?”
“아니, 자기들 아들딸 울렸다고. 이거 완전 연예인 역차별 아냐?”
건의 미간에 어지간해서 안 생기는 세로줄이 파였다. 남자 배우들을 많이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이런 놈은 또 처음이다.
“딸은 그렇다 치고, 아들은 왜 울렸습니까?”
“몰라, 나도 모르는 새 지들 애인이라도 뺏겼나 보지. 나한텐 다 남친 없다더니만.”
“···정말 제 명에 못 죽으시겠네요.”
“그래서 은퇴할랬더니 네가 막았잖아. 우리집까지 쳐들어와서.”
대꾸한 변휘승은 인상을 썼다.
“근데 형 소리 할 거면 그냥 말 놓으라니까,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더구만.”
“제가 말을 잘 못 놔서요. 이게 편합니다.”
철왕국에 있던 세월을 다 합치면 아버지보다도 연배가 올라간다.
까마득한 동생 뻘한테 형이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반말을 쓰는 게 더 어렵다.
“형님들!, 광고 끝나 가요!”
“이제 시작하니까 집중합시다. 모니터링하러 온 건데 빠뜨리지 말고 봐야지.”
곧 8화가 시작되고, 중반부를 넘어선 ‘회도팀’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ㅡ이진하, 넌 나한테 안 돼. 그러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았어야지.
AF몰의 본부장, 석태오는 이진하의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
따낸 오더를 알아내 더 높은 조건으로 가로채는가 하면, 자체브랜드 런칭 쇼에 섭외한 모델들을 통째로 빼돌려 입지를 약화시킨다.
ㅡ이거 빚 하나 진 거예요? 빌려준 돈은 꼭 받아내는 타입이라.
이진하에게 호감을 가진 모델 에이전시 사장, 유비은이 아니었다면 사내 평판이 크게 휘청거렸을 사건이었다.
ㅡ이진하, 요즘 좀 위태위태하지 않나?
ㅡ저 잘났다고 설치는 놈들이 다 그렇지. 언제 고꾸라질지 지켜보자고.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 독보적으로 뛰어난데다 뒷배 없이 팀장까지 고속 승진한 이진하를 질투하는 자들이 ‘더 쉬크’ 내부에도 많다.
쇼에 모델들을 공급한 대가로 유비은과 데이트를 약속하고 돌아오는 길, 조수석에 앉은 한태리가 조심스레 묻는다.
ㅡ팀장님. 혹시 그, 석태오라는 사람······.
ㅡ관심 갖지 마요. 한태리 씨가 알아야 할 일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이진하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한태리. 석태오의 뒷조사에 나선다.
어째서 있는지 모를 ‘화이트해커’ 절친은 이진하와 석태오가 고교-대학 동기임을 전해주며 둘의 악연이 길었음을 암시한다.
ㅡ학창시절 동안 너네 팀장을 한 번도 못 이겼나 봐. 거대 백화점 오너 아들에, 외모 능력 다 빵빵한 엄친아가 계속 발린 거지.
ㅡ···그런 이유 때문에 팀장님을 괴롭혀?
ㅡ모르지. 석태오는 졸업하고 나서 바로 해외로 갔고, 이진하는 청류전자 전략기획실에 들어갔다가 퇴사했네.
ㅡ전략기획실? 영업팀이 아니라?
ㅡ응. 그러다가 석태오가 돌아오고 둘이 부딪친 거지, 업계가 같으니까.
아마 이진하의 비밀도 과거에 있을 것이다. 한태리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 찰나, 같은 팀 상사에게 전화가 온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ㅡ태리 씨, 회사에··· 우리 팀에 경찰들이······!
그렇게 8화가 끝났다.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자 시청자들의 원성이 솟았다.
“와··· 여기서 끊는다고?”
“방송국 사람들 편집 실력은 갈수록 느는구나. 거, 너희 엄마랑 봤던 주말의 명화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아빠, 요즘은 저걸 절단신공이라고 해. 딱 궁금한 데서 자른다는 뜻이래.”
해설을 맡은 박선이 시청률 확인을 위해 홍보팀과 전화하는 사이, 변휘승이 음흉하기 이를 데 없는 떡밥을 던졌다.
“아버님 어머님은 저기 저, 여주인공들 중 누가 박 배우한테 더 어울린다고 보십니까? 신입사원이랑 모델 업체 사장 중에요.”
“아무래도 더 착실한 친구가 좋지 않겠어요? 한태리 쪽이 싹싹하고 당차던데.”
한영주가 한태리를 고르자마자 박열호가 헛기침과 함께 반론한다.
“어흠,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에이전시 사장이 더 어울릴 것 같지요. 괜히 사내연애를 시작했다가 잘못되면 곤란할 거 아닙니까.”
“두 분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저야 둘 다 만나봤을 것 같지만요, 하하핫!”
본래 로코물은 가상의 커플링을 이리저리 엮어 대는 맛이다. 웃고 떠들던 중, 한영주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건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리 아들 키스신은 언제 나오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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