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회초리 (4)
* * *
서예니는 요즘 붕 뜬 기분이었다.
자기가 떠 가는 게 아니라, 투명한 손가락이 목덜미를 잡아서 들고 가는 것 같다.
비에 젖은 걸레짝 꼴이던 드라마가 활활 타오르며 고점을 연신 갱신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게 되네.”
불화설이 터졌을 때만 하더라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미친 리더십으로 작품을 성공시킨 박건, 잡스러운 사건 사고론 올타임 레전드라는 ‘변사또’ 변휘승의 대결이라니.
극적인 협상 타결? 비 온 뒤에 굳는 땅? 천만의 말씀, 암행어사와 탐관오리가 만났으니 누구 하난 죽어서 나갈 줄 알았다.
드라마 직후에 들어올 광고라도 챙기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탈선한 줄 알았던 기차는 장애물이고 뭐고 쓸어버리는 기갑전차였다.
“안녕하세요, 배우님.”
“어, 예. 안 무거워요?”
“괜찮습니다.”
“그러다 장비 떨어지면 그쪽도 다치고 내 머리도 깨지니까, 좀 쉬엄쉬엄 해요.”
동네 백수마냥 추리닝 호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어온 변휘승이 스탭과 잡담을 주고받는다.
시청률이 깡패라고, 촬영장 분위기는 전에 없이 의욕적이다.
이전이 불화설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정말로 일할 맛이 난다. 조연과 단역 배우는 물론, 서로를 소 닭 보듯 지나치던 스탭들마저 변휘승한테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근데 저 둘은 화해 안 하나?’
박건과는 여전히 냉랭하지만,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멱살을 잡지는 않는다.
뒤에서 연락해서 풀었으려나? 생각하는 도중 변휘승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뭐야. 또 일찍 왔네?”
이 인간은 늘 뼈 있는 시비를 건다. 찔리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서예니는 애써 불평을 삼켰다.
“그럼 늦게 와요? 욕을 얼마나 먹으라고.”
“난 우리 예니가 커버해 줄 줄 알았지. 나 대신 욕받이로 섰다가 같이 은퇴하려나 싶었는데, 아직 방송 욕심은 남았나 봐?”
“와. 악담 진짜······!”
“응, 악담 말고 농담.”
씩 웃은 변휘승이 손을 흔들며 지나쳤다. 그녀는 무심결에 점퍼 자락을 붙잡았다.
“저기, 선배는 괜찮아요?”
“뭐가.”
“별일 없이 지나간 것 같길래요. 혹시 둘이 그 뒤로 뭐가 있었나 해서.”
변휘승은 시큰둥하게 귀를 후볐다.
“있긴 뭐가. 그러고 끝인데?”
“선배 성격에 그냥 넘어가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박건 씨랑 더 싸우면 흑의사제 팬들 다 달려와서··· 아니다, 진짜 병원 실려갈까 봐 휴전신청 한 거 아니에요?”
“나 무에타이 9단이야. 이상한 소리 할래?”
변휘승이 눈을 부라렸지만 정말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찔끔하던 서예니는 다시 의혹을 제기했다.
“아니, 봐요. 거기다 황 PD님이 찍은 분량을 또 찍었다니까요. 절대 재촬영할 사람이 아닌데, 이미 오케이 내서 편집실 보냈을 씬을.”
“대본이 수정됐다잖아. 작감이 따로 합의를 봤나 보지.”
“맞아! 근데 그 작가는 왜 촬영장에 안 오지? 선배랑 박건 씨가 싸울 걸 알았나?”
“너도 참 징하다······.”
한심한 눈빛이 된 변휘승에게 덩치 큰 매니저가 경호원처럼 따라붙는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멀리서 조연출이 외친다. 대본을 쥐고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서예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다니까, 진짜.”
*
‘회도팀’ 촬영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주연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포함해서 13화, 14화의 내용 중에서도 절반이 채 남지 않았다.
이미 찍어 둔 분량 일부를 재촬영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마지막 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정이 빡빡해지긴 했네.’
유호영이 가져다준 목욕탕 의자에 쪼그려 앉은 채, 황창재 PD는 코를 훌쩍였다.
거무죽죽하던 낯빛은 회복됐지만 그렇다고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다.
평균을 치던 작품이 기대보다 훨씬 잘 나가 버리니 종영 부담이 밀려오기 시작한 탓이다.
‘피디님, 그거 진짜 병이에요. 불화설 나고 시청률 꼬라박는 것보다 백번 낫죠!’
‘···속 모르는 소리 마라.’
‘그냥 좀 즐기세요. 그러다 스트레스성 위궤양, 뭐 이런 걸로 쓰러진다니까요?’
유호영이 깐족대기에 대본을 휘둘러 쫓아냈지만, 사실 배부른 소리라는 것은 그도 안다.
‘창재야. 이거 좀 위험하다. 메이킹도 없고 리딩도 따로 안 빼고, 진짜 이러다가 국장 픽에 너만 엿 먹을 수도 있어.’
첫방 직후, 동기 PD 녀석이 염려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회도팀’은 상승세를 탔다.
빈말이라도 작품이 특별해서는 아니다. 애당초 이 신인 작가의 능력도, 자신의 연출도 냉정하게 평가해 괜찮은 편에 불과하다.
카메오들의 열연? 말도 마라, 조연을 맡은 배우들은 딱 밥값만 하고 가는 인간들이다.
‘권유진은 많이 나아졌고, 서예니는 늘 하던 연기를 하고······.’
주연들의 불화설로 드라마가 달아오른 순간, 폭탄을 던져 넣은 해결사는 이번에도 ‘그 배우’였다.
‘···박건은 박건이다.’
누가 그를 로코에 적응 못 할 것이라 했는가?
처음 석태오와 재회하는 씬, 놈의 멱살을 잡으며 시청률까지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린 씬, 한태리를 향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씬까지.
슛이 나온 순간, 배우는 눈 깜짝할 사이 현장과 공장과 사무실을 누비는 ‘이진하’ 자체가 된다.
짧은 대사라지만 4개 국어를 원어민처럼 발음하는 데선 놀랄 기력도 잃었다. 혹시 유학파 출신이냐고 묻자, 잠시 고민하던 박건은 매니저가 없는 걸 확인하더니 대답했다.
‘한동안 서구권에 머물렀다고··· 근데 동생이 있는지는 왜 본 거지?’
어쨌든 큰 고비를 넘겼다.
싸움 구경을 하러 온 시청자들이 TV 앞에 자리를 잡았고, 그들이 ‘회도팀’의 새로운 콘크리트층이 되었다.
연기가 조금만 우스웠다면 온갖 조롱을 당하면서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기서 건들건들 걸어오는 저놈의 공도 무시 못 할 만하다.
“감독님, 대본이 또다시 뽑혔어요?”
“아, 예. 이게 어쩌다 보니까······.”
변휘승은 오늘 아침 전달됐을 대본으로 펄럭대며 부채질을 했다.
“우리 완전 쪽대본이네, 사전제작이라더니 절반은 뒤집어엎고. 미리 말이라도 해 줬으면 고생할 준비는 했을 거 아녜요.”
황창재는 쭈글쭈글해져서 눈을 피했다. 속사정을 시원하게 털어놓기도 민망한 탓이다.
댁들의 불화설 직후부터 작가의 창작욕이 심각하게 고취됐고, 그래서 찍은 분량까지 고쳐 댄다는 걸 어느 포인트에서 설명하겠나.
[까요빌런] 피디님 혹시 조금만 더 수정해도 괜찮을까요
[까요빌런] 진짜 좋은 생각이 나서요
[까요빌런] 이러면 1화랑 2화에 던진 것도 복선으로 연결이 돼요
[까요빌런] 피디님
[까요빌런] 혹시 귀찮으신 걸까요
[까요빌런] 그리고 이진하 한태리 키스신도 컨셉을 좀 바꿔서 가면
[까요빌런] 피디님? 깨어 계실까요?
‘···이러니 제 명에 못 살지.’
다행히도, 변휘승은 음침하거나 뒤끝 있는 인간과 거리가 멀다. 저렇게 불만을 말하는 것도 배우들의 입장 전달에 가깝다.
“그럼 오늘도 잘 해 봅시다. 화이팅, 감독님!”
변휘승이 쿨하게 떠난 뒤, 이번에는 박건이 어디선가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 예에.”
“오늘 바뀐 대본 있잖습니까, 혹시 촬영 동선을 백에서부터 잡아서······.”
바로 이것이 고생이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배우들이 태그 매치로 그를 들볶는 것이다.
‘싸워서 그런가, 호흡이 왜 저렇게 잘 맞아?’
이번 작품이 끝나면 열흘간 앓아눕겠다고 결심하며, 황창재 PD는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장의 레일 조명에 눈이 부셔 재빨리 고개를 다시 숙였다.
“웬 눈물이··· 약을 좀 드릴까요? 실내인데 꽃가루가 들어왔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시죠.”
새벽 1시, ‘회도팀’ 세트장 앞.
살수차가 튼 물이 이쪽 골목에서부터 저쪽 골목까지를 흠뻑 적신다.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에, 황 PD는 내리는 비를 일부러 세차게 주문했다.
같은 로맨스여도 부슬비보다 장대비가 어울리는 씬이, 또 세찬 비보다는 끊어질 듯 연약한 빗줄기가 어울리는 씬이 있다.
오늘 이진하와 한태리의 씬은 전자다.
“우비 없어? 챙겨 두랬잖아.”
“정후가 깜빡했대요. 걔는 나중에 조지고, 트렁크에 우산 몇 개 있으니까 받쳐 드릴게요.”
“어휴, 고생문 열린 거 봐라. 이럴 때 오케이 안 나오면 난리 나는데······.”
빗소리 틈으로 스탭들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해안가 도시들을 수복할 때 벌였던 전투가 습기에 실려 되살아난다.
스트라홀름의 짙은 물안개를 뚫고, 악마군은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강습해 왔다.
―쇠뇌를 쏴라! 하늘로 발사해!
―시야가 흐립니다, 놈들이 빙빙 돌면서 화살을 낭비시키고 있습니다!
―사령관님, 후미가 무너졌습니다! 타락한 바다 거인들이 물속에서··· 으아악!
일 년 중 절반이 폭우가 쏟아지던 해안 도시에 비하면 이 정도 비는 어린애 오줌발이다.
살수차가 뿌려 대는 물줄기를 보며, ‘더 쉬크’ 정문 앞에 선 건은 생각했다.
‘돌아오긴 하는군. 요즘 비싸게 굴더니.’
일부러 오감을 낮춰 놔서, 주변 소리를 빗소리가 가리는 와중에도 익숙한 고양감이 꿈틀거린다.
어서 저 장대비 한가운데로 들어가 배역을 뒤집어쓰라는 듯이.
촬영을 시작하면 찾아오는 변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세계로 귀환하며 잃었던 철왕국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가 돌 때 한정으로 돌아오는 용사의 권능이다.
이번 현장에는 둘 다 평소보다 잠잠했다.
철왕국의 기억은 몇 개, 그마저도 평범한 일상의 토막이 다였다. 성녀와 이야기하거나 각 군의 사령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장르의 문제인가?’
서울의 개 때는 인간을 죽였다. 흑의사제에서는 악마를 상대했다. 그에 반해 이번 작품은? 오디션 때 합기를 느꼈을 뿐, 당연히 시나리오에 누굴 죽이는 씬은 없었다.
로맨틱 코미디가 스릴러도 아니고, 갑자기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터로 바뀔 수는 없지 않나.
‘다만··· 넘어갈 수는 없었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귀환 직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떤 거대한 순리가 일종의 규칙이자 안배로써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
마치 첫째와 둘째, 셋째와 넷째를 차례대로 상대해야만 했던 대악마들과의 싸움처럼.
―성녀님, 바로 발몬에게 가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첫 번째는 분노의 군주가 아니라 오만의 고르존······.
―놈이 보내는 데스나이트들이 왕국 북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성녀님이 가지 않겠다면 저 혼자라도 결행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용사님! 야, 아저씨!
아마 10회차 근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 번째 대악마, 분노의 발몬에게 직진했던 결사대는 피구름이 되어 터져나갔다.
‘이후부터는 그 빌어먹을 비둘기들의 말을 들었지. 대악마 한 놈을 죽일수록 격이 높아지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건은 쓰게 웃었다. 철왕국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 보건대, 그는 가장 성녀의 말을 안 듣는 용사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회도팀’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 합기를 품은 작품에 캐스팅됐고 유의미한 시청률로 극을 견인했으니.
‘마지막 회까지 이 추세만 이어지면··· 예, 아마 20%는 찍을 것도 같습니다.’
황창재 PD가 왠지 슬픈 듯한 표정으로 말한 바에 따르면, 타 방송사의 수목 드라마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터.
숨 돌릴 새가 없다. 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서둘러 다음 전장으로 진군해야 한다.
누군가의 빚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자,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황창재 PD의 목소리가 들린다. 등 뒤, 자동문에 가린 로비에서는 그를 따라 나올 준비를 마친 권유진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스탠바이··· 큐!”
희미하게 떠올랐던 웃음이 사라진다. 표정을 지운 건은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또 하나의 전장이, 종언(終焉)을 앞두고 있다.
*
“스탠바이, 큐!”
빗속에서 촬영이 강행된다.
벌써 여섯 번째 스탠바이지만, 촬영감독을 포함한 스탭 누구도 불만 어린 기색은 없다.
오늘 씬의 주연들. 그중에서도 권유진의 강력한 요청으로 촬영을 거듭하는 탓이다.
장대비 속에서 두 명의 배우가 마주 선다.
“팀장님. 가지 마세요.”
이진하를 덮어쓴 박건이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절망과 고독, 상실이 뒤엉킨 표정 위로 비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왜 잡는 겁니까.”
“또 떠나실 거잖아요. 이대로 사라져 버릴 거 다 알아요.”
“나는 주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부모도 친구도, 날 사랑했거나 내가 사랑하려던 모든 이들마저.”
고통스러운 고백이 이어진다. 살수차의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지지만, 대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귓가를 파고든다.
“그러니 제발, 나를 내버려······.”
토해내듯 중얼대는 박건을 달려가 끌어안은 순간, 권유진은 깨달았다.
‘···또 그 사람이 나왔어.’
박건의 안에는 누군가 있다.
이진하 배역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 박건의 본모습 역시 아니다.
어렴풋하게 눈치는 채고 있었다. 씬과 씬의 틈새, 아주 미세한 간극에서 퍼뜩퍼뜩 나타나는 눈동자 저편의 그림자를.
열두 살 때까지 프로 바둑기사를 준비했던, 대국 도중 상대의 눈빛을 끊임없이 분석해 온 그녀였기에 알 수 있는 작은 흔적이다.
‘권유진,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어떤 사정이 뒤에 있든, 드라마가 끝나면 보지 못할 사람이다. 사는 세계도 다르고 바라보는 곳도 다른.
“어떻게 내버려 둬요! 이미 팀장님을 좋아하게 돼 버렸는데······!”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냥저냥 괜찮네, 수준을 전전하던 연기력이 지금은 확고한 유망주 레벨까지 뛰어올라 있다.
그녀가 보답할 방법은 딱 하나,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로 극을 마무리하는 것뿐이다.
“······.”
완전히 몰입한 두 배우의 시선이 빗줄기를 증발시킬 듯 얽혔다.
화장은 다 지워지고 입술은 추위로 새파래졌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또렷하다.
이내, 하얗게 빛나는 손이 권유진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