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해를 와해하라 (1)
* * *
오늘은 ‘회도팀’의 마지막 방송 날이다.
박건 팬클럽의 열심회원 겸 일반회원, 새싹회원까지 껴 있는 한지영 트리오가 그냥 지나갈 수 없다.
다들 칼같이 퇴근해서, 이번엔 무려 한 시간 전부터 한지영의 집으로 집결했다.
“너무 일찍 온 거 아냐?
“그러게, 치킨도 시켰고··· 할 게 없는데.”
“할 게 왜 없어, 이것들아. 복습해야지.”
한지영은 경건한 동작으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메뉴 몇 개를 건너뛰자 벌써 한 차례 복습한 9화의 초반부가 재생된다.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더 쉬크’의 자체 브랜드, ‘오르므팜므’의 대대적인 런칭 쇼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팀장님, 모델보다 낫던데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합시다.
석태오의 계략으로 쇼에 세울 모델들이 전부 이탈하고, 유비은이 자기가 운영하는 에이전시 인력을 가동했지만 남자 모델이 부족한 상황.
이진하는 어쩔 수 없이 런웨이에 오른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성공을 거둔다.
일견 말이 안 되는 스토리지만, 프로 모델들도 누르는 비율과 아우라가 있으니 굳이 흐린 눈을 뜨지 않아도 납득이 간다.
이어지는 유비은과의 데이트. 비 오는 밖을 보며, LP바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의 대화가 음악에 실려 들려온다.
―석태오랑 무슨 사이예요?
―지독한 악연이죠. 이미 알면서 왜 묻습니까.
―내가 그쪽을 도와주고 싶으니까. 그 망할 회사에 계속 있다간 위험해질 거예요.
유비은의 적극적인 어필 뒤로 의미심장한 눈맞춤이 따라붙는다. 마침내 가까워진 입술이 포개지기 직전, 이진하가 유비은을 밀어낸다.
―···하, 오늘 자존심 많이 구겨지네.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요?
―아뇨. 약속 때문에 나왔지만, 유 대표님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번 쇼의 생사여탈도 맡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왜······!
유비은이 뭐라고 더 하려는 순간, 요란하게 진동이 울린다.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한 이진하의 눈이 커진다.
횡령 및 배임, 수뢰 혐의로 감사팀이 경찰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다.
“저건 오버지. 너무 주인공 위기로 밀어넣으려고 무리수 둔 거 아냐?”
“나중에 4화랑 6화 다시 봐봐, 복선이 깔리긴 깔렸어. 우리가 얼굴천재 구경한다고 집중 안 하고 넘겨서 그렇지.”
한지영과 친구들이 투닥거리는 사이 씬들이 휙휙 넘어간다.
석태오와 이진하의 오래된 반목··· 재무팀과 회계팀 보고서를 조작해, 이진하에게 거짓 죄명을 뒤집어씌운 사람이 홍준영 대리였다는 것······.
한태리의 기지로 이진하 팀장의 혐의는 벗겨졌으나, 회사 안에서 그는 외톨이다.
적(籍)을 둔 곳에 배신당한 장수가 어떻게 계속 싸울 수 있을까.
석태오의 AF몰도, 지금껏 일하던 ‘더 쉬크’에도 기댈 수 없는 상황. 이진하는 결국 조용히 짐을 정리해 회사를 떠나려 한다.
“한다, 시작한다!”
“와··· 치킨 시킨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올 생각을 안하네. 오늘 월드컵 하는 날인가?”
그리고 마지막 화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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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배명호와 서승아도 모처럼 맥주를 한 캔씩 따며 처연한 빗속 씬을 보고 있었다.
―팀장님. 가지 마세요.
권유리가 붙잡는 손을, 이진하로 분한 그들의 친구가 매몰차게 뿌리친다. 청순하기 그지없는 눈가에 물기가 금세 차오른다.
“와, 저걸 밀쳐내?”
배영호가 감탄했지만 서승아는 장하다는 듯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잘했다, 이진하! 아니 박진하! 네 첫 열애설을 권유리랑 낼 순 없지!”
“또, 또 과몰입. 로코에선 키스신 아무리 찐하게 찍어도 스캔들 안 난다.”
“네가 뭘 알아.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이어, 두 사람이 빗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흘러나오던 배경음이 멈춘다.
누가 봐도 격정적인 키스신이 나올 상황. 과연 권유리를 거칠게 끌어당긴 박건이 상대 배우에게 입술을 포갰다.
그러니까, 그냥 포개기만 했다.
“······어?”
분명 영상미도 좋고 연출도 괜찮은데, 저건 너무 청춘드라마 느낌 아닌가?
배영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요즘 로코는 살짝 순수한 게 유행인가?”
“뭐··· 뭐라는 거야, 다른 드라마들처럼 안 쩝쩝대니까 보기만 좋구만.”
“너 말 더듬는다.”
서승아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장담했다.
“작가가 무명이라더니··· 주인공들로 마지막 화까지 밀당 잘하네. 있어 봐, 끝나기 전에는 뭐 하나 터질 거니까.”
···그리고 드라마는 끝났다.
석태오는 AF몰 콘텐츠본부장까지 겸하게 됐고, 유은비와 우연히 모 브랜드 런칭 행사장에서 마주친다.
―어, 이진하 팀장 괴롭히던 인간?
―관두지. 그딴 거 이제 안 하니까.
새로운 커플링의 예고와 함께, 출연한 캐릭터들의 비화가 하나씩 마무리된다.
‘더 쉬크’를 나와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 이진하와 권유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멘트가 떴다.
배영호가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나오긴 개뿔, 뽀뽀 한번 나온 청춘드라마였네.”
“···그러게. 내가 작가 성향 파악에 실패했다.”
어쨌든 드라마는 처음 기획했던 것보다 배는 큰 성공을 거뒀다.
종방과 동시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쭉 훑어보던 서승아가 눈을 크게 떴다.
“오, 박건이랑 변휘승 기사 떴다. 역시 우리 예측이 맞았어!”
“왜 우리 예측이야, 나 혼자 맞춘 거지.”
퉁을 주면서도 궁금한 모양인지 배영호가 고개를 빼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
박건의 SNS에, 변휘승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꼬박꼬박 함께 본방을 사수한 둘의 인증샷이 올라온 것이다.
타임스탬프까지 찍힌 사진을 보면 노림수는 뻔하다. 처음부터 불화설이 사실무근이었음을 팬과 안티, 기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함이다.
“하여간 잔머리 끝내준다니까. 이런 거 하나 딱 올려 두면 뒤에서 궁시렁대는 인간들 줄지.”
서승아가 자기 일인 양 으스대자 배영호는 실실 웃으며 친구를 놀렸다.
“그걸 아는 애가 불화설 뜨자마자 변휘승 욕을 그렇게 해 댔냐? 무슨 철천지원수인 줄.”
“오, 팬미팅 기사도 떴다. 그렇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안 싸웠다고 직접 듣고 나서도 의심하는 그 자세. 내가 볼 때 우리 서 변호사는 로펌이 아니라 검찰청에 왔어야 돼.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어찌 이리도 공명정대할까.”
“···입 안 다물면 맥주 뿌린다?”
*
‘회색도시 팀장님’이 끝난 날 밤.
커뮤니티는 다양한 떡밥이 뒤섞여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제목 : 불화설이 처음부터 오보였던 EU
내용 : 애초에 회도팀 측에서도 오보라고 몇 번이나 공식 입장 냈었음, 기자들이 계속 퍼나르면서 일 키운 거지. 거기다 박건은 극 중에서만 싸우고, 변휘승은 여자랑만 싸움. 반박시 박알못에 변알못 ㅅㄱ
-저걸 믿음? 타임스탬프도 조작 가능하고 뒤쪽 TV화면도 다시보기로 조작 가능한데?ㅋㅋㅋ
└얘는 일상생활 가능하냐
└└음모론자 어지럽네
-근데 그 이후에 또 별일 없었긴 함; 진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불화설이 말 그대로 불화‘설’이었으니까 ㅇㅇ
-모르지 고도의 노이즈마케팅이었는지도
└작감은 해명하라 해명하라
└└이런 애들이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니까 계속 루머가 재생산됐던 거 아냐
-근데 생각해 봐, 그 박건이랑 같이 있는데 변휘승이 사고 칠 리가 있을까?
└근묵자흑이 아니라 마중지봉 ㄷㄷ
└명언충 쳐내
이쪽에서 불화설의 진위에 대한 토론이 불꽃을 튀긴다면, 저쪽에서는 다소 다른 떡밥이 돈다.
제목 : 올 상반기 최고의 로코(전체관람가)
내용 : YTS 작진놈들아... 꼭... 그렇게... 입술만 닿았어야 속이 후련했냐...!!!!
-수상하게 기업물 같았던 로코
└이게 박건 매직...?
└└근데 박건이 막 쪽쪽거리는 것도 상상이 안 감 ㅋㅋㅋㅋ
└└└ㅇㅇ 여주가 예쁘긴 한데.. 극중에서도 이진하 확 꼬시기엔 임팩트가 부족했달까
-서예니는?
└낄 데 껴라 좀
└└언니는 나가있어 큰일나기 싫으면
-(재업, 꾸준글) 줘팸좌 팸 목록 : 진지유, 용준상, 수많은 엑스트라, 펀치기계, 변휘승
“이쪽 반응은 괜찮고.”
친구들을 돌려보낸 뒤, 한지영은 커뮤니티들을 한 바퀴 돌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딴 게 로코···? 내 로코 돌려줘요 따위의 제목들이 더러 보였지만, 아무튼 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무감정한 살인기계, 처절한 운명을 타고난 신부에 이어 그나마 정상적인 회사원이다.
여느 로코보다 로맨스 씬이 적다곤 해도, 이전까지와 다른 배역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은 어느 정도 만족한다.
“응··· 너무 달아서 이빨 다 썩느라 단 것도 모르는 거야······.”
드라마에 로맨스가 적다는 불만 글에 연속으로 댓글을 세 개나 남긴 뒤, 한지영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팬클럽 홈페이지를 켰다.
박건의 얼굴이 걸린 팬카페 대문에 커다랗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박건 데뷔 1주년, 팬미팅 COMING SOON]
*
소파에 반쯤 늘어져 있던 변휘승이 불렀다.
“박 배우님.”
“예.”
“팬미팅을 하신다고?”
“날짜는 안 정해졌고요. 그래서 여쭤보고 싶었는데, 첫 팬미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변휘승은 턱을 긁었다.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네. 아마 어디 레스토랑 빌려서 파티처럼 했을걸? 내 돈으로 대관해서 같이 와인 왕창 마시다가 뻗어서 매니저한테 실려 갔을 거야.”
“···그냥 소속사 동료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던지. 최근에 분위기도 좋을 텐데.”
“분위기요?”
진지유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한 소리였는데, 다른 대답이 나왔다. 변휘승은 네가 모르면 어쩌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퀸텀, 음방 1위 후보 올라갔잖아. 아마 이번 주에 조이너스 남돌이랑 붙을 텐데, 퍼핑돌즈는 곧 정규 3집 나오고.”
일전에 진지유가 얘기해 준, 연기대상에서 무대를 했던 아이돌이 퍼핑돌즈였다.
분명 소속사 홈페이지에서 이름이랑 사진을 봤는데 멤버 이름들이 헷갈린다. 기억을 더듬는 동안에도 아이돌 소식이 줄줄 나왔다.
“조이너스 애들하곤 호각··· DG랑 씨레인 애들은 벌써 위태위태해. 이번만 잘 넘어가면 상반기 아이돌 판은 로만이 접수할걸?”
“소식이 빠르신데요.”
변휘승은 연기대상 수상자로 착각할 만큼 거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동종업계 전문가라니까.”
“멤버 이름도 다 아시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어. 퀸텀은 장여빈, 임수령, 김경이랑 리타 네 명. 퍼핑돌즈는······.”
“잠깐만요, 그럼 저희 회사 남자 아이돌은?”
“시커먼 놈들 묻지 마. 뇌 용량 아까워.”
“정말로 한결같으시네.”
건은 감탄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앞과 뒤가 같으면 면박을 주는 사람이 미안해진다.
데뷔 11년차 삼촌 팬은 히죽 웃었다.
“진홍이 형이 그러던데, 요즘 로만 기세가 장난이 아니라고. 박건 합류하고 나서 배우고 아이돌이고 계속 상한가야.”
“그렇습니까.”
“뭔 리액션이 그래?”
“싫어할 사람들도 많겠죠. 대표님이랑 본부장님도 기획사 세력도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변휘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닥 인간들이면 어쩔 수 없지. 아래는 아래끼리, 위는 위끼리 박 터지게 싸우는 게 정상이야. 시기랑 질투, 협잡에 견제는 옵션이라고.”
그때, 도어록 비밀번호가 눌리더니 매니저들이 등장했다.
변휘승의 매니저 김종필을 따라 들어온 박선이 개선장군처럼 외쳤다.
“승리! 최종 시청률 21.3%예요!”
“KBC 쪽, ‘우세남’은 5%로 마감했습니다. 회도팀이 끝나도 반등은 어려울 거예요.”
“와··· 이걸 기어이 20%를 넘기네.”
서울의 개보다 높은 시청률은 아니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몇 배의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예니부터 권유리, 황 감독을 포함해 온갖 사람들한테 축하 톡이며 메시지들이 들어오고 있다.
[구신승] 고생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구신승] 앞으로도 건투를.
[구신승] (기사 링크)
···예상치 못한 연락은 양 팀장을 통해 기어이 번호를 교환하고 간 구신승이다.
연락이 온 걸 예상치 못한 게 아니라, 메신저로는 또 정상적인 말투라서 당혹스럽다.
자기도 요즘 새로운 영화에 들어가야 해서 바쁠 텐데, 이런 안부까지 챙기는 걸 보면 의외로 친절한 인간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박 배우 덕분에 이미지 세탁을 다 했네. 은퇴가 물 건너간 건 좀 아쉽지만.”
“도와주신 덕분이죠. 좋은 작품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은 무슨, 오점이 아니면 다행이지.”
손을 휘휘 저은 변휘승이 물었다.
“그래서 다음은? 영화, 아니면 드라마?”
“무조건 스케일이 큰 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이번 극을 찍으면서 느낀 게 있어서요.”
“포부 좋고. 혹시 배우질도 지겨워져서, 자연스럽게 연예계 은퇴하고 싶으면 얘기해. 최단기간으로 이 바닥 뜨는 법 가르쳐 줄게.”
듣고 있던 박선이 화들짝 놀랐다.
“배우님, 저희 형은 아직 은퇴할 때가······!”
“농담이에요. 10년은 더 해먹고 와야지.”
선배와 동생의 잡담을 들으면서, 건은 구신승이 보낸 기사 링크를 눌렀다.
방금 변휘승의 말을 들어서일까. 평범한 제목이 묘하게 눈에 밟혔다.
[로만․DG․조이너스, 별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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