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해를 와해하라 (2)
* * *
C&J 사옥 최상부, 콘텐츠본부장실.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차렷 자세로 선 조병길 팀장은 보고서를 넘기는 사무실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깔끔한 인상의 젊은 사내.
진규일 콘텐츠사업본부장,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에 C&J의 엔터테인먼트사 요직을 꿰찬 인재다.
아이비리그 출신에 능력 역시 출중하나, 모든 조건을 압도하는 스펙은 바로 저 창진그룹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진창월 회장의 핏줄, 재벌 4세가 보고서를 내려놓고 물었다.
“보고해.”
“인력이 부족합니다. 전속이 아닌 프리랜서 PD들도 저희랑 일하길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눈이 있으면 작년 농사 대차게 말아먹는 걸 봤을 테니까.”
연예계로 뛰어든 C&J는 자체 엔터테인먼트와 방송국을 설립하고, 올해로 엄연한 2년차 전문편성채널이 되었다.
문제는 저조한 시청률과, 그 시청률을 끌고 갈 인재의 부족이다.
“그나마 연예인 풀은 채웠는데··· 배우는 빼 오면 된다지만 능력 좋은 감독들이 부족합니다.”
“드라마 쪽이나 예능 쪽이나, 둘 중 하나만 잡으면 된다고 했을 텐데.”
“방송국들이 제작진 누수를 막으려고 꽁꽁 싸매고 있습니다. 그나마 영도은 작가와 전인우 PD가 관심을 보이는 중이고요.”
“어떻게든 판을 짜. 작년에 가장 높았던 자체편성작품 시청률이 3%를 못 넘겼어.”
그러나, 쉽지 않다.
지상파를 케이블 및 종편이 앞질렀다지만 그들 C&J의 채널, CVN은 완벽한 후발 주자다.
우리끼리 먹기도 부족한 밥그릇을 늦게 온 놈한테 안 뺏기려 똘똘 뭉치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인간의 유구한 역사에 따라, 그 과정에서는 치사스러운 야합과 음모가 동반된다.
“김 의원 쪽은? 여전히 그 말도 안 되는 법안을 밀어붙인다고 하나?”
“본부장님 말씀은 전했습니다만, 별다른 답이 없습니다.”
“전문편성채널 방발금(방송발전기금) 기준을 올린다는 건 우리 목을 죄겠다는 거야. 누가 KBC 출신 아니랄까 봐, 팔이 제대로 굽는군.”
“김후선 의원이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과 몇 차례 접선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진규일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DG나 조이너스 중 한 곳이겠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로만일 확률은······.”
“로만은 저 둘 사이에 껴서 당하는 입장이라, 우리한테 작업 칠 여력이 없어. 노중만 대표가 약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아무리 덩치 큰 공룡이라도, 뒤늦게 진입한 시장에서 자금력 하나로 최고가 되긴 불가능하다.
그것이 그룹 본사의 전략기획실을 떠나온 이유이며, 진규일이 이 콘텐츠사업본부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자들이 기업가들보다 더러운 수싸움에 능해. 할 짓과 못 할 짓을 가리지도 않고.’
덕분에 흐름이 제대로 막혔다. 기획사 쪽은 그나마 낫지만, 배우 몇 명 영입했다고 업계 1, 2위에 댈 바는 못 된다.
거기다 그놈들한테 십 년이 넘도록 온갖 대접을 받아먹은 놈, 앞으로 받아먹으려는 놈들까지 난리를 치고 있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는 전력을 내기가 어렵다. 등을 맞대고 싸울 동료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관자놀이를 누르던 진규일이 물었다.
“박건은?”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조 팀장은 즉각 답했다.
“오늘 팬미팅을 한다던데요.”
“어디서?”
“서운대 강당일 겁니다. 본부장님 명령대로 계속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홀도 큰데, 뭘 한다던가?”
“모르겠습니다. 그 박건이니까 좀 독특한 걸 하지 않을까요?”
“음.”
진규일 본부장은 대답하는 대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조 팀장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돌아갔다.
‘···본부장님이 숨겨둔 형제라도 되나?’
그들의 상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시켰다. 작년 상반기, 박건이 ‘서울의 개’로 데뷔했을 때부터 다음 작품과 행보, 언론 반응 따위를 지속적으로 체크하라는 거였다.
혹여 데려오려나 싶어 지켜봤지만, 몇 달이 지나도 접선 명령은 안 떨어졌다.
조병길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혹시 본부장님, 저희 쪽으로 영입해야 할 후보입니까?”
“이미 로만에 갔잖아. 사고 쳐서 쫓겨나거나 계약기간 끝나기 전까지는 못 빼내.”
“예, 그런데 쭉 지켜보라고 하셔서······.”
“계속 지켜봐. 관심 가는 친구라 그래.”
“알겠습니다.”
일축한 진규일은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조 팀장을 내보냈다.
정적 속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쉽지 않군.”
공기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치열한 싸움은 이 순간조차 계속되고 있다.
놈들은 끊임없이 압박할 것이다. 정계에 끈이 저쪽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 한 놈이 설치는 정도야 대단찮지만 본 게임이 문제다.
제작진이 부족하고, 컨텐츠가 부족하다. 간신히 엔터로 수급한 배우들도 지금 있는 이들로만은 이름값이 다소 아쉽다.
감독이 있어야 배우가 붙고, 배우가 와야 감독이 붙는 게 이 바닥이니까.
‘결국 필요한 건··· 사람이다.’
방송국의 사람, 기획사의 사람, 종횡으로 전략적 동맹을 결성해 강력한 적들과 싸워나갈 내외부의 인재가.
잠시 고심하던 진규일 본부장은 엷게 웃었다.
“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친구야.”
*
생햄과 육포, 견과류며 종류별 맥주가 테이블을 꽉 채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진지유는 러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로만에서 직접 스트리밍하는 박건의 팬미팅 시작이 이제 15분 뒤였다.
샵을 포함한 스케줄을 전부 비워 둬서, 오늘 하루는 밤까지 자유롭다.
“꼭 가야지만 팬미팅인가, 요즘 같은 비대면 세상에.”
마음 같아서는 티켓팅을 하고 싶었지만, 깜짝 손님도 아니고 팬으로 갔다간 민폐 하객으로 남의 잔치를 망칠 뿐이다.
그래도 기분은 뿌듯하다. 며칠 전, 박건이 따로 연락을 해서 팬미팅 팁을 물어봤던 것이다.
[박건] : 여쭤볼 게 있는데
[박건] : 팬미팅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박건] :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희도는 자꾸 자기 아이돌 때 안무 추라고 하고, 휘승이 형은 레스토랑 빌려서 와인에 소맥 말라고 합니다.
[진지유] 일단 후자는 절대 금지
[진지유] 아, 춤은 좀 보고 싶긴 한데······.
어쨌든 사심 가득한 팁도 줬고··· 대략적인 개요는 공기형 팀장이 다 손봤을 테니, 나름대로 짜임새가 나왔을 터였다.
치익, 맥주캔을 딴 진지유는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코를 찡그렸다.
“크흐··· 뭐, 같이 마실 기회는 많으니까.”
*
서운대 제1대강당 대기실.
본래도 축제에 온 연예인들이 쓰는 공간에,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여 있었다.
“형, 어떡하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빙빙 돌던 박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뭐가.”
“내가 진짜 잘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어제 밤새 연습했잖아.”
“근데 실수하면 어떡해, 응? 막 머리 하얗게 돼서 배우 분들처럼 NG라도 내면? 거기다 라이브로 송출까지 한다잖아!”
건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밖에 몰려온 팬들의 수가 많긴 많다. 티켓팅을 통해 모인 사람은 무려 2천 명.
순수 인원만으로 따지면 연기대상이나 대종상 적보다도 많은데, 그 앞에서 진행까지 한다니 긴장할 만도 했다.
“그냥 형이 할까? 네가 보조, 내가 메인 MC로 역할만 바꾸면 되는데.”
“그건 안 돼! 회사 분들이 믿고 맡긴 일을 망치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
전문 MC나 개그맨이 아니라 박선이 진행을 맡게 한다는 것은 공기형 팀장의 아이디어였다.
원래라면 함께 와서 이것저것 도왔을 테지만, 오늘은 2주 연속 1위 후보로 올라간 퀸텀에 퍼핑돌즈 3집 발매까지 겹쳐 바쁜 모양이었다.
건은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네가 진행 까먹으면 형이 차력쇼라도 할게.”
“···차력쇼?”
“응. 각목 부러뜨리기랑 벽돌 깨기 같은 거. 진지유 씨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긴 했는데, 혹시 몰라서 가져오긴 했거든. 개인적으로는 꼭 보여주고 싶었던······.”
“형.”
박선이 불쑥 불렀다. 방금까지 떨리던 눈동자가 비장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한테 맡겨. 오늘 저기서 죽어 본다!”
*
오후 4시.
서운대 1강당에서, 2천여 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건의 첫 팬미팅이 시작됐다.
티케팅 사이트에서 판매됐던 티켓은 1차와 2차 모두 10여 분 만에 매진되며 배우의 인기를 실감시켰다.
조명이 차례대로 꺼지고, 일순간 어두워졌던 무대에 익숙한 얼굴이 등장해 손을 흔들었다. 시상식 때처럼 수트를 빼입은 박선이다.
“안녕하십니까, 열혈건이 여러분! 오늘 진행을 맡은 매니저 박선입니다!”
시상식과 SNS 등을 통해, 동생이 매니저라는 사실은 팬들 대부분이 아는 터라 환호가 쏟아졌다.
“자, 그럼 다함께 불러 볼까요? 하나, 둘, 셋, 나와 주세요!”
아까보다 더한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청바지에 가죽재킷 차림의 박건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박건입니다. 이곳 대강당 크기가 커서 다행이네요.”
“맞습니다, 오늘 무려 2천 분이 박건 씨를 만나러 오셨다고 해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무대 끝까지 걸어나와, 관객석을 쭉 둘러보던 박건은 담담하게 선언했다.
“다음 팬미팅은 두 배 더 큰 곳에서 할 수 있도록, 올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아아아!”
팬미팅은 무난하면서도 다양한 컨텐츠들로 이어지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배우가 팬들에게 궁금한 것, 팬들이 배우에게 궁금한 것을 주고받는 ‘알려줘요 배우님!’ 시간에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었다.
객석에 직접 올라가 팬에게 마이크를 건넨 박건이 담화를 나눈다.
“건이 오빠, 첫사랑이 언제였어요?”
“초등학교 때입니다. 이글맨한테 푹 빠졌었죠.”
“네? 이글맨이 뭐예요?”
십대 팬이 묻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인다. 10년도 더 된 옛날 만화영화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럼 이제 제 차례입니다. 음식 취향 월드컵인데, 치킨이랑 삼겹살 중 어느 쪽이시죠? 맞추시면 상품이 있고 틀려도 상품이 있습니다.”
상품이고 뭐고, ‘내 배우’와 취향 궁합을 맞출 기회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팬은 고민하다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어··· 음, 이글맨이니까 치킨······?”
“겸상은 못 하겠군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힝, 이걸 속였어!”
다음 코너로는 호신술 특강이 열렸다. 비비탄 총으로 작은 목표물 맞추기, 기왓장 연속 격파, 펀치머신 신기록 갱신 등이 종료된 뒤에는 추첨된 팬들을 무대로 불러 소규모 시사회처럼 작품에 대한 토론도 나눴다.
등 뒤 스크린에 박건의 작품과 메이킹 필름들이 지나가는 도중, 큐 카드를 든 박선이 제법 진행자스럽게 묻는다.
“지금까지 박건 배우가 찍은 영상들 중, 뭐가 제일 재밌으셨나요?”
갈색머리 여성팬이 ‘서울의 개’ 대본 리딩을 뽑자 반팔 차림의 근육질 남성팬은 러시아 복서와 싸웠던 액션을 골랐다.
“당연히 리딩이죠! 그때 완전 메이킹필름 신 스틸러였는데, 성대모사 한 방에 유튜브 쇼츠가 조회수 얼마나 뽑힌 줄 아세요?”
“아니죠. 격투기를 잘 모르셔서 그렇지, 이게 우리 쪽에서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어요.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 그만큼 수준 높은 입식 타격을 보여줬던 적이 없었다니까?”
박건과 박선 형제가 간신히 두 팬을 말리고, 마지막엔 몰래 온 손님으로 서희도가 나와 인터뷰 및 합동공연을 했다.
왼쪽에는 박선, 오른쪽에는 서희도와 함께 서희도의 그룹 ‘FCT’ 타이틀곡을 춘 무대는 스트리밍 중이던 플랫폼을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성공적인, 첫 팬미팅이었다.
*
차로 돌아온 박선은 땀 흘린 얼굴이 발갛게 된 채 소리쳤다.
“형, 우리가 해냈어!”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다. 2천 명이나 되는 팬들과 웃고 환호하며 호흡한 경험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건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게, 덕분에 재밌었다. 앞으로는 팬사인회나 소규모 팬미팅도 자주 잡아 달라고 해야겠어.”
“완전 좋지! 아마 대표님이 쌍수 들고 환영하실 거야. 팀장님도··· 어, 잠깐만.”
신나게 떠들던 박선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확인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까 공 팀장님한테 연락 왔어. 퀸텀이 MBS랑 KNET 둘 다 1위 탈환했대!”
“그럴 것 같더라. 휘승이 형이 퀸텀 1등 못 하면 50만 원씩 돌린댔거든.”
“그건 좀 유감인데··· 아무튼 퍼핑돌즈도 차트 10위권 안이라고, 오늘 회사에서 간단하게 파티 한다나 봐. 안 힘들면 잠깐 왔다 가라는데?”
소화한 팬미팅 일정은 4시부터 8시. 물론 전직 용사의 체력은 4시간이 아니라 40시간이라도 끄떡없었을 것이다.
형을 따라잡겠다고 틈틈이 운동을 해 온 터라, 박선도 아직 쌩쌩해 보였다.
“가자. 지난번에 못 알아봐서 미안하니까, 오늘은 축하라도 해 줘야지.”
“···형, 연기대상에서 공연했던 그룹은 퀸텀이 아니구 퍼핑돌즈야. 이거 헷갈리면 진짜 참사, 알지?”
“그럼. 그간 변 선생님 아이돌 특강을 얼마나 받았는데.”
웃음을 터뜨린 박선이 밴을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때였다.
두 형제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본디 그럴 때가 있다. 보지 않아도, 확인하지 않아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이.
“······.”
한쪽에 브레이크를 밟은 박선이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저쪽은 공기형 팀장의, 이쪽은 서승아의 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박건, 너 지금 어디야? 빨리 소속사로 연락해 봐! 학폭 기사 떴다고!
앞자리에서 필시 같은 소식을 들었을 동생의 눈동자가 커졌다.
문득 지구로 귀환한 첫날, 동생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철왕국으로 전이되기 전, 아직 특수부대에 입대하기도 전, 그 아득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반복되는 죽음에 휩쓸려 마모됐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추악한 악의를 직면했을 때의 분노였다.
감았던 눈을 뜨며, 건은 옛 시절처럼 웃었다.
“선을 넘네, 좋은 날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