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67화 (67/122)

음해를 와해하라 (3)

* * *

사옥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건은 오늘의 원래 주인공들과 마주쳤다.

검고 붉은 무대의상을 입은 네 명과 평상복 차림의 세 명이 초조한 얼굴로 서성대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배우님, 매니저님······.”

축하 파티도 애매하게 끝났고, 해산하려다 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좋은 날에.”

연예대상 때 인사를 보냈던 키 큰 검은머리가 어쩔 줄 모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저희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두 분 다 꼭 힘내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맞아요, 정말로!”

한 명이 말하자 이쪽 팀이고 저쪽 팀이고 병아리처럼 한마디씩 더했다.

무대의상을 입은 멤버 중 리더처럼 보이는 백금발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배우님을 잘 모르지만, 저는 절대 그럴 분 아니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믿음이 창피할 일은 없을 겁니다.”

메이크업을 진하게 한, 기껏해야 이십대 초중반일 얼굴들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나같이 수심과 걱정에 찬 표정이었다.

─터무니없는 모략입니다! 용사님이 왜 불화의 군주와 내통한단 말입니까?

─닥치시오, 성녀!

─우리의 믿음이 배신당했소. 보시오, 무슨 낯으로 드높은 천상을 맞이하겠소!

잠깐 흥분했던 탓인지, 때 아닌 환청이 귓전을 울렸다. 건은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입구 스크린을 지나쳤다.

서둘러 따라붙는 박선의 등 뒤로 열띤 응원들이 날아왔다.

“선배님, 힘내세요!”

“저희도 도울게요, 팀장님한테 부탁해서요!”

*

대표실에는 노중만 대표와 이상철 본부장이 함께 있었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채였다. 건이 다가가 앉자 이 본부장이 먼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냈어요. 공 팀장은 알아볼 게 있어서 나갔고, 최필립은 촬영 중인데도 전화를 주더라고요, 도울 일 있으면 말하라면서.”

“그렇습니까.”

“신승이가 와도 되냐고 묻긴 했는데··· 둘이 불편할까 오지 말라고 했어요. 1년도 안 됐는데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 바로 해결해야죠. 어디서 나온 루머입니까?”

“1보는 스타라치, 2보는 스포츠매일. 나머지들도 우수수 쏟아내더군.”

여태 말이 없던 노 대표가 말했다. 박선이 뭔가 생각해내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스포츠매일이면 건이 형 공격하는 기사 몇 번 썼던 데고··· 스타라치는 연예인들 사생활 캐는 파파라치 언론사 아닌가요?”

“맞아요. DG가 뒤를 봐 준다고 소문난 잡지사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한 곳이지. 스타라치는 온갖 데 다 쑤시는 악질들이고.”

“그런데 스타라치가 왜······.”

“이게 첫 기사야. 오면서 봤겠지만.”

노 대표가 말하자, 이상철 본부장이 태블릿 PC를 이쪽으로 밀었다.

[라이징스타 P씨, 실은 학폭 가해자?]

이니셜을 숨기지도 않은 헤드라인 밑에, 자극적인 단어들이 악착같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주먹이 세서, 고교 시절 일진 집단을 만들었다. 다른 학교 아이들까지 때리고 돈을 빼앗았다. 그 증거로 2학년 때 정학을 당했다······.

이미 읽은 기사에서 눈을 뗐을 때, 노중만 대표가 굳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솔직하게 말해야 전력을 쏟을지를 판단할 수 있어.”

건은 고민 없이 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

세 명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이걸 어쩌나, 하는 얼굴로 손을 비비던 본부장이 물었다.

“내가 나가야 되나, 아니면 귀를 막을까요?”

“아닙니다. 선이한테만 말했던 이야기인데··· 전역 직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의사는 단기 기억상실이라고 하더군요.”

박선도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안 됐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알아야 할 일이다.

이상철 본부장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혹시 어디까지 기억이 안 나나요? 혹 정말로 문제가 될 법한 폭행을······.”

“그럴 일은 없습니다.”

건은 잘라 말했다.

“맞으면 맞았지, 누굴 때리진 않았으니까요.”

“조작되지 않은 정학 기록이 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맞아! 김종승!”

나머지 세 명의 시선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 박선에게 모였다.

박선은 얼굴이 상기된 채 건을 잡아끌었다.

“형, 그때 그 일 있잖아. 형이랑 승아 누나, 영호 형이 같은 반일 때. 자기가 때리다가 혼자 골절돼서 국회의원 아빠 불러온 놈!”

“그랬던 적이 있었나?”

“응, 그래서 엄마랑 아빠가 엄청 화났었잖아. 형 정학 떨어지기 전부터 학교로 오셔서 매일 싸우셨는데······.”

건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철왕국을 비롯한 과거의 기억들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군에서의 추억도 전생처럼 희미한데, 그 전의 학창 시절이 쉽게 기억날 리 없었다.

‘김종승··· 그런 놈이 있었나?’

흐릿한 이름을 곱씹었을 때, 순간 어떤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뭐야, 이 새끼?

─김종승. 네가 축구부 애들 괴롭힌다며? 1학년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척 봐도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긴 놈이 질겅질겅 씹던 담배꽁초를 뱉었다.

─뭐, 근데 어쩌라고.

─찾아가서 한 명씩 사과해. 그리고 다시는 애들을 때리지 마라.

이야기를 듣자 양옆에 서 있던 덩치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놈들을 저지한 김종승이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이거 웃긴 새끼네. 야, 내가 널 팼냐? 니네 반 애들을 괴롭혔어? 우리 부에서 내가 군기 좀 잡는다는데 왜 난리야?

─여긴 군대가 아니라 학교야. 같은 학생끼리 군대놀이는 그만두자.

─이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종승이 걸어와 주먹을 휘둘렀다. ‘널 때리겠다’는 기세가 너무 뻔해서 맞아 주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적절한 타점에 팔꿈치를 갖다 대자, 뼈에 금이 가는 우드득 소리가 퍼져나갔다.

─아악, 아아아악!

─종승아, 괜찮아?

─괜찮긴 개뿔, 뭐 해! 죽여 버려!

손을 감싸쥐고 나뒹굴던 김종승이 악을 쓰자 떨거지들도 우르르 덤벼들었다.

건은 무심히 숫자를 셌다.

“다섯 명.”

“음? 뭐가 다섯 명이에요?”

“저를 때리다가 손목이랑 손가락뼈에 금이 간 친구들 숫자가요. 그냥 맞아 줄 수도 있었는데, 저도 너무 과했던 것 같습니다.”

본부장은 심각한 와중에도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 고등학교 때부터 특작부대 출신이었어요? 맞는 걸로만 애들 뼈를 부러뜨리게?”

“호신술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여태 말없이 듣던 노 대표가 물었다.

“그럼, 정학도 그 일 때문에?”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꼬가 트이자 불유쾌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당시 절친이었던 서승아와 배영호가 왜 법조인을 목표하게 됐었는지도.

“아마 은퇴한 구의원의 아들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목격자도 없고, 어쨌든 저쪽이 다친 데다 김종승의 아버지 쪽에서 힘을 썼죠. 그나마 반 친구들이 변호한 덕에 짧은 정학으로 끝났습니다.”

“그 동창들을 불러야겠군.”

박선이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네, 그중에 저랑도 친한 형이랑 누나가 있어서··· 제가 바로 연락해 볼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예······?”

“이미 불렀으니까. 지금쯤 도착했을 텐데.”

노 대표가 말하자마자 대표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간에서는 익숙한 얼굴 두 명이 걸어 들어왔다.

“영호 형, 승아 누나!”

“어, 선이 오랜만.”

“둘 다 괜찮아? 내가 진짜,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퍼뜨린 놈을 그냥··· 어휴.”

건의 눈이 조금 커지고, 박선도 깜짝 놀라 일어섰다.

“너희가 어떻게······.”

“대표님 지시였습니다. 기사가 뜬 순간부터 박 배우 동창분들께 연락을 돌렸죠. 감사하게도 늦은 시간에 달려와 주시겠다고 해서, 우선 모인 다음 움직일 계획이었어요.”

이상철 본부장이 상황을 설명하는 사이, 두 동창도 로만의 수뇌와 인사를 나눴다.

“배영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건이 동창 서승아입니다. 이쪽이 대표님··· 아니, 본부장님이신가요?”

노중만 대표가 짧게 끄덕였다.

“내가 노중만입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본론부터 얘기하죠. 두 분, 박건 배우의 동창들과 교사에게 서명을 모아 주십시오.”

“서명이라면.”

“최소 20인, 그 이상이어도 됩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특히 정학 당시 같은 반이었던 동창 전원이 중요합니다.”

“연락처들은 직원들이 대부분 확보했고, 또 확보하는 중이에요. 오늘 중으로 명단이 추려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부장이 덧붙이고 난 뒤, 노 대표가 상체를 기울였다. 여느 때보다 한층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한기가 감돌았다.

“성추행과 마약, 학교폭력은 거론되는 자체만으로 배우의 이미지에 타격이 커요. 즉각 대응해서 침몰시켜야 본전입니다.”

서승아는 명함을 꺼내 건넸다.

“걱정 마세요. 여기 법무팀만큼은 아니어도 일 처리는 확실하니까.”

변호사 친구가 명함들을 교환하자 배영호도 어깨를 으쓱였다.

“전 뭐, 공무원이라. 좀 다른 쪽으로 일이 터지면 선배들한테 말은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명문이나 서명 정도로 될까요? 안 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안 믿을 텐데.”

“오피셜하게 논란을 불식시키는 게 중요해요. 일단 그 후에 루머의 진원지를······.”

그때, 본부장의 말을 끊으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노 대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또 온다고 했나?”

그리고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말을 잃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홍보팀 직원도 매니저도 아닌 배우였다.

“어라, 손님들이 많이 계시네요.”

모자를 벗은 진지유가 아무렇지 않게 땀을 닦았다. 이상철 본부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지유, 네가 왜 여깄어?”

“지나가다 들렀는데요. 요즘 이쪽으로 산책을 도는 중이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고, 넣어 둔 적금이 있어서요. 깨기도 전에 은행 망하면 안 되잖아요.”

시선들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꽂혔다. 두 친구가 연신 옆구리를 찔러 대는 가운데, 이마를 짚은 건이 선언했다.

“저분한테 돈 안 빌렸습니다.”

*

이튿날 오후, 로만 측의 공식 입장이 발표됐다.

그전까지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것과 달리 명쾌하고도 확실한 입장 표명이었다.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소속 아티스트의 학폭 논란은 악성 루머로 확인되었다.

둘, 당시 다니던 학교의 같은 반 동창들과 교사의 성명을 별첨한다.

셋,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뜨린 1차 유포자 및 악성 댓글은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로만, 학폭 의혹에 “소속사와 배우 명예 지킬 것” 강경 대응 시사]

[박건 고교 동창 및 교사 30여 명 성명문 제출··· 학교폭력 ‘사실무근’]

[‘라이징스타’ 박건, 때 아닌 학폭 논란··· 정학은 사실, 가해는 거짓?]

댓글 [851] ON / OFF

-박건 나락이네 ㅋㅋㅋㅋ 올라간 만큼 빨리 내려와라 거기 니자리 아냐

-속보) 박건미사일 박살 ㄷㄷㄷㄷ

└얘네는 기사도 안 읽나? 동창들 전부 다 학폭은 사실무근이라잖아

└└사실무근은 무슨. 로만이 얼마씩 찔러주고 입막음한 거지.

└└└ㅇㅇ 연예인들 소속사들 일처리 한두번보나

-박건 씨 좋게 봤는데,, 진정 역겹다! 조용히 자숙하시고 합당한 벌 받으시길..

└이놈이 더 역겹다; 아직 오피셜 하나도 안 떴구만 바로 인신공격부터 ㅋㅋㅋ

└└응 그럼 정학은? 멀쩡히 학교 잘 다니던 고딩이 정학은 왜 당함?

└└└왜 당하긴~ 학폭 가해자니까 당했지~

└└└└??? 너네 여기서 뭐하고있냐 새 기사 올라왔는데

‘박건 스캔들’이 터진 지 16시간째. 물고 뜯던 하이에나들마저 놀랄 소식이 날아들었다.

성명문의 명단에 없던 동창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증언의 내용보다 입을 연 사람이 문제였다.

[박건은 학폭 가해자 아닌 피해자··· 당시 나는 방관자이자 공범]

창진그룹 4세, 창진화학 진성한의 삼남이자 C&J 콘텐츠사업본부장.

본인을 경일고 31기이자 박건의 동창이라 밝힌 진규일이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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