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68화 (68/122)

음해를 와해하라 (4)

* * *

[단독] 진규일 C&J 콘텐츠사업본부장 특별 인터뷰

기자들 십여 명이 C&J 사옥에 들어섰다.

목적지는 상층의 콘텐츠사업본부장실.

각 언론사에서도 제법 짬밥을 먹은 인간들을 부른 만큼,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모여든 기자들은 서로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여비서를 따라갔다.

“본부장님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자들을 사무실로 안내한 비서가 허리를 숙인 뒤 나갔다.

자연스레 잠깐 딜레이가 생겼다. 잡담을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뒤쪽의 몇몇은 소릴 죽여 속닥였다.

‘···의외긴 의외네, 창진그룹 핏줄이 그 박건이랑 동창이라니.’

‘그러니까. 혹시 이것도 박건한테 올라타서 CVN 이미지 회복하려는 거 아냐?’

‘설마. 그러다 잘못하면 둘 다 나락이야.’

기자들이 속닥대는 사이, 책장 뒤쪽의 스크린도어가 열리며 회색 셔츠에 베스트를 갖춰 입은 사내가 나왔다.

상위권 대기업이 아니랄까 봐 본부장실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작합시다.”

무뚝뚝하게 말한 진규일은 기자들이 입을 열기 전에 한쪽 손가락을 들었다.

“단, 한 명씩 간단히. 전달해야 할 내용이 다 나왔을 때는 인터뷰도 끝입니다.”

다소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이런 특종을 인터뷰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

기자 한 명이 잽싸게 질문했다.

“박건 배우와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경일고 동창입니다. 31기,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박건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하셨는데, 자세한 전말을 알고 계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박건은 경일고 재학 도중 누군가를 때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라는 뜻은······.”

“본인이 당했죠. 가해자들에게 폭력을 멈추라고 했다가 맞은 겁니다.”

개중 젊어 보이는 기자가 손을 들었다.

“박건이 피해자였다면 정학은 왜 당한 겁니까?”

“맞은 사람보다 때린 쪽들이 더 크게 다쳤으니까요. 학폭 중심에 모 유력자의 아들이 있기도 했고, 부적절한 뒷거래와 권력의 입김이 교권을 농락한 사례였습니다.”

“경일고 내의 파워 게임이 그만큼 치열했습니까? 본부장님이 계신데, 그 유력자가 어떻게······.”

다소 노골적이었던 질문이 뚝 끊겼다. 진규일이 고개를 돌려 질문한 기자를 쳐다본 것이다.

“내가 비겁했으니까.”

“예?”

진규일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고등학교까지라도 배경을 숨기려 했습니다. 눈에 띄는 행동 없이,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죠. 나서서 행동한다면 시끄러워질 걸 알고 눈앞의 불의를 못 본 척 한 겁니다.”

끌어내려던 대답이 이만큼 쉽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노트북 타이핑 소리도 멈춘 사이, 담담한 회고가 이어졌다.

“그 이후 박건 배우와는 일절 연락한 적 없습니다. 뒤늦게 연락해 사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다만 9년 전 졌던 마음의 빚을, 이번에도 갚지 않고 지켜볼 수 없어서 끼어들게 됐습니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번쩍 손을 들었던 기자 한 명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렸다.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방관하고 침묵해서 미안했다고.”

말을 마친 진규일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창진그룹의 현 2인자, 진성한 부회장을 빼닮은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쳤다.

“나머지는 때린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요.”

*

로만 엔터테인먼트, 12번 스튜디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어제 모였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시 모였다.

박건과 박선 형제, 배영호와 서승아 듀오까지.

노중만 대표와 이상철 본부장은 빠지고, 대신 유준일 실장과 공기형 팀장이 합류했다.

공 팀장이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서승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이래.”

“그러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냐.”

맞장구를 치면서도 배영호의 시선은 자꾸만 옆으로 움직였다.

손님 눈이 완전히 돌아간 꼴을 보던 유 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요. 홍보실 직원이세요?”

박건 형제와 나란히 앉아, 심각하게 아이패드를 조작하던 진지유가 대꾸했다.

“네, 여기 우리 회사니까 시비 걸지 마세요.”

“예, 예, 누가 보면 자주 오셨던 줄 알겠습니다.”

“소속사 동료를 음해하려고 하잖아요. 악성루머 자문위원으로 온 거니까 실장님은 쉿.”

긴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가 뗀 진지유가 동창들 쪽을 향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두 분이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시면······.”

“아뇨, 전혀. 죽어도 아닙니다.”

“괜찮아요. 건이를 한 분이라도 더 도와주면 저희야 감사하죠.”

어지간한 서승아도 신기하다는 눈빛이다.

매일 보는 사람이야 적응이 됐지만, 영화에서나 보던 탑 배우가 코앞에서 애교를 부리면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사이 눈이 퀭해진 박선이 말했다.

“그런데 진짜 상상도 못 했어요. 우리 학교, 그것도 형네 반에 대기업 오너 증손자가 다녔을 줄이야. 형은 알았어?”

“몰랐지. 얘기해 본 적도 없고.”

같은 학교,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 창진그룹 4세였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다.

학교를 다닐 때는 관심이 없었고··· 본인이 숨기려 했다면 졸업한 뒤에도 동창회든 뭐든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요즘 재벌 후계들은 입사할 때까지 신분을 안 밝힌다더니, 진규일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기사를 살펴보던 서승아가 배영호를 툭 쳤다.

“인터뷰 화끈하네. 뱅호 너도 얘 기억나?”

“글쎄. 어렴풋하게만? 말은 했던 것 같은데, 워낙 존재감 흐릿했던 놈이라······.”

“근데 웃긴 게, 얘는 어떻게 그 때 일을 다 알지? 우리도 김종승 손목 부러진 건 건이한테 듣고서 알았잖아.”

“어디서 구경만 하고 있었나 보지. 그때 당시엔 자기도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니까.”

대꾸한 배영호가 입맛을 쩝 다셨다.

“뭐, 재벌 4세께서 이렇게 판을 엎어 주시니 고맙긴 하다만.”

전세는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소속사의 입막음이 아니냐, 필시 로만의 언론 플레이일 것이라던 여론도 대부분 정리되고 ‘역시 박건이었다’는 찬양이 득세를 차지했다.

창진그룹 4세, 진규일 본부장이 터뜨린 진실은 그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박건은 사건의 유일한 피해자다. 나와 교사, 반 친구들, 그 당시 불의를 지켜만 보았던 모두가 방관자이며 가해자였다.’

본인 사무실로 기자들을 불러 밝힌 인터뷰는 지상파 뉴스까지 실리며 퍼져나갔다.

애초 학폭이란 민감한 논제다. 거기다 가해자와 피해자 논란, 재벌 4세의 폭로가 엮이자 소식을 들은 관련자들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경일고 31기 학우임. 인증 有]

졸업장 인증 같이 올렸고, 추가로 설명하자면 김 모 군이라고 빽 센 집안 아들이 있었음.

그놈이 축구부 들더니 후배랑 선배들까지 패면서 기합을 줬는데 어느 날 박건이 찾아가서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함.

거기서 김 모 군이랑 따까리들 다 주먹에 금 가서 실려나감; 그러고 박건은 정학당했는데 때린 게 아니라 맞았다는 소문이 있었음.

그땐 안 믿겼는데 액션 찍는 거 보니까 그럴 수 있겠다 싶음.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길.

이후로 ‘김 모 군’의 아버지로 추측되는 구의원과 당시 교육감의 친분, 자식들이 저지른 음주운전 및 사기도박 따위의 전과까지 줄줄이 나오며 사실상 못을 박았다.

문득 진지유를 돌아본 서승아가 고개를 숙였다.

“배우님도, 실장님도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힘써 주셔서 불길이 바로 잡혔어요.”

여론전이 전개되는 동안, 박건의 사람들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변휘승과 서희도를 위시한, ‘서울의 개’와 ‘흑의사제’, ‘회도팀’ 멤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난 인터뷰를 쏟아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컸던 임팩트는 진지유의 지원사격이었다. SNS 라이브 방송을 켜, 본인이 당했던 음해며 날조를 밝히는 간담회를 열어 버린 것이다.

‘포 퀸즈’ 멤버들까지 멀티캠으로 합세한 라이브는 수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모으며 막을 내렸다.

“식구인데 도와야죠. 제가 그런 건 또 못 보는 성격이거든요.”

“그럼요,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저도 건이 놈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진지유가 수줍게 웃자 배영호도 정중한 투로 감사를 전했다.

“······.”

유 실장과 서승아가 저것들을 어쩌나, 하는 눈빛을 보낼 때 공 팀장이 들어왔다.

“어, 팀장님!”

“잠깐 대표님 전화 좀 받고 왔어요. 본부장님도 같이 계셔서 얘기가 길어졌네.”

“아마 그쪽도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노 대표님은 뭐라고 하세요?”

공 팀장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두 주먹을 극적으로 치켜 올렸다.

“지금 관계자들이랑 헤어졌는데, 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답니다.”

“그럼 이제······.”

“예. 한숨들 돌립시다.”

한숨과 환호가 뒤섞여 튀어나왔다. 의자에 기댄 서승아가 미간을 누르며 신음했다.

“아으, 우리 펌 사건들보다 빡세네······.”

“그래도 진짜 다행이에요! 다들 잠도 못 자고 고생 많으셨어요, 승아 누나랑 영호 형도, 지유 배우님도요!”

“에이, 우리가 뭘 했다고. 서승아 쟤가 동문들 구워삶느라 고생했지.”

칭찬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유준일 실장의 표정은 음침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그놈들이겠죠? 변동근이랑 차인혁, 그 또라이 새끼들. 이번에 퀸텀한테 레드스완이 싹싹 털리고 칼 간 것 같은데.”

공 팀장도 이를 갈며 대꾸했다.

“조이너스일 수도 있지. 최근 퍼핑돌즈 애들한테도 계속 파파라치 붙었었어. 위험하다 싶으니까 어떻게든 스캔들 뜯으려다가······.”

“제가 걸려든 거겠죠.”

박건이 덤덤히 말하자 주변 사람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논란이 터진 24시간 동안, 정작 루머의 당사자는 조마조마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동창인 서승아나 배영호가 분노에 차 날뛸 때도 평온한 얼굴로 중얼거린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져. 최악의 상황이 오면, 그 때 내가 나서도 늦지 않아.’

박선은 곁눈질로 형을 흘끔거렸다. 저 ‘나선다’가 어떤 의미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다행이다.”

“응? 뭐라고?”

“아냐, 형. 다 잘 돼서 다행이라구.”

박건은 엷게 웃었다.

“고맙다. 그래서 말인데··· 팀장님,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어우, 물론이죠. 우리 건이 씨가 제일 고생했는데 뭘 못 들어 주겠어.”

큰소릴 치던 공기형 팀장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

드라마가 아님을 알면서도 숨을 멈췄다. ‘서울의 개’ 시절 봤던,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이번 일의 배후, 언제쯤이면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겠습니까?”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꼭 누굴 죽이면 되겠느냐는 질문처럼 들린다.

서승아도, 배영호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친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목구멍에서 마른침이 넘어갔을 때였다.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

양해를 구한 박선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회의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딱 30초 후, 나갔던 것보다 세 배쯤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진규일 본부장한테 직접 연락이 왔어요. 박건 배우랑 만나고 싶다고!”

*

구름이 통유리창 저편으로 흘러간다.

저 30층, 40층이 넘는 건물들도 한없이 낮게 보이는 창월타워 최상부의 응접실.

기반碁盤(바둑판)을 앞에 둔 진성한 부회장이 홀로 앉아 있었다.

소리 없이 들어온 비서실장이 보고했다.

“셋째 도련님이 칼을 뽑으신 모양입니다. 조만간 움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놈치곤 늦었군. 아니지, 빠른 건가?”

중얼거린 진성한은 바둑판 위의 돌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혼자 두는 바둑이기에 판세는 팽팽하다. 흑은 상변을 크게 넓혀 찍어누르려 하고, 백은 육박하는 적을 피해 하변을 도모한다.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새삼스럽게 뭘. 열 살이 지나면 창진그룹 사내놈들은 홀로 서야 돼.”

진성한의 세 아들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주 계열사들을 물려받을 첫째, 중공업 쪽으로 활로를 찾는 둘째, 여태 그룹의 불모지였던 엔터 사업을 맡긴 셋째까지.

“추잡한 꼴들을 보였다지?”

“예, 기회를 타 그룹을 음해하려는 자들은 모두 잘라냈습니다.”

진성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라는 게 그래. 하찮게 보면 딴따라, 잘 봐 주면 미래의 자금줄이지. 그래서 규일이 놈한테 맡긴 거야.”

“도련님도 납득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그놈이 생긴 건 선비처럼 느긋한데, 진흙탕 싸움질도 마다 않는 뚝심이 있거든. 절벽으로 던지면 산삼을 캐서 올라올 놈이야.”

비서실장은 침묵했다. 셋째도련님의 성정에는 늘 의문이 뒤따랐다.

항상 형들 틈에서 몸을 낮췄고, 능력은 보이되 결코 공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C&J 콘텐츠사업본부를 맡고 일 년이 넘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 않은가?

백돌을 놓은 진성한 부회장이 불렀다.

“우 실장.”

“예.”

“내가 규일이한테 삼 년을 줬어. 그 안에 박힌 돌을 뽑고 네놈 폭을 넓히라고. 납작 엎드려 죽이나 쒀 온 이유가 있었단 소리야.”

“예.”

“이제야 패를 얻은 모양이지. 그 야단법석을 떨어 가면서.”

비서실장의 눈이 조금 커졌다. 주군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줄곧 파상공세를 취하던 흑이 움찔하며 몸을 뒤챈다. 어느덧 좌변으로 침입한 백이 대마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턱을 쓰다듬은 부회장은 다음 수를 놓았다.

“대마 잘 잡는 놈한테도 돌은 필요하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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