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69화 (69/122)

역대급 태그팀 매치 (1)

* * *

다음날 새벽.

매니지먼트 관계자, 방송국 스탭들이 주로 모이는 비공개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왔다.

제목 : 이번 학폭떡밥 24시간을 못 갔네

내용 : 하루도 안 돼서 입장문, 동료 지원, 재벌 4세까지 나와서 논란 종식시킴

─수상할 만큼 인복이 많은 배우...

└그러게 ㅋㅋ 정작 배우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다 커버함

└└로만이 일을 잘하는 거지

└└└이장미 때도 거의 즉각 대응 아니었나?

└└└└ㅇㅇ 배우 본인도 나락감지센서가 있는 것 같고

─변휘승 서희도야 그렇다쳐도 진지유가 라방 쏠 줄은 몰랐다 ㅋㅋㅋㅋ

└주변 사람한테 잘하긴 하나 봄

└└하는 작품마다 멱살 잡고 끄는데 싫어할 수가 있겠냐... 현장에서 거의 슈퍼맨이라더만

─근데 진규일은 뭐냐? ㄹㅇ 개인적 친분 아님?

└이유 있는 투자지. CVN이 작년부터 작감이랑 배우 수급이 안 됐는데, 방송국들 담합 뒤에 대형기획사들 견제까지 있었다고 함.

└└견제 오지긴 해 ㅋㅋ 무슨 3%짜리 전문편성채널을 국회의원이 와서 때리냐

─??? : 의원님 먹은 값은 하셔야죠

─그래서 박건이 CVN 작품을 찍을까?

└글쎄.. 혼자 가봤자 인력 딸려서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데...

└└백퍼 1, 2등 vs 나머지들 싸움 벌어지겠네 ㅋㅋㅋㅋ 보인다 보여

*

한남동의 어둑한 바(Bar).

키 큰 그림자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가게를 통째로 빌렸는지, 바 끄트머리의 양복 사내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나이 지긋한 바텐더만 유리잔을 닦고 있을 뿐이었다.

박건이 옆에 앉자 진규일 본부장이 온더록 잔을 밀어 놓았다.

“오랜만이야. 십 년 만인가?”

“그쯤 됐겠네.”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같이 보낸 일 년간 나눈 대화가 몇 번 안 되더라고. 새삼 아쉬웠어.”

“상관없어. 어차피 다 잊었을 테니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인데도 뭘 하면서 지냈냐느니, 반갑다는 둥의 살가운 멘트는 없다.

괜한 인사치레할 시간에 건설적인 사업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보태는 것이 낫다.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덕분에 앉아서 끝났지.”

말속에 희미한 불쾌감이 감돈다. 박건이 위스키를 쭉 들이켜자 진규일이 다시 따라 주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아니, 네 쪽엔 신세를 졌어. 다른 사람들한테도 신세를 졌고.”

진규일은 다른 사람, 이라는 대목에서 박건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잔 안의 얼음이 녹으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지. 사업이든 엔터테인먼트든 올라갈수록 적이 많아지니까. 진짜 총을 쏘지 않는다 뿐이지, 군 시절보다 더할지 몰라.”

특수부대 이야기가 나오자 박건은 짧게 웃었다.

“그래서 날 불렀나? 둘이 손을 잡고 공공의 적들을 요격하자고?”

“맞아. 힘을 빌리자는 거지.”

선선히 인정한 진규일이 손짓하자 바텐더가 새 위스키 병을 가져와 둘 앞에 놓았다.

“너도 알진 모르겠지만··· 2년 전에 아버지가 날 이쪽으로 보냈어. 지원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 늑대 같은 형들한테 치이지 말고 신사업 하나를 온전히 완성해 보이라는 뜻이셨겠지.”

“쉽지 않았을 텐데.”

“남의 밥그릇 빼앗기가 오죽 어려울까. 일 년쯤 쭉 지켜보면서, 괜찮은 배우들 수급하고 판을 키울 자금도 깔아 뒀어. 그래서 슬슬 패를 던질까 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내가 나왔고?”

진규일도 자신의 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래. 아예 몰랐으면 몰라도, 알고도 못 본 척은 못 하겠더라고. 예전 빚도 갚을 겸 좀 떠들썩하게 설친 거야.”

그를 빤히 응시하던 박건이 말했다.

“조건을 얘기해.”

“조건이라면······.”

“내가 왜 필요하고, 뭘 하면 되는지. 그래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어디까지인지.”

진규일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정말 배우가 맞나? 주변에도 육해공 특수부대 출신들이 많지만, 이런 분위기는 결단코 아니다.

뭐랄까··· 미팅을 나온 비즈니스 관계자가 아니라, 임무를 상의하는 업체 해결사의 느낌이다.

‘기대했던 대로야.’

사업가의 대화 방식도, 방송국 관계자들의 스타일도 아니지만 이 편이 오히려 좋다.

신뢰를 쌓아야 할 상대와는 협상이 길어질수록 역효과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16부작 분량에 역할은 주연, 스케일은 상하반기 포함해서 가장 크게. 마지막으로 개런티보다는 시청률과 인지도를 중요시한다던데, 맞게 알아본 건가?”

“대충 비슷해. 시상식은?”

“올해부터는 매해 어워드를 열 거야. 극을 견인하고 채널을 키우면 대상부터 자잘한 것들까지 전부 쓸어담겠지.”

박건은 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예산 대비 인재가 없던데.”

아픈 곳을 찔렸지만, 그것이 모두가 다 아는 약점이라면 별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네가 필요해. 조율 중인 작감이 있는데, 돈만으로는 안 움직여. 배우든 제작진이든 구심점 하나는 확보해야 다른 말들이 붙으니까.”

“작품도 가져올 수 있고?”

“물론이지, 영도은 작가 시대극이 제작비 때문에 계류되고 있었거든. 그게 우리한테 오면 KBC 쪽이랑 정면승부도 가능해.”

더 설명해 보라는 듯, 가만히 듣고 있던 박건이 턱짓했다.

진규일은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500억짜리 ‘하이페리온’, 거기에 DG랑 조이너스가 소속 연예인들을 넣을 거야. 중국 동시수출에 OTT에··· 떠들썩하게 출범할 모양이더군. 앞뒤로 던진 로비 금액들 다 합치면 제작비보다 훨씬 더 들어갔을 거고······.”

박건의 입매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걸 망치자는 얘기군.”

“그래, 최대한 처참하게.”

두 동창은 차례로 잔을 들어 마셨다. 승낙이다 거절이다 얘기도 없이, 박건이 불쑥 말했다.

“개인적인 부탁인데.”

“뭐지?”

“우리 쪽 촬영장, 배우, 제작진, 모든 관련자들에게 사람을 붙여. 미행하는 놈을 역으로 쫓으면 너구리굴이 나올 테니까. 나는 촬영 때문에 몸을 빼기가 어려워.”

기사가 뜨는 순간부터 온갖 물밑공작과 진흙탕 싸움은 예정된 수순. 기자로 위장한 악질 파파라치들도 각지에서 날뛸 것이다.

진규일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엔터보다는 본사 기획실에 일 잘하는 인력들이 많지. 알아낸 건 소속사로 보내면 되나?”

“아니, 나한테.”

“응?”

박건은 또 한 잔을 비웠다. 독한 보드카를 물처럼 마셨는데도 낯빛이 평온했다.

“내 쪽으로 직접 달라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고.”

한동안 LP 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컵을 닦는 바텐더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진규일이 검지로 잔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폭력은 안 돼, 알고 있겠지만.”

“그건 아는데.”

“행사하는 순간 명분을 주게 돼. 필요하다면 차라리 이쪽에서······.”

“깨달은 게 있어.”

여상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예전엔 누가 날 때릴 때 나만 참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확실히 알아 둬, 진 본부장. 누군가 널 다치게 할 때는 네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다치는 거야.”

진규일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동문들도 서른이 채 안 됐건만, 말에서 수십 년간 일선을 구른 부장급 연배의 자조가 묻어난다.

‘···대체 군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거지?’

남은 위스키를 잔에 붓지도 않고 쭉 들이켠 배우가 일어섰다.

허리를 쭉 펴자 머리가 바 앞의 조명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키가 이렇게 컸었나? 새삼 올려다보던 진규일에게, 짧은 선언이 들려왔다.

“세 번을 맞고는 못 살지.”

*

박건이 떠난 뒤, 진규일은 손을 저어 바텐더를 물렸다.

미팅 내내 소리를 꺼 뒀던 휴대폰을 켜자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둘째형] : 인터뷰 지금 봤는데

[둘째형] : 정신 나간 새끼... 기자들 불러다 그게 무슨 개짓거리냐?

[둘째형] : 제발 집안 망신시키지 말자

[첫째형] : 늦지 않게 들어와라. 아버지가 같이 저녁 하자신다.

[첫째형] : 전에 보내 준 이도건설 첫째 딸, 너만 괜찮으면 만나겠다니까 날짜 잡고.

피붙이란 작자들한테 온 톡이, 어째 10년을 못 봤던 동창의 반만큼도 반갑지가 않다.

“···빌어먹을 집구석.”

진규일은 메시지를 모조리 삭제하고 넥타이를 헐겁게 늦췄다.

박건 본인은 잊은 모양이었으나,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로 찾아온 김종승의 아버지, 구의원이라던 작자에게 뺨을 맞을 때 녀석의 눈동자를.

‘나약한 정의는 불의보다 못하지.’

정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실 사람에게 반쯤 호기심으로 조사를 부탁했었다.

소방관 아버지, 외제차 딜러 어머니··· 별것 없는 집안을 보고 흥미를 잃었던 것도 떠올랐다.

폭력을 겪은 소년은 어른이 된다. 사회의 쓴맛을 일찌감치 봤으니, 더는 선인으로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폭력을 막으려다 학교에서 쫓겨났던 동창은 여전히 남들을 도우려 들고 있었다. 뭘 하다 왔는지 돌덩이처럼 단단해진 채로.

우군으로는 이보다 믿음직할 수 없다.

이번 싸움이 승리한다면 CVN과 C&J 엔터테인먼트는 단번에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적들은 처참한 패배를 맛볼 것이고.

진규일은 잔을 들어, 한 번도 건배하지 않았던 박건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축배는 다 박살 낸 다음에 들자고.”

*

소위 ‘대박 작품’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는 감독.

둘째는 작가.

셋째는 배우.

여기서 제작진이 먼저냐, 배우가 먼저냐는 닭과 달걀의 관계와도 같다.

유명한 감독이 있으면 배우들이 붙지 못해 안달을 내고, 탑 배우에게는 반대로 내노라 하는 PD나 작가가 함께 일하자며 러브콜을 보낸다.

그중에서도 확실한 것은 저 셋 중 둘 이상이 뭉쳤을 때··· 또는 좋은 작가가 끝내주는 작품까지 가지고 있을 때다.

그래서 영도은 작가는 요즘 온갖 인간들의 러브레터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가님, 저 MBS 이성운 PD입니다. 차기작 같이 작업하실 곳은 정하셨나요?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YTS 김주혁 CP인데 미팅을 잡을 수 있을까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영도은 작가님. 이번에 쓰신 시나리오를 우연히 접하게 되어······.

컨택이 오는 방송국들만 봐도 다양하다. MBS 수목, JNBC 월화, KBC와 YTS 주말.

대부분 어느 정도 급이 있는 PD, 또는 이미 CP를 단 인간들한테 러브콜이 날아온다.

“영 작가, 나 못 믿어요?”

지금 눈앞에 있는 종승태 PD도 억지로 작업실까지 찾아온 놈이다. 실력은 우수한데 촬영 들어가는 여배우들마다 질척거리며 로맨스를 찍으려 든다는 단점이 있다.

“끝내주게 해 준다니까. 아니면 뭐, 나종모나 최창국한테 가고 싶어서 그래요? JNBC 출신들은 뒷심들이 다 떨어지는데.”

“아직 제대로 이야기 중인 곳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제 작품만 잘 나올 수 있으면 돼요.”

“그럼 MBS지. KBC에 500억짜리 들어간다는 소식 들었죠? 지상파는 같은 지상파가 잡아야지. 근본 없는 케이블 버러지들은······.

“제 데뷔가 케이블이었는데요.”

종승태 PD가 큼지막한 손수건을 꺼내더니 코를 휑 풀었다.

“그건 영 작가가 잘해서 그렇고. 이왕이면 다홍치마인 걸 아셔야지.”

더 열이 받는 건, 이렇게 뻔뻔한 놈도 조건만 보면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영도은의 고심이 깊어진다.

이 하이에나들이 원하는 고깃덩이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다.

작품은 죽이게 나왔다. ‘백정과 장군’, 이 시나리오에 무려 5년을 투자했다.

물론 다른 작품을 하면서 쓴 것이긴 하지만, 그만큼 오래 공을 들인 녀석이 아니던가.

‘···아무 곳에서나 찍을 수는 없어, 절대로.’

시대극이니 홍보도 중요하고, 찍어 줄 감독도 중요하며, 주연부터 조연··· 심지어 제작사와 방송사의 스탭 균형까지 중요하다.

돈은 많지만 일 못 하는 제작사, 반대로 배우는 좋지만 캐스팅부터 파워게임과 자존심싸움을 거듭하는 기획사.

저런 악재로 명작의 반열에 들 극들이 곤두박질치는 걸 수없이 봐 온 그녀다.

영 작가에게서 말이 없자 종승태가 다시 떠벌렸다.

“영 작가님, 내가 그거 죽이게 찍을 수 있어. 웬만한 PD들은 시대극 못 버티는 거 알죠? 연출 하나, 미장센 하나가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 작품 생명 끝나는 거야.”

“아, 예.”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정성들이는 놈이 나 말고 얼마나······.”

“저기요, PD님.”

“예?”

“반말은 하지 마시고요. 오늘도 만나기 싫다는데 부득부득 여기까지 올라오셨잖아요. 제가 같이 하고 싶으면 회사로 연락드릴 테니까, 그만 쪼고 좀 나가 주세요. PD님 때문에 MBS 쪽으로는 운전도 못 하겠어요.”

종승태 PD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갔다. 쿵쿵대던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영도은은 머리카락을 잡고 신음했다.

“아우으, 미쳐 버리겠네······.”

그때, 전화가 다시 울렸다.

[CVN 신명철 차장]

이번에는 CVN 쪽이다. 자기네 본부장까지 팔아 가며 끈질기게 연락하던 인간, 오기만 하면 다 해 주겠다던 대기업 신생으로 기억한다.

‘여긴 몸집이 너무 작은데.’

반쯤 망한 채널로 갈 일은 없겠지만, 방금까지 얼빠진 놈한테 시달리던 참이라 그랬을까.

그녀는 평소라면 받지 않았을 전화를 충동적으로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영도은입니다.”

그리고 몇 분 후.

휴대폰을 쥔 영도은의 표정이 변했다.

“···예? 누가 미팅을 잡았다고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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