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태그팀 매치 (2)
* * *
굵직한 제작 미팅이 잡혔다.
청담의 모 이자카야 VVIP룸이 섭외되고, 본부장 특별 오더가 아래로 내려갔다.
C&J 엔터 직원들과 CVN 관계자들은 미팅 한 시간 전부터 도착해 긴장한 얼굴로 사전 준비를 점검했다.
“지금 올라가면 되나?”
“예, 조금 전에 본부장님도 도착하셨습니다.”
“야단났네. 신 차장, 바로 가자고.”
먼저 도착한 것은 CVN 방성일 국장과 신명철 차장이었다. 두 남자는 다다미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있는 진규일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찍 출발했는데, 테헤란로 접촉사고 때문에 한참을 막혀서······.”
방송국 국장 대 본사 본부장이라지만, 새파랗게 어려도 오너 집안의 아들이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국장을 진규일 본부장이 손짓해 앉혔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할 일만 잘합시다, 맡은 자리에서 실수 없이.”
“예, 물론입니다!”
음식과 술이 깔릴 무렵, 건장한 체구에 인상이 험상궂은 사내와 무테안경을 쓴 키 작은 사내가 입장했다.
이번에는 로만 엔터테인먼트 쪽, 노중만 대표와 이상철 본부장의 등장이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진규일입니다.”
“로만 대표 노중만입니다.”
“이상철 매니지먼트 본부장입니다. 곧 배우들도 들어올 겁니다.”
악수를 나눈 세 사내가 눈빛을 교환했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만큼 만만찮은 상대, 또는 동맹들임을 확인한 것이다.
“앉아서 먼저 한잔하고 계시죠. 나머지 관계자들도 오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저희 대표님도 소문난 주당이신데, 진 본부장님이랑 잘 맞으실 것 같습니다.”
“하하,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박건과 박선 형제가 들어온 직후, 영도은 작가와 전인우 PD도 연이어 미닫이문을 열었다.
소속사 대표와 배우, 방송국 국장과 엔터테인먼트 본부장, 제작을 맡을 PD 및 작가까지. 전원이 둘러앉자 긴 테이블이 꽉 들어찼다.
특이한 점은 다다미방 입구에 촬영용 카메라가 한 대 설치돼 있다는 점인데, 오는 사람들 모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영광이에요, 배우님. 영도은이라고 해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건입니다.”
“C&J 콘텐츠사업본부 조병길 팀장입니다. 엔터테인먼트 배우팀 관리도 맡고 있습니다.”
배우와 작가가 첫인사를 나누고, PD와 팀장이 명함을 교환한다.
얼추 인사들이 끝나자 진규일 본부장이 일어서서 장내를 정리했다.
“그럼 오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가벼운 긴장감 속에서, 미팅이 시작됐다.
*
“작가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매니저님도요. 앞으로 신세 질게요?”
“어유, 그런 건 제작사가 더 뛰어야죠. 걱정일랑 붙들어 매십쇼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차장님.”
일이 잘됐을 경우,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의 인사치레가 길어진다.
이쪽 팀은 대리를 부르고, 저쪽 팀은 택시를 타러 올라가고, 이내 지하 주차장의 스타크래프트 밴 앞에는 두 형제만 남았다.
“고생 많았다.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
차에 오른 건이 말하자 박선은 대답 대신 싱글벙글 웃었다.
“응, 근데 형. 새로운 별명 들었어?”
“별명?”
“아까 신 차장님이 그러시던데. 이제 박건 배우는 명실상부한 키스 거절범, 로맨스 브레이커, 스캔들 분쇄기에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사나이라고. 타이틀이 그새 늘었나 봐.”
철왕국 전역에 위명을 떨칠 때도 저런 주렁주렁한 칭호들은 붙은 적이 없었다.
건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키스 거절범?”
“응. 서예니 씨는 피하고 권유리 씨랑도 뽀뽀만 했다면서 팬들이 붙여 줬어.”
“그건 대본이 수정됐었잖아.”
“그치, 원랜 더 로맨스 요소가 많았는데 무 작가님이 바꿔 버렸지.”
‘무명’이라는 필명의 회도팀 작가와는 종방연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작가 얘기가 나올 때마다 황창재 PD가 한숨부터 푹푹 쉰 것과 달리, 실제로 보니 의외로 멀쩡한 인간이었다.
“형도 기억나? 작가님이 종방연 때, 박 배우님은 로코보다 더 끈적한 장르가 어울린다고 했던 거. 그래서 일부러 어른용 키스씬은 다음 작품으로 양보한 거랬잖아.”
“난 그게 악담인 줄 알았지.”
그때가 떠올랐는지, 혼자 웃어대던 박선이 짐짓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근데 이번 작품 보니까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겠어. 회도팀도 좋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진짜··· 박력이 장난 아니더라.”
그들은 거의 6시간을 달린 마라톤 미팅에서 겨우 탈출한 참이었다.
로만과 C&J, CVN 관계자에 작가와 감독, 외주 제작사 PD들까지 참석한 대형 미팅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개런티 조율, 회당 제작비 조율, 미리 돌렸던 시나리오 회의, 미팅치곤 이례적인 카메라 오디션까지 벌어졌던 탓이다.
결과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세세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남았으나, 그 정도는 회사 법무팀에서 검토 후 사인만 하면 된다.
계약이 성사되자 사람들은 그제야 먹고 마시며 태그팀 결성을 축하했다.
특히 CVN의 방 국장과 신 차장, C&J 엔터테인먼트 관계자 쪽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물에 잠기기 직전의 나룻배에서 초계함으로 옮겨 탔으니 희희낙락할 만도 했다.
‘어쨌든 싸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된 신 차장은 흉금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 팀, 올해까지만 버티다가 쓸려나갈 거란 소문이 파다했거든요. 사람이 갈리든 부서가 사라지든 하나는 한다면서.’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본부장님이 배우님이랑 동창인 걸 알았을 때, 저희끼리 이러다 같이 일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와 주셔서······.’
급기야 신 차장은 물을 틀다 말고 그의 손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물론, 영도은 작가와 전인우 PD도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서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돈 많기로 소문난 C&J다.
스탭과 세트장 구성 등 제작 환경을 최고급으로 맞추고, 문제였던 배우 수급까지 박건을 위시한 로만의 멤버들로 꽉꽉 채운다? 작감 입장에서도 군침 도는 제안인 것이다.
‘거기다··· 미팅 자리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겸한 보람도 있었지.’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꿈틀대던 합기(合氣)가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타올랐다.
한 시즌 정도는 날릴 각오를 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되면 이쪽도 전력으로 임할 수 있다.
미팅 내내 술 대신 음료수만 마신 박선이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근데 형, 그건 왔어? 그 느낌 있잖아. 나 물어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글쎄. 이번엔 오든 안 오든 웬만하면 하려고 했는데······.”
“어, 그랬는데?”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이제 제법 달라진 형을 파악했는지, 둥글둥글한 눈매에 기대감이 그득 들어차 있다.
건은 동생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팍 오더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거지! 역시 이래야 스캔들 분쇄기, 로맨스를 모르는 남자, 우주의 대운이 모이는 사나이지.”
“아직 학폭 외 스캔들은 안 났는데.”
“그럼 키스 거절범?”
“···그 호칭은 묘하게 기분 나쁘네.”
킥킥대던 박선이 갑자기 입을 떡 벌렸다.
“어, 그러고 보니까 형. 이번에 여주인공 누구로 정해질 것 같아? 백하니 씨, 아니면 진지유 씨?”
“글쎄, 누구든 상관없는데.”
오늘 오디션을 위해 마련한 준비물이 아직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백정탈’, ‘희광이탈’이라 불리는 나무 가면의 험상궂은 눈매를 들여다보며, 건은 몇 시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그가 ‘백정과 장군’에서 이번에 맡게 된 배역은 조선인 이천인(異賤人).
별신굿 탈놀이에서 황소를 도살하듯, 칼과 도끼를 쥐고 일제와 맞서는 백정의 아들이다.
*
다음날 정오.
영도은 작가의 작업실에, 이번에는 초청을 받은 손님이 들렀다.
“향이 좋네. 작가님은 좀 잤습니까?”
“못 잤지. 그렇게 마시니까 잠이 안 오더라고, 여태 시나리오 다시 보면서 짚을 거 짚고, 고칠 거 있나 점검했어요.”
“하긴··· 이제 400억짜리 대작인데.”
텁수룩한 구레나룻이 턱수염까지 이어진 전인우 PD가 커피를 홀짝였다.
두꺼운 손에 들린 머그잔이 얼핏 유아용 컵으로 보일 정도다.
“이렇게 한배를 탈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얼마나 놀랐는지, CVN에서 영 작가님 섭외 들어갔다는 얘긴 들었지만······.”
“난 애당초 마음이 없었어요. 근데 저렇게 판을 짜 오면 반칙이잖아.”
고개를 젓는 영도은 작가를 보며, 전인우 PD가 산도적 같은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여러모로 대박이긴 했죠.”
전인우는 MBS에서 입봉해 외주 프로덕션에 들어간 베테랑, 영도은은 벌써 데뷔 12주년을 맞은 인기 작가다.
제작회의에 이골이 난 두 사람에게도 어제 미팅은 ‘역대급’이란 말이 어울렸다.
‘돈은 안 아낍니다. 필요한 사항들, 뭐가 됐든 올려보내 주세요.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제작비가 얼마를 넘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조건을 다 받겠다던 C&J의 본부장이 호랑이라면, 체면치레 없이 즉석에서 협상을 제시하던 로만의 대표는 호수 속 이무기다.
‘메인은 박건 배우로, 개런티는 업계 관행에 회당 1.3배를 더해서. 다른 주조연 배우들도 비슷하게 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신승 씨나 최필립 씨도 가능합니까?’
‘신승이는 이미 극에 들어갔고, 요시모토 역에 최필립은 조금 아쉬워요. 여배우는 줄 수 있지만 남자 배우만 둘을 꽂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굵직한 배역들은 로만과 C&J 안에서 채워야 할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탑급 배우를 우리 쪽에서만 셋을 쓰면 역풍이 올 수 있어요.’
치열한 설전 끝에 로만에서는 박건을 비롯한 두 명의 주연이 가고, 나머지는 C&J 쪽 배우들과 공개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이 났다.
“그나저나, 소문이 사실이긴 한가 봅니다.”
“무슨 소문요?”
듣는 사람도 없건만, 주변을 괜히 둘러본 전인우 PD가 소곤거렸다.
“영 작가님은 모르시나? 로만이 DG-조이너스랑 완전 척을 졌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CVN이랑 손잡은 거 아닙니까, 팀 대 팀으로 정면승부 들어가려고.”
영도은 작가의 목소리도 한 톤 낮아졌다.
“미팅 내내 아예 언급이 없긴 했죠. 급 높은 배우들은 남녀 불문하고 거기 많은데.”
“그렇지,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눈을 맞춘 둘은 비밀이라도 공유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영도은이 물었다.
“근데 피디님은 괜찮으시겠어요?”
“나? 뭐가요?”
“이젠 MBS 소속도 아니시잖아요. 괜히 독이 든 소주 벌컥벌컥 드시다가 극 무너지면 갈 곳 없는 거 아닌가 몰라.”
전인우 PD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영 작가님, 악담도. 내 실력이면 밥은 안 굶으니 캐스팅이나 예상해 봅시다.”
“뭐··· 별거 있나. 조연들이야 알아서 앉힐 거고, 송이설 역이 궁금하긴 하네요. PD님은 누가 올 것 같아요?”
“당연히 백하니나 진지유 중 하나겠죠? 퍼핑돌즈인가, 거기서 배우로 밀어주는 애가 있긴 한데··· 어제 연기 보니까 박건이랑 절대 안 돼. 뼈도 못 추리고 나가리 될 거예요.”
퍼핑인지 돌즈인지 하는 애는 모르지만, 나머지 말엔 격하게 공감이 가는 바였다.
어제 기억은 영도은에게도 충격이었다.
제작회의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고 해서 조금 당황했고, 박건이 갑자기 백정 탈을 꺼냈을 때는 그보다 더 기특했다.
어차피 배역이 정해진 오디션에, 배우 쪽에서 성의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너희 일제의 개들을 모조리 도살해, 저 더러운 양인역천(良人役賤)마저 함께 베겠다. 나는 막쇠의 아들, 천인이 아닌 이천인이다!’
···연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박건은 성의 따위를 보이려던 것이 아니다. 그녀의 극 속 인물을, 이 세계에 재현하러 경성에서 온 운동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어쨌든 기다려 봅시다. 내일 중으로 노 대표님이 연락 준다고 했으니까.”
백하니일까, 진지유일까.
연기력이야 정평이 난 둘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작품에 잘 맞는 이미지를 골라야 한다.
극의 주연 급들··· 그 중에서도 여주인공의 크랙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아마 ‘하이페리온’에서도 가진 카드를 총동원해 최고의 조합을 짜서 나올 것이다.
탑 배우들만 밀어넣는다고 극이 성공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주연끼리는 물론이고 작품과의 궁합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전 PD가 불쑥 물었다.
“영 작가님은 개인적으로 누굴 원하는데요?”
“나야 다 좋죠. 진지유든 백하니든.”
“에이, 선수끼리 거짓말 맙시다. 노 대표 성격이면 나 말고도 뒤에서 설문조사 돌렸을 거 알아요. 그때 누굴 골랐는지만 얘기해 달라고.”
산적처럼 생긴 양반이 눈치는 백 단이다. 영도은 작가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역으로 질문했다.
“PD님 픽부터 말해 주면 나도 말하죠.”
“저라면··· 무조건 진지유. 두 명 느낌이 다르긴 한데, 진지유도 시대극에 안 어울리는 마스크는 아니라서. 감독 입장에서야 다 제치고 핸들링 잘 되는 배우가 최고죠.”
“아아, 그래요.”
“작가님은 어느 쪽 손을 들었는데요?”
“난 백하니.”
작감의 선택이 갈렸다. 오호라··· 하는 표정으로 휘파람을 부는 전인우를 보며, 영도은도 슬그머니 웃었다.
“PD님. 우리 내기나 할까요, 노중만 대표가 누굴 보낼지?”
“좋죠. 지는 쪽이 첫촬 회식비 쏩시다.”
“받고 종방연까지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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