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태그팀 매치 (4)
* * *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아까 전이 조금 불편한 정도라면, 지금은 칼바람이 살을 에는 히말라야에 있는 것 같다.
“······.”
다른 사람들은 숨도 못 쉬고 두 여배우를 번갈아 곁눈질했다.
진지유가 맞은편에 자릴 잡은 이후, 백하니는 팔짱을 낀 채 계약서만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치 이걸 언제 찢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유준일 실장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지유야, 혹시 연락 못 받았어?”
“받았지. 그런데 그냥 왔어.”
“그러니까 왜······.”
진지유는 웃는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하고 싶었던 배역이라. 회사가 이쪽을 꽂은 건 알겠는데, 혹시 직접 연기하는 걸 보시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잖아.”
순식간에 ‘이쪽’이 된 백하니가 비웃듯 묻는다.
“그래서 쫄래쫄래 쫓아왔니? 왜, 나 없었으면 로비라도 하려고?”
“로비는 무슨, 실력이죠.”
“전에 보니까 없는 것 같던데.”
“저는 최저 12%, 언니는 7%. 프로는 숫자로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관객 수는 안 따지나 봐. 회사 홍보팀 갈아넣어서 80만 찍고 고꾸라진 게 누구더라.”
“어머, 그럴 거면 고점도 계산해야죠. 1102만이랑 765만인데?”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멍청히 마주 봤다. 탑 여배우들의 살기등등한 신경전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실에 입각한 순위 다툼 아닌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차마 입 밖으론 꺼낼 수 없는 말이 떠돌았다.
‘저걸 다 외우는 게 더 신기하다······.’
숫자에서 좀 밀려도 이쪽은 두 살 더 많은 짬밥이 있다. 백하니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하고 싶으면 대표님한테 가서 말해. 백하니 밀치고 나 꽂아 달라고.”
“어떻게 그래요. 아무리 같은 회사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뒤늦게 이미지관리는··· 싸우자고 칼 물고 여기까지 쫓아와 놓고선.”
저쪽이 귀찮은 파리 쫓듯 군다면, 이쪽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할 말을 다 한다.
진지유는 테이블에 흩어진 계약서를 흘끗 보더니 턱을 괴었다.
“시비 걸 의도는 없었어요. 작품 뺏으러 온 것처럼 보일 건 아는데, 사실 대표님 오더로만 나는 하고 넌 안 하고는 좀 웃기잖아요.”
저희가 그럴 급도 아니고, 덧붙인 뒷말에 묘한 뉘앙스가 함축된다.
“오랜만에 오디션도 보고 싶었고, 누가 하는 걸 보니까 재미있어 보여서.”
“······.”
단두대의 칼날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좀 말려 봐요.’
‘내가 저걸 어떻게 말려?’
영도은 작가와 전인우 PD가 서로의 옆구리를 찔러 댈 때, 백하니가 소파에 기댔던 등을 곧게 폈다.
“그럼 해.”
“뭘?”
“귀먹었니? 네가 원하는 대로, 제작진 앞에서 오디션 보자고. 누구 연기가 그 여자애 배역에 더 잘 맞는지.”
“좋아요, 제가 선배지만 공정하게.”
누구 한 명 대본을 달라는 사람도 없다. 두 여배우는 어서 큐를 하라는 듯, 동시에 전인우 PD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머리를 감싸 쥔 유준일 실장이 신음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오디션 현장이다.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신 차장이 전 PD에게 소곤댔다.
“PD님, 그럼 카메라도 설치할까요?”
“카메라? 왜요?”
“왜, 미팅 때 박건 배우가 했던 것처럼요. 요즘 톱스타들은 다 그러는 것 같은데.”
“···제발 그냥 합시다.”
*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십 년은 늙은 듯한 유준일 실장의 목소리도 이해가 갔다.
건은 순수한 궁금증에 입각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요. 연기대상 한 편 찍었죠. 백하니는 총 쏘는 씬 하고, 진지유는 남주랑 첫 만남 씬 가져오고··· 둘 다 살벌하더라고요.
“백하니 씨가 됐겠군요.”
-어, 뭐야. 들었어요? 어떻게 알았지?
“느낌이 그랬습니다. 시나리오 이미지랑도 그쪽이 더 어울렸고.”
유 실장은 전화기 저편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하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걔가 사람 가려 가면서 지랄은 해도 천성이 못된 애는 아니에요.
건은 잠시 옛 경험을 떠올렸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자들은 철왕국에도 많았다.
‘동료든 적이든 그 꼴은 못 두고 봤는데. 같은 회사라고 봐줘야 하나?’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유 실장이 급하게 덧붙였다.
-차별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게 참, 설명하기 애매한데··· 연예인 가면만 쓰면 애가 좀 홱 돈다고 해야 하나, 아마 촬영하다 보면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예, 이거 괜한 소릴 했군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십쇼.
전화가 끊겼다. 백하니··· 예상했던 소식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슬금슬금 다가온 서희도가 소리 죽여 물었다.
“진짜 백하니예요? 진지유가 아니라?”
“예.”
이내 5년차 아이돌은 배를 잡고 체육관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배야··· 나도 7집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합류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아쉬워합니까?”
“부러워서 그러죠! ‘달을 띄운 호수’ 때부터 팬이었단 말이에요. 나 진짜 그 누나랑 작품 찍고 싶어.”
백하니의 패악질을 몇 번 직관했던 박선이 힉 소릴 내며 충고했다.
“저, 아무리 희도 배우님이라도 하니 씨는 조심하셔야 돼요. 같이 일하다가······.”
“알아요. 그 누나 빡치면 물건 던진다면서요? 나도 같이 던지면 돼요.”
그야말로 애새끼다운 해결책에 두 형제는 말을 잃었다. 서희도는 가슴을 쿡 찌르며 자랑스레 부연했다.
“이래봬도 아기스포츠단 투수 출신이거든요. 내가 더 많이 맞출 자신 있어요.”
“아, 그러셨구나······.”
“어? 왜요, 지금 질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만 가자, 선아. 씻어야지.”
*
백하니의 합류가 공식화됐다.
[백하니, ‘백정과 장군’ 출연 확정··· 박건과 첫 호흡 맞추기로]
[1년 4개월 만의 브라운관 나들이, “여왕의 귀환”]
[드디어 결성된 로만의 ‘원투펀치’··· 팬들 입을 모아 “기대만발”]
반응은 반 우호, 반 애매로 갈렸다.
‘반 백하니’ 파는 백하니가 1년 4개월간 활동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부족한 안정성을 지적했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거 아닌가? 한두 푼도 아니고 400억짜리 시대극인데, 만에 하나 박건 템포 못 맞추면 대참사임
-지금이라도 진지유로 갈아타자 ㄹㅇ
‘친 백하니’ 쪽, [하니단]을 중심으로 한 팬덤은 진지유의 단점을 걸고넘어지며 노련하게 진흙탕 싸움을 유도했다.
-솔직히 진지유는 ㅋㅋㅋㅋ 조선시대에 그 피지컬이 말이 됨? 남자 조연들보다 커서 몰입 다 깨질 듯
└그럼 백하니 얼굴은 말이 되고...?
-백12랑 진지컬 비교는 선넘었지
키보드배틀이 연일 벌어졌다. 진지유파, 백하니파, 거기에 분탕을 치러 온 타 팬들까지 섞여, 그야말로 초열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내부의 분란은 강력한 외세 앞에 진압되었다.
[1보) ‘하이페리온’ 문한빈, 강영웅, 기은서, 안미립··· 어벤저스 결성]
[병서한 PD, 자신만만한 출사표 “백정장군에 신경 쓸 시간 없어”]
먼저 주연들의 라인업을 발표한 것은 ‘하이페리온’ 쪽이었다.
공개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배우 풀은 까고 보니, 호화를 넘어 미슐랭 뷔페를 방불케 했다.
DG의 대표 남녀 배우 문한빈과 기은서가 선두에 섰고, 조이너스에서도 강영웅에 안미립이라는 필승 조합을 꺼내들었다.
이만하면 DG와 조이너스 모두, 현재 가용 가능한 배우들 중 최고급 전력을 쏟았다고 볼 수 있다.
장군에는 멍군이 나와야 하는 법.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CVN 쪽에서도 ‘백정장군’ 라인업 보도를 뿌렸다.
로만의 박건과 백하니, C&J의 이동수와 조현아, 거기에 중견 명배우 고철준까지.
메인 둘을 제외한 몸값으로는 다소 밀리지만, 나머지 배우들도 어디 가면 주연 한 자리씩은 충분히 꿰찰 사람들이다.
거기다··· 그 박건과 백하니의 조합 아닌가.
매일같이 고점을 갱신하는 라이징스타와 로만의 얼음공주라니, 베일에 싸인 시대극에 기대가 모이는 것도 당연하다.
연출을 맡은 전인우 PD는 충남 부여에 초대형 세트장을 짓고 있다고 밝혔다. 겸사겸사 상대의 트래시토크도 되돌려 준 것은 덤이다.
[전인우 PD··· ‘백정장군’ 신경 안 쓴다던 병서한에게 일침, “너 아직 은퇴 안 했냐”]
‘병서한 PD가 재밌는 인터뷰를 했던데, 보고 나서 좀 웃었습니다. 그쪽은 절 신경 안 쓴다고 하는데, 저는 그 친구 은퇴한 줄 알았거든요. 매번 작품 엎고 술 얻어먹으면서 저한테 은퇴한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흑의사제 때 평을 올렸던 유명한 문화평론가는 페이스북에 한 줄을 게시했다.
-자본과 인력, 이해관계와 자존심이 얽힌, 어떤 서사보다 치열한 엔터테인먼트의 대혈투.
경성시대를 배경으로 한 백정 출신 독립투사의 시대극과, 재벌가 다섯 남매를 그린 최상류층들의 복수치정극이 맞붙는.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
각 소속사들은 목표하는 지향성에 따라 배우 수급, 아이돌 육성, 운영 방침까지 조금씩 다르다.
그중 가장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 엔터테인먼트 사옥이다.
로만이 실용성과 심미성을 중시한 유선형 디자인이라면, DG는 천박하리만치 화려한 빌딩 두 채를 동시에 쓴다.
조이너스는 그 둘의 중간쯤에 있다. 내부 디자인 역시 회사의 자체 세계관 컨셉으로, 태양계와 은하 등을 코스믹하게 꾸며 놓았다.
그리고 그 우주 최심부. 조이너스의 VIP 라운지에서 두 수장이 회동을 갖는 중이었다.
“백하니라고?”
“그렇다던데, 예상하긴 했다만.”
두꺼비처럼 눈이 툭 튀어나온 DG 대표, 변동근이 턱을 긁었다. 짧고 굵은 손가락마다 끼워진 금반지가 천박한 빛을 뿜는다.
“진지유보다는 백하니가 낫다고 봤겠지. 저쪽은 작년에 영화 말아먹은 전적도 있고, 이쪽은 한동안 활동을 안 했으니 말이야.”
반면 조이너스의 수장, 함현식은 젠틀한 대기업 부장 같은 인상이다.
한쪽은 프로듀서··· 다른 한쪽은 안무가 출신으로 자신들의 회사를 초거대 연예기획사까지 키워 낸 인물들이기도 하다.
다리를 꼰 함현식이 툭 던지듯 말했다.
“볼 때마다 아깝겠어. 백도 진도 다 자네가 품을 수 있었잖아.”
“품기는 개뿔이, 노중만이가 독 오른 개처럼 물고 늘어져서 진땀 쏙 뺐구만.”
“그래서 아쉽다는 거야. 그때 눌러 놨으면 얼마나 좋아?”
“품는 맛이 있어 보이긴 하지, 둘 다.”
추잡한 음담패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탑 여배우들이라 해도, 이들에게는 사고 팔아 배를 불릴 상품일 뿐이다.
“누가 됐든, 이번에는 완전히 뭉개야 돼. 이왕이면 성적 말고 다른 쪽으로도.”
함현식의 말을 변동근이 받았다.
“왜, 네 새끼들 쪽 당할까 걱정되냐?”
“걱정은 무슨··· 그냥 그 친구, 자꾸만 살아나서 설치는 게 거슬려. 어떻게 창진그룹 손자놈이랑 딱 동창일 수가 있냐는 말이지.”
로만을 이끌어가는 ‘그 친구’는 요즘 장안의 화젯거리이자 두 수장의 골치였다.
안 그래도 노중만이 제 식구들을 끔찍하게 감싸는 판에, 운까지 좋으니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안 나는 것이다.
“기다려 봐. 아직 안 끝났으니까.”
함현식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근이, 자네도 조심해. 노 대표랑 그쪽 팬덤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 중일 거야. 애매하게 건드렸다가 불똥이 이쪽으로······.”
“튀면 어때? 슬슬 물갈이할 때도 됐는데.”
기획사의 수장쯤 되면 상대방 눈빛만 봐도 뜻을 읽는다. 함현식이 의외라는 듯 갸웃거렸다.
“차인혁 본부장을?”
“그럼 누가 또 있냐.”
“아끼는 친구 아니었나? 잘 키워서 오래 쓸 줄 알았더니.”
변동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개장수가 투견 아끼는 거 봤어?”
“차 본부장 정도면······.”
“아, 당연히 아끼지. 근데 이게 좀 애매해. 예쁘다고 싸고돌면 돈을 못 벌어 오고, 피를 너무 많이 묻혀도 상품성이 떨어져요. 더군다나 그 와중에도 개새끼 머리는 계속 큰단 말이지.”
쑥쑥, 하면서 목을 뽑는 시늉을 하던 변동근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려올라간 입술 밑으로 누렇게 튀어나온 뻐드렁니 두 대가 드러났다.
“박건, 구신승, 백하니··· 누구든 좋으니 모가지 물고 자폭하면 이득 아닌가?”
함현식도 마주 웃었다.
“그렇긴 해. 개는 새로 키우면 되지만 호랑이 새끼는 구하기 어렵지.”
“함식아, 함식아. 넌 이래서 얄미워. 뻔히 알면서 끝까지 의뭉을 떨잖냐.”
함현식이 대꾸 없이 웃고만 있자, 변동근은 뒷짐을 진 채 입구로 슬슬 걸어갔다.
“어우, 여긴 무슨 우주선이야. 우리도 이사회 소집해서 인테리어 좀 갈아엎으라고 해야지··· 돈을 벌어도 욕을 먹으니, 쯧쯧쯧.”
뒤뚱거리던 변 대표의 모습이 이내 라운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뒤에 남은 함현식은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들었지? 맞춰서 보조해. 어차피 일 생기면 저쪽이 뒤집어쓸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친구와 손을 잡고 수십 년간 경쟁자들을 숙청해 온, 미중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린 떡 챙겨서 굿이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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