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77화 (77/122)

백정, 이천인 (3)

* * *

‘백정장군’의 서사는 이천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불과 십여 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은 이천인은 상인들에게 밥동냥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나 아비 이막쇠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순식간에 역적의 아들이 된 어린아이를 거두어 주는 이는 없다.

―일없다, 이놈아! 그러기에 왜 백정 주제에 독립운동을 한다고 설쳐대, 응?

―너도 네 아비처럼 되기 싫으면 경성에서 썩 꺼져! 네놈들 때문에 삼식이네 아범까지 종로서로 끌려간 걸 생각하면··· 카악, 퉤!

―육시럴 백정 놈들, 세상에 망조가 들려니 별의별 잡것들이 다 설치는구나.

이천인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것은 왜놈들이 아닌 조선인, 그것도 엊그제까지 함께 저잣거리에서 살아가던 상민(常民)들이다.

결국 비 오는 밤, 이천인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길가에 쓰러진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맞닥뜨린 이는 금빛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닌, 마침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외국인 선교사 제이슨 캠벨이었다.

―얘야, 정신 차려라! 기절하면 안 돼, 어서 눈을 떠라!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이막쇠의 아들, 이천인은 경성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십오 년 후.

경성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조선인들은 짚신 대신 게다(나막신)를 신고, 칼 찬 왜인들이 가슴을 떡 펴고 돌아다닐뿐더러 우마차와 인력거가 거리를 누빈다.

빠앙, 빠아앙―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차의 경적이 들려올 때, 한때 푸줏간이 있었던 골목에 새까만 사륜차가 멈춰 선다.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라.”

“예, 단장님.”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린, 최신식 양복을 빼입은 박건이 중절모 챙을 고친다.

촬영감독 도종우는 이미 바로 옆까지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수려하게 뻗은 입술에서 정반대로 무덤덤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고향이로군.”

자동차가 연기를 뿜으며 사라지고, 근대화된 거리를 돌아보던 사내는 인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뚜벅뚜벅 걸어올라간다.

“방을 좀 빌리고 싶소만.”

호텔 여직원은 얼굴을 붉힌다. 지금 박건이 입은 의상은 현대의 양복을 개화기 식으로 재해석한 올블랙 턱시도다.

단역급의 조연이라지만 저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사심이 듬뿍 섞인 연기는 절로 물이 오른다.

“혹시 이름··· 성함을 뭐라고 적어 드릴까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한테 말씀을······.”

“이천인(異穿人), 다를 이에 뚫을 천 자요.”

뜻은 다르나, 본래의 이름을 말한 이천인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벌써 이막쇠가 죽은 지도 십수 년째.

백정놈 자식의 이름 따위, 당시 저잣거리에서 살아가던 무지렁이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터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눈 호텔 여직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한다.

“예, 그렇게 적어 놓을게요.”

“아··· 그리고 하나만 더.”

호색한을 가장한 이천인의 눈빛에, 찰나간 끓는 살기가 스친다.

“요즘 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사교회가 열리는 곳이 어딥니까?”

밤이 백정탈의 시간이라면, 낮은 성공한 사업가 이천인의 시간이다.

*

‘그냥 뭐, 연기로 다 씹어먹네.’

C&J의 여배우, 조현아는 새삼 감탄한다.

이미 수십 번을 본 박건의 연기지만 볼 때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 맡은 배역만 아니었으면 넋을 놓고 구경하고 싶을 만큼.

그리고 옆을 보면, 다른 의미로 놀라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뚱한 표정으로 소속사 동료의 연기를 구경 중인 백하니다.

‘얘는 또 왜 나온 거야?’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은 여전하나, 어쨌든 요즘은 촬영 현장에도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박건이 나오는 씬 한정이지만··· 밴에 콕 박혀 코빼기도 안 비추던 초창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하다.

‘누나, 우리 박건 형님이 한 건 했나 봐요. 저 백하니가 나랑 대사를 맞춰 봤다니까? 심지어 먼저 인사까지 했다고요!’

이동수의 첩보에 의하면, 며칠 전 박건이 촬영팀한테서 소품용 우산을 빌려 백하니의 밴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거기서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소속사 선배를 확 휘어잡은 모양이었다.

‘뭐··· 나라도 듣고 볼 것 같긴 해.’

그녀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다. 박건, 박건, 하도 노래를 부르기에 대체 뭔가 했는데 함께 작품을 찍어 보니 알겠다.

저 괴물은 이미 유망주의 수준을 넘어섰다. 연기로도, 그 밖의 모든 것에서도.

후배인 이동수와 촬영장에서 친분이 생긴 오민우 모두, 들어보니 다른 여배우들에게 연락이 엄청나게 오고 있다고 했다.

···같이 촬영 중이면 내 연락처라도 전해달라는 억지와 생떼가.

‘아서라, 얘들아. 매일 보는 게 진지유랑 백하니인데 눈에라도 차겠니.’

안쓰럽게 고개를 저은 조현아는 다시 백하니에게 시선을 보냈다.

예상 밖인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듣기론 관계자고 선배고 제 성깔 수틀리면 들이받는 미친년이라던데, 실제로 보니 그냥 사회성만 좀 결여된 프로 배우가 아닌가.

‘역시 소문이 과했던 건가, 아니면 로만에서 단속을 잘해서? 작년부터는 사고 쳤다는 기사가 안 뜨긴 했으니······.’

진짜 저질과 인간쓰레기, 훨씬 더 천박하게 미친 여배우들을 수없이 봐 온 그녀의 시선에서는 저만하면 충분히 정상이었다.

한 길 사람 속은 알아도 보이는 연예인 속은 모른다고, 결국 촬영이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알 일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요즘 조현아뿐 아닌 촬영장의 모두가 기다리는 이벤트가 있었다.

저기 저쪽, 세트장 반대편에서 오늘 촬영이 없는 이동수도 1열을 차지하고 앉아 있지 않나.

뒤쪽에는 종로경찰서장을 맡은 남중익,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역할의 고철준 등 중견 배우들까지 흡족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다들 모이셨구만. 오늘도 볼 만 하겠는데.’

슬그머니 미소 지은 조현아도 오늘자 대본을 꺼내 펼쳤다.

이다음 씬은 경성의 화려한 밤, 상류층이 모이는 무도회장에서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치열한 사랑과 정쟁(政爭)이다.

*

S#.12 경성의 거리(낮)와 무도회장(밤)

“이천인이 누구야?”

“몰라, 엄청난 부자라던데. 서양에서 화포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대.”

“맞아! 경성이 고향이랬어. 그래서 저기 저, 종로경찰서랑 딱 마주한 대저택을 샀다더구먼.”

“아냐, 은행 앞 호텔에 묵는다던데. 일 년치 숙박비를 한 번에 지불했대.”

C&J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배우들과, 이장미의 추천으로 캐스팅된 연극 출신 배우들이 감칠맛 나는 행상인 연기를 소화한다.

사실 저 행인들 중 이천인이 깔아 둔 바람잡이가 있다는 사실을, 경성을 활보하는 어떤 왜경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이천인은 낮에는 경성의 정세를 파악하고, 밤에는 젊은 유력자들이 모이는 상류층 무도회장에 드나들며 눈도장을 찍는다.

오늘 민족 반역자 송별학 대감의 금지옥엽 손녀, 송이설 역의 백하니와 맞붙는 씬은 곧 방영될 2화의 하이라이트다.

은은한 조명이 내리비치는 무도회장 안, 이 경성 안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술잔을 들고 홀을 거닌다.

그 중, 유독 눈길을 끄는 미남자가 있다.

쭉 뻗은 콧날과 훤칠한 옷태, 그야말로 양반가 자제 같은 몸가짐으로 단번에 사교회장을 접수한 신흥 귀족이다.

“어머, 저분은 누구신가요?”

“아직도 몰라요? 그 서양의 화포상, ‘경성호텔’에서 머물고 있다는 이천인 공자요.”

“저 친구가 그렇게 돈이 많다지? 듣기론 호텔에서 아랫것들한테도 펑펑 쓴다던데··· 조선에서는 무슨 사업을 하려고 돌아왔나 모르겠군.”

혜성처럼 등장한 다크호스 앞에서 고관대작들의 부인이든, 대갓집의 여식들이든 평등하게 가슴을 부여잡고 뺨을 붉힌다.

호기심과 탐욕, 추파와 질투가 뒤섞인 시선들이 끈적하게 엉겨 붙지만, 이천인은 가벼운 미소만 지은 채 어디론가 향한다.

그의 발길이 멎은 곳은 몇 달 만에 모임을 참석한, 송별학 대감 몰래 경성독립군을 지원하고 있던 송이설의 앞이다.

“반갑소이다. 나 이천인이라고 하오.”

이미 경성에 나타난 수상한 사내, 이천인을 조사하고 있던 송이설은 내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하지만 총독부의 간자나 종로경찰서의 첩자일 수도 있는 일. 그녀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대화에 임한다.

“저는 당신이 초면인데, 어디서 저를 보신 적이 있었을까요?”

이천인, 박건은 대수롭잖게 대꾸한다.

“어느 대갓집 따님이시겠지. 저기 저, 기와 높은 집의 손녀라든가.”

문득 송이설의 미간이 좁아진다. 처음 보는 사내의 말에, 익숙한 기시감이 든 것이다.

저 얘길 어디서 들었더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송이설은 퍼뜩 고개를 든다. 잠들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희미한 빛을 뿌린다.

―어느 부잣집 따님이겠지. 저기 있는 저, 송씨 대감님네 손녀라든가.

송이설의 큰 눈이 한층 더 커진다.

.

.

.

경악한 송이설의 안에서, 백하니는 생각한다.

‘···신기하긴 하네.’

그녀의 연기력은 이중인격에 가까운 정신적 방어기제에서 나온다.

연기와 생각, 마음과 몸을 따로 쓰는 것쯤은 철이 들기 전부터 해 왔던 일이다.

―어떻게, 당신이 그 말을······.

온몸으로 송이설을 연기하면서도 냉정한 정신은 연기자 박건을, 이 작품의 파트너이자 소속사의 새 동료를 평가한다.

‘메소드는 아니고. 발산도 응축도 자유자재고. 전형적으로 상대 배역을 빨아들여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스타일······.’

무섭도록 이기적이기에 외려 이타적인.

그 말이 정확할 것이다. 저렇게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합을 맞추는 배역들을 ‘배려’하는 것도 놀랍지만, 더 신기한 점은 박건이라는 인간 자체다.

‘어떻게 의도가 없을 수 있지?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고. ···꼭 내 머릿속을 다 읽고 있는 사람처럼.’

조각 같은 몸, 잘생긴 얼굴, 좋은 비율과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는 많이 봤다.

배우가 되기 전··· 연예계에 데뷔하고 나서도 그녀에게 접근해 오던 것은 거의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었으니까.

다만 박건은 다르다.

그들의 모든 것을 상회하지만, 그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박건이 ‘서울의 개’로 히트를 쳤을 즈음이었으리라. 대표실 앞에서 진지유와 마주쳤을 때, 그 싸가지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언니, 미안한데 난 다른 마음 없거든요? 특별출연은 하고 싶어서 했던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만 봐 온 언니는 모르겠지만.’

‘믿을 말을 해. 잘 나가는 신인 올라타서, 이미지 복구하고 백하니 눌렀다는 소릴······.’

‘참, 언니도.’

말을 끊은 진지유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면을 튼 뒤 처음으로 본, 안타깝다는 듯한 미소였다.

‘이래서 그쪽이랑 내가 못 친해진다니까. 둘 다 너무 많이 더러워져서.’

“······.”

퍼뜩, 백하니는 정신을 차렸다. 회상에 정신이 팔려 대사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마침 극 속의 송이설도 당황한 바, 이 정도 텀이라면 자연스레 한 호흡 접으면서 다음 합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

“역사를 안다는 것은, 기억해 마땅한 것을 기억한다는 것.”

그때, 한 걸음 다가선 박건이 대사를 끊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대본에 없는 애드립이지만, 전인우 감독이 멈출 리 없음은 그녀가 더 잘 안다.

송이설─백하니의 동공이 흔들리는 순간, 생소한 향취가 와락 달려들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소.”

*

씬이 끝났다.

문성훈이 달려와 백하니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고, 숨죽인 채 구경하던 배우들에게서 한숨 섞인 감탄이 흘러나온다.

“백하니 씨.”

아무렇지 않게 촬영장을 빠져나가던 백하니에게, 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보자 박건이 서 있었다.

“다음 주가 본방인데, 회사에서 같이 보시죠. 홍보실 직원들이 좋아할 겁니다.”

“저 그날 바빠요.”

“그럼 하루에 한 번씩 밴으로 찾아갑니다.”

“···생각 좀 해 볼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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