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이천인 (4)
* * *
‘백정과 장군’ 첫 방영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새벽 4시, 잠에서 깬 박선은 부모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부터 했다.
이제 박건의 오피스텔로 가서, 형을 태우고 촬영장으로 출발하면 하루 일정의 시작이다.
첫 촬영부터 첫 방송까지, 그간 형이 준 특별 임무를 수행하느라 옆에서 챙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다 미어져 왔다.
박선은 면도크림을 잔뜩 바른 채 거울 속의 자신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약한 소리 마, 박선. 이것도 다 내 배우를 지키기 위한 공부인 거야.”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진규일 본부장이 특별히 뽑아 왔다는, C&J의 무슨 특별경호팀이라는 자들을 따라다니며 온갖 것을 배웠으니까.
이름도 성도 없이, 그냥 ‘1팀장’이라 소개한 포마드 사내는 무뚝뚝하게 그를 가르쳤다.
‘연예계 파파라치들은 대부분 미행에 서투릅니다. 도보, 오토바이, 자동차··· 어떤 루트로든 티가 나죠. 눈썰미가 생기면 이자가 기자인지 파파라치인지, 팬인지 스토커인지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저, 혹시 팀장님은 어떻게 이런 걸······.’
마른침을 삼킨 박선이 묻자 1팀장은 표정 없이 대답했다.
‘기업의 사냥개들은 더 집요합니다. 건수가 나올 때까지, 일주일씩 잠복해 기다리는 자들도 있고요. 본부장님은 그 점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이 무슨 첩보전인가, 싶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옳은 소리다.
이장미와 소속사 대표의 비사(祕史)를 들춰낸 것도 치졸하지만, 무려 십수 년이 지난 형의 학창시절까지 공격하지 않았나.
거기다··· 이곳은 재계가 아닌 연예계다.
1팀장의 말처럼 건수가 나올 필요도 없다. 조그마한 의혹만 있으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져서, 이미지에 흠집만 내도 성공이다.
“나쁜 인간들, 분명히 또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거야.”
그 DG와 조이너스의 조합에, KBC와 병서한 PD라는 걸출한 놈이 얹혔다.
나종모 PD는 따로 톡까지 보내 스탭들 사이에서 병서한의 악명을 설명했다.
-선이 씨, 그 새끼 조심해요. 기수로 따지면 내 윗윗대였는데, 남의 밥그릇 아득바득 뺏어서 자기 식탁에 올리는 놈이야. 병서한이 때문에 드라마국 도망친 조연출이 열 명도 넘어요.
그것을 증명하듯, 한 주 먼저 방영된 ‘하이페리온’은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7.4%.
첫방에 10%도 아닌 15%를 넘었다. 그것도 급격한 오르내림 없이 완만한 상향선으로.
지상파가 최근 약세라지만, 그중에서도 꾸준히 성적을 내 왔던 KBC다운 결과였다.
[최고시청률 17.4%··· 하이페리온, 쾌조의 출발]
[병서한X문한빈X강영웅, KBC의 ‘보검’으로 상반기 견인하나]
[‘백정장군’ 비켜! 갈 길 바쁜 ‘하이페리온’, 올해 봄에는 “먼저 좀 가겠습니다~”]
KBC에 우호적인 언론들, 클릭 수에 목마른 연예부 기자들은 과하게 자극적인 제목들을 쏟아내며 ‘백정장군’을 도발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바. 미리 촬영분량을 뽑아 둔 터라, 전인우 PD는 첫 방송인 토요일 9시에 맞춰 화끈하게 휴식을 알렸다.
‘인생 뭐 있나? 오늘 못 한 건 내일, 밤에 못 찍은 건 새벽에 찍으면 되지. 어차피 날 어두우면 21시나 4시나 똑같아요.’
‘아유, 감독님!’
‘그러다 쓰러져요. 우리 마라톤이라니까, 20부작이란 말이에요!’
조연들과 스탭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조성한 서사며 끌어모은 관심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11주년.
CVN에서 처음으로 준비하는 100억 이상의 대규모 드라마.
로만과 C&J, DG와 조이너스의 정면 승부.
케이블의 신생 기타편성채널 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지상파 채널.
상반기··· 아니, 아마 올해 최고의 대결이 될 시작점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박선은 밴에 시동을 걸고 형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웅장한 판타지 BGM 모음’이 재생되며, 차 안이 순식간에 관현악 소리로 가득 찼다.
“좋아, 한번 붙어 보자고!”
*
큰범 스튜디오.
‘흑의사제’가 불러온 공전의 대성공으로, 영세한 제작사였던 큰범은 초호황기를 맞았다.
직원도 더 뽑고, 작년 말에는 옹기종기 붙어서 작업하던 좁은 건물에서 널찍한 빌딩으로 확장 이전까지 마쳤다.
그런 큰범 스튜디오에서 가장 크고 좋은, 55인치 모니터 네 개가 나란히 붙은 영상편집실이 오늘은 전면 개방됐다.
오후 8시 30분, 태종범 대표는 버선발로 뛰어내려가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건 배우님, 선 매니저님도 무진장 오랜만입니다! 우리 홍보팀장님도 같이 오셨네요?”
과일바구니를 들고 올라오던 박건 형제와 공기형 팀장도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표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그럼요. 덕분에 이렇게 스튜디오도 목 좋은 데로 떡하니 옮기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나저나 이분들 살 빠진 것 좀 보게, 드라마 현장은 어디 밥도 안 준답니까?”
그때, 더 육중해진 태 대표의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 말은 바로 하셔야죠. 우리도 일정 빡빡해서 도시락 하날 제대로 못 깠는데.”
“장미 씨!”
이장미는 씩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새 작품 들어가신 거 축하해요. 오늘 첫방 상영회래서, 저도 촬영 스케줄 맞춰서 놀러왔어요.”
“이장미 배우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혹시 드라마 끝나고,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와, 공 팀장님 또 스카웃하신다!”
곧이어 C&J 쪽 식구들, 조현아와 이동수도 도착해 ‘원조’ 박건 사단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앉고 나서도 계속 편집실 문 쪽을 흘끔거리는 이동수에게 박건이 물었다.
“누구 또 오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동수는 찔끔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박건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백하니 씨요. 그때 형님이 본방 보자고 하셨잖아요, 로만은 아니지만 혹시 올까 해서······.”
“못 온답니다.”
“예에에?”
“아까 연락을 받았는데, 다른 촬영이 겹쳤다네요. 아쉽게 됐습니다.”
이동수는 나라 잃은 독립군마냥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중얼거리는 걸 보니 대놓고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 누나가 와야 꿀잼인데··· 오늘에야말로 신발 던지는 걸 직관할 줄 알았더니······.”
박건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 백하니의 톡이 떠 있었다.
[백하니] : 촬영장배우들도온다고요?
[백하니] : 사람많으면못가요
[백하니] : 아니안가
[백하니] : 난집에서볼거니까
[백하니] : 어쨌든같이보긴하는거예요
“······.”
저도 모르게 눈을 문지르게 되는 활자의 조합이다. 평소 스마트폰을 거의 안 쓴다더니, 띄어쓰기도 어째 반사회적이었다.
‘뭐, 편한 대로 하는 거지.’
그래도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문성훈이라고 했나? 덩치 큰 백하니의 매니저가 헉헉대며 달려와 휴대폰을 내밀었을 때는 녹음이라도 하려나 싶었다.
‘저기, 백하니 씨가 휴대폰 번호 찍어 달라시면서, 혹시 다른 착각하면 촬영 보이콧한다고 전하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더니 톡이 와서 어디서 볼 거냐, 몇 명이 오느냐만 묻고는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같은 회사라 그런가.”
진지유도 오늘 누구랑 같이 볼 거냐고 묻던데, 그의 회사 여배우들은 아무래도 낯을 가리는 것이 공통 특성인 것 같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전인우 PD와 영도은 작가는 CVN 주조정실에서 보겠다고 했고, 나머지 지인들도 본방 사수를 하겠다며 격려 문자를 보내왔다.
금세 방영 시간이 됐다.
거대한 모니터에서 광고가 나오는 사이, 태종범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누추한 회사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큰범 스튜디오에서 외부 제작을 전담하는 태종범 대표······.”
“감독님, 이제 시작해요. 홍보는 끝나고 나서.”
이장미의 일침에 태 대표가 잽싸게 물러나고, 광고가 끝나며 화면이 어두워졌다.
이내 흰 글씨가 차례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35년.
조선의 황실은 뿌리부터 힘을 잃고,
제국주의가 나날이 횡포를 더해 가던 시대.
침략자의 수탈과 동포들의 멸시 속에서,
경성 저잣거리에 백정의 탈을 쓴 사내가 있었다.
*
하회 별신굿 탈놀이.
희광이라고도 불리는 백정(白丁)은 두 번째 마당에 등장한다.
황소의 머리를 도끼머리로 세 번 쳐 쓰러뜨리고 칼집에서 칼을 빼 칼춤을 추는데, 이는 도살자로서의 직능을 드러내는 춤사위다.
‘백정장군’의 서막은 이 별신굿 탈놀이로부터 얻은 모티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경성 저잣거리의 구석에서 조그맣게 푸줏간을 하는 백정 이막쇠.
그리고 그 이막쇠의 어린 아들 이천인.
사극에 색 보정을 기가 막히게 입힌다고 소문난 이여선 편집부장의 손끝에서, 개화기의 경성은 현실보다도 더 사실 같게 화면을 채운다.
―비켜, 이 천한 것아!
근대식 양복을 빼입은 중년 신사가 이막쇠를 걷어차듯 밀친다.
일본인 관료나 왜경(倭警)이 아니다.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조선인에게 멸시당한 것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들어가십시오!
―전처럼 산속에 몰아서 살게 하든 해야지, 보일 때마다 혐오스러우니 원··· 산적이나 진배없는 놈들이 말이야.
경멸조로 중얼거리고 가 버리는 신사의 뒷모습을, 어린 이천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노려본다.
그때 머리 위로 두툼한 손이 올라온다.
―무엇이 그리 분하더냐.
―저 몹쓸 놈이 아버지한테······.
―어쩔 수 있느냐? 우린 백정의 핏줄이고 저들은 양반의 후손인 것을.
―이제 신분제는 없잖아요! 다 똑같이 왜놈들의 노예인 형편에, 뭐가 양반이고 상민(常民 : 양반이 아닌 평민)이란 말이에요!
이(異)막쇠. 성은 한자요, 이름은 상놈인 사내의 얼굴에 쓴물 같은 미소가 번진다.
일제강점기에도 신분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상민일지언정 백정처럼 천대받는 이들은 일제 치하의 수탈과 한민족의 차별을 함께 견뎌야 했다.
―천하에 부끄러운 직업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부수는 법이란다.
―이해를 잘 못 하겠어요.
어린 천인이 갸웃거리자 이막쇠는 빙그레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천인아, 기억하거라.
―우리가 백정이라는 것을요?
―아니. 네 이름은 천인(賤人)이 아니라 천인(穿人), 이 세상을 뚫을 사내가 될 것이다.
백정인 아버지와 백정의 아들, 두 부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는다.
그리고 또다시 흘러간 씬.
이막쇠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푸줏간에 찾아온 일본 순사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총에 맞는다.
―아들놈인가 보군. 제 아비를 도왔을 수도 있으니 함께 데려가.
―이거 놔, 이 개새끼들아! 아버지, 아버지이이!
순사들이 흙발로 짓밟지만, 이막쇠의 시체를 끌어안은 어린 천인은 몸부림치며 절규한다.
눈은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어리지만 훤했던 얼굴은 아버지의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돼 있다.
―아들아, 칼은 피를 받기 위해 탄생한 괴물이다. 짐승을 잡으면 다섯이 배불리 먹지만, 사람을 죽이면 백 명이 연달아 죽는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칼은 헛되이 휘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백정 이막쇠는 비록 신분은 천했으나 홀로 글을 익혀 신념과 통찰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드라마는 이막쇠가 독립운동에 정말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누명이었는지 정확히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저 남겨진 이천인의 고통을, 경성의 동포들에게 쫓겨나는 어린아이를 조명할 뿐이다.
“야, 이건 너무했지!”
오랜만에, 라오스 짐이 아닌 집에서 여자친구와 본방을 사수하던 박두이는 책상을 내리쳤다.
단단한 원목 탁자가 파이터의 파운딩에 맞아 부서질 듯 삐걱거린다.
“왜 그래, 오빠. 그냥 드라마잖아.”
“아니, 저거 저··· 미친 빨갱이 새끼들, 왜 우리 천인일 안 도와주냐고! 딱 봐도 잘 커서 무진장 센 독립투사가 될 각이잖아!”
“···빨갱이가 여기서 왜 나오는데?”
박두이의 여자친구는 웃어야 할지 말려야 할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운동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 아닌가.
처음 연예인 팬이 됐다고 할 때는 취미생활이 생긴 것 같아 좋았는데, 어느새 과몰입 장인으로 거듭나고 말았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천인아.
극은 또다시 흘러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천인이 외국인 선교사 제이스 캠벨과 마주한다.
―아저씨랑 같이 조선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겠죠?
―아니, 그렇지 않단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이 땅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천인의 신분과 그로 인한 차별들을 충분히 느낀 제이스 캠벨이다.
이미 쇠한 국운에, 같은 민족에게도 모진 대못이 박혔으니 상처받았을 어린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천인은 고개를 든다.
―돌아올 거예요.
―천인아!
―반드시, 돌아와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예요. 총칼을 차고 이 땅을 짓밟은 왜인들에게, 아버지를 천대하고 무시했던 조선인들에게, 그리고······.
짓씹은 입술에서 선연한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이스 캠벨을 앞에 둔 채, 백정의 아들은 선언한다.
‘더러운 민족의 반역자들에게도.’
*
‘백정과 장군’ 1화가 끝났다.
편집실에 둘러앉은 배우들은 아무 말 없이 광고가 나오는 화면만 바라봤다.
열기 어린 침묵을 뚫고, 공기형 홍보팀장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최종 집계가 몇 퍼센트로··· 뭐라고?”
아마도 홍보팀 직원일, 전화기 건너편의 목소리가 무언가를 긴급히 말한다.
박건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백정장군’의 나머지 배우들과 이장미, 태종범 대표까지 손에 땀을 쥔 채 기다린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공 팀장이 사람들을 돌아보고 열 손가락을 폈다.
“하이페리온은 15%, 우리는 13%. 양쪽 다 나름대로 선방했습니다.”
안도의, 혹은 아쉬움의 한숨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17%던 ‘하이페리온’ 쪽의 시청률을 다소 깎았지만, 2화와 1화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13%란 성적은 못내 아쉬운 것이다.
“그래도 뭐, 그만하면 괜찮잖아요? 앞으로 쭉쭉 가서 문한빈 목 따면 되지.”
“맞아요. 원래 시대극은 서사가 쌓일수록 시청률이 터진다고 했어요. 오늘 보니까 하이페리온 쪽이랑은 포텐부터가 다르던데.”
이동수가 텐션을 띄우고, 이장미도 거들지만 공 팀장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하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조현아가 묻는다.
“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싸움을 부르는 전보가 공 팀장의 입에서 날아든다.
“끝나자마자 기사들이 쏟아지네요. 우리 드라마가 역사왜곡에 일제 미화, 식민사관이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