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79화 (79/122)

백정, 이천인 (5)

* * *

배우에게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성마학’, 성 관련 스캔들과 마약, 그리고 학교폭력이다.

그렇다면 작품에서는 어떤가.

여러 방법이 존재하나, 만약 사극이라면 고증 이슈만큼 쉽고 효과적인 흠집 내기도 없다.

거기다 식민사관과 역사왜곡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논란 치트키’가 완성된다.

“알지. 고증 그딴 거, 다 지킬 수 있지. 방구석에서 망상으로 써낸 작품도 아니고, 남의 돈 써서 극 올리는 각본가가 왜 모르겠냐고.”

CVN의 빈 회의실. 영도은 작가의 말을 전인우 PD가 무겁게 받는다.

“···재미가 없어서 그렇지. 그럴 거면 시대극이 아니라 다큐를 찍고 말죠.”

바로 이 점이 시대극의 딜레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 간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록과 자료는 많다.

하려고만 든다면 복식부터 예법, 주인공들의 대사와 작중 시대 상황 등을 완벽하게 고증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재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교육방송이 아닌 이상, 고증 논란은 사극이라면 피할 수 없는 꼬리표와 같다. 문제는 이 이슈가 역사 왜곡까지 번졌을 때다.

“영 작가님,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멀쩡해요. 낯빛 나쁜 건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그렇고. 그제부터 심해져서 응급실 다녀왔거든요.”

본인의 작품을 상어 떼가 물고 뜯는데도 영도은 작가는 침착하다.

아까 전, CVN 주조정실에서 시청률을 확인하다가 급보를 받았을 때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방송국 관계자와 무슨 부장, 차장, 팀장이라는 자들까지 달려와서 한참을 걱정했지만 영도은 작가는 담담히 말했을 뿐이다.

‘괜찮아요.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어차피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그녀를 오래 봐 온 전인우 PD는 안다.

저것은 영 작가가 정말로 화가 났을 때, 이를테면 주연이랍시고 들어온 놈이 조연 분량을 운운하거나 극의 전개에 간섭할 때의 표정이다.

“···이 새끼들, 쓸데없이 디테일해가지고.”

전인우 PD는 이를 갈면서 CVN 직원들이 정리해 준 자료들을 다시 켰다.

극이 끝나갈 때쯤, 시청자게시판과 드라마 커뮤니티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개화기의 복식과 풍습부터 시작해, 경성 한복판에 사는 백정의 고증 및 왜경들의 등장씬까지 토를 달다가 종국에는 ‘친일 미화’, ‘선조 모욕’ 프레임을 교묘히 씌워 넘긴다.

-아직 1화가 방영됐을 뿐이지만, ‘백정장군’은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전복돼 있다. 작가가 그려낸 조선의 문화는 미개하며, 주인공에게 위기와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신분을 차별하고 동포를 내버리는’ 민족성을 강조한다. 이는 순전히 재미를 부여하려는 식민사관 요소로써······.

원문을 읽던 전인우 PD가 탄식했다.

“이거, 한 놈이 아니에요. 미리 전문가 몇 놈을 고용해가지고, 실시간으로 대조하면서 보다가 극 끝날 때 맞춰서 글 올리고 기사 푼 거야. 자기들도 헷갈리니까 앞에 자료집 펴 놓고서.”

“우리가 시대극 한다고 했을 때부터 준비했겠죠. 사극 때리는 데엔 이만한 방법도 없으니까.”

영도은 작가의 말에 이어,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다랍니까?”

“······예?”

두 제작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는 그들 외에, 아까 전부터 드라마의 주연배우 한 명도 도착해 있었다.

박건은 김이 빠진다는 듯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촬영장에 최루탄이라도 던질 줄 알았는데.”

“···그건 범죄잖습니까. 그나저나 박 배우님이 상암까지는 무슨 일로······.”

“출연 중인 배우니까요. 드라마의 현황을 함께 챙길 의무가 있습니다.”

영도은 작가가 옆을 돌아봤다. 전인우 PD가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박건이 다시 물었다.

“이 논란이 시청률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겠습니까? 부정적인 쪽으로요.”

영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건 씨도 알겠지만, 내 대본은 조선과 일제 어느 쪽도 미화하지 않아요. 남의 입맛대로 수정할 생각도 없고. 그러니 이대로 가면······.”

“저것들이 계속 짖어댈 겁니다. 바꾸면 바꾼 대로 줏대 없는 시대극이라며 조롱할 거고. 딱 병서한이가 기획할 만한 판이야.”

드라마의 첫 화는 영화의 첫 주, 개봉 첫날 드는 관객만큼이나 중요하다.

거기에 정성들여 준비한 똥을 뿌렸으니, 이제는 고치든 고치지 않든 논란을 안고 가는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그럼 큰 문제는 없다는 소리군요. 시청률만 더 끌어올릴 수 있으면.”

“뭐··· 그렇긴 하죠?”

대답하는 전인우 PD의 표정에 그늘이 진다.

해결책이야 간단하다. 밖에서 뭐라고 찧고 까불든 드라마만 잘 찍으면 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만큼 촬영장의 사기가 걱정되는 것이다.

박건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을 불렀다.

“작가님, 감독님.”

이젠 익숙해진,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영도은과 전인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저희가 질 까닭이 없는 싸움입니다. 이미 잘 해 주고 계시니, 흔들리지만 마십시오. 백정탈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일지라도 짊어진 것이 많으면 허리가 굽는 법이다.

차분한 충고에 마음이 진정되고, 좁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감독님은 지금까지처럼 현장의 컨트롤을, 작가님은 뚝심 있는 대본을 부탁드립니다. 불안해하는 배우들은 제가 안심시키겠습니다.”

조금 전과는 사뭇 표정이 달라진 두 사람에게, 박건이 말한다.

“논란은 새로운 논란으로 덮어야죠.”

*

CVN 로비에서, 건은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바삐 걸어오던 진규일 본부장 일행이었다.

“됐어, 들어들 가.”

뒤쪽의 수행원들부터 물린 진규일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올 줄 몰랐는데, 딱 만났군. 오 분쯤 시간 괜찮나?”

“상관없어. 잠깐 들렀던 참이라서.”

늦은 시간이라 로비에는 경비요원과 직원 몇몇 외에는 인적이 뜸했다.

두 명은 본부장실로 올라가지도 않고 드넓은 1층 라운지를 거닐었다.

“놈들이지?”

난리가 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진규일은 딱히 위기감을 느낀 기색도 아니었다.

그 역시 이 정도 공격쯤은 상정하고 있었을 터다.

“확인되진 않았지만 뻔하지. 효과적인 잽으로 우리 맷집을 테스트한 거야.”

“그럼 여기서 더 버텨 줘야겠네.”

“버티는 것만으론 부족해.”

걷던 박건이 옆을 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진규일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악질 언론플레이는 법적 허용 범위야. 시청률부터 화제성까지 저쪽을 전부 찍어눌러서, 못 견디고 패를 던지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명분이 생길 테니까. 삼킨 뒷말은 두 사람 모두 알았다.

박건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10화, 어쩌면 6화 안에.”

촬영을 시작한 뒤 몇 주가 흘렀지만, 낯빛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변함없다. 부여를 오가는 고된 일정도 거뜬했다는 소리다.

진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을 포착하면 연락하라고 해 뒀어. 1팀장과는 안면을 텄나?”

“먼발치에서 본 적 있어.”

“그럼 됐군. 유능한 사람이니 곧 뼈다귀라도 가져올 거야.”

작품을 찍는 배우는 바쁘지만, 가업의 최전선에 나선 재벌가 삼남은 그보다도 훨씬 바쁘다.

피곤한 얼굴로 눈 사이를 누르던 진규일 본부장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직접 움직이려고? 지금이라도 우리 쪽에 맡겨도 돼. 자네 경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내 경력?”

처음으로 되물음이 나왔다. 대답을 바라는 어조가 아니었기에 진규일은 침묵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잊은 지 오래라.”

흡사 스스로에게 말하듯, 나지막이 뇌까린 박건이 로비 쪽으로 돌아섰다.

진규일이 손목시계를 본 지 정확히 오 분이 지나갈 때였다.

“슬슬 가자고. 할 일이 많을 텐데.”

*

다음날, 촬영현장의 분위기는 농담 조금 보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뭐야, 다들 왜 그래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늘 촬영 끝나고 돼지갈비라도 쏠까? 기름칠 한번 제대로 해 줘? 응?”

전인우 PD가 공기를 바꾸려 고군분투하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그나마 옆에 붙어 있던 CVN의 조연출이 한숨을 내쉬며 지적했다.

“감독님, 그렇게 말씀하시고 지난번에도 안 쏘셨잖아요. 소갈비라고 해서 촬영팀 애들 집에도 안 가고 기다렸는데.”

“···애가 셋이라, 미안하다.”

“······.”

제작진의 궁상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조현아가 돌아섰을 때였다.

촬영장의 또 다른 에이스가 나타났다.

“하니 씨, 일찍 나오셨네!”

“예, 감독님.”

삼십 분 뒤가 촬영이라, 이미 개화기에 유행하던 한복으로 복식을 갈아입은 채였다.

전인우에게 인사한 백하니는 세트장을 가로질러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 뒤를 덩치 큰 매니저가 허겁지겁 뒤따랐다.

‘···얘는 또 뭐지? 여태 소 닭 보듯 하더니만.’

조현아가 내심 경계하는 사이, 백하니는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요. 하니 씨가 나한텐 무슨 볼일일까?”

여태 개인적인 친분은 고사하고 이야기 한 번을 나눈 적 없는 사이다.

그러나 백하니는 그런 것 따위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대체 뭘 발랐나, 싶게 하얀 얼굴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 백하니가, 부탁을?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라 반응이 늦었다.

조현아에게서 대꾸가 없자 백하니는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물더니, 죽도록 싫은 반성문을 쓰는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선배님께 실수한 점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건 없어요. 갑자기 부탁이라니까 조금 신기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니 씨가 나한테?”

백하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에는 ‘그러게요’라고 쓰여 있다.

조현아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뭔데요?”

*

“아니, 이거 진짜 큰일 나요! 배우님이 억지 부리실 게 아니라니까.”

“세트 높이가 삼사 미터가 넘습니다, 낮아 보여도 올라가면 아파트 한 층이에요, 한 층!”

“첫 촬영 때도 올라갔었는데요.”

“그 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잖아요!”

그날 오후, 촬영장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오늘은 경성의 가옥 지붕들을 달리며 왜경들의 추격을 따돌리는 액션 시퀀스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액션의 주역, 백정탈 역을 맡은 주연배우가 와이어를 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도종우 무술감독이 재차 설득에 나섰다.

“서 감독님 말씀이 옳아요. 아파트 1층, 높은 데는 2층도 넘는데 거길 어떻게 맨몸으로 탑니까. 아무리 박 배우님이 몸을 잘 쓴다지만 그러다 삐끗하기라도 하면······.”

행여 뒤질세라, 서응서 촬영감독도 침을 튀기며 도종우를 지원한다.

“바로 촬영장 올 스탑에, 안 말린 우리까지 역적 되는 겁니다. 깁스하는 순간 바스트 샷 말고는 찍지도 못 해요, 하필 짚신 신는 시대극이라.”

지상 2미터에서 4미터 사이. 떨어진다고 즉사할 높이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다치고 깨지는 경우가 많은 높이다.

사고가 잦아 프로 스턴트맨들도 와이어를 꼭 다는 판에, 시야가 좁아지는 탈까지 쓰고 맨몸으로 씬을 찍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두 감독에게 둘러싸여 있던 박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한 수긍에, 아직 저 똥고집을 모르는 도종우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요, 그럼 와이어 단다는 거죠?”

“아뇨. 두 분 말씀처럼, 절대 다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미치겠구만, 그게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난 모르겠다, 진짜로 모르겠어······.”

촬영감독과 무술감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나자, 결국 지켜보던 전인우 PD가 나선다.

“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어차피 화면에는 보이지도 않을 건데. 우리 크레인이 낮은 편이라, 움직임도 크게 안 어색해요.”

“복장이 두루마기라, 아무래도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 운동능력으로 달리는 점프랑도 차이가 나고요. 그리고······.”

조목조목 짚은 박건은 뒤쪽을 돌아봤다.

아까 한참 쑥덕거리던, 와이어를 단 스턴트맨 한 명이 소형 캠코더를 들고 서 있었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 왜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하려는지, 비로소 알아챈 감독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한다.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도 고증해 보라고 하죠, 어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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