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의 반란 (1)
* * *
상황이 종료됐다.
집주인이 나타났는데 계속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쉬운 표정으로 초청객들이 흩어진다.
빅 이벤트가 펼쳐지나, 싶어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만 공기 중을 떠돌 뿐이다.
“오늘 일은 외부 유출이 안 되도록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지시십니다.”
그 와중 자르마니 코리아의 관계자들이 돌아다니며 기자들에게 입단속을 하고 다녔다.
“이걸 쓰지 말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다 아는 얘길 통째로 자르라면······.”
불만을 토로하던 모 연예지 팀장은 ‘적당히 각색해서 뿌리라’는 말을 듣고 싱글벙글하며 새 샴페인 잔을 들었다.
사실, 방금의 이벤트를 보려고 불러 모았는데 입을 다물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화제성과 관심은 이 판에서 곧 돈이다.
“아, 이게 이렇게 끝나네."
기자 한 명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자르마니 코리아 본부장.
글로벌 명품시장의 리더, 로열 자르마니(JMRY)에서 유일하게 한국인 임원에 발탁된 심수진의 등장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그녀는 박건과 함께 입장해, 직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더니 금방 자리를 떴다.
원래 싸움은 마지막에 때린 놈이 이긴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무려 그 심수진 본부장과 친분이 있어 보여서일까. 묘하게 이쪽으로 흐른 분위기에 기은서를 위시한 DG와 조이너스 연합도 탐탁찮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기은서와 백하니의 막말 배틀을 기대했던 초청객들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마무리였다.
“아까 전에, 누가 이겼을까? 박건이 심 본부장 데리고 안 나타났으면.”
아까 수군거리던 여배우의 말에, 함께 있던 동료가 대꾸했다.
“난 백하니. 돈 걸라면 십만 원까지 가능.”
“왜? 기은서도 사고 많이 쳤잖아.”
“기은서는 입만 살았지, 끽해야 맨손이잖아. 백하니는 문명인이야.”
“문명인?”
“도구를 쓴다고. 때리고 던지고.”
연예계 뒷소문에 빠삭해, 명실상부 ‘마당발’로 통하는 동료가 대꾸했다. 역시 백여왕···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던 여배우가 물었다.
“그럼 박건이랑 문한빈은?”
동료 배우는 희한한 소릴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DG 남배우들이 다 와도 안 되지. 박건이 사람 가리면서 패는 거 봤어?”
*
행사장 2층, 초청객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라운지.
자켓을 벗어던진 백하니가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노망이 났나, 본부장이면 가방이나 잘 팔 것이지.”
“다 들리겠습니다.”
“들으라고 하는 거예요. 배우들 모아다가 싸움 붙이는 꼬라지가 역겨워서.”
박건과 조현아에게 끌려 올라오고 나서도 백하니는 신랄한 비난을 늘어놨다.
남의 나라 브랜드나 파는 하청인간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제깟 게 뭔데 배우들을 엿 먹이려 드냐······ 분노의 대상은 기은서 등 ‘하이페리온’ 주연들이 아니라 심수진 본부장이었다.
배우 케어를 위해 함께 와 있던 유준일 실장이 급히 샴페인을 따라 내밀었다.
“하니야, 알겠으니까 이것부터 좀 마셔. 너 좋아하는 술이다, 술. 응?”
“됐어. 누굴 주정뱅이로 알아?”
홱 쏘아붙인 백하니는 그득 채운 샴페인 잔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켰다.
비로소 침착을 조금 되찾은 얼굴의 조현아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로만 분들이 이런 행사장에, 그것도 다 같이.”
라운지 난간에 선 채, 행사장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박건이 돌아섰다.
“제가 오자고 했습니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얼굴을 비춰야 나타날 것 같아서.”
“찾는 사람이요?”
“예. 오는 길에 백하니 배우도 데려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짬밥 높은 여배우라지만, 이 위치까지 올라가면 오히려 싸울 일이 많지 않다.
더군다나 양대 기획사 연합 아닌가. 탑 배우들이 몰려와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으니 조현아도 고초를 치른 셈이다.
“괜찮아요. 하니 씨가 마침 안 왔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역시 의리가 있네.”
조현아가 웃으며 말하자, 한 잔을 더 들이켠 백하니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의리는 무슨 의리예요, 그냥 짜증나니까 욕 좀 해준 거지. 싸움도 못 하면서 사람 괴롭히고 다니는 것들은 딱 질색이라.”
“웃기시네. 나는 매번 괴롭히잖아?”
유 실장이 항변했으나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조현아가 이번에는 박건을 돌아봤다.
“아, 그런데 심 본부장이랑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친해 보이던데.”
“그러게요, 딱 우리 박 배우님이랑 둘이 들어오는데 포스가 그냥··· 심수진 본부장도 소싯적 재벌가 스캔들이 장난 아니었잖아요.”
“아뇨, 오늘 처음 봤습니다.”
유준일 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어? 아까는 분명히······.”
싸움이 흐지부지된 뒤, 심 본부장은 그와 잠깐이지만 친근하게 이야기했었다.
두 쪽 다 능숙한 독일어를 쓰기에 친분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단 소린가?
박건은 담담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는 길에 만났는데요. 제 팬이라면서 먼저 인사하길래, 그런데 왜 저쪽 사람들까지 다 불렀냐고 물었습니다. ‘하이페리온’ 배우들이 왔다면서 입구부터 떠들썩하더군요.”
“······.”
이번에는 조현아의 눈이 커졌다. JMRY의 임원, 거기에 가장 큰 명품 브랜드의 본부장이라면 패션계의 입지는 어마어마하다.
팬이라는 립서비스야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면전에 들이박는 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그, 어··· 그랬더니요?”
“미안하다던데요. ‘회도팀’ 때 런웨이 섰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고, 조만간 모델로 쇼에 한번 서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더 놀라기도 버겁다. 본부장 급의 입에서 나온, ‘우리 쇼에 서 달라’는 멘트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닌 것이다.
그 말의 가치를 익히 아는 유 실장이 샴페인을 병째로 내밀었다.
“크, 역시 로만의 복덩이십니다. 심 본부장이 저렇게까지 말했으면 조만간 전속 계약을 넣겠다는 건데, 대표님께 올려서 최대한 판을 키워 보죠.”
“축하해요, 나까지 기분이 좋네.”
조현아도 축하를 건네는 한편, 백하니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탑스타 나셨네. 그냥 촬영 접고 지금 가요, 파리패션위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위약금 뭅니다.”
“언젠 그런 거 신경은 쓰셨나?”
“저는 갈 길이 먼 신인이라서요. 하니 씨처럼 마음대로 본부장님 명패를 못 집어던집니다.”
“···어이없어, 진짜!”
벌떡 일어선 백하니가 카펫을 콱콱 밟으며 계단을 내려가고, 유 실장이 익숙하다는 듯 널브러진 재킷을 챙겨 뒤따랐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투 샷을 바라보던 조현아가 중얼거렸다.
“이걸로 내일 연예란 1면은 먹었네요. 백정장군이랑 하이페리온이 자르마니 행사장까지 와서 붙었다고.”
“그렇겠죠. 심수진 본부장도 노리고 판을 짠 눈치였습니다.”
“맞다, 그쪽이랑도 잘해 봐요. 정말 해외 패션위크라도 서면 글로벌 팬들 엄청 늘 텐데.”
“저렇게만 얘기하고 안 부를지도 모르는 일이죠. 결국 하이페리온과 백정장군, 둘 중 더 주가 높은 라인업을 모델로······.”
말을 잇던 중, 문득 박건의 시선이 어둑한 행사장 저편을 향했다.
민첩하고 재빠른,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표범 같은 움직임이었다.
“왜요, 아는 얼굴이라도 봤어요?”
조현아가 물었지만 박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리도 그만 일어나죠.”
*
행사장과 조금 떨어진 공원 어귀에서, 차인혁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금연’이라는 팻말이 보이지만, 그와 같은 부류에게 돈으로 무마되는 법은 법이 아니다.
“확인해 봤어?”
오늘 DG 쪽의 관계자로, 그를 대신해 내부 인원들과 접촉했던 여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백하니는 먼저 갔다고 합니다. 조현아와 박건도 조금 전 행사장을 떠났습니다.”
“그림도 나왔고, 더 있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 기은서는?”
“문한빈 배우와 회사로 간 것 같습니다.”
차인혁은 잠깐 벗어 뒀던 금장테 안경을 수트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멍청한 것들, 잠깐 인기 좀 누린다고 저희 인생이 뒤바뀐 줄 알아. 기껏해야 유통기한 오륙 년짜리 딴따라들이.”
오늘, 기은서는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별말을 안 했던 문한빈은 몰라도, 그녀가 조현아를 찌르다 백하니에게 호되게 맞았다는 뉴스는 금방 퍼질 것이다.
‘몸값이 오르면 더 올릴 생각을 해야지, 흘리고 다니는 꼴이 딱 초콜릿 쥔 애새끼군.’
그는 변동근 대표의 ‘능력주의형 당근’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보라, 조이너스 놈들은 꼭 제 대표처럼 구경만 하다 꽁무니를 말지 않았나?
문한빈이란 놈은 그나마 눈치가 좀 있지만, 기은서를 포함한 DG의 톱스타 대부분은 뮤지션이고 배우고 할 것 없이 멍청한 쓰레기다.
“···저 백하니도 제 신상은 지독하게 보호하는 판에 말이야.”
“예?”
“아니, 너 말고.”
희미한 짜증이 섞인 대답에, 여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다.
박건과 백하니, 이번에 ‘백정장군’에 들어가는 배우들의 뒤는 진작부터 캐고 있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이 없다.
밑에 것들이 도통 믿음직스럽지 못해, 따로 맡긴 파파라치 팀은 앓는 소리나 해 댔다.
-착수금 조금만 더 줘요. 아니, 우리가 공갈치는 게 아니라 이상한 놈들이 붙었다니까?
-이상한 놈들이라고?
-그래요. 무슨 경호팀 같던데··· 누구야, 박건네 매니저랑 같이 다니면서 주연들 케어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
-붙어서 알아내면 될 텐데.
-아이고, 차 본부장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어요, 연예인들도 파파라치나 스토커, 미행이니 현행이니 잡으면 바로 고소해 버려. 우리가 잡히면 댁들 이름도 나오는 거라고.
꽉, 안경을 쥔 차인혁의 손아귀에 새파란 핏줄이 튀어나왔다.
‘신인 때부터 그랬지. 그놈 때문에 일이 자꾸 꼬였어, 번거롭고 귀찮게.’
그러나, 이 역시 결국은 놈을 옭아매는 수렁이 깊어짐을 의미한다.
본래 폭력이란 것이 그렇다. 한 대, 두 대, 그걸로도 안 굽혀지면 더 많이··· 그리고 더욱 가혹하게 때릴 수밖에 없다.
‘감은 좋은 놈이 맞는데······.’
십여 분 전, 행사장 안에서 박건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내심 놀라기도 했다.
아직 행사장에 있다는 말에, 먼발치에서 얼굴이나 보려고 들어갔던 차였다.
-2층에 있습니다.
이어링으로 오는 보고를 받고, 2층 라운지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박건이 그가 있는 곳을 정확히 쳐다보았다.
마치 이쪽의 시선을 느꼈다는 것처럼.
얼굴을 안다고 해도 알아보기 힘든 어두컴컴한 자리였으니, 감 하나는 지독하게 좋은 놈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특수부대, 그 웃기지도 않은 배경이 여러 사람 번거롭게 하는군.”
여비서도 이번에는 상사의 혼잣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차인혁은 손을 펴, 다리 한쪽이 찌그러진 안경을 담배꽁초가 굴러다니는 벤치에 던졌다.
“아침까지, 같은 걸로 내 책상에 올려놔. 부여 쪽 현장인원 두 배로 늘리고.”
*
DG의 청담동 제 1사옥.
내부보안팀이 지하 라운지의 연습생과 직원들을 전부 쫓아냈다.
아무도 남지 않은 라운지에서, 또 다른 탑 배우가 찢어져라 소리를 지른다.
“뭔데, 그 개 같은 년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매니저의 차에서 온갖 난동을 부렸음에도 기은서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자리에서 당한 모욕에 화가 치미는 탓이다.
“그냥 확 기강을 잡았어야 했어! 누가 보든 말든, 심 본부장이 오든 말든! 안 그래, 오빠?”
“글쎄, 하필 박건이 심수진을 데려와서 판이 깨지긴 했지.”
멀찌감치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던 문한빈이 말했다.
“그 박건이란 인간··· 그 새끼도 건방져,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맨 나중에 등장해서 뭐가 어째? 제가 천만 관객을 들여 봤어, 응? 해외에서 콘서트를 해 봤냐고오오!”
기은서는 번들거리는 눈을 치뜬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인 없는 커피 두 잔을 동시에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DG의 대표 배우가 발광하는 꼴을 지켜보며, 문한빈은 무심히 생각했다.
‘조만간 홍보팀이 고생하겠어.’
기은서의 분노조절은 사람의 급에 따라 달라진다. 머리끝까지 화가 뻗쳐서도 앞의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커피를 몸에 뿌릴지 얼굴에 뿌릴지를 정하는 것이 그의 동료다.
“나중에 만나면 갚아 줘. 어차피 영화제든 패션쇼든 볼 얼굴들이야.”
“그렇지? 그때 두 배로 혼을 내주면 되는 거지?”
그 증거로, 절절 끓던 분노가 싹 사라지며 멀쩡한 얼굴이 돌아왔다.
눈앞에 화풀이할 대상도 없는데, 라운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봐야 자기 체력만 빠진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근데 짜증나니까, 내일 촬영장엔 좀 늦게 가야겠다. 아니, 일찍 가는 게 나으려나?”
기은서는 해맑은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생긋 웃었다.
“오빠. 대표님한테, 미리 얘긴 해야겠지?”
“그러든가.”
“좋아, 그럼 일단 오늘 밤엔 매니저들을 싹 집합시켜서······.”
그리고 DG의 두 대표 배우는 간과했다.
외부와의 전쟁은 때때로 내분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