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82화 (82/122)

언더독의 반란 (2)

* * *

새벽 4시.

‘백정장군’ 촬영장.

방송가의 격언 중, 가수는 무대를 봐야 알고 배우는 함께 연기해 봐야 안다는 소리가 있다.

바깥에서는 이미지 좋은 배우가 촬영장에서는 개차반으로 변하고, 이미지가 나쁘기로 소문난 배우가 성실파인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건이 지켜본 바, 백하니는 철저히 후자였다.

‘의외의 모습이 꽤 많았지.’

이를테면 지금 같은 경우다.

새벽 촬영이 있을 때, 정말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배우들은 오지 않는다.

자다가 깨거나 잠을 못 자면 얼굴이 붓는다. 그리고 급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립스틱 발색 하나에도 예민한 것이 여배우란 생물 아니던가.

그러니 새벽 시간 촬영은 남배우들이 맞춰 주고, 여배우들은 간식을 쏘거나 메이킹 인터뷰에서 언급해 주는 게 이 판의 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백하니는 예외다.

이른 저녁이며 새벽 타임을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시간이 애매하다 싶으면 아예 촬영장에 밤부터 도착해 기다린다.

들리는 말로는 전인우 PD가 촬영 시간을 조절해 주려 했을 때, 필요 없으니까 똑같이 잡으라고 못을 박았다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그렇다. 자르마니 행사에 들른 뒤, 본인의 스케줄까지 소화하곤 바로 부여로 달려와 밴 안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나.

“박 배우님, 야식 좀 드세요. PD님이 고생하신다고 챙겨 두셨더라구요.”

다가온 AD가 도넛 봉지를 내밀었다. 그는 고맙다며 받아든 뒤 조연출을 불러세웠다.

“하나만 더 주실 수 있습니까? 백 배우한테도 갖다주려고요.”

“아유, 배우님이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촬영에 열성적인 것과 다가가기 쉬운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조연출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도넛 박스를 몇 개 더 가져다주었다.

간식을 들고 백하니의 밴으로 가자 무슨 자동문처럼 운전석 문이 열렸다.

“감독님이 간식거릴 준비하셨다는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고생은요! 그냥 절 부르셔도 되는데, 이렇게 직접 와 주시니 참······.”

감격한 표정의 문성훈에게 먹을 걸 안긴 뒤, 건은 뒷좌석을 들여다봤다.

“잡니까?”

졸음기 섞여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안 자요, 왜요.”

“그럼 잠깐 들어가도 됩니까? 오 분 뒤에 우리 스탠바이라서.”

“······.”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밴 뒤쪽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올라가자 롱패딩에 푹 감싸인 백하니가 밴 구석에 앉아 있었다.

“졸리지도 않아요? 얘기 들으니까 저녁부터 계속 찍고 있었다더니.”

“전 괜찮습니다. 백하니 씨는 안 피곤합니까?”

“여기서 안 피곤한 사람이 어딨어요. 그냥 하는 거지.”

새벽이라 그런지, 뾰족하던 얼음가시들이 다소 누그러진 느낌이다. 분장을 마친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감독님한테 얘기해 보시죠. 조 선배는 얼굴 붓는다고 새벽 촬영은 절대 안 하던데.”

백하니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붓는 사람들 얘기고. 난 안 부어요, 부어도 안 부은 애들보다 예쁘니까 상관없고.”

“오늘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습니다.”

“···뭐라고요?”

인상을 팍 찌푸린 백하니가 재빨리 스마트폰 뒷면으로 얼굴을 비춰 봤다. 건은 가져온 도넛을 뜯으면서 덧붙였다.

“농담인데, 하나 드시겠습니까?”

“그딴 거 안 먹어요!”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백하니는 문 쪽으로 턱짓했다.

“볼일 끝났으면 그만 가요, 눈 좀 감고 있다가 나갈 거니까.”

“그러죠. 아, 오늘 고마웠습니다.”

“또 뭐가요?”

“군소리 없이 따라와 줬잖아요. 조 선배 편도 들어주고.”

백하니의 시선이 잠깐 옆으로 내려갔다.

“편들어 준 거 아니라고 했죠. 그건 그냥 기은서, 그 또라이가 설치는 꼴을······.”

“아무튼 멋있었어요. 다시 봤습니다.”

“하, 얼마나 미친년으로 봤길래?”

“예전엔 보는 사람마다 쪼는 싸움닭, 지금은 의리 있는 소속사 동료.”

또 짜증을 내거나 투덜거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백하니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갑자기 딴청을 피웠다.

“벌써 30분인데 왜 안 불러? 하여간, 감독들 시간 늦는 거 진짜 고질병이야.”

그러더니 꼼지락대며 스마트폰을 꺼내 영화를 켠다. 건은 웃음을 참으면서 생각했다.

‘딱 여섯 살짜리 조카 같은데. 칭찬이 어색해서 부끄러워하는.’

그때 조수석 문이 열리며 문성훈이 나타났다.

“저, 배우님들! 곧 시작입니다!”

문성훈이 말하자마자, 저쪽에서 스탭 하나가 쪼르르 달려온다.

건이 먼저 내린 뒤, 뒤따라 내리려던 백하니가 문득 그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요. 지금 나 얼굴 안 부었죠?”

“신경 안 쓴다면서요, 아깐 붓는 체질 아니라더니.”

“아, 장난하지 말고!”

*

촬영장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점심때쯤, 오늘 촬영이 있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세트장으로 도착했다.

그중에는 이미 분량은 모두 끝난 이천인의 아역, 성지호도 있다.

“형!”

“아, 지호 놀러왔구나.”

달려온 성지호는 박건의 두루마기가 더러워진 걸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또 새벽에 촬영했어요?”

“응. 그래도 이번엔 하니 누나랑 같이 해서 괜찮았어, 심심하지도 않고.”

“저 한창 찍을 때도 매일 새벽 촬영은 형이 다 하셨잖아요, 그러다 몸살이라도 나면 큰일나요.”

열서넛밖에 안 된 녀석이, 그래도 같은 배역이라고 이쪽을 걱정해 준다.

워낙 어른스럽기도 하고, 촬영장 안팎의 프로정신을 보면 몇 년 뒤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박건은 성지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 흐트러뜨렸다.

“괜찮아. 남는 게 체력이라서.”

어린 이천인이 왔다 가자, 이번에는 중견급 조연 배우들이 슬슬 등장해 인사를 건넨다.

“박 배우, 기사는 봤어요. 비싼 데 가서 욕먹느라 고생했구먼.”

“그러게 말이야. 일부러 싸움을 붙이려고 주연들만 부른 것 같은데, 그런 쇼엔 초대도 못 받는 뒷방 늙은이라 미안하더라고.”

메인 악역인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역할의 고철준, 종로 경찰서장 역을 맡은 남중익이 담배 냄새를 풍기며 걱정을 늘어놓는다.

“괜찮습니다. 혼자 간 것도 아닌데요.”

“아무튼, 혹시나 도와줄 게 있으면 얘기해요. 먹은 게 나이뿐이라 아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

고철준이 주름진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선배도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치던 인간이다.

“물론입니다. 선배님들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듣고 있던 남중익이 끼어든다.

“아이고, 고 배우. 지금 후배 도와준다고 목에 힘 줄 때가 아냐. 당장 오늘 살아서 퇴근할지도 모를 판에, 응?”

“그러게, 밤까지 쭉 붙는 씬이었지.”

고철준의 가느다란 눈에 호승심이 스친다.

그가 맡은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는 조선인을 수탈하고 독립투사를 멸족하던 악질 중 악질. 극이 끝날 때까지 이천인을 괴롭히는 강적이다.

“아, 생각해 보니 경성은행이 불타는 것도 오늘 찍는다지 않았나?”

“맞아. 그래서 전 감독이 며칠 전부터 예민했잖아,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날까 봐.”

“에이! 건물 좀 그슬리고 물 뿌려 끄는데 사고는 무슨, 부정 타게 그런 소리 마. 거기다 박 배우도 떡하니 버티고 있구먼.”

촬영분에 대해 한참을 떠들던 두 배우가 동시에 박건을 돌아보았다.

고철준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와이어도 안 달고 날아다니는 후배님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나.”

“그럼, 그럼! 난 아직도 김률 그 친구가 한 말이 기억나. 철진이 자네도 대종상 봤었지? 영화 찍을 때, 박 배우 별명이 용사님······.”

“···제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박건이라도, 머리가 반쯤 센 양반들이 코앞에서 용사 운운하면 민망해지고 만다.

박건은 서둘러 세트장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4층짜리 건물 근처엔 벌써 장비들이 쭉 들어서 있었다.

오늘 ‘백정탈’의 인질극이 펼쳐질,

조선인들의 분노로 불탈 경성은행이다.

*

안방극장 속 백정탈의 본격적인 활약은 다음 주부터지만, 드라마는 끊임없이 다음 화와 그다음 화를 찍어낸다.

어느 정도 각본이 완성되어, 쪽대본의 위험이 줄었다 해도 편집에 시간을 들일수록 드라마 완성도가 높아짐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전인우 PD는 하이라이트뿐 아니라 모든 회차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고 선배님. 오늘은 회차가 확 뛰어서, 어제랑은 또 다르게 연기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그럼, 그럼. 전 감독이 지상파 있을 적부터 유별난 완벽주의자 아닌가. 참조해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전해도 돼.”

‘백정장군’의 주요 악역은 세 명이 있다.

첫째는 종로경찰서장 이균.

둘째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

셋째는 황우회(皇祐會)의 우두머리이자 전직 사무라이 출신의 슈헤이.

이균은 종로경찰서에 들어앉아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파고, 도쿠로 신지는 조선총독부로 파견된 경무국장이다.

그리고 마지막, 황우회는 몰락한 사무라이들이 모여 만든 친왕 극우 장교집단에 속한다.

이 셋은 서로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이천인과 치열하게 싸운다.

특히 이 중 흑의에 금빛 자수로 황(皇)이라고 새긴 황우회의 일원들은 엄청난 무력과 실전 경험으로 ‘백정탈’ 패거리를 몰아붙인다.

―본토에서 육군대신으로 마쓰히로가 발탁되었다. 우리의 거사도 더욱 늦어지겠지.

―천황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자를··· 정녕 대일본제국을 나약한 흰쥐로 만드시려는 것인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조선의 불령선인들을 한시라도 빨리 쳐죽이고, 이 경성을 완벽한 사무라이의 봉토(封土)로 만들어야 한다.

대낮인데도 모든 창을 검은 천으로 막고 촛불 하나만 켜 둔 판잣집 안, 두건을 쓴 황우회의 일원들이 밀담을 나눈다.

―하지만 그자, 백정탈은?

황우회의 부회주가 그 이름을 언급하자 살기 그득한 정적이 흐른다.

백정탈

몇 주 전 경성에 나타난 놈이다. 아마 독립투사로 보이는데, 왜경(倭警)과 친일파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참살한다.

특징은 흰 두루마기에 대나무 패랭이, 조선의 탈놀이에서 쓰는 검붉은 백정탈을 뒤집어써 신분을 감췄다는 것.

그 수법 또한 말로 할 수 없이 잔인해, 도끼머리로 골통을 부순다거나 도살용 식칼로 팔다리를 토막친다거나 하는 식이다.

―잡아야지, 반드시!

―벌써 토자로와 오오츠케가 당했어. 궁에서 녹을 받던 검객으로 보이는데, 놈을 제거하려면 우리도 작전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정보원까지 딸려 있는 모양이던데. 워낙 신출귀몰해서 종로서 순사들도 꼬리조차 잡질 못해.

여태 아무 말이 없던 황우회의 회주, 슈헤이가 한 손을 들었다.

검은색 장갑을 낀 그의 오른손에는 약지와 소지가 없다.

―그래 봐야 조선인 아닌가?

―그렇지.

―그렇다면 미끼를 써야지. 제 동포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데 나오지 않고 배길까?

역시 그들의 회주다. 두건에 가린 황우회 일당의 입가로 잔인한 미소들이 떠올랐다.

불빛 아래서 슈헤이가 고개를 든다. 눈 위쪽부터 길게 새겨진 칼자국 속에서, 새파란 의안(義眼)이 섬뜩하게 빛난다.

―이곳은 천황 폐하가 밟으실 땅. 미개한 짐승들은 우리의 손에 처단될 것이다.

*

“엑스트라 1팀 분들! 여기, 이쪽으로 붙어 주세요! 스탠바이하면 이 앞 동선에서만 계속 연기하시면 됩니다!”

“2팀은 반대쪽으로 오세요! 거기, 명찰 보이니까 찍기 전에 감추시고요!”

조연출들과 촬영팀 스탭 몇몇이 목이 터져라 소릴 지르며 출연자들을 조율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촬영되는 ‘경성은행’ 안팎으로 모이는 엑스트라만 백여 명이 넘는다.

본래 저잣거리 씬을 딸 때에도 이 정도 인원이었지만 오늘은 위험도가 다르다.

무술감독과 촬영감독 옆에는 팀 닥터 및 의료진들이 자리하고, 카메라에 안 잡히는 경성은행 뒤쪽엔 살수차도 두 대나 들어와 있다.

“전 감독님, 오늘 날이 좋아요. 바람도 안 불고, 이만하면 불이 옮겨붙을 걱정도 덜었습니다.”

바삐 달려온 미술감독 양연태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한다.

다양한 재료를 동원했으나, 어쨌든 주 골자는 목조건물인 경성은행을 불태우는 씬이다. 타는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불이 근처 세트로 옮겨 붙는다면 꼼짝없이 촬영장 사고가 난다.

반면 도종우 무술감독은 뭐가 걸리는지 아침부터 얼굴에 수심이 그득하다.

“그,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내일로 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점을 봤는데, 거기 적힌 게 글쎄······.”

“또, 또! 도 감독님, 그런 사주팔자보다 과학을 믿으시라니까. 여기 보면 풍향이랑 풍속이 아주 적당하잖아요, 응?”

“뭘, 기상청이 얼마나 잘 맞았다고.”

날씨 어플을 띄운 미술감독이 스마트폰을 들이밀자 무술감독이 툴툴댄다.

물론, 도 감독도 정말로 촬영을 연기할 수 없음은 안다. 엑스트라에, 팀 닥터에, 살수차에··· 준비한 게 얼만데, 사주팔자 하나 때문에 씬을 접는다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제작비로 돌아간다.

그리고, 둘이 아무리 실랑이를 한들 이곳의 전권을 쥔 것은 총괄 디렉터다.

“두 분 다, 그쯤 해 둬요. 내가 책임지고 사고 안 나게 컨트롤할 거니까요. 혹시 뭔 일이 나면 저기 방화복 입고 뛰어들 겁니다.”

촬영을 시작한 후, 철사 같은 수염이 더 수북해진 전인우 PD가 모자 챙을 올렸다.

이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다. 미술감독과 무술감독이 익숙한 듯 귀를 막자, 메가폰 없이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자, 시작들 합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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