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87화 (87/122)

파리의 쇼 스틸러 (2)

* * *

파리 패션위크.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F/W 컬렉션 쇼는 유독 한국인 셀럽들이 뜸한 잔치라고 평가된다.

유명 글로벌 패션잡지, <디 러스트> 출신 칼럼니스트는 이번 파리패션위크에 초청받은 한류스타들을 정리해 올리기도 했다.

[전전년도 23명, 전년도 14명, 금년도는 불과 8명··· 글로벌 앰버서더의 강세는?]

한때, K팝 출신 한류스타들이 숱한 글로벌 브랜드들의 전속 모델을 휩쓸었던 적도 있었다.

다만 빌보드에 진출한 그룹의 은퇴와 해체 등으로 인기가 식고, 몇몇은 아예 연예계를 떠나며 열풍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거기다 국내 배우들마저 칸과 아카데미 등 세계적 영화제에서 유독 부진한 지금, 패션위크에 국내 스타들이 많을 리 없다.

그렇기에, 자르마니가 코리안 앰배서더를 뽑아 쇼에 세운다는 소문은 하루도 안 돼 쫙 퍼졌다.

“디자이너 픽인가?”

“말도 안 돼, 자르마니 소속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모르지, 또 릭켈 뮌러가 아시아 쪽 시장을 재공략하려는지도.”

파리패션위크 이튿날.

쇼에 서는 수백 명의 모델들, 그보다 몇 배로 많은 스탭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패션위크에 등장한 글로벌 앰버서더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진 셀럽이 이만큼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경우는 잘 없다.

보통은 미리 계약을 하고, 업계 내외부에 자료를 뿌리고, 모델로서 충분히 준비한 다음 쇼에 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도 수석 디자이너 이상쯤 되는, 브랜드를 휘어잡는 인간에게 잘 보여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디자이너 놈들, 이래서 그것들이 변덕의 동물이라는 거야!”

어제 ‘제리옹’의 쇼에 서고 오늘 또다시 자르마니에 서는 네덜란드 출신 모델, 반 마르틴이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진정해, 반.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어제도 피에르노 쪽에서 모델 몇 명을 직전 교체했다더군. 한 명은 나도 아는 친구였는데, 파리까지 왔다가 헛물만 켜고 돌아갔어.”

모델의 세계야말로 지독하게도 잔혹하다. 당장 첫날 런웨이를 누비던 모델 중, 상위권 그룹을 제외하면 안 보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한 번은 설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은 보장되지 않는다.

매 시즌 패션위크에 서는 수백 명의 신인모델 중, 대부분이 단발성으로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다.

런웨이가 됐든 브랜드 쇼가 됐든, 한 번이라도 쇼에 설 기회를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잡는다니 모델들 입장에선 곱게 보일 턱이 없다.

“리사, 이제 몇 분 남았죠?”

“지금 루메너리 쪽 쇼가 시작됐어요. 우린 다음 순서니까··· 얼추 사십 분?”

“야단났네. 나 얼굴 괜찮아요?”

“완전 해골 같으니까 걱정 마요. 눈꺼풀 떨리면 그냥 감고 있고.”

거기다 이곳은 자르마니의 쇼가 예정된, 미국 대성당(The American Cathedral in Paris).

여자 모델들이야 그렇다 쳐도, 남자 모델들은 혹시나 자신의 자리가 빼앗길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때, 저만치 백스테이지 입구가 웅성거린다.

“릭켈 뮌러인가? 이번에는 백스테이지 지휘 같은 건 안 한댔는데······.”

“아냐, 우리 쇼에 서는 셀럽이 도착했대!”

무수히 늘어앉아 분장에 여념이 없던 모델과 스탭과 관계자들의 이목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내 화제의 앰배서더가 등장했다.

키는 186센티미터쯤 될까. 옆에는 평범한 체구의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는데, 외모로 봐선 통역사거나 매니저로 보였다.

이윽고 그가 걸어들어오는 순간, 모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삼켰다.

“······.”

남자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형의 파동이 백스테이지에 퍼져나간다.

이 글로벌 앰배서더··· 한국인 출신이라던 셀럽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관심 있는 이들도 기사에 뜬 사진만 검색해 본 것이 전부.

하지만 이름이니 나이니 하는 건 이 업계에서 어떤 쓸모도 없다.

모델의 능력은 마스크, 피지컬, 소화력과 워킹으로 대변되는 ‘아우라’로 결정되기에.

저것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그냥 길을 걷는 행인이냐, 수십만 달러를 걸치고 브랜드를 표현하는 모델이냐가 갈린다.

그런데 이건 숫제······.

‘무슨, 옷이 걸어오는 느낌이잖아?’

하물며 분장도 세팅도 안 한 채, 후줄근한 점퍼와 청바지만 걸친 상태 아닌가.

그럼에도 쑥 들어간 뺨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번득이는 눈, 힘을 빼고 걷는데도 자기장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워킹은 탑 모델의 그것이다.

동종업계의 경쟁자이기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껴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의 모델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자는 셀러브리티가 아닌 모델이라고.

“어······.”

하필 남자가 멈춰선 빈자리는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던 반 마르틴의 옆이었다.

동양인 모델ㅡ박건ㅡ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르틴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옆자릴 빌리게 됐군요. 잘 부탁합니다.

“아, 예.”

심지어, 방금 전 벨기에인 동료와 하던 이야길 듣기라도 했는지 네덜란드어였다.

당황한 마르틴이 얼떨결에 악수를 나눈 뒤, 남자는 돌아서더니 이번에는 불어로 말했다.

“자르마니의 글로벌 앰배서더, 고드입니다. 큰 쇼에서 여러분과 설 수 있어 기쁩니다.”

완벽한 발음의 불어로 한 번, 그다음은 영어로 같은 말이 반복된다.

이젠 저 멀리 떨어진 모델과 스탭들까지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본래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그야말로 수면 밑 백조의 발 같은 백스테이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옆의 변휘승이 씩 웃는 사이, 고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놀러 온 것도, 가벼운 마음으로 관광을 온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았다면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같은 쇼에 서는 동료이자 팀으로서, 올 시즌 최고의 런웨이를 만들었으면 좋겠군요.”

자신을 깎아내리지도, 그렇다고 오만하지도 않은 말은 언제나 효과가 빠르다.

이미 그 짧은 워킹의 임팩트로 질투와 미움은 상당 부분 희석된 상황. 홀린 듯 옆에서 듣던 모델 하나가 작게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박수가 근처에서 일자, 이내 손이 자유로운 모델 몇몇도 합류했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더 시비를 걸어 봐야 쇼만 망친다는 사실은 이곳의 모두가 안다.

그렇기에 분장을 마친 모델들은 슬금슬금 뉴페이스에게 모여들었다.

“한나 이보예요, 잘 부탁해요.”

“대니얼 론입니다. 브랜드 쇼는 나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고드, 순서는 몇번째예요? 퍼스트, 아니면 클로징?”

“옆에 있는 친구는 자르마니가 붙여 준 매니저인가요? 우린 다 셀프로 했는데, 역시 아시아 슈퍼스타는 다른 건가?”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 영어고 불어고 모두 알아듣는 변휘승의 인상만 시시각각 구겨졌다.

“이 새끼들이 진짜······.”

*

분장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의상까지 미리 갈아입은 뒤, 건은 막간을 틈타 대성당 곳곳을 구경했다.

과연 4대 패션위크 중에서도 메인인 파리답게, 쇼가 열릴 공간이 크니 걸어야 할 런웨이의 길이도 보통이 아니었다.

진짜로 매니저가 된 것처럼 옆을 따라다니던 변휘승이 감탄했다.

“야, 넌 어떻게 그 와중에도 친목질을 하고 있냐? 나였으면 보이는 놈부터 잡고 들이박았을 텐데.”

“싸워서 뭘 합니까. 어차피 저는 같이 일하다가 먼저 퇴근할 사람인데요.”

“···가만 보면 인싸 마인드인지, 그냥 공무원 마인드인지 모르겠다니까.”

“진짜 인싸는 선배님이죠. 한국보다 아는 모델이 더 많은 것 같아서 놀랐습니다.”

변휘승은 패션위크에 온 모델 중, 친한 사람은 모조리 소개해 주겠다는 말을 지켰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각 쇼가 펼쳐지는 브랜드를 돌며 인사한 사람만 수십 명이 넘었다.

쇼에 서는 모델뿐 아니라 그냥 행사를 즐기기 위한 셀럽들, 관계자들, 그들을 찍으러 온 기자들까지 섞이는 통에 정신이 다 없었다.

“몇 명 보지도 않았구만, 뭘. 근데 진짜··· 딱 하룻밤만 시간이 있었으면 훨씬 재밌었을 텐데. 비행기표 미루면 안 되냐?”

“그럼 촬영현장 식구들이 찾아올 겁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자, 변휘승은 입이 잔뜩 나와 툴툴거렸다.

“해외여행도 처음이라기에 완벽하게 안전한 루트를 싹 짜 놨더니, 이걸 거르네. 한국 가서 분명히 후회할 거다.”

“다시 나오면 되죠.”

“어이고, 시청률귀신께서 해외여행을? 헐리우드 진출할 거 아니면 안 나갈 거 다 알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변휘승은 바삐 SNS며 메신저를 확인했다.

듣기로는 국내의 배우들과 뮤지션, 쇼에 서는 모델도 몇몇 이곳에 왔다는 것 같은데, 친분이 없는 입장에선 굳이 만날 이유도 없었다.

난간 아래를 보니 쇼의 입장객들이 서서히 차는 중이었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생각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건 씨?”

돌아서자 윗머리만 하얗게 염색한, 청년과 중년 사이의 사내가 서 있었다.

변휘승이 이쪽에만 들리도록 잽싸게 귀띔했다.

“릭켈 뮌러. 자르마니 수석 디자이너야.”

심수진 본부장이 출국 전 말했던, 그를 ‘좋게 본 내부의 디자이너’가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건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쇼에서 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릭켈 뮌러는 얼굴 전체를 움직여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군요.”

“절 여기 데려온 분 아닙니까?”

“맞아요. 앰배서더니 모델이니, 그런 계약은 수진이 했지만 당신을 여기 데려온 건 납니다. 아무리 그룹의 임원이어도 런웨이에 올릴 모델은 디자이너 안목이 더 중요하죠.”

연예계에서 스타 감독과 PD가 섭외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패션계에서는 디자이너의 픽이 절대적이다.

무명 신인이 마스크 하나로 발탁받아 쇼에 오르고, 바로 다음 시즌에 디자이너의 변심으로 버림받는 곳이 바로 이 씬이다.

건은 짧게 끄덕였다.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압니다. 특별한 이벤트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실은 박, 당신이 예전에 찍었던 작품을 보았습니다.”

심수진 본부장은 ‘회색도시 팀장님’에서 그가 모델 연기를 했던 씬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타국의 드라마까지 찾아봤나, 하는데 오랜만에 듣는 작품 이름이 나왔다.

“검은 옷의 신부였나요? 이번 자르마니의 컨셉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한 영화라서, 보는 내내 다양한 의미로 전율이 흐르더군요. 마치··· 지금은 떠난 내 옛 뮤즈들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흑의사제’의 이름이 오역된 것 같았으나, 그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자르마니의 수석 디자이너는 눈을 빛내며 대성당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무대와 달리 무대도 조명도 설치되지 않은,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자연 그대로의 빛만이 격자무늬 바닥을 내리비추고 있다.

“어떻습니까. 쇼 역시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데, 감독과 편집이 없는 무대에서도 내 기대를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눈앞의 디자이너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안다. 영화와 드라마, 런웨이 워킹은 녹화방송과 라이브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그를 모르기에 가능한 소리다.

“카메라만 있으면 됩니다.”

“예?”

건은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 아래에서는 쇼를 찍기 위한 수많은 카메라가, 런웨이 옆부터 성당 구석에 달하기까지 설치되는 중이었다.

*

4대 패션위크는 초대형 축제지만, 브랜드마다 그 네임밸류나 시즌의 컨셉에 따라 차이는 있다.

파리의 미국대성당을 통째로 빌려, 무려 1000명 규모로 쇼를 진행하는 자르마니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쪽에 속한다.

행사 일정이 타이트한 만큼, 시간이 되자 쇼는 지체 없이 막을 올렸다.

모든 조명이 꺼진 대성당, 저 웅장한 궁륭 밑의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조명이 자체 런웨이를 내리비추고, 첫 모델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번 자르마니 컬렉션의 모티프는 북풍과 빙하, 삶과 운명의 명암 속 장엄함이다.

우주복과 사제복, 점프수트와 수트 사이의 옷들을 걸친 모델들이 오가고, 런웨이는 곧 흑백으로 물든다.

단조로운 리듬이 반복되는 와중, 먼 곳에서는 포성 같은 뇌우의 소리가 울린다.

런웨이에서 음악만 트는 것은 한참 전의 일. 컨셉에 맞게 자연환경의 효과음이나 정적, 계산된 소음을 섞기도 한다.

‘무난하게 꾸몄네.’

한국의 탑 모델, 안사라는 런웨이 바로 옆자리에서 팔짱을 꼈다.

그녀는 이번 패션위크 때 무려 네 번의 쇼를 선다.

리옹, 오르 제니스, 드파르마, 샤골.

어제 첫 무대를 마쳤고, 나머지 브랜드들은 패션위크 후반부에 몰려 있어서 오늘은 한가하다.

그래서 컨디션을 조절하던 참에, 무려 고국에서 날아온 배우가 런웨이를 걷는다고 해서 나와 본 참이었다.

박건이라고 했던가?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하며, 한국의 연예인들과 자연스레 멀어진 그녀지만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요즘 앰배서더가 쇼에 서긴 힘든데. 디자이너 중 누구랑 친분이 있었나?’

그녀가 알기로, 자르마니의 디자이너들은 다른 브랜드들보다 훨씬 자존심 세고 괴팍하며 변덕스럽다.

‘모델은 소모품’이라는 철학을 가장 잘 전개하는 브랜드가, 아직 글로벌 시장에 데뷔조차 않은 배우를 데려왔다면······.

60분의 쇼는 금방 흐른다. 익히 아는 얼굴과 새로운 얼굴들이 몇 차례씩 지나가는데도 동양인 앰배서더는 나오지 않았다.

내심 기다리던 관객들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을 때였다.

흐르던 음악이 멎으며, 저 안쪽에서부터 새하얀 옷으로 온몸을 감싼 모델이 나왔다.

사제복··· 아니, 이건 수도복에 가깝다. 눈처럼 흰 스카풀라(Scapular)에, 긴 망토를 입은 모델의 몸에서 흑색이라곤 눈동자뿐이다.

머리와 눈썹, 눈 아래의 기하학적인 무늬까지 서리를 맞은 듯 새하얗게 분장한 모델이 걸어나오자 런웨이에 눈보라가 일었다.

“······!”

등받이에 기대 있던 안사라의 허리는 어느 새 꼿꼿하게 펴진 뒤였다.

워킹을 준비하는 것은 수년이지만 그를 보여주는 것은 몇 초뿐이다.

그리고 런웨이 끝에서 멈춰 선 남자 모델은, 현장의 관객들을 일별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서 사라졌다.

런웨이의 정면. 쇼를 녹화하던 카메라맨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자르마니가, 진짜 성직자를 데려왔군.”

채광창이 내리비춘 빛줄기가 거룩한 길을 적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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