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88화 (88/122)

파리의 쇼 스틸러 (3)

* * *

로만 엔터테인먼트 홍보팀.

요즘 연일 축제 분위기인 홍보팀이지만, 오늘은 유독 이유가 많다.

“와,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육회가 살살 녹아요!”

“요즘 이런 것도 배달이 되나?”

“되겠냐, 당연히 진 배우님이 직접 사오신 거지. 한두 번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저래.”

첫째는 저녁도 못 먹은 가여운 영혼들에게 천사가 성은을 베풀었기 때문이고,

“팀장님, 자르마니 쇼만 조회수 폭발합니다! 드파르마랑 샤골도 업로드 시간 대비 조회수는 상대가 안 돼요!”

“<디 러스트>에도 올라갔어요, 콰이엇 US는 아예 특별기사로 지면 하나를 할애했고요. 파리패션위크 관련 검색어로도 완전 알박기 성공했어요!”

둘째는 행사장에 갔다가 덜컥 브랜드 앰배서더를 물어오고, 또 패션위크에 초청받았다가 덜컥 쇼의 클로징을 장식한 모 배우 때문이었다.

“퇴근 안 하길 잘했네. 봐, 내가 1시간 안에 뭐가 더 떠도 뜬다고 했지?”

와이드한 수트 팔목을 토시처럼 걷어붙인 공기형 팀장이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러니까요, 사실 정근이는 안 믿었는데. 에밋 잭슨 트위터 뜬 걸 보고도 그럴 리 없다면서, 팀장님이 퇴근하기 싫어서 볶는 거라고······.”

“야, 내가 언제 그랬어!”

“박정근 씨. 홍보팀 생활 청산하고 싶나 봐?”

홍보팀 식구들이 투닥거리면 그날은 무조건 중박 이상이라는 소리다.

본인이 전속계약이라도 따 온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 실시간 기사들을 검색하던 진지유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와, JMRY 부회장까지 떴어요! 트위터 공식계정, 2분 전!”

JMRY의 리노 카르세른 부회장은 긴 말 없이 한 마디만 남겼다.

자르마니의 수도사.

(The friar of Zarmani)

박건이 자르마니의 쇼 피날레를 단독으로 장식한 뒤, 저 별명은 이번 파리패션위크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에 남긴 임팩트는 근 몇 년간의 클로징 중 역대급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전반적인 쇼의 컨셉과 선보인 옷들도 우수했지만, 순백으로 분장하고 무대를 장악한 동양인이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것이다.

거기에 무대로 낙점됐던 대성당의 조명은 자연광.

런웨이 끝에 선 박건이 막 먼 곳을 바라보는 시점에, 희미한 햇볕이 후광처럼 내리비치며 ‘자르마니의 수도사’를 완성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전 세계로 송출시켰다.

런웨이의 정면을 찍었던 카메라맨은 신성한 흥분에 빠진 채 방송국 카메라에 대고 떠들었다.

“그 순간, 난 어떤 계시를 느꼈습니다. 이건 신께서 내 냉담을 용서해 주신 겁니다!”

현대 하이패션의 쇼는, 파격과 난해를 넘어 더는 충격적이기 어려워졌다.

특히 독특함과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오트쿠튀르 컬렉션이 아닌, 프레타포르타 쇼에서 주목받은 것이야말로 모델의 저력을 증명하는 증거다.

목을 길게 뺀 채 여직원의 모니터를 구경하던 남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와, 근데 진짜 이건 다시 봐도 찰떡이네요. 두루마기가 꼭 망토 같지 않아요?”

“두루마기가 아니라 케이프야. 디자이너가 알고 입힌 건 아니겠지만, 건이 씨가 ‘흑의사제’ 때 주연이니까 그 생각도 나고 좋았지.”

케이프는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형태. 그 안의 사제복마저 다 풀어헤쳐져 있어, 불끈거리는 근육이 언뜻언뜻 보였다.

벌크업된 체형 탓에 일반 모델보다야 옷의 소화율은 떨어지지만··· 바로 그 이유로 셀럽들이 쇼에 서는 것 아니겠나?

“아무튼 마저 먹고들 하죠. 이러다 사 오신 거 다 상하겠어요!”

오늘 진지유가 가져온 양식은 로만 사옥 옆, 한정식집에서 포장해 온 육회와 냉면이다.

공 팀장이 씩 웃었다.

“박 배우 때문인가, 요즘 홍보팀이 아주 인기네. 대표실보다 활활 타는 느낌이야.”

“그러게요, 이렇게만 되면 진짜 일할 맛 날 텐데. 회식보다 배우님들 간식 선물이 더 많은 것 같다니까요.”

진지유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누가요? 저 말고도 온 사람이 있었어요?”

“어··· 지난번에는 필립 씨가 왔었고, 박건 씨야 자주 들르지. 심지어 백 배우까지 들렀다면 믿겠어요?”

“백하··· 하니 언니가요?”

“놀랍지만 진짜야. 자기 작품 들어갈 때도 절대 안 오던 사람이, 갑자기 요즘은 배우들이 어디 나가서 홍보하는질 물어보더라니까?”

듣던 남직원도 거들고 나섰다.

“맞아요. 백하니 씨가 매니저 안 보내고 직접 여기까지 온 건 처음 본 것 같은데.”

“······.”

진지유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겉을 보면 ‘하이페리온’ 쪽과의 마찰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자르마니 쇼에서 부딪쳤으니 꼭 이기고 싶어진 거라고.

그러나, 백하니라는 배우를 아는 자라면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안다.

‘애초에 백하니는 누굴 이길 생각이 없어. 자기 혼자만 잘하면 끝인 인간이지.’

그렇기에 더 의심스러운 것이다. 더군다나 ‘백정장군’은 지금 승승장구 중인 상황.

남의 돈으로 찍는 시대극, 아쉬울 것 없을 탑 배우가 갑자기 저럴 이유라면······.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 내 건가?”

“당연히 팀장님 진동이죠. 저희는 벨소리로 해 놓잖아요.”

이 바닥 일이란 게, 아는 번호보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가 대부분이다. 공 팀장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꺼냈다.

“예. 홍보팀장 공기형입니다. 예··· 예? 병원이라고요?”

전화를 받은 공 팀장의 표정이 변했다. 끊고 나자 여직원이 물었다.

“왜요, 팀장님? 누군데요?”

“···박선 씨라는데.”

아는 이름이 나오자 진지유의 시선도 돌아갔다.

“박선 매니저님이요? 아까는 병원이라고 하시더니.”

“응. 부여에서 올라오다가 사고가 났대.”

“지금 어디래요!”

홍보실 3인방은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벌떡 일어난 진지유가 주먹을 쥔 채 눈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어··· 그냥 접촉사고래, 많이 안 다쳤으니 진정해요, 지유 씨.”

“많이 다치고 안 다치고가 문제예요? 팀 동료가 다쳤는데 당연히 가 봐야죠!”

진지유는 박선이 입원한 병원과 호실을 캐묻더니, 재킷도 안 걸치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동료의식 없는 놈이 된 사람들은 서로를 빤히 마주 봤다. 공 팀장이 다소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누가 병문안 안 간댔나······.”

*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박선 환자 보호자입니다.”

원무과.

야간근무를 하러,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건을 알아본 것이다.

“5병동은 어디로 올라갑니까?”

“아, 예··· 저쪽 엘리베이터로 타셔서, 거기 간호사 데스크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5층에 내리자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진 간호사가 호실을 알려주었다.

508호, 개인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병원 특유의 향이 떠돌았다.

“선아.”

박선은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감긴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이다가 떠졌다.

“어··· 형?”

“공항 내리자마자 택시를 탔는데, 이 밤에도 길이 막히더라. 늦어서 미안하다.”

박선은 민망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침까지 흘리면서 자던 중이었는데.”

“몸은 좀 어때, 많이 다쳤냐?”

“어? 아니, 나 완전 멀쩡하지. 완전 그··· 학원 빼먹고 몰래 휴가 받은 기분이야.”

건은 눈가를 찌푸렸다.

“···멀쩡하다고?”

박선은 해맑게 팔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응. 노 대표님이랑 공 팀장님이랑, 거의 반강제로 입원시켜서 쉬고 있던 거야. 벌써 엑스레이랑 필요한 검사는 다 했는걸? 후유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면 완전 멀쩡하대.”

표정을 보니 걱정을 안 시키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호흡은 정상인데······.’

병원이 그렇다고 했다면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는 움직임 외에 뼈 안까지 투시할 수 없으니까.

한 시간 전.

건은 드골에서 날아와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미터기 요금 세 배를 드리죠. 최대한 빠른 길로 부탁합니다.’

기사가 눈에 불을 켜고 가장 빠른 루트를 찾는 동안, 건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동생의 사고 소식은 귀국하는 비행기를 탑승하기 직전 전해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접촉사고를 냈다는데, 그가 아는 동생은 받히면 받혔지 절대 들이박지 않는 방어운전의 귀재였다.

사고의 원인은 비행기 안에서 받은 공 팀장의 문자가 말해 주었다.

공기형 : [파파라치가 따라붙었나 봐요. 백정장군 촬영장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는데, 따돌리려다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얘기해 봐, 무슨 일이야?”

형한테 혼날 걸 예상했던 듯, 박선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요즘 C&J 쪽 분들이랑 다니니까 파파라치들이 딱 보이더라구. 부여에서 올라오는데 대기하고 있던 차가 슬쩍 따라붙길래······.”

“따라붙길래?”

“저 정도는 따돌려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야 나중에, 형이든 누구든 태웠을 때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근데 아직 모자랐나 봐, 마음이 급해서 가드레일만 들이박았네, 헤헤.”

건은 이마를 감쌌다.

이것은··· 실착이다.

DG, 혹은 다른 사주를 받은 자들이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움직이리란 건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족들을 향할 줄은, 또 동생이 그를 지킬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다가 다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세계는 주변 사람들부터 해한다는 것을, 이장미 사건을 겪고서도 아직껏 적응하지 못했단 말인가?

‘멍청하고 안일했다. 철왕국이었다면 결코 범하지 않았을 실수를······.’

생각했던 잔소리가 없으니 더 불안했는지, 박선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기, 형··· 많이 화났어?”

“화는 무슨. 너한테 안 났어.”

“그럼 나기는 났다는 거잖아. 진짜 안 그래도 돼, 응? 순전히 내가 잘못한데다, 원래 매니저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는 많다고······.”

“그럼 수를 좀 줄여야겠네.”

박선은 눈을 끔뻑거렸다.

“응? 수를?”

“잠깐 나갔다 올게. 쉬고 있어.”

순식간에 박선의 표정에 걱정이 들어찼다.

“형, 안 돼. 아무리 화가 나도 형이 직접 가면 일이 커질 거야. 일단 1팀장님 쪽에 얘기해서 경찰이랑 연계하자. 그러려고 C&J 사람들 힘을 빌렸던 거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조용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잠깐만, 형!”

뒤에서 박선이 애타게 불렀지만, 건은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언젠가 설명하면 될 일이다. 동생이 알던 형과, 지금의 그가 전혀 다른 자라는 것을.

병원을 나와 전화를 걸자, 진규일 본부장은 늦은 시각임에도 즉각 받았다.

-귀국했나 보군.

“정보는 들어왔나?”

-물론. 자네 동생을 따라다닌 놈들, 우리 쪽에서 파악한 자들과 일치해. 몇 팀 더 있지만 이자들이 주축인 모양이더군.

“이쪽으로 보내, 지원은 필요 없어.”

-괜찮겠나? 마음은 알겠지만, 명분도 있는데 직접 칠 것까지는······.

“걱정 마. 우리 일은 안 망칠 테니까.”

전화기 저편의 진규일에게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싸늘하게 불타는 격려가 돌아왔다.

-전부 전송했어. 이왕 할 거면 끝장을 봐야지.

“물론.”

*

상도동의 허름한 건물.

밖에서 보면 쓰러질 것 같은 허름한 건물 3층에, 남자 셋이 모였다.

흰 야구 모자와 붉은 비니, 그리고 후드티. 오늘도 방금 전까지 걸그룹 출신 배우를 미행하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비니 쓴 사내가 마스크를 벗으며 물었다.

“야, 어떻대?”

“그냥 입원만 했지. 우리 얘기는 기사로 안 띄운 모양이야.”

껌을 질겅거리던 후드티가 쯥 소릴 냈다.

“큭큭, 쪽팔려서 뭘 띄우겠냐? 파파라치한테 도망치다 지 혼자 갖다 박은 건데.”

이들은 ‘아파치’라는 이름의 3인조 파파라치 팀이었다.

주로 의뢰를 받거나 대상을 지정해 연예인들을 따라다니는데, 거기서 얻어낸 정보를 신문사나 기획사에 보내 판매를 했다.

셋 다 전과가 있는 잡범 출신이라 대포 카메라와 초소형 망원경은 물론, 문을 따고 주거지에 침입하는 등 범법행위까지 불사했다.

그 덕분에 그들이 모은 셀럽들의 사생활 자료는 일개 파파라치 규모를 넘어섰다. 소속사들에겐 재앙, 이슈 유튜버들에게는 축복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니, 미친놈인 줄 알았다니까. 저 뒤에서 따라가는데 갑자기 급커브를 도는 거야. 옆에서 차라도 나왔으면 받쳐서 뒈졌을걸.”

“병신, 아주 영화를 찍네.”

비니 쓴 사내가 낄낄대며 소파에 털썩 앉았을 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중앙의 형광등이 나갔다.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지며 컴퓨터 모니터만 파란 빛을 발했다.

“뭐야, 정전인가?”

그렇다기엔 컴퓨터는 멀쩡하게 돌아갔다.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후드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아닌데, 형광등이 다 됐나······.”

“아니.”

쉰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머지 세 명은 약속한 듯 잽싸게 반응했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뽑아 플래시를 켠 야구모자가 살벌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짭새냐?”

“그건 아니고.”

모니터 불빛이 비춘 벽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이 판의 악질들인 줄 알았는데, 그냥 밑바닥 범죄자들이었군. 강도, 절도, 사기··· 징역까지 살고 나와서 하는 게 겨우 파파라친가?”

“씨발, 너 누구야!”

“당장 안 나와? 어떤 새끼냐고!”

나머지 두 명도 소리치며 플래시를 이리저리 비쳐 댔지만, 괴기스럽게도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쇠를 긁는 듯한, 저 거칠고 쉰 목소리만 웅웅대며 공간을 울릴 뿐이었다.

“참 많이 찍었어. 허락받지 않고 탐하고, 해하고, 배를 불렸지. 죄 없는 이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괴롭히면서.”

이내, 그나마 벽을 비추던 모니터까지 새파란 불꽃을 튀기며 꺼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쉰 목소리는 귓전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더는 그러지 못할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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