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1)
* * *
“충성, 오셨슴까.”
폴리스라인을 넘어오는 임형배 형사에게, 후배 형사가 경례를 붙였다.
“어, 왔다. 과수대 애들은?”
“이미 다녀갔습니다. 나온 게 개미 코딱지도 없다고, 도무지 뭔 일인지 모르겠다던데요.”
“나도 모르겠더라. 미친놈들이 순찰차 뒷자리에다 오줌을 지렸어.”
임형배는 암모니아 냄새가 아직도 난다는 듯 코 밑을 벅벅 문질렀다.
후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너무 겁주신 거 아닙니까?”
“넌 저걸 보고 겁이 안 나겠냐? 무슨 오함마로 찍은 것 같은데.”
임형배의 핀잔에, 후배 형사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그들의 눈앞엔 소형 굴삭기가 난동을 부린 듯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상도동 끝자락, 작은 업무용 건물에서 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스토킹, 불법촬영, 사생활 침해 및 유포··· 죄목을 주워섬기던 신고자는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기, 범인들이 다 있습니다. 증거도 있으니 형사님들 데려오시죠.’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끔찍했다. 들어와서 불을 켰을 때, 어지간한 임형배도 흠칫 놀랐다.
‘우으, 흐우으으······.’
척 봐도 수상쩍은 남자 셋이 사무실 구석에 처박혀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기절한 것도 아니고 묶인 것도 아닌데, 형사들을 보고도 도망치기는커녕 정상적인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내부 풍경이었다.
“이게 뭐냐, 진짜로.”
사무실 바닥과 벽면이, 무슨 지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임형배는 산산이 쪼개져 먼지구덩이 속에 파묻힌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은 지진이라고 치자. 저쪽 벽에 난 크레이터는 대체 뭔가? 건물을 부수는 스틸 볼 같은 게 아니어도 저런 자국이 날 수가 있나?
후배 형사가 임형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무슨 오함마로 부수고 다닌 것도 아니고. 정작 애들은 멀쩡하게 놔두고, 왜 애꿎은 사무실만 때려부쉈지?”
“화풀이 같던데.”
“예? 화풀이요?”
임형배는 대답 대신 서에서 조사한 놈들의 이력을 떠올렸다.
김씨, 이씨, 허씨.
성들은 다 달랐지만, 경찰서에서 밝혀낸 놈들의 신분은 사고를 두세 번씩 친 전과자들이었다.
거기에 현장의 PC와 외장하드, 거기 꽂혀 있던 USB에는 신고자의 말처럼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담긴 영상과 사진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연예인 파파라치질에 일반인 몰래카메라까지··· 아주 악질들이었지.’
사기꾼에 빈집털이, 몰카나 찍던 잡범 놈들이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업계에선 ‘아파치’라고 하면 대충 안다는 모양이었다.
관계부서 팀장은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임 형사의 노고를 칭찬했다.
‘아니, 이놈들은 어떻게 잡으셨어요?’
‘아는 놈들입니까?’
‘얼굴은 몰랐는데 하는 짓은 알죠. 신고가 계속 들어와도 증거 하나 안 남기고 내빼던 놈들인데, 아예 사무실까지 소탕을 하셨네 그래.’
그건 그 역시 묻고 싶었다. 이 자경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 아마도 저놈들에게 원한이 있었을 익명의 신고자에게.
파파라치들은 셋 다 외상이 없었다. 대신 극심한 불안증세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쇼크 증상을 보였다.
취조 도중, 비니를 쓴 놈은 눈이 반쯤 뒤집혀서 ‘번갯불, 빨간 번갯불!’하고 소리쳐 댔다.
“벽이 부서졌잖아. 아마 망치 비슷한 걸 가져온 모양인데, 쇳덩어리로 사람 팼으면 걔들 머리통 다 박살났을 거 아냐. 사람을 죽일 순 없으니 건물을 팬 거지.”
“아, 분노조절을 위해서요?”
“그래, 인마.”
그만큼 철두철미한 놈이니까. 임형배는 뒷말을 삼켰다.
놈들을 연행한 직후, 돌연 연예기획사 여러 곳에서 신고가 빗발쳤다.
파파라치들의 신상, 아지트 위치, 놈들이 여태 찍은 소속연예인들의 사진이 메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건방진 놈, 아주 주무르려고 들어.’
판을 다 깔아 경찰을 불러 놓고, 왜 굳이 기획사에까지 자료를 뿌렸을까.
답은 뻔하다.
신고자는, 그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사건을 묻으려 들거나 처리가 늦으면 재미없으리란 경고를.
임형배 형사는 깔깔한 입천장을 혀로 훑었다.
“어떤 새낀지, 골 때리는 놈일세.”
*
부여의 ‘백정장군’ 세트장.
주연 배우가 복귀한 현장에서, 오늘도 치열한 연기 대결이 펼쳐진다.
“이봐, 백정탈. 어떻게 할 셈인가?”
“뭘 말이지?”
“알면서 묻지 말고. 이번 천황의 탄신일 축제 때, 총독부 놈들이 앞장서서 우리 형제들을 끌어내 총살한다더군.”
“그래서?”
“어쩌긴 어째, 막아야 할 것 아닌가!”
한낮의 햇볕이 흘러드는 아지트에서, 백정탈로 분한 박건과 경성독립군 대장 이동수가 신경전을 주고받는다.
속이 터지는 쪽은 독립군의 젊은 리더, 이정녕 역할의 이동수다.
각고의 노력을 거쳐 ‘백정탈’과 접선하고, 우호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놈은 어마어마한 무력을 가졌음에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뜬금없이 일경들을 습격해 십여 명을 몰살시키는가 하면, 이쪽의 공조 제의는 싹 무시한 채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지금도 보라. 총독부와 종로서에서 붙잡은 독립투사들을 처형하려 들건만,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지 않나.
백정탈을 뒤집어쓴 이천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내가 왜? 놈들도 독립군이 올 걸 대비하고 있을 텐데. 어차피 지금 잡힌 자들은 고문당하다 죽어갈 운명이야.”
“아무리 그래도 동포가 눈앞에서······.”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조선인을 내 동포라 생각한 적이 없어.”
철판을 긁는 듯한,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저 음성이 기어이 이정녕의 분통을 터뜨린다.
이를 갈며 다가온 경성독립군 대장은 걸치고 있던 저고리를 벗어던졌다.
“그렇게 잘났으면 나랑 한번 붙지. 지는 쪽이 군말 없이 따르는 걸로, 어떤가?”
백정탈의 고개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진다.
“괜히 힘만 빼겠군.”
“이, 건방진 자식이······!”
저만치서 형이 불꽃 튀는 연기를 펼치건만, 박선은 촬영장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박건이 무력 높은 해결사라면, 박선은 스탭들 사이에서 ‘선타민’이라 불릴 정도로 활기찬 에너지레벨을 자랑한다.
그런데 제 형이 파리에 다녀온 이후, 늘 웃던 얼굴에 그늘이 꼈다. 평소 긍정적인 사람이 저러니 당연히 신경도 쓰이는 법.
보다 못한 스탭 한 명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매니저님?”
“아, 예! 죄송해요, 제가 뭘 생각하면 표정에 바로바로 티가 나서······.”
“죄송은요. 혹시 그때 교통사고 때문에 아직 몸이 안 좋으신가 했죠.”
도와드릴 게 있으면 말씀 주세요, 친절하게 이야기한 스탭이 일을 보러 떠났다.
촬영팀 스탭이 배우 매니저를 걱정한다는 사실만 봐도 현장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지만······.
지금은 다른 걱정이 더 크다.
“······휴.”
박선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옆에 와서 멈췄다.
“저기요.”
“배··· 백 배우님!”
요즘, 밴에만 틀어박혀 있던 주연 여배우가 촬영장을 쏘다니는 비중이 늘었다.
팔짱을 낀 백하니는 짜증스레 말했다.
“백 배우고 뭐고, 왜 그러는 거예요?”
“예?”
“그쪽 형 오고부터 왜 넋이 나가 있냐고요, 어디 아픈 사람처럼. 진짜로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그래요?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대표님한테 휴가 내놓으라고 전화할게요.”
“···어, 아니에요. 진짜 그게 아니라······.”
“답답해 죽겠네. 됐어요!”
백하니가 인상을 구기며 떠나려던 차였다, 갑자기 박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기, 하니 배우님.”
“왜요?”
“그··· 싸움을 말려야 하는데 도저히 못 말리겠으면, 이럴 땐 어떡해야 할까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니까, 나쁜 놈이 있는데··· 아는 사람이 그놈을 혼내주러 갔는데, 혹시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돼서······.”
“커헉!”
박선이 자신 없이 주워섬기고 있는 동안, 나가떨어진 이동수가 신음을 토한다. 이내 경성독립군의 수장은 형편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박건의 구타 쇼를 바라보던 백하니가 툭 던졌다.
“저렇게 패겠대요?”
“예? 아뇨, 형 얘기가 아니라요.”
“그거야 잘 모르겠고. 아무튼 난, 싸울 일을 피하면 더 큰 싸움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먼저 들이박아서 밟아 놔야죠.”
이야기 속 주인공은 형이 아니라고 변명하려던 박선의 입이 닫혔다.
백하니는 냉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쪽도 이제 2년차죠? 착한 건 알겠는데, 슬슬 알아 둬요.”
“어떤 걸······.”
“이 바닥에서는 참으면 안 돼요. 만만해 보인 순간 전부 몰려와서 걷어차니까. 왜, 예전에 그 또라이 아이돌이랑 매니저한테 당했던 것처럼.”
형제를 연예계로 데뷔시킨 에피소드지만, 썩 좋지 못한 사연이기도 했다.
오귀준과 와우키즈가 박선을 괴롭혔다는 것은 아직까지 로만 내부에서도 회자되는, ‘다시는 범하면 안 될’ 실수였으니까.
“그러니까 걱정 마요. 우리 대표님보다 철두철미한 인간은 처음 봤거든.”
“······?
박선이 돌아봤을 때, 얼음으로 조형된 듯한 얼굴에 드물게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붉은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싸움 잘하는데 똑똑하면 말 다 했지, 뭐.”
*
새벽 3시 45분,
청담동 모 오피스텔 앞.
차인혁은 건물 주차장에 그의 벤츠를 세웠다.
방금 마신 위스키가··· 두 병을 넘겼던가?
근처 바에서 모 투자사 관계자와 미팅을 하고, 2킬로쯤 되는 거리를 그냥 운전해 왔다.
‘이 근방은 일 년 가까이 단속이 없었지.’
모든 위법, 또는 불법은 이런 식으로 저질러야 하는 것이다.
이쪽의 안전이 대체로 보장됐을 때··· 리턴보다도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될 때.
DG의 아티스트육성 총괄본부장, 늘 부서를 옮겨 다니는 ‘마이더스의 손’이 차 키를 뽑았다.
“···더럽게 바쁘군.”
오늘도 그는 다양한 일을 했다.
모 중소기획사의 음원사재기 정황을 발견하고, 압박을 넣는 한편으로 상반기 경쟁 아이돌들의 리스트를 추렸다.
한 팀은 어머니가 탈세··· 다른 한 팀은 일반인 남자친구와 비밀 연애··· 또 다른 팀은 학폭 가해자 의혹이 각각 있었다.
파파라치 몇 팀과 DG에 우호적인 방송국, 사실상 그들 소속사의 하청업체인 잡지사에 오더를 내리고 나니 하루가 금방 사라졌다.
문득, 명치께가 뻐근해 왔다.
타인의 앞길에 흙과 재를 뿌리면 늘 이런 기분이 들곤 했다. 이미 죄책감과 양심 따위는 무뎌지고 잘려나가 사라졌음에도.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다 감안하고 들어온 바닥이잖아.”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무감각한 목소리가 차 안을 맴돌다 흩어진다.
실제로 연예계는 추악한 흙탕이다.
누구보다 멋지고 예쁘지만 그보다 더욱 천박한, 번지르르한 껍데기에 비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들의 판이다.
그러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했을 터였다.
지잉ㅡ
짧고 굵은, 신음 같은 알람이 들어왔다. 액정에 뜬 문자는 숫자만 길었다.
[Web 발신] 출금 8,687,190원
차인혁은 무심히 스마트폰을 도로 넣었다.
남을 모욕하고, 해치고, 혹사시켜 번 숫자들은 그의 욕망을 위해 빠져나가고 소모되었다.
-차 실장, 자네만 한 사람이 없어.
-복귀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언제까지 딴따라나 키우면서 연예계 푼돈으로 먹고 사시려고요.
-나 참, 차인혁이가 엔터테인먼트라니··· 너한테 당한 작자들이 원통해 땅을 치겠군.
아직도 몇 군데서는 연락이 왔다. 과거, 대기업 ‘전략개발비상기획실’로 포장된 부서에서 칼춤을 출 때의 그를 아는 이들이었다.
‘남을 해쳐 달란 인간이 이렇게 많아서야, 원.’
그 마굴로 복귀할 생각은 없었으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긴 했다.
‘아파치’ 놈들이 털렸다.
그 조심성 많은 팀이 통째로 검거됐고, 종종 일을 맡기던 개인 파파라치들도 지난 한 주 사이 열 명이 넘게 경찰로 넘어갔다.
뉴스에 대서특필되진 않았지만, 어떤 자의 소행일지는 대강 예상이 갔다.
‘그놈이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아니면 그저 원한이 있는 자일 수도 있다.
이쪽 일은 본래 위험도가 높았다. 당장 그가 나락으로 보낸 연예인의 가족이, 회칼을 들고 오피스텔에 침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닌가.
그리고 지금.
아이돌들 은퇴 시기까지 맞춘다던 DG의 본부장도, 당사자가 직접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차에서 내린 차인혁은 한 손을 들었다.
“먼 길을 오셨군. 그쪽이라면 회사로 연락했어도 미팅을 잡아 줬을 텐데.”
티에 달린 후드를 눌러 쓴, 키 큰 그림자가 대답했다.
“비공식적인 볼일이라.”
“왜, 동생처럼 교통사고라도 내주려고?”
바람이 불며, 달을 가리던 구름이 비켜섰다.
한 발짝 걸어나온 박건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조금 올렸다.
“오래된 빚은 슬슬 청산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