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2)
* * *
창백한 달빛이 길가를 내리비췄다.
침묵 속에서, 멀쑥한 정장과 허름한 후드티가 마주 선 채 서로를 응시한다.
차인혁은 자신의 차를 돌아보고, 머리 위의 CCTV를 올려다보았다.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암시하듯이.
먼저 입을 연 것은 DG의 본부장 쪽이었다.
“인사라도 나누지, 그래도 초면인데.”
“자르마니 쇼는 잊었나?”
“눈도 기억력도 좋네. 특수부대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봐.”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면서도, 차인혁은 맞은편의 상대를 살폈다.
박건··· 매우 희박한 확률이지만, 혹시나 접촉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통 연예인들은 제 안위만을 챙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올라간 자리 아닌가. 자기 주가가 낮아질 것 같으면 매니저고 가족이고 내다 버리는 게 정상이다.
‘저놈이 이상한 거지.’
DG의 터줏대감 남우협도, 아시아의 톱스타가 된 문한빈도, 모두 예상 내 범위였다.
-차 본부장, 얼마나 될 것 같나?
-남우협은 롱런할 겁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계속 잡을 가치가 있습니다.
-문한빈이랑 기은서는?
-문한빈은 아시아에서, 기은서는 국내용이지만 경쟁력이 있습니다. 핸들링이 되고, 배우 이미지에 맞는 작품만 준다면 가치 있는 패입니다.
이쪽 업계로 이직한 뒤, 재계약 시즌마다 변동근과 ‘연봉 예측’의 자리를 가지곤 했었다.
실제로 그 예측들은 적중했다. 소속사 내외의 연예인들 태반이 그가 산출한 범위에 맞게 몸값이 올랐으니까.
그러나··· 박건은 달랐다.
애초 측정했던 몸값, 즉 광고 단가는 맥시멈 3억. 지금은 그 값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대기업을 등에 업고 초대형 시대극 주연을 꿰찼고, 무려 4대 패션위크에서 클로징을 맡아 글로벌 시장에 스스로를 내보였다.
처음 로만과 계약했을 때만 해도, 그 생짜배기 신인이 이런 괴물로 성장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특수부대 출신에, 주변 사람들을 과하리만치 챙기는 성격. 본인보다도 타인의 안전에 유독 민감한 편. 쉽게 흥분하는 타입으로는 안 보이지만···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다.’
차인혁 역시 운동을 했다지만, 와이어도 없이 허공을 나는 인간병기와 댈 것이 아니다.
만약을 대비해 몸을 긴장시키는데 마음을 읽은 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숨이 거칠어졌는데, 지은 죄를 아나 봐.”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걸?”
문득 허리를 굽힌 박건은 발밑의 돌멩이 하날 주웠다. 자갈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을 때마다, 달빛이 비친 돌이 하얗게 빛났다.
“DG 본부장 차인혁, 네가 이장미 배우의 소속사 논란을 터뜨렸지. 가짜 루머로 과거를 음해하고, 내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파파라치를 붙여 불법 촬영과 스토킹을 사주했다.”
차인혁은 태연히 대꾸했다.
“내가 했을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이 했을 수도 있고.”
박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최후변론을 듣는 변호사처럼,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며 이쪽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악랄한 수법에, 뻔뻔하기까지 하군.”
“미안하지만 연예계는 원래 그런 곳이야. 보트에 자리는 정해져 있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으면, 군대에서는 전부 다 태워서 가라앉히라고 가르치던가?”
“여긴 군대도 전쟁터도 아냐.”
“허튼소리. 사회는··· 아니, 이 세계는 본래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어. 한 사람의 성공은 곧 다른 누군가의 몰락이고. 인간이란 한정된 자원 속에서 서로의 살을 파먹는 구더기들이 아닌가?”
차인혁은 넥타이를 끌렀다. 이 각도라면, 저쪽이 덤볐을 때 CCTV 화각에 아주 예쁜 그림으로 찍힐 것이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거야. 변동근 대표는 그런 자니까. 의외로 조이너스가··· 아니면 그 밑의 중소기획사가 칼을 뽑았을 수도 있겠군. 핫앤쿨, 롱원, 데자뷰, 모두 노 대표와 악연이 있는 곳들이야.”
“그러다가 대상이 다치면?”
“어쩔 수 없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명이 죽고 다치는데, 고작 연기 좀 하고 노래나 부르면서 평화로운 삶을 원하는 건 우습지 않나?”
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이 달라져도 이건 똑같군.”
“같다니?”
“철왕국의 귀족들도 그랬어. 전부 다 구할 수는 없다며 희생을 강요했지. 때로는 병사에게, 대부분의 순간에는 시민과 농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약이라도 했나? 아니면 연기? 차인혁의 눈매가 가늘어졌으나,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표정에 깃든 것은 해묵은 후회··· 그리고 이유 모를 비감(悲感)이다.
박건은 옛 전장을 회상하는 노병처럼 말했다.
“잊고 있었다. 어느 세상에서든, 싸우지 않고 얻어낸 평화는 없었다는 걸.”
잊고 있었지. 어딜 가나 너 같은 놈들은 꼭 내 주변을 망가트려.
“대체 무슨 소리를······.”
상대는 도발에도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슬슬 답답해진 차인혁이 한 발짝 나섰을 때였다.
그 순간, 꼭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 같던 눈이 초점을 찾았다.
“우선··· 보는 눈부터 치우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멩이가 날아가 전신주 밑 CCTV에 쑤셔박혔다. 불꽃이 튀면서 조각난 부품이 떨어졌다.
‘···무슨 돌멩이 하나로?’
안전을 확보하던 카메라 하나가 사라졌다. 차인혁이 차 문을 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서 있던 후드티가 흔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박건은 눈앞에 와 있었다.
“······.”
무시무시한 악력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다음 찰나, 그는 자신의 차 창문에 머리부터 거꾸로 쑤셔박혔다.
와장창!
코팅된 차창이 깨지며, 유리 파편이 운전석으로 쏟아져내렸다.
차인혁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발버둥 쳤으나 저 손아귀는 악어의 턱처럼 강고했다. 이내 목이 졸리는가 싶더니, 두 발이 허공에 떴다.
한쪽 팔로만 그를 들어올린 박건은 장난감 다루듯 저편으로 내던졌다.
‘젠장, 뭔 놈의 힘이······.’
양복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골목 안쪽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차에 들이받힌 것처럼 머리가 윙윙 울리고 핏덩이가 올라왔다. 간신히 눈을 뜨자 블랙박스를 빼내 맨손으로 부서뜨리는 미친놈이 보였다.
“아직 몰랐나 본데, 카메라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아.”
“개소릴··· 커헉!”
그를 일으켜 세운 박건은 복부를 툭 쳤다. 거의 건드리는 수준이었는데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이미 피와 위액, 불가항력으로 토한 오물 때문에 수트 앞섶은 엉망이었다. 부옇게 된 시야에 청바지가 다가와 앉았다.
“나도 널 조사해 봤어, 차인혁.”
“쿨럭, 쿨럭쿨럭!”
“DG 전에는 대광그룹에 있었고··· 그 전에도 쭉 대기업의 네거티브 전문가로 활동했더군. 인원을 감축하고 소송을 무마시키고, 타인에게 위해를 끼침으로써 기업의 배를 불리던 청부업자.”
차인혁은 내장이 뒤틀리는 통증 속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연예인 주제에, 뒤를 캐는 실력이 좋아.”
“네가 먼저 선을 넘었으니까.”
“그래, 그리고 결국 너도 넘었지. CCTV랑 블랙박스만 없애면 끝인 줄 아나? 라이벌 소속사 직원 폭행, 차량 파손, 사실상 살인 미수에 알리바이까지 없으면 최소 불구속 입건이야. 손을 쓸 거면 죽일 각오로 왔어야지.”
칠 테면 더 쳐 보라는 도발에도, 박건은 화를 내거나 주먹을 들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여동생이 실망하겠어. 이 꼴을 보면.”
“······!”
찌그러진 안경테 뒤에서, 차인혁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두들겨 맞고 허공을 날아가도 냉정하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너, 그걸 어떻게······.”
“조사했다고 했잖아. 남의 과거는 캐면서, 본인은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박건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로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췄다.
“차인혁, 본명 강은혁. 서은대 경영학과 출신, 대학 2학년 때 가족들이 탄 차가 화물트럭과 충돌해 부모님은 사망··· 여동생은 중상. 이후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가 온 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나와 우중물류에 입사.”
신상 브리핑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반쯤 몸을 일으킨 차인혁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아직까지 입원해 있나 싶어 알아보니 이미 오래 전 완치됐더군. 척수자극기를 삽입해 일상생활도 가능한 상태였고.”
“······.”
“이름까지 개명하고 동생 곁을 떠난 건 이해할 수 있어. 원한을 사는 일이니까.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여태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느냐야. 충분히 손을 씻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때껏 말이 없던 차인혁이 씹어뱉듯 뇌까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아니, 알 수 있어. 차인혁, 너는 네 분노를 쏟을 상대가 필요했던 거야. 가족을 잃고 운수회사에 패소해, 눈먼 칼이라도 휘둘러 자신과 타인을 모두 파멸시킬 명분이.”
“입 닥쳐!”
“그렇게 죽고 싶었나?”
다음 순간, 차인혁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
“······.”
숨통을 막는 정적이 흘러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차인혁은 어깨로 숨을 들이쉬며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확연히 침착을 잃은 태도였다.
‘예상하지 못했겠지. 제 약점이 남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은.’
건은 이 세계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만난 진짜 악인을 내려다보았다.
차인혁··· 강은혁의 정보는 진규일 본부장 쪽에서 모두 넘겨주었다.
본인의 정보를 모조리 지우고, 동생의 병원에 입원비를 보내는 계좌까지 몇 다리를 거치게 해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했다.
-독한 놈이야. 이쪽 일에 손을 댄 이후로, 동생을 단 한 차례도 찾아가지 않은 것 같아.
빌려온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진규일은 무심히 평했다.
-알아보니, 부모님이 죽고 난 뒤 운수회사와 보험사에 꽤 심하게 당한 모양이더군. 기업사냥꾼 출신치고도 손속이 지독해서 의아했는데··· 더러운 놈 밑에서 칼춤을 추는 이유가 있었어.
-이유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던 거지. 제 복수심만 충족시킬 수 있으면.
흔한 일이다. 엘리트 수재가 어떤 계기로 탈선해, 맹목적 악의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대악마를 향해, 철왕국을 향해, 또··· 용사를 향해 그런 증오를 불태우는 자들을 그 또한 수없이 보지 않았던가?
―전부 다, 너희 용사들 때문이다. 한 명이라고 속일 생각 마라, 네 녀석 전··· 그 이전에 온 놈들을 내 조부께서 기억하고 계셨단 말이다!
짧은 번갯불이 뇌리를 스쳤지만, 지금은 기억을 더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건은 차인혁의 옷깃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뜯겨나간 단추가 두 사람의 발치로 떨어져 굴러갔다.
가쁜 숨을 내쉬던 차인혁이 말했다.
“···날 죽이든, 경찰에 넘기든 마음대로 해라. 대신 동생만큼은 건드리지 마.”
“글쎄, 요즘 새로운 걸 배워서. 주변 사람을 건드리는 게 효과가 좋다던데.”
이런 자들은 본인의 고통이나 죽음에 오히려 무감각했다.
막을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 이제 차인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타인을 해칠 때는 본인의 소중한 것도 다칠 각오를 했어야지. 안 그런가?”
“박건, 너 이 자식··· 큭!”
붙잡는 오른손을 간단하게 꺾어 버린 건은 말을 이었다.
“너는 날 건드릴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내 주변의 또 다른 사람, 무고하고 선량한 이들을 또다시 물어뜯겠지. 평생을 그러다 비명횡사하는 것이 네 목표일 테니까.”
차인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기세만으로 오귀준을 실금시키던 그때의 합기(合気)가, 옛 권능을 약간이나마 재현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을 해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설령··· 그게 똑같이 무고한 자라 할지라도.”
수십 번, 수백 번 대악마를 참살한 용사는 자신의 적들과 닮아간다. 실현하지 않을 협박을 오감에 각인시키는 정도야 쉽다.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진 차인혁이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너, 네놈··· 내 동생을 건드리면······.”
“예전에도 너와 같은 자들이 있었다. 스스로와 타인을 상처입혀야 하는 사람,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극성에 달한 용사의 살의를, 어떤 인간은 미치지 않고 견뎌낸다.
이미 눈이 반쯤 뒤집혔으면서도 차인혁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냥, 날··· 죽여······.”
“그건 곤란하지. 이 세계의 룰이 있는데.”
게다가 귀환 후, 더 이상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선을 넘었다면 응징이 마땅하나, 악인이라고 다짜고짜 목부터 날릴 수는 없다.
목숨을 잃은 횟수가 백 번이 넘어갔을 때 그는 깨달았다. 세계의 악의는, 결코 폭력과 죽음으로 소탕할 수 없음을.
‘···그게 인간이라면 더더욱.’
잠시 후 차인혁의 몸이 허물어졌다. 깨어났을 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터였다.
용사의 살의와 합기의 편린, 저 둘은 이성을 헤집고 들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미래를 보여줬을 테니까.
다시는 누군가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을 구타했다가 평생 악의를 잊게 된 오귀준처럼.
“이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쓰게 중얼거리며, 건은 등을 돌렸다. 눈앞의 적은 처리했지만 마냥 홀가분할 것도 없다.
차인혁은 그저 기술자일 뿐이다. 더 큰 상대는 저 뒤쪽··· 거대한 궁전에, 싸우러 보낼 부하들을 잔뜩 거느린 채 숨어들어 있다.
마경 밑의 불타는 지옥.
거기서 그를 맞았던 오만과 불화, 분노와 죄악과 허무의 다섯 대악마들처럼.
“그때, 지금만큼만 내 힘이 충분했다면······.”
실패한 숙원은 회한으로 남는다.
온 길을 따라, CCTV 없는 골목으로 몸을 날리려던 건의 몸이 잠시 멈췄다.
휴대폰 액정에 세 명의 메시지 알람이 연달아 들어오는 중이었다.
박선 : [형 언제와...? 나 불안해(그렁그렁)]
진지유 : [오빠, 저 마지막 화 특출 허락받았어요! 영 작가님이 언제든 환영이래요!]
백하니 : [이따촬영늦으면보이콧]
물끄러미,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건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 형? 경찰서 아니지, 응? 나 진짜 너무 걱정돼서 회사로 왔는데······.
“걱정 마, 잘 끝냈으니까. 너 좋아하는 갈비 사 갈 테니까 홍보팀 사람들이랑 먹어.”
-어어, 그럴까? 안 그래도 오늘 새벽 촬영이잖아. 많이 챙겨서 촬영장 식구들한테도 돌리자!
“백하니 씨는 안 먹을걸, 얼굴 붓는다고.”
달빛이 발치를 밝힌다.
용사는 철왕국을 구원하지 못했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그를 부르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