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92화 (92/122)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4)

* * *

방송가에 전운이 흘렀다.

최근 드라마판은 2강 1중 6약이라 평받는다.

JNBC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월화미니시리즈가 죽을 쑤고, 상반기 히든카드로 기대되던 MBS의 수목극도 고꾸라졌다.

로만과 DG의 대결이 대수냐며, ‘진검승부’를 운운하며 출격한 YTS 주말극은 둘 사이에서 찌부러져서 보이지도 않는다.

나머지 방송국들, 심지어 같은 KBC의 타 시간대 드라마까지 치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백정장군과 하이페리온,

저 둘이 너무 강력하다.

20%부터 25%까지. 저희끼리 물고 물리면서 시청률을 전부 흡수해 버린다.

다른 방송국과 소속 기획사 홍보팀들이 전력을 다해 보지만, 이미 앞선 놈들을 끌어내리긴커녕 인력만 낭비될 뿐이다.

[백정장군 Vs 하이페리온, 2강 독주를 막을 드라마는?]

그렇다고 잡을 놈이 나오냐, 그렇지도 않다.

후발주자가 고정 팬층을 빨아들이려면 작감과 배우, 작품의 합까지 딱 맞아야 한다.

방송가는 자존심이 아닌 실리로 돌아가는 곳. 자본을 뭉텅이로 쑤셔넣은 대작과 굳이 싸울 멍텅구리는 흔치 않다.

고래싸움에 등허리가 박살난 새우, 이번 미니시리즈를 대차게 말아먹은 JNBC의 윤 PD가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배우 놈들, 뻔히 쉬는 걸 다 아는데 시나리오 검토도 제대로 안 해. 그렇게 백정장군이랑 하이페리온이 무서우면 처음부터 저기 빌붙든가, 어?”

“나종모가 그랬잖아. 쟤들 둘 붙으면 1분기 시청률 쫙 빨릴 거라고. 탑급 작가들도 저거 피한다고 편성표 미룬다니 말 다 했지.”

“아니, 걔들은 자존심도 없나? 박건이랑 문한빈이가 못 밟을 카드냐고!”

동기의 절규에, 마주 앉은 예능국 PD가 안쓰럽다는 듯 위로했다.

“못 밟을 건 없지. 죽이게 빠진 시나리오에, 물 오른 감독들 폼까지 밟기가 어려워서 문제지.”

진검승부(眞劍勝負).

현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중반부를 돌아 결말로 달려가는 지금, 24부작과 20부작짜리 두 작품은 그야말로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고 있다.

하이페리온의 남은실 작가는 ‘남 사단’이라는 위명답게, 열 명이 넘는 새끼작가 인력들을 갈아 가면서 주마다 새 승부수를 던졌다.

막장과 수작의 교묘한 경계선.

거기에 마약, 폭력, 성접대 등 자극적인 소재들을 배우들의 열연이 살리며, 시대극을 안 보는 시청자들을 꾸준히 흡수했다.

그 결과, 백정장군에 붙잡히나 싶던 하이페리온의 시청률은 다시 뻗어나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KBC의 국장실은 매일같이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야, 오 CP. 넌 어떻게 봐?”

“무조건 이깁니다. 지난주에 고작 0.4% 밀렸는데, 그 사이 병서한이가 펌프질 제대로 넣었으니까요. 이젠 진짜 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돼! 인력이고 뭐고 다 몰아넣어, 마지막화 나가는 순간까지 기자들 족쳐서라도 더 짜내란 말이야!”

CP의 보고를 듣던 드라마국 국장이 벌게진 눈으로 부르짖었다.

본래 쫓기는 놈이 급한 법이다. KBC 쪽 분위기가 절박하다면, CVN 쪽은 오히려 여유로웠다.

“조 팀장님, 우리 쪽에서 서포트할 건 없나요?”

“예, 국장님. 신경써 주신 덕분에 현장 분위기도 최고조입니다.”

“하하, 엔터 팀장님이라 그런지 듣기 좋은 말씀을 잘 해 주시네. 지금쯤 스탭들 힘들어서 곡소리 나올 거 나도 알아요. 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지.”

“아, 그래서 현장 복지에 최대한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본부장님도 사기가 떨어지면 안 된다셔서, 오늘도 중식 밥차가 갈 겁니다.”

조병길 팀장이 보고하자, 방성일 국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그래요. 부대원 보급은 참모들이 챙겨야지. 이번 주엔 그쪽 발목, 또 한 번 잡아 봅시다.”

“물론입니다. 이번엔 앞질러야죠.”

*

부여, ‘백정장군’ 촬영장.

박카스젤리를 입에 까 넣던 제작팀 스탭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감독님, 하루만 쉬고 싶습니다.”

옆의 고참은 아예 먼지투성이 바닥에 털퍽 주저앉아 흐느적거리고 있다.

“앞으로 부여 쪽엔 오줌도 안 싼다, 무조건 고구려가 최고다······.”

“그건 또 뭔 소리예요?”

“그런 게 있어. 넌 시대극 찍는다는 놈이 역사공부도 안 했냐?”

“···여긴 개화기인데요.”

대형 현장에, 심지어 손이 가장 많이 간다는 시대극이다.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스탭들의 피로는 극에 달한다.

감독진도 지치는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영도은 작가는 실시간으로 막장을 넣는 하이페리온에 맞서, 진작 완성한 대본을 갈아엎으며 완성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덕분에 촬영장의 배우들은 쪽대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하루하루 가챠 게임처럼 극을 찍고 있었다.

“영 작가, 괜찮아요? 그러니까 왜 이 먼 부여까지 내려와서 생고생을 해.”

세트장 한쪽의 감독 텐트 안.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물든 영도은 작가가 전인우 PD를 째려봤다.

“실시간으로 현장 보면서 수정해도 빠듯한 판에, 서울에서 어떻게 시간을 맞춰요? PD님 편집본도 아슬아슬하게 나오잖아요.”

“이쪽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여태 쌓아 온 게 있는데 후반부라고, 막 대충 찍어? 서 감독한테 날려 찍으라고 해요?”

“그럼 PD님도 죽고 나도 죽는 거예요. 펜 꺾고 절간 들어가 버릴 테니까.”

눈에서 귀기가 타오르는 영도은을 보며, 전인우 PD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사왜곡으로 국민청원 올라가더니, 우리 영 작가가 독이 바짝 오르셨어.’

그라고 어찌 힘들지 않으랴. 아무리 좋은 대본일지언정, 시간에 쫓기며 찍으면 감독의 스트레스도 심해진다.

편집실로 보내고도 안심이 안 돼, 현장 가편집을 하느라 밤을 샌 적이 몇 번이던가?

방영시간에 맞추려고 한 화를 편집하다가 촬영에 들어가고, 또 다음 화를 만지다가 스탠바이를 외치는 일은 다반사 중 다반사였다.

하지만··· 완성본을 보면 도저히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ㅡ이 탈을, 내가 왜 쓰고 있는지 아시오?

ㅡ당연한 질문이십니다. 왜인들을 물리칠 때 정체를 숨기려고 쓰셨겠지요.

ㅡ틀렸소. 본래 ‘백정탈’을 쓴 탈놀이패는 황소를 도살하고 양반을 우롱하지. 장군이 되지 못한 천인이, 진정 맞서야 할 상대는 저 일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이었던 거요.

ㅡ···당신, 설마······.

박건과 백하니의 호흡은 절로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든다.

불타는 경성은행에서 송이설ㅡ백하니를 구해낸 뒤, 두 주인공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가까워지지 못한다.

옛 정인(情人)을 지키기 위해 탈을 벗을 수 없는 사내. 그리고 한낱 신분과 목숨 따위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는 여인.

“이걸 보면서, 어떻게 그냥 찍겠냐고.”

이천인과 송이설, 그리고 ‘백정장군’ 속을 살아가는 뭇 악역과 선역들까지.

결국, 촬영현장의 모두를 다시금 일으켜세우는 심장은 배우와 작품인 것이다.

“감독님, 작가님.”

그 때, 텐트 옆이 열리며 박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주연은 하다 하다 배우 스탠바이조차 직접 하고 있었다.

“언제든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랑 백하니 씨는 준비됐으니까요.”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영도은과 전인우의 표정에도 어떤 결심이 서린다.

이제 극은 몇 회 남지 않았다.

*

S67#3. 조선총독부 앞

총독부 건물 앞에 거대한 무대가 세워진다.

널찍한 흰 바닥 위에 붉은 점이 찍혀 일장기를 만들고, 그 위에 철 지난 단두대가 서슬 퍼런 칼날을 자랑하며 올라온다.

ㅡ김 서방, 그 소식 들었나? 총독부 앞에서 불령선인 무리를 처형한다는군.

ㅡ간악한 왜놈들··· 아주 칼을 간 게야. 지금 종로서에 갇혀 있는 독립군들에, 죄 없는 조선인들까지 데려다 죄를 묻는다던데.

ㅡ백정탈이 가만 둘까? 분명 어디선가 나타나 구해 줄 걸세.

ㅡ빌어먹을, 무슨 놈의 백정탈인가? 그놈 때문에 경성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데. 난 차라리 백정탈 없을 때의 경성이 나았어!

천황 탄신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의 경무국장과 종로경찰서장이 합작한 ‘참수의 날’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경성의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여론이 갈린다.

왜경을 참살하고 종로서를 궁지에 몰아넣은 백정탈을 칭송하는 부류.

피를 본 총독부가 마구잡이로 조선인을 잡아가는 등 행패를 부리는 탓에, 오히려 백정탈을 역귀(疫鬼)로 취급하는 부류.

백정탈이 도와줄 거라는 쪽과, 그 따위 역병 같은 놈은 없어야 한다는 쪽이 말싸움을 벌이다 급기야 주먹다짐으로 번진다.

그리고 건물 2층. 동포끼리 드잡이질하는 꼴을 내려다보는 두 쌍의 눈이 있다.

“저런 이들을 구하란 말인가?”

주막의 소리가 들리는 골방 안.

경성독립군 대장, 이정녕 역(役). ‘백정탈’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바 있는 오민우가 인상을 구긴다.

“누가 저들을 구하랬소? 총독부에 잡힌 형제들은 이 땅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오. 그들이 흘린 피가 없었다면 경성은 놈들에게 떨어졌을 거요.”

이천인, 박건은 무표정하게 창호지 틈으로 저잣거리를 내려다본다.

민초들을 바라보는 탈 속의 눈에는 증오도, 동정도 없다. 그저 동떨어진 무언가를··· 흡사 바위나 폭포를 앞에 둔 듯한 무관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괜찮았겠군. 썩을 대로 썩은 나라, 백골까지 다 타야 잿더미 속에서 부스러기라도 찾을 수 있을 테니.”

“이보시오, 백정탈!”

“경성독립군 대장 이정녕, 너는 왜 조선을 되찾으려 하지?”

단순한 물음이나, 그 안에는 독립군의 젊은 수장이 짊어지기 힘든 무게가 담겨 있다.

오민우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 당연히 우리 민족이······.”

“동포를 쫓아내는 자가 내 민족인가?”

오민우의 입이 닫힌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촬영 스탭만 십여 명이다.

분명 조명판과 장비, 사람들에게 나오는 열기로 추울 리가 없건만, 고개를 돌린 백정탈이 그를 보는 순간 뺨이 굳었다.

“한 핏줄을 경시하고, 약자를 핍박하며, 제 살 길만 찾는 겁쟁이들. 나는 그들을 동포이자 민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건······.”

“돌아가라, 이정녕. 일국의 흥망성쇠는 의기 있는 자 몇몇으로 바뀌지 않는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오민우.

그 모습을 무심히 응시하는 백정탈의 눈에, 거리의 불빛이 타오르다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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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처형의 날이 밝았다.

총독부 앞에는 아침부터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차가운 입김이 사람들의 숨을 타고 흘러나온다.

부우우ㅡ

긴 나팔소리가 경성의 하늘을 울린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는 이 끔찍한 살육 행위에 총전력을 쏟아부었다.

조선총독부의 정예 병력들, 종로경찰서의 헌병들과 그 외의 서들에서 불러온 왜경들.

이어 총검과 긴 칼로 무장한 순사들이 독립투사들을 끌고 나온다.

ㅡ아이고, 저 몰골 좀 보게.

ㅡ얼마나 고초를 당했을꼬. 종로경찰서장 이균이 그리도 잔악하다더니만······.

ㅡ쉿, 누가 듣겠네! 자네도 혀가 지져지고 싶나?

포승줄에 묶인 채로 절뚝거리며 걷는 독립투사들의 모습은 처참하다.

머리는 하나같이 산발에, 흰 삼베저고리는 온통 시뻘겋게 얼룩져 있다. 종로서의 순사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결과물이다.

그들이 무대에 줄지어 서자, 단상 위로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가 오른다.

“아래의 불령선인들은 들으라. 너희는 경성독립군을 자처하며, 폭도 이정녕을 도와 제국의 신민을 공격하고 총독부에 피해를 입혔다. 감히 독립군이라는 허명으로 천황 폐하의 이름에 거역하고 나아가 경성을 어지럽힌 바······.”

중견 배우, 고철준은 ‘백정장군’에서 악독한 경무국장으로 완벽히 변신했다.

절친한 친구 남중익 역시 나라를 팔아먹은 종로경찰서장 이균으로 분해, 저편에서 백정탈을 찾는 데 여념이 없다.

이어, 혈색 나쁜 입술이 열리며 독살스러운 명령이 떨어졌다.

“전부, 참수하라.”

말과 함께, 십여 개의 단두대에 독립군 투사들의 머리가 집어넣어진다.

처형을 맡은 헌병들이 줄을 당기려던 찰나였다.

삐이이이이ㅡ

총독부의 나팔소리보다 짧고 날카로운, 매의 울음소리를 닮은 호각이 울려퍼졌다.

“뭐야, 놈인가?”

“어디서 들리는 거야?”

“위다! 저 위야!”

도쿠로 신지와 이균도, 총독부의 헌병들과 구경꾼들의 시선도 모두 하늘을 향한다.

총독부 건물 꼭대기.

오만하게 솟아오른 총독부의 탑 위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화악ㅡ!

순간 해가 구름에서 벗어나며 눈부신 빛을 뿌린다. 사람들이 잠시 눈을 가린 순간, 하늘에 거대한 천이 펼쳐졌다.

“······.”

탁, 가볍게 내려선 백정탈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악명 높은 불령선인이 나타났지만,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왜인들까지 말을 잃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저 총독부 건물 꼭대기부터 지상까지 연결된, 오전의 태양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태극기다.

“더러운 잡종들이 모여 있군. 악취가 나서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

백정탈은 로프처럼 잡고 내려왔던 태극기를 놓고 돌아섰다.

왼손에 쥔 도살용 식칼, 오른손에 든 작은 도끼가 빙글 돌아 도쿠로 신지를 겨눈다.

“덤벼라, 민족의 개들아.”

*

씬이 끝났다.

숨 하나 가쁜 기색 없이, 스턴트맨들과 동선을 이야기하는 박건에게 박선이 달려갔다.

“형, 형!”

“잠시만요, 금방 오겠습니다.”

이제 눈빛만 봐도 뭘 말하려는지 안다. 한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박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백하니 배우님이 전해 달란 게 있어서, 대답 안 하면 집에 가겠다고······.”

“어차피 말만 그렇게 하는 거야. 뭔데?”

“입에서 냄새나거나 눈 뜨면 죽여버리겠대.”

“응?”

“전 감독님이 말씀 안 해 주셨어? 이따가, 둘이 키스씬 있잖아!”

박건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연기 생활 2년차, 처음으로 심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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