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96화 (96/122)

고래싸움의 승자 (4)

* * *

부여, ‘백정장군’ 세트장 근처.

새까만 밴이 조성된 돌길을 달린다.

여배우 조현아는 밴 밖으로 보이는 세트장의 풍광에 시선을 보냈다.

개화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돌담과 지붕들이 눈에 익은 청색으로 빛난다.

이제 저 광경을 보는 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면 세트장은 팬들에게 개방돼 부여의 새로운 관광지가 될 것이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이동수 : [누나 저 도착쓰]

이동수 : [언제오세용?]

이동수 : [거니형네가 간식차 보내서 우리 딱 먹으려고 하는데]

이동수 : [여기 우리 회사보다 돈 많이 쓰는 듯요 ㄷㄷ]

조현아 : [나도 곧 도착. 지금 앞이야.]

앞으로 2화.

그들의 드라마가 남은 횟수다.

“원래였으면 한창 쉬고 있을 땐데.”

“예?”

“아냐, 혼잣말.”

룸미러를 보는 로드에게 대꾸한 뒤, 조현아는 등을 기댔다.

몰락한 군벌이자 마지막 사무라이, 슈헤이 역을 맡은 이동수는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터졌다.

일전에도 연기력은 좋지만 작품을 잘 못 고른다는 평을 받던 그였다.

준수한 마스크로 같은 역할만 한다는 꼬리표에, 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후배가, 지금은 난리가 났다.

[미친 광기로 ‘인생 악역’ 달리는 이동수··· 사무라이로 완벽 변신]

[지금 방송가는 ‘슈헤이 열풍’, 시대극의 악역이 인기를 끄는 까닭은?

[로만의 박-백이 있다면 C&J의 조현아-이동수 콤비가 있다]

[소속 배우들의 맹활약으로 연일 고점 갱신하는 C&J··· 이제 엔터로도 재조명받나]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방송 출연이며 광고도 쏟아져, C&J 실장들은 엔터 출범 이후 최고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부족함 없이 누렸다. 그녀도 이른 전성기에 드라마 주연을 맡았고, 천만은 아니지만 오륙백만 영화들에 출연도 했다.

저 별들의 가장 꼭대기, 그곳을 밟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 왔을 뿐이다.

‘재계약은 별로 안 내켰어. 회사도 나도 애매하던 차에, 파격적인 조건이 들어왔었지.’

어차피 2년을 넘지 않는 단발성 계약이다.

변덕에 가깝게 회사를 옮겼는데, 계약기간이 반도 지나기 전에 대박을 쳐 버렸다.

-현아 씨, 난리가 났습니다! 광고도 광고인데 작품들이 계속 쏟아져요, 마종모 감독도 주연 시나리오를 보냈습니다!

담당 실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괜찮은 조연, 딱 밥값만 할 줄 알았던 일본인 캐릭터가 이토록 각광받을 줄은 그녀도 예상 못 한 바였다.

‘캐릭터도 몰입력도 엄청나. 영도은 작가 실력이 이 정도였었나?’

강렬한 주연으로 극을 끌면서, 조연과 단역들에게까지 입체적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영 작가의 특기라 했다.

송씨 가문, 경성독립군 단원, 조선총독부의 일본인들과 종로서의 친일파들, 그중 속칭 ‘공기화’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거기다 연기력까지 고점들을 찍어, 구멍은커녕 매 씬 하나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다.

‘단, 박건이랑 붙을 때만.’

조현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젠 그녀뿐만 아닌 모두가 안다. 일견 수상하기까지 한 저 연기력들의 증진은, 박과 백의 콤비 때문이다.

‘와, 진짜 들었던 대론가 봐요. 박건 배우님이랑 붙으면 진짜 여기, 이 공기부터가 경성으로 변한다니까요?’

‘엑스트라 나온 분들도 눈빛이 달라지던데요. 황철 씬가, 그분은 연기학원 출신인 줄.’

‘백하니는 또 어떻고? 박건 씨한테 가려서 그렇지, 그쪽 시너지도 살벌해. 저 혼자만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상대 연기에 맞추더라.’

휴식시간, 배우들의 화제는 단연 로만이 보낸 두 대표선수였다.

박건이야 들은 바가 있다지만, 다른 쪽으로 악명이 높았던 백하니의 활약엔 다들 의아해했다.

자르마니 런칭 쇼에서 접점이 있던 조현아만 태연했다. 본래 연예계의 소문이란 과장과 날조로 점철된 것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자기네 본부장한테 뭘 집어던졌다는 게 말이 돼? 예의는 없어도 경우는 있는 애던데.’

기이한 오해 속, 여배우의 밴이 멈췄다.

외투를 챙긴 조현아가 내리려다 말고 로드에게 물었다.

“경훈아, 네가 봐도 기은서보단 백하니지?”

“당연하죠. 제가 백 배우 매니저였으면 업고서 부여로 출퇴근했을걸요.”

“오, 그럼 내일부터 나도?”

“···아이고, 전 감독님 브리핑 늦겠다!”

*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 수고해.”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중, 도종우 무술감독이 스탭의 인사를 받는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조명팀 쪽일 것이다. 저 장비를 낑낑대며 들고 가는 걸 보면.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든 사람 특유의, 그을리고 단단한 얼굴에 짧은 감상이 스친다.

‘아직 표정들이 살아 있네.’

조명팀뿐만 아니다. 대장정의 막바지, 다 죽어가야 할 스탭들의 표정이 밝다.

‘우리 스턴트팀 애들, 추가로 불러온 엑스트라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액션 사극에서 가장 고생이 많은 팀을 뽑자면 단연 스턴트팀이다.

뚝딱거리는 배우와 합을 맞추는 것은 물론, 위험한 스턴트는 대역까지 맡고도 감독들한테 욕이나 들어먹기 일쑤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숫제 스턴트맨과 배우가 바뀐 채 가르침을 받고 있다.

저기서 걸어오는, 저 스턴트의 신(神)에게.

“박 배우님!”

이천인의 두루마기를 입은 채, 매니저도 없이 돌아다니던 박건이 마주 인사한다.

“오셨습니까.”

“마침 잘 만났구만. 어제 깜빡했는데, 다음 팬미팅은 언제예요? 우리 애들이 꼭 티켓팅하고 싶다고, 맨 앞자리로 뽑을 거라지 뭐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갑자기 정해졌던 거라서.”

“에이, 그러지 말고 팍팍 좀 해 줘요. 왜, 스턴트 쇼 같은 거 하면 팔 걷어붙이고 도울 테니까. 이래봬도 액션스쿨 중에선 우리가 제일······.”

무술감독이 배우에게 팬미팅을 권하는 동안, 저쪽에서는 전인우 PD와 서응서 촬영감독이 이야기를 나눈다.

“박 배우, 오늘따라 표정이 묘하게 다른데?”

“그래요? 난 왜 몰랐지?”

촬영 중 가장 주연들을 가까이서,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는 것이 촬영감독이다.

전인우보다 대여섯 살 많은 서응서 촬영감독이 중얼거렸다.

“찍으면서 느꼈는데, 씬에 따라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더라고. 분명히 연기는 연긴데··· 그러면서도 연기가 아닌 것 같달까?”

스위치를 껐다가 켜듯, 순식간에 몰입했다 빠져나오는 박건의 신기(神技)는 스탭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전인우 PD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게 다 본인의 노하우 아니겠습니까, 저쯤 되면 몰입도 조절까지 하는 거죠.”

“글쎄, 캐릭터 몰입이라기엔 좀······.”

서응서 촬영감독이 코를 긁는다. 배우를 렌즈에 담는 데만 전문가였지, 느낀 감을 말로써 풀어내긴 서투른 탓이다.

연기의 감각이 날카로운 자가 박건을 살폈다면 이렇게 분석했으리라.

저 조선인 백정의 서사··· 이천인의 위에, 무언가 옛 기억을 덮어쓰는 것 같다고.

“그나저나, 많이들 죽는구만.”

“오늘 찍는 씬 말입니까?”

“응. 영 작가가 실시간으로 칼춤을 추잖아. 대본도 갈수록 늦어지고.”

“어휴, 그래서 저도 죽겠습니다. 매번 편집이 늦어지니 편집실에서도 자꾸 쪼아요.”

두 감독이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쪽대본의 늪.

70% 이상을 완성한 채 시작한 촬영이, 기어이 그날 보고 그날 찍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가가 늦게 보내니 감독은 도리가 없다.

-현장에 대본 바로바로 보낼게요. 수정할 게 많긴 한데, 촬영하는 씬 순서만 알면 무조건 맞출 수 있어요.

영도은 작가는 본인의 대본에 놀라운 솜씨로 칼춤을 춰 댔다.

주연의 대사가 바뀌고, 죽어야 할 인물이 살아나는가 하면, 본래 비중 없던 배역이 장면의 씬 스틸러로 날뛴다.

“그러면서도 퀄리티가 계속 올라가니, 아무튼 작가나 배우나 괴물은 괴물들이야.”

“그러게요. 백 배우가 쪽대본에 불만 없이 연기한다는 것도 신기······.”

턱수염을 쓸던 전인우 PD가 문득 저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만치서, 그들처럼 나란히 오던 두 중견 배우들을 본 까닭이다.

“두 분, 오늘 표정이 좋으십니다?”

작품의 두 악역이자 실제 막역지우.

오늘, ‘백정탈’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고철준과 남중익도 허허 웃으며 답했다.

“이제 우리도 퇴근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 씬 아닙니까.”

“이 나이에 대역 없이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후배가 날아다니니까 어디 대충 할 수가 있나, 원.”

짐짓 앓는 소릴 하지만 저 둘의 존재 역시 완벽하게 극을 받쳤다.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이 돋보이는 법. 악독한 제국주의자와 교활한 매국노는 이천인의 안티-테제로 시청자게시판 지분을 채우고 있었다.

동료보다 조금 더 일찍 최후를 맞는, 종로경찰서장 역의 남중익이 시계를 봤다.

“내가 죽을 시간이 됐군, 슬슬 갑시다.”

*

S#.64 경성의 저잣거리(밖)

인적 드문 거리를 바람이 스친다.

경성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불탄 가옥이 수십여 채에, 채 닦지 못하고 스민 피가 벽과 담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

행인들은 옷자락을 여미고, 인력거들도 행여나 소리가 크게 날까 조심스레 달린다.

―백정탈 말일세, 혹시 잡혔다던가?

―아니, 소식이 없어. 저놈들이 잡았으면 그냥 뒀겠나, 총독부에 목이라도 내걸고 선전해 댔겠지.

―그럼 아직도 도망다니고 있다는 건데, 여드레째 감감무소식이니 원. 정말 객사라도······.

―예끼, 이 사람아. 부정 탈 소리 말어! 독립군도 사라진 마당에, 백정탈까지 없으면 경성은 정말로 끝이네!

반면 두 명씩 조를 이뤄 돌아다니던 순사들은 다섯으로 늘었다.

소수로 다니면 무조건 당한다. 백정탈의 무차별 게릴라에, 종로경찰서장 이균이 특별 경보령을 내린 것이다.

총독부 습격의 날, 백정탈의 무위에 혼이 빠진 이균은 미친 사람처럼 부하들을 내몬다.

―부상을 당했다지만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몸을 회복했을지도 모르니, 편제된 인원대로 완전무장한 채 민가를 뒤져라. 놈과 마주치면 즉살, 무조건 즉살시켜야 한다!

한편, 경성 외곽의 나무집.

경성독립군의 대장 이정녕과 백정탈 이천인이 호롱 아래 마주한다.

···이쪽의 상황은 더 나쁘다.

이정녕은 왼쪽 팔이 날아갔고, 이천인은 총상과 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독립군 역시 뿔뿔이 흩어져 각지에 몸을 숨겼다.

‘일이 더럽게 됐군. 그날, 붙잡힌 머저리들을 구하러 가면 안 됐었는데.’

아무리 이천인이 강하다 한들, 단독으로는 적들의 군세를 상대할 수 없다.

거기다 지금은 부상까지 당한 상황. 황우회의 칼 잘 쓰는 사무라이들이 대여섯 놈만 와도 힘에 겨울 것이다.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벗지 않는, 백정탈 뒤의 시선이 이정녕에게 머무른다.

‘지원은··· 없겠지.’

이정녕이 만주의 독립군에게 연락을 취했다곤 하지만, 기대하긴 어렵다. 모자란 병력으로 그쪽 전선을 지키기도 버거울 테니까.

죽어나간 독립군들이 뒤늦게 아쉽다. 경성에 와서, 곧장 이자들과 공조했더라면······.

생리적 반발감 속에서, 이천인은 헛된 상념을 뿌리친다.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복수를 위해 다시 밟은 고향 땅이다. 후회는 무용하다.

―당신 때문이야!

―백정의 아들 주제에, 무슨 독립군 노릇을 하겠다고······.

―경성에서 썩 꺼져, 이 백정아!

옛 신분이 탄로난 뒤, 그는 경성 민초들의 울분과 마주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먼 독립보다도 가까운 생업이 더 중요했으므로.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 당장의 안위에 눈이 멀어 평생 수탈을 자청하는군.”

외팔이가 된 이정녕이 거리낌 없이 말한다. 환지통의 고통이 작열할 터인데, 반듯한 몸가짐을 유지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독립군 대장을 맡은 청년은, 목숨을 내건 싸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렇게 지키려던 민족 아닌가?”

“같은 민족이라면 수치를 알아야 하오. 독립군에 출신은 무슨, 내 앞에서 이 형의 욕을 했으면 먼지 나게 두들겨 줬을 거요.”

이 형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제법 살갑지만, 이천인의 대꾸는 냉담할 뿐이다.

“그 실력으로?”

“독립군 제일의 칼잡이가 나요.”

“가당찮군, 짐이나 안 되게 제대로 요양해.”

전이라면 발끈했겠으나, 이정녕은 화도 내지 않고 피식거린다.

“짐··· 외팔이 병신이지만 아직 칼은 휘두를 수 있지. 이 형을 잡아끄는 다른 짐덩이들쯤은 처리하고도 남아.”

이천인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린다.

송별학은 노구를 이끌고 저항하다 죽었고, 송이설은 행방이 묘연하다. 총독부와 종로서와 황우회를 저지하려면 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양동작전부터 시작하지. 나를 이용하시오, 죽을 준비는 됐으니.”

“첫인상만큼 한심한 사내는 아니었군.”

두 청년의 시선이 마주친다. 저잣거리 백정의 아들과, 그 맞은편 포목상의 아들 사이에 세월을 뛰어넘는 이해가 오간다.

기이한 열기 속, 이정녕이 하나뿐인 손으로 허리춤을 뒤진다. 나온 물건을 본 이천인의 눈동자가 탈 속에서 커진다.

“조선의 혼을 위한, 마지막 싸움이오.”

.

.

.

바로 다음 씬, S#.65는 일본식 가옥이다.

―헉, 허억······.

고급스러운 목조 가옥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방 새어나온다.

종로경찰서장을 지키던 경호 인력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드러누웠다.

검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백정의 탈을 쓴 사내가 그들 모두를 베었다. 이 집에서 숨을 쉬는 자는 이제 둘뿐이다.

“백정을 다른 말로 희광이라고 하지. 본디 회자수라 하는 군문의 사형 집행인인데, 네놈도 조선인이니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제발, 목숨만······.”

백정탈의 발밑에서, 나라를 팔아 개인의 영달을 채우던 매국노가 벌레처럼 버르적거린다.

“먼 옛날엔 흉년이 들거나 가뭄이 오면 왕을 처형했는데, 이때 목을 베는 자가 희광이였어. 그런데··· 왕도 아닌 자가 동포를 팔아넘기고 고국을 우롱하다니, 이야말로 민족의 찬탈자가 아닌가.”

“아냐, 나는··· 난 그저 이 나랄 위해······!”

“헛소리.”

냉정한 집행인은 변명을 듣지 않는다. 피딱지가 들러붙은 도끼가 벼락같이 내리꽂힌다.

“끄아아아악!”

날아간 것은 특수소품 팔이지만, 터져나온 비명은 진짜다.

종로경찰서장 역을 맡은 이균··· 중견배우 남중익은 극한의 몰입 속에서 잘려나간 신경다발의 통증을 느끼고 있다.

‘다시 봐도 엄청난 몰입력이야. 혼자만 잘난 작자들하고는 또 다르단 말이지.’

경험 많은 배우의 의식이 감탄하는 한편, 경찰서장 이균은 충실히 연기를 수행한다.

“나··· 날 살려주면, 살려만 주면 보은하겠소. 총독부, 그래! 도쿠로 신지의 목을 치고 싶겠지? 종로서엔 조선인 순사도 많소, 그들을 데리고 총독부를 함께 칩시다. 우리가 그래도 동포···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 아니오!”

눈물과 피, 콧물과 타액이 범벅된 채, 이균이 필사적으로 애원하지만 소용없다.

눈앞의 사내에게 민족만큼이나 무의미한 단어 또한 없을 것이기에.

“종로경찰서장 이균, 추악한 거머리야.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편으로 죽어라.”

“안 돼, 제발······!”

또 한 번의 섬광이 튄 뒤, 처절한 비명이 중간부터 끊긴다.

백정탈을 위로 올린 이천인은 땀을 닦는다. 육신이 당장 그만두라며 경고를 발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남은 생명을 다 써서라도··· 몸이 움직이는 동안, 더 많은 원수를 베어야 한다.

“이제, 몇 놈 안 남았다.”

청년의 마지막 혼이 불타오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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