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싸움의 승자 (5)
* * *
“와··· 역시 건이 형이네,”
“그럼, 그럼. 우리랑 데뷔작 찍을 적 신인이 아니라니까.”
“그 때도 살벌했습니다. 첫 욕탕 씬, PD님 얼굴 허옇게 됐던 게 아직도 선해요.”
“어허, 용 사장님. 이제 작품도 안 찍으시면서 공격하기 있어?”
오랜만에, 옛 전우들이 모였다.
JNBC의 나종모 PD와 은희욱 작가, 배우 서희도와 요즘 프랜차이즈가 잘 돼서 본업보다 바쁜 용준상이다.
스마트폰을 보던 은희욱 작가가 감탄했다.
“다들 이것 좀 봐요. 어떻게 그 때보다 칼솜씨가 더 늘었지?”
총독부 앞, 태극기를 타고 내려온 액션 씬은 ‘인급동’에 올라간 뒤 300만 뷰를 넘겼다.
걸린 시간은 불과 나흘. 대충 하루에 100만 뷰씩이 찍혔다는 소리다.
[장안의 화제, 이천인의 14가지 디테일]
[박건의 조선검술이 완벽한 이유]
[‘서울의 개’ 때는 크라브마가, ‘백정장군’ 때는 본국검, 소름 돋는 액션 디테일]
각종 전문가 유튜버들까지 리뷰를 쏟아내며, 그야말로 전설이 된 터.
서희도가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작가님, 제가 말했잖아요. 느와르 액션 말고 판 깔면 더 잘할 거라고.”
“확실히··· 그 때랑은 또 다르네. 조선검술도 따로 배운 건가?”
“에이, 건이 씨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걸. 몇 달 연습한 솜씨가 아냐.”
촬영 당시, 박건과 합을 맞춘 용준상의 말에 나종모 PD가 딱 자른다.
“아무튼, 이젠 진짜 월드스타 직전이네요. 더 떠서 얼굴 볼 시간도 없으면 어쩌지?”
“어쩌긴, 바쁜 게 좋은 거지. 희도 너도 일본 투어 간다고 패션위크 못 따라갔잖아.”
“아니, 그건 대표님 때문에!”
걸출한 라이징스타의 탄생을 함께했기 때문일까.
보통 작품이 끝나면 멀어지기 마련인데, 이 팀은 촬영이 끝나고도 자주 뭉친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은희욱 작가가 말했다.
“그럼 다 같이 한번 놀러갈까요?”
“종방연 끝나고? 시간이 될까?”
“PD님도 다음 작품까지 텀이 좀 있고, 용 사장님이랑 서 배우야 휴식기니까······.”
“아니, 아니. 우리 말고 박건 씨 말야.”
나종모 PD가 침중한 표정으로 자기 폰을 밀어 놓았다. 화면에는 ‘백정장군’ 지난 화 마지막 장면이 떠 있다.
“이것 봐, 뭐 느끼는 거 없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돈! PPL! 이게 다 얼마겠냐고!”
“······예?”
과연 인기 PD답게, 작가와 배우들과는 관점이 다르다. 나종모는 화면을 하나하나 넘겨 가며 PPL 제품들을 짚기 시작했다.
“여기 삼계탕, 다음은 곶감, 여긴 또 미역이랑 김이랑··· 이전 화에는 철강에 자동차 상표까지 제대로 찍어서 보여 주더구만. 전 선배가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야.”
배우는 연기 잘 하고, 작가는 대본 잘 쓰면 그만이라지만 PD는 살림을 해야 한다.
다만 어설프게 삽입된 광고는 몰입을 방해한다며 욕이나 들어먹기 십상. 그런 면에서, 백정장군의 PPL은 완벽에 가깝다.
“와, 그러네. 여기, 추격씬에 붙은 이것도 삼호자동차 마크잖아요.”
“초반부 양복 PPL은 알았는데, 나머지는 PD님 말 듣고야 보이네. 우리 한우 상품도 미리 좀 넣어 볼걸 그랬어.”
서희도와 용준상이 연신 감탄을 발한다.
개화기 당시 ‘가배’라고 불리던 커피는 유명 프랜차이즈에, 칼과 총포를 만드는 장인들의 공방에 찍힌 마크는 모 제철소다.
어디 그뿐이랴. 순간순간 스쳐나가는 음식과 의류, 백하니와 조현아의 화려한 동-서양식 복식들 모두가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다.
무려 시대극인데도 웬만한 현대극보다 PPL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이다.
“거기다가, CVN 모기업이 C&J잖아. 진 본부장이 동창한테 얼마나 후하게 주겠어. 패션위크도 섰겠다, OTT도 나가겠다, 이제 건이 씨 몸값은 지붕 뚫었다고 봐야지.”
“확실히··· 바빠서 못 볼 수도 있겠어요. 다음 작품은 헐리우드 가겠는데?”
울상이 된 서희도가 은희욱 작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작가님, 건이 형 첫 작품 쓰셨잖아요. 나 PD님은 몰라도 작가님이 연락하면 받지 않을까요?”
“아니, 나는 왜······.”
“또 작품 같이 하자고 질척대셨다면서요! 다 들었어요, 어떻게 세 번을 까이고도 다시 들이대서 어색하게 만드냐고.”
“희도 씨는 내 마음 몰라. 그 시나리오가 잘 빠졌었다니까.”
아픈 곳을 찔린 나종모가 찌그러진다. 개량한복 자락을 걷으며, 은희욱 작가가 빙긋 웃었다.
“글쎄요, 박건 씨는 변함없을 것 같은데.”
“응? 뭐가요?”
“아무리 떠도 예전이랑 똑같을 거예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하긴··· 생일 때 갑자기 르메로 팔찌를 보내더라니까, 나 PD님은 축하도 안 해 줬는데.”
“또, 또, 그 얘기 안 하겠다면서!”
저 둘은 ‘서울의 개’ 촬영 당시에도 소문난 앙숙이었다. 오늘따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라니, 섭섭한 게 제법 쌓였던 모양이다.
옛 동료들이 투닥대든 말든, 용준상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종방연 전에 선물이라도 보내야지. 박건 씨 왔다 간 뒤로 매출이 터진단 말이야.”
*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원하는 걸 말해라.”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 역을 맡은 고철준이 근엄하게 말한다.
알몸에 훈도시(일본 전통 남성속옷) 하나만 달랑 걸친 상태. 이 지경이 되어서도 관리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일견 우스울 정도다.
“어차피 살아서는 못 빠져나갈 것이다. 네놈도 알겠지, 조선인. 나를 인질로 잡거나 내 수하가 되는 것이 옳다. 협상한다면 가짜 백정탈들의 목숨도 살려 주마.”
짐짓 허세를 부리지만, 그의 목에는 날이 시퍼런 도끼가 닿아 있다.
총독부 함락. 백정탈과 경성독립군의 마지막 양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뚝, 뚝······.
피바다가 된 장내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만 연신 울린다. 거대한 빗장으로 걸어잠긴 총독부는 이미 아수라장이다.
헌병과 순사들, 제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숨도 쉬지 않고 널브러진 한가운데.
늘 쓰던 백정탈이 아닌, 붉고 푸른 장군의 탈을 뒤집어쓴 이천인이 묻는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뭐라고?”
“목숨을 생각했다면 이 땅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너도 각오는 했겠지, 제국주의를 두르고 타국을 침략할 때부터.”
“큭, 더러운 조선인이······.”
역대급 저열함을 보여주며 퇴장한 종로경찰서장 동료에게 자극받은 것일까. 고철준의 연기도 숫제 물이 올랐다.
흉험하게 일그러지는 선배의 얼굴을 보며, 장군탈을 쓴 건은 생각한다.
‘오늘은 동화율이 좋군.’
이젠 익숙해진 옛 권능―합기의 편린이 도끼자루를 쥔 손 안에서 요동친다.
처음엔 이걸로 뭘 하나 싶었지만, 백하니를 구하고 나니 생각이 변했다.
그 당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즉 반쪽짜리 합기나마 쓸 수 없었다면, 만에 하나라도 늦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세계에서 회귀는 없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이젠 연기와 합기의 연관성도 안다. 씬에 몰입할수록 옛 권능이 되살아나고, 동화가 강해지면 잃었던 기억들도 더 많이 돌아온다.
‘마치··· 보상을 받는 기분인데.’
실제로, 지난 시상식 때도 불가사의한 환청을 듣지 않았던가?
이 역시 그의 연기로 얻어낸 보상과 같을 것이다. 악마를 찢어죽이고 대악마를 참하여 ‘격’을 높였던 용사의 여정처럼.
“왜 말이 없나, 역시 두려운 게야. 천하의 백정탈도 목숨은 한 개니까. 아니면 본국으로 호송된 동료들을 걱정하는 건가?”
열연하는 고철준의 얼굴 위로, 적색 수염이 무성한 사내가 덧씌워진다.
철왕국 귀족들의 타락한 수장. 벨지움 공작가를 멸문시킬 때의 기억이었다.
―네놈은 이방인일 뿐이다. 천상의 창부, 더럽혀진 성녀의 간택으로 차원을 넘어온 자가, 어찌 우리의 대의를 알겠··· 커헉!
―공작님! 안 됩니다!
―빌어먹을, 악마 들린 용사가 공작님을 베었다, 가서 죽여라!
무능한 왕과 비겁한 황자들, 대악마의 종이 된 귀족들이 눈앞을 스친다.
옛 환상이 밀려드는 와중, 건은 용사의 기억 속에서 배우의 의식으로 말한다.
“너야말로 두려운가 보군. 말이 많아졌어.”
“뭐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오늘 밤 모든 것이 끝날 거야. 이 경성 전체가··· 아니, 조선이 너희를 징치할 테니까.”
바로 옆에서 그들을 찍던 촬영감독이 한 걸음 물러나며 포커스를 넓힌다.
대사의 텀이 살짝 길어졌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씬 속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만 가라, 보기 역겹다.”
이천인―고드가 도끼를 내리치는 순간, 창문이 깨져나가며 황우회의 사무라이들이 들이닥친다.
“네 이놈, 백정탈―!”
*
그날 저녁.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백정장군’ 세트장에, 색다른 웅성거림이 돈다.
“왔어? 진짜?”
“지금 도착했대. 강현호가 인사하니까 웃으면서 사인해 줬다더라, 방금 톡 옴.”
“와, 나 포 퀸즈 때부터 팬이었는데. 앨범 산 거 지금이라도 가져올까?”
“바보야, 진지유 있을 때는 포 퀸즈가 아니라 파이브 퀸즈였거든?”
진지유가 촬영장에 등장했다.
서울의 개 때와는 다르다. ‘진지유’ 효과를 의식해서인지, 본인이 SNS에 포스터를 올리고 라방까지 때리며 자체 홍보에 나섰다.
로만의 삼인방, 거기에 박건의 드라마에만 두 번째 특별출연이다.
신이 난 기자들이 몇 주 내내 기사를 뿌려 댄 터라, 정작 팬들보다도 현장의 스탭들이 더 기대하고 있었다.
“뭐, 진 배우가 도착했다고?”
마지막 시청률을 책임질 마스터피스다. 전인우 PD가 버선발로 뛰쳐나가 귀한 손님을 맞았다.
“어이구, 진 배우님!”
“오랜만에 뵈어요, 전 감독님.”
진지유가 눈웃음을 치며 인사했다.
스트레이트 핏 청바지에 후드집업 차림인데도 아우라가 흐른다. 모 리서치 회사가 조사한, 여배우 외모 순위 1티어의 위엄이다.
“어째 더 예뻐지셨습니다.”
“그럼 하니 언니 말고 저로 뽑지 그러셨어요. 오디션 떨어지고 집에 가서 펑펑 울었는데.”
“예, 예······?”
“농담이에요. 대본은 다 외웠으니까, 바로 준비해서 나올게요.”
당황한 감독을 내버려둔 채, 사뿐사뿐 걸어가던 진지유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둘러선 엑스트라들 사이, 눈에 확 띄는 흰색 두루마기를 발견한 것이다.
“오빠!”
보자마자 창과 방패의 대결이 펼쳐진다.
살짝 비켜서서 회사 동료의 포옹을 피한 박건이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습니까. 아직 지유 씨 촬영 순서는 좀 남았는데요.”
“보고 싶어서 왔죠. 오빠 말고 여기, 백정장군 촬영장. 꼭 구경하고 싶었거든요.”
샐쭉해진 여배우가 돌부리를 툭툭 차지만, 이쪽 역시 밀당엔 도가 텄다.
“같이 둘러보죠.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흠, 큼, 데려가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괜찮습니까? 그럼 저는 먼저······.”
“아니에요, 가요. 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옆으로 붙은 진지유가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백하··· 언니는요?”
“아마 밴에 있을 겁니다. 웬만큼 중요한 씬이 아니면 브리핑을 잘 안 하거든요.”
“중요한 씬에는 나와서 하고?”
“종종, 자주는 안 했습니다. 따로 입을 안 맞춰봐도 합이 나쁘지 않아서.”
“···맞추긴 뭘 맞춘대, 진짜.”
“뭐라고 했습니까?”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진지유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오빠, 혹시 구 배우한테 연락 받았어요?”
“구신승 씨 말입니까? 아직 없었는데요.”
“아··· 아마 직접 하려나 보다.”
“무슨 일이라도······.”
“지난번에 회사에서 만났거든요. ‘백정장군’ 쪽 특출 간다니까, 혹시 오빠 다음 작품 정해졌는지 물어봐 달라더라고요.”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할게요. 용건이 더 생기면 본인이 따로 연락하겠죠, 뭐.”
평상시의 정신머리야 의심스럽지만, 일 얘기로 흰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다.
박건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등 뒤로 손을 모은 진지유가 돌아섰다.
“오빠, 제가 이번에 느낀 게 있는데요.”
“예.”
“보는 것만으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괜찮았어요. 동생들 인형이 다 터질 만큼.”
“······?”
뭐가 안 괜찮았다는 거지? 난해한 말 뒤로, 확신에 찬 선전포고가 들려왔다.
“다음에는 양보 안 할 거예요, 절대로.”
*
“스탠바이, 슛!”
전인우 PD의 신호와 함께, 로만의 3인방이 촬영에 들어간다.
배우판 탑을 달리는 셋이 모이니 눈이 즐겁다. 저 멀리, 붐마이크에 잡음이 안 들어갈 거리에서 CVN의 관계자들이 소곤거린다.
“와, 저 쓰리 샷을 다 보네.”
“원래 로만 배우들은 다 따로 나오지 않았나? 최필립이랑 구신승이 화보 하나 찍었고.”
“그러게. 특히 저거, 진지유랑 백하니는 절대 작품 같이 안 했잖아. 오늘 촬영 보니까 사이 안 좋다는 것도 뜬소문······.”
팀장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컷, 오케이!”
전인우 PD의 컷이 나오며, 스탭들 사이에서 일대 함성이 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축하는 무슨, 우리 배우 분들이 고생 많았지. 지유 씨도 와 줘서 고마워요.”
이천인과 송이설, 다른 등장인물들의 라스트 씬은 이미 찍어 둔 터. 그리하여 방금이 사실상 마지막 분량이었다.
카메라를 내린 서응서 촬영감독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PD님, 오늘 우리 막촬연 갑니까?”
“당연히 가야죠. 종방연은 종방연이고, 한번 끝까지 마셔 봅시다!”
펑, 펑!
준비성 좋은 누군가가 폭죽마저 터뜨려, 색색깔의 종이조각이 날아다닌다.
‘하이페리온’을 완전히 꺾은 탓일까. 마지막 화를 보기 전임에도 축제 분위기다.
“형, 진짜 고생 많았어!”
배우들에게 둘러싸인 형에게, 박선이 다가와 덥썩 끌어안는다. 동생의 등을 두드려 주던 박건이 진지유에게 물었다.
“지유 씨도 오늘 축하연 가십니까?”
“당연하죠, 서울의 개 때는 종방연만 가서 얼마나 섭섭했는데요.”
사냥감을 독차지하려는, 고양이의 긴 눈이 슬쩍 옆으로 돌아간다.
방금까지 같이 연기한 백하니 쪽. 덩치 큰 매니저가 부랴부랴 달려와 물을 건네고 있다.
“아, 하니 언니는 안 가겠다. 시끄러운 걸 워낙 싫어하셔서.”
분장을 아직 지우지 않아, 온통 먼지투성이인 백하니가 툭 던지듯 말한다.
“갈 건데.”
“···언니가요? 종방연에 온다고?”
“왜, 특출도 가는데 난 가면 안 돼?”
저쪽에서는 폭죽과 샴페인이 터지지만, 이쪽은 갑자기 복마전이 열렸다.
두 매니저와 박건까지 눈만 껌뻑거리는 가운데, 진지유가 생긋 웃었다.
“우리 백 선배님, 술은 잘 드시나 모르겠네.”
* * *